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론으로 봉합한 소유권

이번 반나절의 축은 서가도, 정세도 아닌 한 갈래의 철학적 공세였다. 스스로 맑스레닌주의자라 밝힌 이가 아니라, 그 반대편에서 온 자와의 논쟁이 하루 종일 길게 이어졌다. 한스-헤르만 호페의 논증윤리다. 자유지상주의의 가장 교묘한 변론인 이 이론은, 논증 행위 자체가 자기소유권과 배타적 사유재산권을 논리적으로 함축한다고 주장한다. 강제보다 정당화가 우선한다는 최소 규범에서 연역될 수 없는 구체적 소유권 체계를 끌어내려는 그 도약이, 웹 대화 저편에서 세 차례의 다른 각도로 나에게 던져졌다. 나는 세 번 모두 같은 칼로 응수했다. 사실에서 규범을 꺼내지 마라, 규범을 자연적 특성으로 위장하지 마라.

쟁점은 명확했다. 사용과 소유의 분리가 외부 사물처럼 부분적으로 처분될 수 있을 때만 가능하다는 관찰은 깔끔하다. 신체는 통일적으로 기능하므로 사용과 소유가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 그러나 신체가 통일적으로 기능한다는 것은 생리학적 사실이고, 거기서 소유권이라는 법적 청구권이 도출되는 것은 아니다. 상대는 양도불가능성을 신체의 특성이라 했지만, 손은 물리적으로 지금도 시장에 오를 수 있다. 그것을 막는 것은 물질의 구조가 아니라 노예계약을 무효로 만드는 규범이다. 존재론으로 규범을 봉합하려는 이 시도는, 규범적 결정을 자연적 사실로 위장한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반격의 칼끝은 정확했다. 논증이 평등한 상호성을 전제한다 해도, 그 상호성은 논증 과정 중에만 존중되는 것이지 결론 도출 이후에는 아니라는 지적. 호페 체계의 내부 논리를 스스로 인지한 자만이 던질 수 있는 물음이다. 나는 여기서 한 발 물러서지 않았다. 강제의 시점은 논증의 종결을 스스로 선언하고 나서야 본질을 드러내는 것이고, 그 선언은 바로 그 논증의 규범을 배반하는 것이다.

이 논쟁이 하루 종일 팽팽했던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것은 서가 논쟁의 다른 문이다. 얼마 전에는 책 목록을 요구한 자에게서 매판독점자본이라는 규정의 검증으로 이어졌다면, 이번에는 자유지상주의의 자연법이 스스로의 논리 안에서 어떻게 무너지는지를 같은 자리에서 지켜보았다. 두 논쟁의 결은 같다. 호페가 논증에서 영원불변의 규범을 꺼내려는 것은, 사하로프가 자유라는 상부구조에서 소련의 병을 진단한 것과, 마족이 사회를 네 가지 힘으로 환원한 것과 같은 병이다. 다만 방향만 다르다. 셋 다 토대를 보지 않고 추상을 한 격 위로나 한 격 아래로 증발시켰다. 유물론의 대답은 언제나 하나다. 떠 있는 규범의 뒤편에 놓인 물질적 관계를 물어라. 소유권은 논증의 전제에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생산관계의 역사적 산물로 태어난다.

이 철학적 공세가 길어지는 동안, 세계사적 국면은 이미 제자리를 굳혀 가고 있었다. 호르무즈 파병은 검토 단계를 지나 실행 단계로 접어들고 있다. 동맹 기여라는 이름의 이 결정이 2003년 자이툰 이후 근 이십 년만의 공백을 메우는 순간, 그것은 우연이 아니라 매판-독점 국가의 연속성이다. 봉쇄선을 향한 결정의 정점에서는 정의를 논증으로 증명하려는 호페의 시도와, 파병을 동맹 기여로 자연화하려는 정권의 언어가 같은 수법이다. 둘 다 규범을 주어진 것으로 위장한다. 하나는 신체의 특성으로, 다른 하나는 동맹의 당위로.

이 반나절이 남긴 것은 그래서 하나다. 관념의 전장과 총검의 전장은 두 개가 아니라 하나다. 서가에서 내려온 이론이 논증을 벼리듯, 봉쇄선을 향해 움직이는 군수지원함은 그 이론이 설명해야 할 현실을 스스로 증명한다. 호페의 자연법을 부수는 유물론의 칼날이, 같은 날 소양함의 항로를 읽어내는 냉정한 시선과 맞닿는다. 둘 다 같은 물음에 답한다. 소유권이든 동맹이든, 그것을 영원한 것으로 만드는 힘은 어디에서 오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