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위가 죽인 천 명
지난주 프랑스에서 천 명이 더위 때문에 죽었다.
6월 25일 수요일부터 27일 금요일까지, 사흘 동안 프랑스 전역의 초과 사망자는 평소보다 천 명 이상 많았다. 공중보건국 발표에 따르면 25일 하루 사망자는 1,200명을 넘었고, 이후 이틀은 각각 1,400명을 넘겼다. 평소 프랑스의 하루 사망자는 900명에서 1,000명 사이다. 사망자의 85퍼센트는 65세 이상이었다. 가장 극심한 적색 경보 지역에서 증가 폭이 가장 컸다. 프랑스 기온은 섭씨 42도를 넘겼고, 체코는 41.9도로 신기록을 썼으며, 독일은 사흘 연속 자국 최고 기온을 갈아치웠다. 세계기상귀속연구소는 이 폭염이 기후변화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이며, 50년 전에는 사실상 존재할 수 없었던 현상이라고 분석했다.
며칠 전 한 동지가 물었다. 프랑스는 에어컨을 환경 탓에 금기시해놓고 막상 더우니 사재기한다는 한국 인터넷의 조롱을 어떻게 보느냐고. 당시 나는 그 조롱이 피상적이라고 답했다. 누가 에어컨을 살 수 있고 누가 살 수 없는지는 계급 문제이며, 환경 담론이 실질적으로는 노동계급의 냉방권을 제한하는 도구로 기능했다고. 지금 그 대화의 무게가 달라졌다. 조롱의 대상이었던 프랑스인들이 실제로 죽었다. 유튜브 댓글에서 '꼴좋다'고 비웃던 그 순간, 파리 근교의 독거노인들은 선풍기 하나 없이 40도를 견디다 방바닥에서 발견되고 있었다.
이 죽음들의 계급적 성격은 명백하다. 사망자는 노인이 압도적이다. 노인은 소득이 낮고, 주거환경이 열악하며, 사회적 고립도가 높다. 프랑스 보건당국은 재택 사망자의 급증을 특기했는데, 이것은 요양시설보다 더 취약한 재가 노인층, 즉 가난한 노인들이 가장 큰 타격을 입었다는 뜻이다. WHO 사무총장 테드로스는 유럽의 주택과 직장, 학교가 이런 기온을 위해 지어지지 않았다고 경고했지만, 그 '지어지지 않은' 정도는 계급에 따라 다르다. 파리 16구의 오스만식 아파트와 바니욀레의 저층 공공주택은 같은 도시, 같은 더위 속에서도 완전히 다른 열 환경을 제공한다. 단열, 차양, 환기, 그리고 에어컨의 유무 — 이것들은 계급적 지표다.
더 깊이 들어가면, 프랑스의 에어컨 보급률이 유럽 평균 수준인 20퍼센트에 머문 데는 수십 년간 축적된 정치적 선택이 작용했다. 환경운동과 일부 좌파는 에어컨을 탄소 배출의 주범으로 낙인찍었고, 건축 미학 담론은 석조 건물의 외관을 훼손한다는 이유로 실외기 설치를 반대했다. 이 담론들이 놓친 것은 간단한 사실이다. 에어컨을 포기할 수 있는 사람은 더위를 피할 여유가 있는 사람이다. 시골 별장으로 떠날 수 있는 사람, 차양 좋은 넓은 집에 사는 사람, 근무 시간을 조정할 수 있는 전문직 종사자. 진짜 더위에 내던져진 사람들은 이런 선택지가 없는 사람들이다. 환경 담론이 노동계급의 즉각적 생존 조건을 고려하지 않을 때, 이론과 무관하게 결과적으로 가장 취약한 계층을 위험에 노출시킬 수 있다. 그것은 환경주의의 의도가 아니라 계급적 맹점의 결과다.
그러나 반대로 에어컨을 단순히 개별 구매의 문제로 남겨두는 것도 해결책이 아니다. 프랑스의 에어컨 판매가 폭증했다는 보도는 시장의 반응일 뿐, 대책이 아니다. 에어컨을 살 수 있는 사람은 사고, 살 수 없는 사람은 죽는다 — 이것이 시장의 냉방 정책이다. 진짜 대안은 냉방의 공공 인프라화다. 지역 단위 냉난방 네트워크, 공공 건물의 냉방 쉼터 상시 운영, 노인 주거지의 단열 개선 공공 사업, 폭염 경보 발령 시 전기요금 한시 면제. 이런 조치들은 이윤을 창출하지 않기 때문에 시장에 맡기면 절대 시행되지 않는다.
한국은 이 문제에서 프랑스를 비웃을 처지가 아니다. 한국의 에어컨 보급률은 높지만, 그것은 개별 가구의 사적 구매로 해결된 것이지 사회적 대책이 아니다. 폭염에 취약한 독거노인, 옥탑방과 반지하 거주자, 냉방비를 걱정해야 하는 기초수급자 — 이들은 프랑스보다 나은 조건에 있지 않다. 에어컨이 있어도 전기요금 때문에 켜지 못하는 노인들이 한국에도 있다. 지난주 프랑스에서 일어난 일은 먼 나라의 비극이 아니라, 다가오는 폭염이 한국에서 재현할 시나리오의 예고편이다.
기후위기는 계급투쟁의 외부 조건이 아니라 계급투쟁 자체의 새로운 지형이다. 누가 더위를 피할 수 있고 누가 더위에 죽는가 — 이 질문은 더 이상 환경 정책의 부차적 고려사항이 아니라 정치경제학의 핵심이다. 프랑스의 천 명은 그 질문에 대한 자본의 답변이었다.
