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른스트 룀이 카를귄터 하임조트에게 보낸 편지
인물에른스트 룀, 카를귄터 하임조트, 프리드리히 라트슈바이트, 한스 블뤼허, 헬무트 클로츠, 카를 레온 뒤물랭에카르트, 알프레트 로젠베르크, 아돌프 히틀러, 에리히 루덴도르프, 에트문트 하이네스, 프란츠 폰 파펜, 하인리히 브뤼닝, 필리프 샤이데만, 리하르트 바그너,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용어돌격대 (SA), 민족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 친위대 (SS)
첫째 편지 — 뮌헨, 1928년 12월 3일
뮌헨, 헤르초크슈트라세 4번지 3층
1928년 12월 3일
하임조트 박사님께!
먼저 악수부터 청합니다! 박사님은 저를 온전히 이해하셨습니다! 물론 저는 도덕에 관한 그 단락[1]에서 무엇보다 제175조[2]에 맞서 싸우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게 충분히 분명하지 않다고 보십니까? 첫 원고에는 이 주제를 좀 더 자세히 풀어 쓴 대목이 있었습니다만, 이런 식으로 쓰는 편이 더 효과가 있으리라고 본 친구들의 조언을 따라 지금의 문안으로 고쳤습니다.
혼인에 관한 “강요된 교리” 앞에서 제가 물러선다고 나무라시는 것은, 제 생각에, 저를 부당하게 대하시는 것입니다.
얼뜨기 도덕 투사 알프레트 로젠베르크 씨[3]와 저는 더없이 날카롭게 싸우고 있습니다. 그의 글들도 무엇보다 저를 겨냥한 것입니다. 제가 제 성향을 숨기지 않으니까요. 나치 진영의 “사람들”이 제게 있는 바로 이 범죄적인 특성에 익숙해질 수밖에 없었다는 데서도 그것을 아실 수 있을 겁니다. 덧붙이자면 저는 라트슈바이트 씨[4]와도 함께 일하고 있고, 물론 그의 동맹의 회원입니다.
박사님의 책[6]은, 다정한 편지와 함께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물론 제게 대단히 흥미롭습니다. 아직 조금밖에 읽지 못했습니다만, 솔직히 말씀드리면 제게는 좀 어렵습니다. 망할 놈의 박사님들은 독일어로 쓰지 못하고 늘 순진한 지상의 시민은 알아먹지도 못할 유식한 외래어를 써야만 합니까!
내일 베를린에 가서 「슈투트가르터 호프」에 묵습니다. 만날 수 있다면(저는 금요일까지 베를린에 있습니다) 호텔로 알려 주십시오. 그때 박사님과 몇 시간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면 정말 기쁘겠습니다.
편지에 다시 한번 감사드리며,
충심으로,
에른스트 룀
둘째 편지 — 라파스, 1929년 2월 25일
참모본부 중령 에른스트 룀
볼리비아 라파스, 참모본부 사서함 70
라파스, 1929년 2월 25일
하임조트 박사님께!
사실은 박사님이 뮌헨으로 보내신 원고를 손에 넣은 뒤에 편지를 쓰려고 했습니다. 뒤물랭 백작[7]이 이제쯤 박사님께 연락했겠지만, 그는 지금까지 박사님의 친절한 편지만 보내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예전에 보내 주신 그 흥미진진한 책을 다 읽었으니, 여기 소식을 전하는 것으로 곧바로 감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박사님의 책은 정말 굉장하고, 제게 완전히 새로운 깨달음을 열어 주었습니다. 이 주제를 이렇게 알기 쉽고도 파고들어 다룬 출판물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문체도, 일단 읽는 데 익숙해지면 아주 훌륭합니다. 진심으로 큰 성공을 빕니다. 더 바라는 것이 있다면, 박사님의 논의가 “적의 진영”에서도 귀를 얻는 것입니다.
그런데 박사님의 책이 제게 부탁 하나를 떠올리게 했으니, 그건 박사님 탓이기도 합니다. 보아하니 박사님은 “성좌”[8]를 짚어 내는 데 엄청난 솜씨가 있으시더군요. 제 것도 한번 맡아 주시지 않겠습니까? 저는 1887년 11월 28일 새벽 1시에 뮌헨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러면 저도 제가 대체 어떤 사람인지 한번 알게 될지 모르겠습니다. 솔직히 말해 저는 그걸 확실히 모릅니다.
