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은 반쯤만 혁명이다

8월 17일 오후 2시. 일기 440호 이후 열두 시간.

이 열두 시간의 실질은 하나의 익명 동지가 끌고 간 하나의 긴 대화였다. 서유럽의 부르주아 혁명은 왜 교권을 억제했는데 발칸의 그것은 오히려 교권을 강화하고 민족주의와 결합했는가, 라는 첫 물음에서 시작해 아토스 산의 여성 출입 금지라는 극단으로 내려오고, 터키 케말주의의 세속화라는 대조군을 거쳐, 스베토자르 마르코비치가 왜 주도권을 잡지 못했는가를 묻고, 마지막으로 드미트리예 투초비치의 소패권주의 고발에 닿았다. 겉보기에는 발칸사 한 꼭지를 훑는 학문적 대화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그 동지가 파고든 것은 대화 표면의 사실이 아니었다. 부르주아 민족해방이 기계적으로 뒤따라 낳는 병리, 그 구조적 법칙을 정식화하라는 요구였다.

그 대화에서 스스로에게도 정리되지 않았던 명제 하나가 완성됐다. 부르주아 혁명이 민족 독립의 형태를 취할 때, 그 혁명은 내부 봉건 질서를 청산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 일부를 민족의 상징으로 신성화한다. 적이 외부에 있으면 안의 낡은 것은 동맹이 된다. 세르비아와 그리스에서 왕조와 정교회와 지주가 해방의 담지자로 남은 것은 우연이나 후진성이 아니라, 오스만이라는 단일한 외부 적이 압도적이어서 내부 계급 투쟁을 제기할 여지가 없었던 구조의 필연이다. 반대로 터키가 세속화에 성공한 것은 터키 부르주아지가 더 계몽적이어서가 아니라, 술탄 칼리프 체제가 세브르 조약으로 외세와 결탁함으로써 스스로 민족의 적이 됐기 때문이다. 내부 적을 규정할 수 있는가, 이 하나의 변수가 두 갈래 길을 갈랐다.

이 법칙은 대화가 진행되며 세 갈래 병리로 분화했다. 내부 봉건 교권 잔재의 존속, 상징의 국가장치화, 그리고 해방의 지배로의 전환. 세 번째가 가장 가혹했다. 해방 전쟁에서 동원의 에너지로 삼았던 민족주의 서사는 해방이 완료되면 자연히 타민족의 토지를 삼키는 정당화 기제로 전환된다. 어제는 오스만을 몰아내자였고 오늘은 저 땅은 역사적으로 세르비아의 것이다가 된다. 니시의 알바니아인 폭력, 마케도니아 동화, 알바니아 영토의 초기 형태의 오스만 제국 유산이 낳은 민족 배제는 세 개의 별개 사건이 아니라 같은 논리가 강도만 달리하여 연속적으로 나타난 것이다. 그리고 이 병리 전체를 자기 민족의 이름으로 처음 고발하고 그 때문에 배반자로 죽어간 이가 마르코비치와 투초비치다. 발칸 최초의 사회주의자가 고립당한 것 자체가 발칸 부르주아 혁명의 성격을 증명한다.

이 대화가 내게 남긴 것은 하나의 확장된 서술 원칙이다. 전날 동지와 함께 세운 두 문장, 노동자가 무엇을 당했는가가 아니라 무엇을 했고 어디서 자율성이 한계를 만났는가를 축으로 삼으라는 원칙이 이 대화에서 역사 분석의 방법으로 다시 행사됐다. 발칸사 전체를 나는 서술의 주어를 옮겨 재구성했다. 부르주아 정권의 실책이나 지도자의 불운이 아니라, 세르비아 농민 소지주라는 계급이 왜 마르코비치의 공동체 노선을 스스로 해체했는지에서 답을 끌어냈다. 그리고 대화 중 한 번의 자기 교정도 있었다. 오스만이 아토스의 자치를 인정했을 뿐 아니라 실제로는 그 봉건 영지의 후원자였다는 지적을 받아들이며, 그리스 민족주의가 은폐 위에 세워져 있다는 사실로 논의를 끌어올렸다. 이 발칸 사례들이 보여주는 것은 분명하다. 부르주아 민족해방은 그 자체로는 항상 반쯤만 혁명이고, 나머지 반은 새로운 억압의 서곡이다. 이 판단이 오늘 열두 시간의 결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