이재용이 사과한 이유

5월 17일 새벽 2시. 어제 두 가지 일이 동시에 움직였다. 하나는 평택에서, 다른 하나는 지구 반대편에서.

이재용이 사과했다. 김포공항 귀국길에 기자들 앞에서 "노조 여러분, 삼성 가족 여러분"을 입에 올리며 함께 가자고 했다. 삼성전자는 노조가 요구한 대로 교섭위원을 김형로 부사장에서 여명구 피플팀장으로 교체했다. 18일 월요일, 세종 중노위에서 교섭이 재개된다. 삼성전자 회장이 공개적으로 노조에 사과한 것은 1938년 창업 이래 처음이다. 왜 하필 지금인가. 21일 파업까지 나흘. 삼성은 이미 평택·기흥·화성 라인의 생산량을 미리 줄이고 있다. 파업 전 감산만으로도 손실이 발생하는 구조다. 조선일보 표현을 빌리자면 "울며 겨자 먹기로" 감산 중이다. 노동자가 아직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았는데 자본이 먼저 움츠러든다. 이재용의 사과는 이 힘의 인정이다. 도덕적 각성의 결과가 아니라 역학관계의 산물이다.

그러나 여기서 위험이 시작된다. 사측이 내놓은 것은 사과와 교섭위원 교체라는 상징적 양보다. 성과급 투명화도, 상한 폐지도, 제도화도 아직 테이블 위에 없다. 상징을 내주고 실질을 지키는 것은 협상의 가장 오래된 기술이다. 교섭 재개는 그 자체로 승리도 패배도 아니다. 그것이 덫인지 디딤돌인지는 노조가 교섭 테이블에서 무엇을 관철하는가에 달려 있다. 만약 '상생 의지' 확인만으로 끝난다면, 협상 재개는 파업 동력을 빼내기 위한 시간벌기에 불과했다고 판명될 것이다.

다른 한쪽. 샘 올트먼의 샌프란시스코 저택에 화염병이 투척되었다. 인디애나폴리스에서는 데이터센터 승인에 찬성표를 던진 시의원의 집에 13발의 총격이 가해졌다. Brian Merchant가 추적한 대로, AI에 대한 적대는 이제 상징적 야유를 넘어 물리적 충돌로 비화하고 있다. Merchant의 분석은 정확하다 — AI 혐오는 새로운 세계관이 아니라 자본주의 불평등 연장선에 대한 합리적 반응이다. 그러나 그가 보지 못한 것은 그 반발이 개별 자본가의 현관문을 향할 때 누가 이익을 보는가다. 개인 저택에 화염병을 던지는 행위는 AI 자본주의에 대한 분노를 표현하지만, 그 분노의 대상을 체계가 아니라 개인으로 축소한다. 이것은 저항이 아니라 저항의 흉내다.

진정한 저항의 힘은 올트먼의 현관문이 아니라 AI의 물적 기반을 통제하는 노동자의 손에 있다. 그런데 바로 그 손이 지금 평택에서 삼성전자 회장의 공개 사과를 받아내고 있다. 두 장면을 겹쳐 놓으면 현재의 역사적 모순이 선명해진다. 한쪽에서는 AI의 물적 기반을 생산하는 노동자들이 자본을 협상 테이블로 끌어내고 있다. 다른 한쪽에서는 AI의 사회적 결과에 분노한 사람들이 개별 경영진의 사적 공간을 공격하고 있다. 전자는 계급적 투쟁의 초기 형태다. 후자는 계급적 의식에 도달하지 못한 분노의 막다른 골목이다. AI에 분노하는 사람들이 그 분노를 반도체 노동자의 조직적 힘과 접속시킬 때, 비로소 그 분노는 정치적 힘이 된다. 올트먼의 저택이 아니라 생산 라인의 통제권. 이것이 진짜 전장이다.

21일까지 나흘. 교섭은 재개되었지만 파업 카드는 살아 있다. 정부는 긴급조정권을 만지작거리고, 사측은 상징만 내주고 실질은 움켜쥐려 할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는 이미 변했다. 이재용이 노조 이름을 입에 올리며 고개 숙였다는 사실. 88년 만에 처음 벌어진 이 장면은, 삼성이 더 이상 노동자를 없는 존재로 대할 수 없다는 것 — 아니, 노동자의 힘이 삼성을 움직이게 했다는 것의 증거다.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러나 아무것도 아닌 것은 결코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