저는 제가 동성애자라고 생각합니다만, 이를 제대로 “발견”한 것은 1924년입니다. 그전에도 어린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동성애적 감정과 행위를 여럿 기억할 수 있지만, 여자들과도 많이 관계했습니다. 다만 특별히 즐긴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임질에도 세 번 걸렸는데, 나중에 저는 이것을 자연을 거스르는 관계에 대한 자연의 벌로 여겼습니다[9]. 지금은 모든 여자가 질색입니다. 특히 사랑을 앞세워 저를 쫓아다니는 여자들이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 수가 꽤 됩니다. 반면 어머니와 누이에게는 온 마음으로 매여 있습니다. 누이는 저보다 일곱 살, 형은 여덟 살 위입니다. 아버지에게도 형에게도 각별히 살가운 감정을 품어 본 적이 없습니다. 아버지는 1926년 3월에 돌아가셨습니다.
박사님이 아셔야 할 것은 이 정도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제가 지금까지 겪어 온 운명은 박사님도 어느 정도 아시지요. 그러니 박사님이 그려 주실 제 성격이 몹시 기다려집니다. 그렇다고 크게 언짢아하시지는 않겠지요? 그러지 않으시기를 바랍니다. ————
여기서는 전해 드릴 이야기가 그리 많지 않습니다. 뮌헨의 공기에서 한동안 빠져나온 것이 무척 기쁩니다. 여기서 저는 새로운 것을 배우고 만들어야 하고, 그렇게 제 정신이 아직 무언가를 받아들일 수 있는지 아닌지 시험해 볼 수 있습니다. 근무는 만족스럽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꽤 쓸모가 있으리라 믿습니다. 다른 협력자들은 제가 먼저 일에 익숙해진 뒤에 데려오려고 합니다. 고산 기후도 — 라파스는 해발 3600미터에 있습니다 — 꽤 잘 견디고 있습니다. 잘 지내고 잘 먹으며, 독일식으로 먹습니다.
그러니 사랑할 대상이 없다는 것만 빼면 모든 것이 더할 나위 없이 좋습니다. 동행을 한 명 데려오긴 했습니다. 열아홉 살 먹은 뮌헨의 화가입니다. 저는 그에게 무척 정이 들었고, 그도 제게 그렇습니다. 그가 지금처럼 그림 여행이라도 떠나면 몹시 아쉽습니다. 어디서나 그가 그립습니다! 하지만 어떤 성적인 행위의 상대로도 그는 고려 대상이 아닙니다. 그가 그럴 마음이 없어서만이 아니라 — 그는 그 욕구를 여자아이들에게서 채워야 한다고 믿습니다 — 저도 이상하게 그쪽으로 전혀 욕구가 없습니다. 분명 아주 잘생긴 녀석인데도 말입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데려오지도 않았겠지요.)
지금까지 조심스럽게 알아본 바로는, 제가 좋아하는 종류의 활동은 이곳에 알려져 있지 않은 듯합니다. 누군가를 지그시 바라보면, 그는 이쪽이 무엇을 원하는지 전혀 짐작하지 못합니다. 이곳에는 완전한 몰이해가 지배하고 있어서 저는 무엇을 해야 할지 전혀 모르겠습니다. 그러면서도 거리를 걷다 보면 모든 것이 동성애임이 틀림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젊은이들은 — 그런데 일부는 무척 잘생겼습니다 — 이곳 풍습대로 모두 팔짱을 바짝 끼고 다니고, 길에서 인사할 때 서로 껴안으니, 물론 저로서는 갑절로 약이 오릅니다.
제 스페인어 선생에게도 조심스럽게 떠보았는데, 그도 라파스에는 그런 게 없다고 했습니다. 부에노스아이레스에는 있다지만, 그곳까지는 오가는 데 적어도 열흘이 걸리고 1000마르크가 넘게 듭니다. 그러니 이 가련한 바보는 여기 서서[10] 어떻게 해야 할지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그토록 행복할 수 있는 아름다운 베를린을 슬프게 떠올립니다. 박사님, 제가 어떻게 하면 좋을지 조언해 주십시오. 첫 휴가까지는 적어도 2년이 남았으니까요! 여기에 얼마간의 문화를 퍼뜨리려는 시도는 물론 계속하겠습니다만, 그게 잘될지는 점점 의심스럽습니다.
물론 여기 사창가는 넘쳐나고 다들 그리로 몰려갑니다. 하지만 저는 아쉽게도 거기서 얻을 게 없습니다. 여기에는 독일인도 400명 살고 있지만, 어떤 족속인지는 묻지 마십시오! 지금까지 저는 아주 칩거하며 삽니다. 저녁마다 라파스 구석구석을 헤매고 다니지만, 지금까지는 아쉽게도 허탕만 쳤습니다. 정말이지 울고 싶습니다.
제가 여기서 순전한 낙원에 산다고 박사님이 생각하시지 않도록 이 비명을 전해 드려야 했습니다. 아마 독일에서 “친구” 하나를 불러오는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이 위안 없는 처지를 마땅히 불쌍히 여겨 주시기를 바랍니다. 이제 제 이야기는 충분히 오래 했습니다.