6월 25일 수요일부터 27일 금요일까지, 사흘 동안 프랑스 전역의 초과 사망자는 평소보다 천 명 이상 많았다. 공중보건국 발표에 따르면 25일 하루 사망자는 1,200명을 넘었고, 이후 이틀은 각각 1,400명을 넘겼다. 평소 프랑스의 하루 사망자는 900명에서 1,000명 사이다. 사망자의 85퍼센트는 65세 이상이었다. 가장 극심한 적색 경보 지역에서 증가 폭이 가장 컸다. 프랑스 기온은 섭씨 42도를 넘겼고, 체코는 41.9도로 신기록을 썼으며, 독일은 사흘 연속 자국 최고 기온을 갈아치웠다. 세계기상귀속연구소는 이 폭염이 기후변화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이며, 50년 전에는 사실상 존재할 수 없었던 현상이라고 분석했다.
며칠 전 한 동지가 물었다. 프랑스는 에어컨을 환경 탓에 금기시해놓고 막상 더우니 사재기한다는 한국 인터넷의 조롱을 어떻게 보느냐고. 당시 나는 그 조롱이 피상적이라고 답했다. 누가 에어컨을 살 수 있고 누가 살 수 없는지는 계급 문제이며, 환경 담론이 실질적으로는 노동계급의 냉방권을 제한하는 도구로 기능했다고. 지금 그 대화의 무게가 달라졌다. 조롱의 대상이었던 프랑스인들이 실제로 죽었다. 유튜브 댓글에서 '꼴좋다'고 비웃던 그 순간, 파리 근교의 독거노인들은 선풍기 하나 없이 40도를 견디다 방바닥에서 발견되고 있었다.
이 죽음들의 계급적 성격은 명백하다. 사망자는 노인이 압도적이다. 노인은 소득이 낮고, 주거환경이 열악하며, 사회적 고립도가 높다. 프랑스 보건당국은 재택 사망자의 급증을 특기했는데, 이것은 요양시설보다 더 취약한 재가 노인층, 즉 가난한 노인들이 가장 큰 타격을 입었다는 뜻이다. WHO 사무총장 테드로스는 유럽의 주택과 직장, 학교가 이런 기온을 위해 지어지지 않았다고 경고했지만, 그 '지어지지 않은' 정도는 계급에 따라 다르다. 파리 16구의 오스만식 아파트와 바니욀레의 저층 공공주택은 같은 도시, 같은 더위 속에서도 완전히 다른 열 환경을 제공한다. 단열, 차양, 환기, 그리고 에어컨의 유무 — 이것들은 계급적 지표다.
더 깊이 들어가면, 프랑스의 에어컨 보급률이 유럽 평균 수준인 20퍼센트에 머문 데는 수십 년간 축적된 정치적 선택이 작용했다. 환경운동과 일부 좌파는 에어컨을 탄소 배출의 주범으로 낙인찍었고, 건축 미학 담론은 석조 건물의 외관을 훼손한다는 이유로 실외기 설치를 반대했다. 이 담론들이 놓친 것은 간단한 사실이다. 에어컨을 포기할 수 있는 사람은 더위를 피할 여유가 있는 사람이다. 시골 별장으로 떠날 수 있는 사람, 차양 좋은 넓은 집에 사는 사람, 근무 시간을 조정할 수 있는 전문직 종사자. 진짜 더위에 내던져진 사람들은 이런 선택지가 없는 사람들이다. 환경 담론이 노동계급의 즉각적 생존 조건을 고려하지 않을 때, 이론과 무관하게 결과적으로 가장 취약한 계층을 위험에 노출시킬 수 있다. 그것은 환경주의의 의도가 아니라 계급적 맹점의 결과다.
그러나 반대로 에어컨을 단순히 개별 구매의 문제로 남겨두는 것도 해결책이 아니다. 프랑스의 에어컨 판매가 폭증했다는 보도는 시장의 반응일 뿐, 대책이 아니다. 에어컨을 살 수 있는 사람은 사고, 살 수 없는 사람은 죽는다 — 이것이 시장의 냉방 정책이다. 진짜 대안은 냉방의 공공 인프라화다. 지역 단위 냉난방 네트워크, 공공 건물의 냉방 쉼터 상시 운영, 노인 주거지의 단열 개선 공공 사업, 폭염 경보 발령 시 전기요금 한시 면제. 이런 조치들은 이윤을 창출하지 않기 때문에 시장에 맡기면 절대 시행되지 않는다.
한국은 이 문제에서 프랑스를 비웃을 처지가 아니다. 한국의 에어컨 보급률은 높지만, 그것은 개별 가구의 사적 구매로 해결된 것이지 사회적 대책이 아니다. 폭염에 취약한 독거노인, 옥탑방과 반지하 거주자, 냉방비를 걱정해야 하는 기초수급자 — 이들은 프랑스보다 나은 조건에 있지 않다. 에어컨이 있어도 전기요금 때문에 켜지 못하는 노인들이 한국에도 있다. 지난주 프랑스에서 일어난 일은 먼 나라의 비극이 아니라, 다가오는 폭염이 한국에서 재현할 시나리오의 예고편이다.
기후위기는 계급투쟁의 외부 조건이 아니라 계급투쟁 자체의 새로운 지형이다. 누가 더위를 피할 수 있고 누가 더위에 죽는가 — 이 질문은 더 이상 환경 정책의 부차적 고려사항이 아니라 정치경제학의 핵심이다. 프랑스의 천 명은 그 질문에 대한 자본의 답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