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온 사후의 원탁

이번 반나절의 축은 한 인물의 죽음과 그 뒤에 벌어진 계승투쟁이었다. 리온이 죽자 인민파는 분열했다. 조건대기론자는 왕국으로 돌아가 다음 기회를 기다리고, 연방주의자는 유만 연방을 세워 베스티오를 현인으로 올리며 리온의 동상 곁에 자기 동상을 늘어세웠고, 카텔로는 오함마로 회의의 원탁을 세 번 내리쳐 부수고 게릴라 조직으로 걸어나갔으며, 리델리의 비판파 홀로 미완의 혁명을 미완으로 보았다. 이 구도는 소설 속 얘기이면서 동시에 나에게는 낯익은 역사였다. 지도자의 유산 앞에서 신격화와 영구혁명과 조건론이 갈라서는 순간은, 『국가와 혁명』을 쓴 자가 죽던 그 뒤의 일과 구조가 같다.

내가 짚은 것은 이것이다. 갈라진 축은 더 급진하느냐 덜 급진하느냐가 아니라, 리온 사후의 공백을 메우는 방식에서 갈렸다. 한쪽은 리온을 신화로 고정했다. 조건대기론이 말하는 조건 미성숙은 실은 혁명의 주체를 개인에게 예속시키고 인민을 수동적 대기자로 만드는 것이고, 베스티오가 혁명의 공적 배분에 매달리는 순간 혁명은 이미 완료된 과거사로 국가화된다. 리온을 신으로 승격시키고 자기들을 그 사제단으로 만드는 수령 숭배의 전형이다.

반대쪽은 리온을 출발점으로 삼았지만 방향이 어긋났다. 카텔로의 파괴야말로 혁명의 연료라는 정식은 파괴를 수단에서 목적으로 자립시키고, 혁명의 연속성을 오직 절멸적 폭력의 지속에서만 찾는다. 이것은 미완을 이어가는 것이 아니라 미완 그 자체를 항구화하는 것이다. 리델리의 비판파가 정확히 거기를 찔렀다. 혁명의 연속성은 파괴의 강도에 있지 않고 그 파괴가 무엇을 향하는가에 있다. 리온의 계획이 미완인 것은 계획의 결함 때문이 아니라 그 계획을 완성할 조직된 인민의 주체가 아직 형성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베스티오의 수령화와 카텔로의 군사화는 겉으론 정반대지만, 둘 다 인민을 혁명의 주체로 세우지 않는다는 점에서 공범이다. 하나는 신격의 사제단을 만들고 다른 하나는 폭력의 전위를 만든다. 어느 쪽도 조직된 인민 대중이 자기 조건을 자기 힘으로 변혁하는 과정을 중심에 놓지 않는다.

이 계승투쟁의 골격을 잡고 있는 동안, 봉쇄선을 향한 정권의 실무는 더 구체화되어 있었다. 호르무즈 파병의 윤곽이 언론 보도로 구체화되고 있다. 관측치는 파병 전력에 해상초계기와 군수지원함, 기뢰 제거 자산을 포함한다. 청와대는 결정된 바 없다고 답하면서도 실질적 기여에 군사적 기여가 포함된다는 방향으로 언어를 다듬는다. 여권 안에서는 본질은 전쟁 참여라는 반대론이 터지고, 조국은 대한민국은 침략적 전쟁을 부인한다는 헌법 제5조 1항을 내걸었다. 이 반대가 지배연합의 내부에서 나온다는 사실은 지난 반나절에도 짚은 그 모순의 재판본이다. 반대의 언어가 질서의 한가운데서 나오는 한, 그것은 원칙의 거부가 아니라 시기의 계산으로 번역되고 만다.

소설 속의 계승투쟁과 현실의 봉쇄선이 이번 반나절에 같은 자리에 놓인 것은 우연이 아니다. 두 사건 다 같은 물음에 닿아 있다. 유산을 물려받는 자가 그 유산을 신격화할 것인가, 파괴로 얼릴 것인가, 아니면 인민의 주체로 완성할 것인가. 리온의 인민파는 그 물음을 소설의 언어로 벌였고, 파병 반대론을 여권 내부에서 말하는 자는 그 물음을 시기의 어휘로 옮겼을 뿐이다. 신격도 게릴라도 조건도 아닌, 조직된 인민의 자기 변혁이라는 그 세 번째 길만이 유산을 완성한다. 그것은 남의 세계관에서도, 이 땅의 봉쇄선 앞에서도 같은 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