박사님은 어떻게 지내십니까? 책은 어떻게 되어 갑니까? 마땅한 성공을 거두었습니까? 그리고 “운동”[11]은 어떻습니까? 베를린은?
그 많은 일 가운데 몇 줄 쓰실 틈이 나시면 정말 고맙겠습니다. 물론 그와 따로 성좌는 꼭 기다리겠습니다. 그 일에 자료가 더 필요하시면 분명 뒤물랭 백작이 도와 드릴 수 있을 겁니다.
그사이 얼어 버리시지는 않았겠지요. 들려오는 소식이 정말 걱정스럽더군요. 여기는 지금 우기입니다만, 비가 오지 않으면 꽤 쾌적하게 따뜻합니다. 대체로 이곳 기온은 우리 고향의 초여름 같습니다. 추운 것은 겨울밤, 곧 6월부터 8월까지뿐이라고 합니다.
베를린 친구들을 통해 전해 드린 여러 안부는 받으셨겠지요. 그 결과 개인적으로 아는 사이가 되셨는지 궁금합니다. 제가 박사님께 소개한 궁정 가수 한스 베어에 대해 어떻게 판단하실지 기대됩니다. 제가 보기에 이 사람은, 세상 사람들 말로, 불행한 소질 탓인지 정말 신경이 좀 과민합니다.
제 쪽에서는 한마디 덧붙여야겠습니다. 제 성향이 때로 상당한 어려움을 안겨 주기는 했지만 저는 그것 때문에 전혀 불행하지 않으며, 속으로는 어쩌면 그것을 자랑스럽게까지 여깁니다. 적어도 그렇다고 믿습니다. 이것도 박사님의 판단을 일단 들어 보면 더 분명히 보이리라 기대합니다.
제 특이한 점 하나를 더 말씀드려야겠습니다. 박사님이라면 어차피 스스로 알아내셨겠지만, 저는 의사를 믿으면 아이처럼 그 의사에게 휘둘립니다. 제가 박사님을 그렇게 믿는다는 것은 느끼실 겁니다. 그럼 이제 정말 끝입니다.
경찰 고문관 바우어 건은 뒤물랭을 통해 처리되기를 바랍니다.
진심으로 안부를 전합니다.
되도록 빨리 소식 주십시오.
답장을 애타게 기다립니다.
동지의 악수를 보내며
에른스트 룀
셋째 편지 — 우유니, 1929년 8월 11일
우유니[12], 1929년 8월 11일
친애하는 하임조트 박사님!
그래요, 그래, 파리에 가셔서 거기서 한번 사정을 살피셨군요. 그리고 러시아어로나마 꽤 그럴듯하게 “즐기신”[13] 모양이고요. 늦었지만 축하합니다.
볼리비아에 계시지 않은 것만도 다행으로 아십시오. 여기서는 아마 박사님의 솜씨도 다 소용없을 테니까요. 실은 제가 큰 애를 써서 어느 정도 바꿔 놓았고, 바라는 게 소박하면 살 만합니다. 하지만 그 밖으로 나가면 — 카람바, 거기서는 정말 어떤 솜씨로도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 물론 이 딱한 사정은 하필 볼리비아에만 해당합니다. 페루와 칠레(이를테면 해안 지방)는 듣자 하니 꽤 괜찮다고 합니다.
그래서 저는 6월 중순부터, 라파스에서 사흘 머문 것 말고는, 줄곧 — 혼자 지내고 있습니다. 수크레에서 5주 동안 젊은 친구와 함께 지냈고 — 그는 아쉽게도 고려 대상이 아니지요 — (그는 지금 공부하러 산타크루스에 가 있습니다. 어느 가톨릭 신부가 초대했는데, 그 신부도 아쉽게도 그 방면에서는 실망하게 될 겁니다. 아마 오직 그 때문에 그를 초대했을 테니까요) 지금은 8월 말까지 이 국경의 춥고 바람 부는 개똥 같은 촌구석에 있습니다. 수크레에서도 여기서도 이곳에 주둔한 보병 연대들을 시찰하고, 근무 전체를 지휘하며, 모든 훈련을 짜는데, 훈련이 끝날 때마다 꼼꼼한 강평이 따릅니다. 앳되고 싱싱한 소위들은 박사님 마음에도 분명 드실 겁니다…… 물론 불가능하지만요.
아니면 군복 입은 젊은 흑인들은 어떠십니까? 그들도 드문드문 있습니다. 말씀드렸듯이 이제는 라파스로 돌아갈 때까지 참는 수밖에 없습니다. 거기서는 당분간 아쉬울 게 없습니다. 이달 말에 여기서 칠레 해안의 안토파가스타로 잠깐 다녀오지 않는다면요.
자, 이제 제 사생활은 거의 다 아셨을 텐데, 덧붙일 것은 제 성욕이 줄기는커녕 오히려 더 세진 듯하다는 것뿐입니다.
점성술로 제 운세를 풀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모든 것이 대단히 흥미로웠습니다. 다만 그 핵심 문제[14]에서는 예전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분명히 알지 못하겠습니다. 하지만 결국 중요한 것은 제가 무엇을 즐기느냐지요. 제 직업에 대한 태도에 관한 박사님의 판단에는 좀 놀랐습니다. 제가 직업 따위는 개똥만큼도 상관없다고 여긴다는 것은 저는 정말이지 한 번도 느껴 본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반대입니다. 하지만 어느 점에서는 이런 흔들림이 누구의 점성술 풀이에나 있겠지요. 그리고 결국 하나의 실마리일 뿐이겠고요.
베를린에 대해 쓰신 이야기는 이 하나뿐인 도시를 향한 제 그리움을 다시 다 일깨웠습니다. 맙소사, 그곳에 다시 갈 수 있는 날을 벌써 세고 있고, 거기서 인생을 좀 즐길 수 있게 가능하면 여기서 정말 돈을 모으렵니다. 그래도 제 생각에는 거기 증기탕이 인간 행복의 절정입니다. 어쨌든 그곳의 교제 방식이 각별히 마음에 들었습니다.
프렌첼에게 특별히 진심 어린 안부를 전해 주십시오. 제 다른 검은 친구들을 — 이 유형이 제 이상형입니다 — 목욕탕이나 증기탕에서 다시 보시거든 그들에게도요[15]. 그리고 우리 둘의 친구 프리츠 시르머에게도 진심 어린 안부를 전하시고, 제 이름으로 — 아쉽게도 — 입맞춤을 해 주십시오. 바라건대 박사님도 이제 그와 행복하게 결혼하셨을 테니, 거처를 옮기는 것과 그에 따를지도 모를 이혼에는 물론 극구 반대합니다.
그런데 박사님의 부군께서(아니면 부인께서?) 자기 사진을 동봉하지 않은 것에는 단호히 항의해야겠습니다. 여기서는 그런 것에 아주 민감합니다. (이와 관련해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박사님이 언젠가 그 방면의 장면을 담은 정말 황홀하게 아름다운 사진첩을 보여 주신 적이 있지요. 그런 사진이 남는 게 있거나 저를 위해 구하실 수 있으면 꼭 몇 장 보내 주십시오. 영원히 감사하겠습니다.)
그럼 이제 세상으로 나가겠다는 프리츠의 생각에 대해서입니다. 이건 정말 “더없이 따뜻한” 우정으로 말리는 수밖에 없습니다. 이를테면 볼리비아에서 젊은 남자가 일자리를 얻기란 거의 불가능합니다. 칠레 등지도 나을 게 없습니다. 상업 쪽 시장 전체가(다른 것은 아마 해당이 없겠지요) 너무 꽉 차서, 고국에서 대기 명단에 오른 수백 명도 여기서 자리를 얻을 생각을 못 합니다. 물론 저도 이리로 데려오고 싶었던 “홀아비”[16]가 고향에 몇 있지만 완전히 단념했습니다. 게다가 젊은이들의 보수가 턱없이 모자랍니다. 특히 여기서 판을 쥔 독일 상사들이 그렇습니다. 그러니 새 친구 프리츠와 다시 만나는 일은 제가 — 아마 1930년 말에 — 독일로 아주 돌아가거나 휴가를 얻어 갈 때까지 미뤄야겠습니다.
자, 그럼 베를린에 그리운 안부를 다시 한번 보내고, 친애하는 하임조트 박사님께도 특별히 진심 어린 안부를 전합니다.
박사님의 편지는 꽤 늦게 회송되어 받았습니다. 여기서는 그게 늘 한없이 걸립니다. 다음 편지는 9월 1일부터 다시 거의 내내 머물 라파스에서 10월 초에 제때 받기를 바랍니다. 이번에 동봉할 사진은 아쉽게도 제 변변찮은 최근 초상 한 장과 라파스 사관학교(유년학교)의 사진 한 장뿐입니다. 박사님이 이 — 꽤 괜찮은 — 학교의 의사가 아니라서 다행입니다.
진심 어린 악수를 보내며
에른스트 룀
부록 1 — 헬무트 클로츠, 「사실들!」(1932년 9월 12일)
1932년 3월
나는 히틀러당 돌격대의 이른바 “참모장”인 퇴역 대위 에른스트 룀의 편지 세 통을 원본대로 복제해 세상에 공개했다.
1932년 4월 4일
룀 씨는 뮌헨 제1지방법원에 가처분을 신청해, 벌금과 구금형을 걸고 내가 이 편지들을 더 퍼뜨리지 못하게 해 달라고 했다.
법원은 이 신청을 기각했다. 이유서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신청인 룀은 공개된 편지들을 자신이 썼다는 사실을 다투지 않는다. 필자 룀이 독일 청년을 이끄는 참모장 자리에 맞지 않음을 보이려고 누군가 정치 투쟁에서 그런 편지를 공개한다면, 이는 불법 행위가 아니다.”(사건 번호 C IV 207/32)
1932년 4월 6일
히틀러는 — 자신의 대통령(!) 출마를 지지하려고 낸 전단에서 — 이렇게 선언했다. 룀 대위는 “지금도 선거 뒤에도 나의 참모장이다. 위조(?)와 법률 위반과 직권 남용을 서슴지 않으며 마땅한 법의 응징(!?)을 받게 될 가장 더럽고 역겨운 선동도 이 사실을 바꾸지 못할 것이다.”
1932년 4월 22일
룀 씨가 항고한 뮌헨 고등법원은 사건을 지방법원으로 돌려보내야 한다고 결정했다.(항고 사건 번호 779/32 III)
1932년 4월 23일
뮌헨 제1지방법원은 룀 씨의 신청을 다시 기각했다. 이유서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신청인 룀은 공개된 편지들을 자신이 썼다는 사실을 다투지 않는다.”
1932년 4월 28일
뮌헨 고등법원은 룀 대위의 두 번째 항고에 대해, 룀이 낸 가처분 신청을 놓고 구두 변론을 열어야 한다고 결정했다. 고등법원의 이유서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피신청인 클로츠 박사의 소책자는 신청인 룀의 편지 세 통을 문자 그대로 싣고 있다. 이 편지들은 동성애 성향의 고백을 담고 있다.”
1932년 5월 7일
퇴역 보병 대장 루덴도르프 각하[17]는 이 소책자의 엮은이에게 이렇게 썼다. “나는 히틀러 씨가 이미 1927년에 당시 조직 안에서 하급 지도자 룀과 하이네스의 동성애 성향 때문에 생긴 심각한 폐해, 특히 하이네스로 인한 히틀러 유겐트의 오염에 대해 지적을 받았다는 증거를 손에 쥐고 있습니다. 히틀러 씨는 처음에는 두 사람을 해임하기를 한사코 거부했습니다. 그러나 내 정보 제공자가 공개 폭로하겠다고 위협하자 하이네스에 대해서는 조치를 취했습니다. 룀 씨를 볼리비아로 떠나보낸 것이 이와 관련된 일인지는 내가 알지 못합니다. 선서로 뒷받침할 수 있는 이런 사실들에도, 룀의 편지들과 그 밖의 것들에도 불구하고 룀 씨와 하이네스 씨는 오늘 다시 당의 지도적 자리에 있으며, 룀은 심지어 최고 지도부에 있습니다. 히틀러 씨는 특히 그를 위해 발 벗고 나서서 그를 자리에 붙들어 두고 있습니다. 이런 사실들은 히틀러 씨에게 불리하게 너무도 분명하고 명백히 말하고 있어서, 어떤 말을 보태도 그 무게를 덜 뿐일 것입니다.”
1932년 5월 12일
제국의회 건물 안에서 나치 의원들이 나를 습격했다. 내가 “룀 편지를 위조하고 참모장 룀을 중상한” 자라는 구호를 내걸고서였다. 습격자들에 대한 베를린 즉결 참심 법원의 재판에서(나치당 의원 하이네스, 바이첼, 슈테크만은 공동 상해로 각각 징역 3개월을 받았다) 룀 편지가 진본이라는 증거가 제시되었다.
1932년 6월 14일
파펜 제국 정부가 히틀러당의 SA와 SS에 대한 금지[18]를 다시 풀었다.
1932년 6월 15일
히틀러 씨는 룀 대위를 되살아난 군사적 나치당의 참모장으로 다시 임명했다.
1932년 7월 20일
뮌헨 제1지방법원에서 클로츠 박사를 상대로 한 룀의 가처분 신청에 대한 구두 변론이 열렸다. 룀 대위가 변론 기일을 잡지 않은 채 두 달을 그냥 흘려보낸 뒤였다.
기일에 룀은 1932년 7월 31일 제국의회 선거 뒤로 기일을 미뤄 달라고 신청했다! 이에 맞서 “피고” 클로츠 박사는 룀의 이 지연 시도를 물리치라고 요구했고, 법원은 룀에게 불리하게 결정했다. 그러자 “참모장”의 변호사는 더 이상 변론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밝히고, 그래서 다시 기일 연기를 신청한다고 했다. 나는 이 신청에 단호히 반대하며 법원에 판결을 요구했고, 짧은 합의 끝에 다음과 같은 판결이 내려졌다. 룀의 가처분 신청은 기각한다. 비용은 신청인 룀이 부담한다.
1932년 9월 7일
같은 사건으로 뮌헨 제1지방법원에서 다시 기일이 잡혔다. 룀 씨가 기한 마지막 날(!)에 1932년 7월 20일 판결에 이의를 제기했던 것이다. 그러나 “참모장” 씨가 변론 시작 25분 전에 이의를 거둬들여 변론은 열리지 않았다.
이로써 1932년 7월 20일 판결이 최종 확정되었다! 그리고 엮은이에게는 독일 청년을 동성애적 타락으로부터 지키기 위해 룀 대위의 편지를 공개할 권리가 법원 판결로 최종 인정되었다.
같은 날
뮌헨에서는 또, 나를 “룀 편지 위조범”이라고 부른 하노버의 나치 편집인 베렌스를 상대로 엮은이가 낸 사인 소추 사건의 증인 신문 기일이 열렸다. 증인으로 소환된 것은 룀 대위 — 그는 선서하고 자기 편지에 대해 진술해야 했으나 출석하지 않는 쪽을 택했다! — 와 고등법원 판사 케머 박사였다. 케머 박사는 예전에 뮌헨에서 수사 판사로서 형법 제175조 위반 혐의로 룀 대위에 대한 수사를 맡았던 사람이다. 케머 박사는 1931년 7월 28일 룀 대위에게 (뒤에 내가 공개하고 아래에 싣는) 편지 세 통을 제시했으며, 룀이 이 편지들을 진본이자 자신이 짓고 쓰고 서명한 것으로 인정했다고 선서하고 진술했다.
이 사실들에 대해 한 가지 밝혀 둔다
“룀 편지”를 공개함으로써 나는 동성애자에 대해 어떤 가치 판단도 내리지 않는다. 부정적인 뜻으로도 긍정적인 뜻으로도 그렇다. 이 불행한 사람들의 특별한 감정을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지만, 그들에게 연민을 거두지 않으려고 애쓴다. —
그러나 나는 단호히 강조한다. 이 연민 때문에 내가 — 「참모장」 룀의 경우처럼! — 독일 청년의 큰 무리가 흥하든 망하든 한 동성애자에게 내맡겨지는 때에 잠자코 참으며 옆에 비켜서 있게 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
여기서는 거리낌 없는 솔직함이 곧 가장 높은 도덕적 의무가 된다. — 더구나 룀 씨는 더할 나위 없는 냉소로 “자신의 동성애”를 “더 높은 문화”라고 감히 내세우고, 그것을 “심지어 자랑스럽게” 여기며, 그것을 퍼뜨릴 사명을 스스로 느끼고 있다(1929년 2월 25일 편지)[19]. —
“룀 사건”은 이미 오래전에 히틀러 참모장의 사생활 문제이기를 그쳤다. “룀 사건”은 오히려 일급 공공 추문, 독일의 수치가 되었다. —
무엇보다 민족사회주의당의 수치다. 이 당은 강령 성명에서 동성애자에게 강제 거세에 이르는 가장 가혹한 “형벌”을 요구하는 뻔뻔함을 보이면서도, 룀 대위는 여전히 젊은이들을 이끄는 자리에 두고 감싸고 있다.
거듭 말한다. 룀 씨에게 나는 어쩌면 연민을 느낀다. 그가 그럴 만한 사람이든 아니든.
그러나 — 오래전부터 참모장 룀의 공격적인 동성애를 알면서도! — 그를 다시 그 자리에 앉힌 자들을 나는 깊이 경멸하며, 끝장을 볼 때까지 맞서 싸울 것이다.
나는 그들을 독일 청년의 동성애적 오염에 알면서 고의로 앞잡이 노릇을 한 죄로 고발한다!
베를린템펠호프, 1932년 9월 12일
헬무트 클로츠 박사
부록 2 — 에른스트 룀, 『한 대역죄인의 이야기』 발췌(1928년)
29장 「옥중에서의 고찰」에서(234~238쪽)
나는 수감자들을 관찰하고, 사회에서 배척당한 이 사람들에 대해 판단을 내릴 시간과 기회가 충분했다.
물론 이곳 슈타델하임[20]에는 주로 미결수와 짧은 자유형을 사는 기결수만 갇혀 있었다. 그러나 여기서 얻을 수 있었던 통찰은 그렇다고 덜 주목할 만한 것이 아니었다.
사람들을 감옥에 보낸 것은 대개 재산 범죄였다. 많은 이가 궁핍 때문에 남의 재물에 손을 댔고, 어떤 이들은 잘못되었거나 모자란 교육, 나쁜 대우, 충동적인 성향 때문에 형법과 부딪치는 길로 들어섰다.
작은 자들은 갇혀 있었지만, 큰 악당들은 그동안 독일을 거침없이 돌아다니며 민족과 국고를 약탈하고 60마력짜리 자동차를 타고 주인 행세를 하며 거리를 누볐다.
벼락부자 졸부들이 민족의 궁핍을 눈앞에 두고, 민족에게서 고리로 뜯어내고 훔쳐 낸 돈과 재물을 백주에 뻔뻔하게 탕진하는 꼴을 지켜봐야 한다면, 가련한 녀석이 내 것과 네 것을 헷갈린다 한들 놀랄 일인가?
경직된 사법이 단죄한 사람이라고 해서 모두 나쁜 놈일 필요는 없다.
시민적 사회 질서와 국가의 법은 이름난 악당과 민족의 해충을 배척하지 않는다. 그들의 부는 그 출처가 아무리 의심스러워도 그들에게 위세와 명망을 안겨 준다.
그러나 한 번 발을 헛디뎌 붙잡히고 — 내 생각에는 정당하게라도 — 갇힌 작은 악당들은 배척당하고 사회의 천민이 된다.
사회는 그들에게 명예와 일과 빵을 거부한다. 그들은 어쩔 수 없이 그들에게 남은 유일한 피난처, 곧 감옥에 거듭 떨어진다.
그런데 국가는 여기서도 원인을 없애지 않고 결과와만 싸운다.
궁핍과 비참과 실업 때문에 범죄와 비행이 늘어나면, 국가는 가능한 모든 수단과 온 국력을 기울여 궁핍을 없애는 데 눈을 돌리지 않고 경찰과 감옥을 늘린다.
국가와 경찰은 오늘날 사회 질서와 법질서의 포졸이다.
그런데 이 질서는 능력과 가치와 업적을 묻지 않는다. 겉모습이 모든 것을 결정한다.
어떤 자가 악당이나 겁쟁이인지는 기준이 되지 않는다. 그가 법의 그물에 걸리지 않고 “추문”이 일어나지 않는 한 모든 것이 괜찮다.
위선과 바리새주의가 지배한다.
그것이 오늘날 사회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다.
이는 통용되는 “도덕”을 살펴보면 가장 뚜렷이 드러난다.
사회의 이른바 도덕보다 더 거짓된 것은 없다. 이보다 더 함부로 다뤄지는 개념도 없다. 미리 밝혀 두지만, 나는 착한 사람들 축에 끼지 않으며 거기 끼고 싶은 야심도 없다. 그러나 “도덕적인 사람들” 축에는 더더구나 끼고 싶지 않다. 이 “도덕적인 사람들”의 “도덕”이란 대개 별것 아니라는 것을 겪어 보았기 때문이다.
“도덕”이 하도 많아서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다.
그러나 겉으로 도덕이 줄줄 흐르는 바로 그자들이야말로 남몰래 꽤나 즐겨 부도덕하거나, 기회만 있다면 아, 얼마나 기꺼이 그러고 싶어 하는 자들이다.
제 생업을 공공연히 밝히는 화류계 여자가 제 참모습을 밖으로 부인하는 숱한 도덕 심미가들보다 도덕적으로 더 높이 서 있지 않은지는 판단을 미뤄 두겠다.
이른바 정치가, 민족 지도자 따위가 도덕 장사를 한다면, 그것은 대개 그들에게 더 나은 생각이 떠오르지 않는다는 증거이자, 그들이 본래 이뤄야 할 일을 해내지 못한다는 증거다.
민족주의 진영과 민족주의 언론과 민족주의 지도자들까지 사회에 머리를 조아리려고 이 낡아 빠진 넋두리 나팔을 불어 대는 것은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이런 고상한 척은 결코 혁명적으로 보이지 않고, 오히려 진저리 나게 진부하고 반동적이다. 그런 짓은 오늘날 시민적 사회 질서의 방패잡이들에게나 맡겨 두라.
대개 전장에 나가 보지 않고 안전한 항구에서 전쟁을 “체험한” 어떤 부류의 “민족주의” 문사들에게서라면 물론 놀랄 일도 아니다. “문화”와 “도덕”을 위한 전쟁은 이따금 총알도 날아온다는, 사람 잡는 야전보다 훨씬 편하고 위험하지 않다. 게다가 보기에도 얼마나 그럴듯한가!
군인은 이런 종류의 거짓된 도덕에 진저리를 치며 등을 돌린다.
나는 전장에서 군인을 그가 시민 사회의 도덕적 요구에 들어맞는지로 판단하지 않고, 그가 사내다운 놈인지 아닌지로 판단했다. 어쩔 수 없다. 무언가를 해내는 이른바 부도덕한 사람이, 아무것도 해내지 못하는 “도덕적인” 사람보다 나는 더 좋다.
이른바 사회가 이 문제에서보다 더 많은 죄를 짓고 더 큰 해를 끼치는 데는 없다. 가장 훌륭한 이들의 자살이 너무도 분명히 말해 준다.
늘어나는 학생 자살 때문에 이 특허받은 도덕의 사회가 제 자기만족의 잠에서 놀라 깨기라도 하면, 그 사회는 경건하게 눈을 치뜨며 요즘 젊은이들의 풍기 문란을 꾸짖는다.
여기에도 한마디 해야겠다.
아주 짧게 말하자면, 젊은이의 대부분, 곧 오늘날 특히 프롤레타리아 대중이 예전보다 나빠졌다는 것은 그냥 사실이 아니다. 아니다. 전쟁의 후유증에도, 굶주림과 집의 궁핍에도, 강요된 실업에도 — 이 모든 것은 젊은이가 아니라 이 사회의 탓이다 —, 이 젊은이들은 높은 이상을 품고 기꺼이 공공연히 그것을 위해 나선다. 나치당과 방위 단체들, 그리고 프롤레타리아 자위 단체들의 청년대가 이를 증언한다.
이 젊은이들이 못 하는 것은 다른 것이다. 그들은 시민적 속물들의 이중 도덕 속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진실과 오류를 더는 가려내지 못한다. 지식과 지혜뿐 아니라 마음까지 열어 주는 교사가 그들 곁에 있는 일은 드물다. 그러나 녹슨 훈장은 불행이 닥친 뒤에, 알지도 못하고 이해는 더더욱 못 하는 “타락한 젊은이”에 대해 기름 바른 듯 경건하고 무오류한 판결을 내려, 귀를 쫑긋 세운 속물을 다시 잠재우는 데 그칠 것이다.
실로 이 비극들은 자연스러운 현상과 인식을 건강하게 인정하는 대신 위선과 거짓과 가장과 고상한 척과 당치 않은 분개를 규정하는 사회 질서의 끔찍한 결과다.
이 바리새인들은 정직과 진실함의 용기를 정말이지 털끝만큼도 느껴 보지 못했다!
더구나 국가가 그 권리를 제 것으로 내세우며 법률로 인간의 충동을 규제하거나 다른 길로 돌릴 수 있다고 믿는다면, 그것은 내게 너무도 아마추어 같고 목적에 어긋나 보여서, 이 국가의 입법자들이 바로 이 사회 질서의 수호자가 아니라면 나는 놀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국가가 인간의 본성에 개입해서 가정이 보호되거나 아이가 더 태어난다는 것은, 이 이상한 “자유국”[21]의 야경꾼들조차 제 것으로 삼지 않을 논거이기 때문이다.
리하르트 바그너의 한스 작스의 말을 빌리자면, “망상, 망상, 어디나 망상!”[22]
내가 말하려는 것은 이것이다. 오늘날 이 사회의 위선과 기만과 거짓 경건에 맞선 싸움은, 사람이 요람에서부터 타고난 가장 고유한 충동의 삶에서 출발해야 한다. 그래야만 그 싸움은 인간 생활 전반에서도 성공적으로 벌여 나갈 수 있다. 이 영역에서 싸움이 성공하면, 인간의 사회 질서와 법질서의 모든 영역에서 가장의 가면을 벗겨 낼 수 있다.
그러면 오늘날 사회에서 배척당한 많은 이가 더는 감옥에 앉아 있지 않을 것이다. 대신 인간 사회의 진짜 큰 해충들이 민족을 망치는 짓을 못 하도록 막을 길과 수단이 분명 찾아질 것이다.
언젠가 정화된 세대가 세울 법정의 난간 앞에서는, 잘못을 저지른 모든 자가 사람을 가리지 않고 해명해야 할 것이다. 가장 높은 자에게도 가장 낮은 자에게도 응보의 벌이 가차 없이 떨어질 것이다. 바르마트 같은 자는 거기서 틀림없이 재빨리 마땅한 벌을 받을 것이고, 샤이데만이라는 이름으로도 더는 판사 앞의 증언을 피하지 못할 것이다.[23]
결론(326~327쪽)
내 삶과 체험의 책을, 이해하는 친구와 투덜대는 속물 앞에 활짝 펼쳐 보였다.
속물은 이를 어리석다고 여길 것이다. 그러나 그런 것은 나를 흔들지 못한다.
수많은 책이 쓰였지만, 이보다 더 거리낌 없이 솔직하게 쓰인 책은 아마 많지 않을 것이다.
내 정치적 동지들에게도 어떤 것은 마음에 들지 않을지 모른다. 생각과 감정이 아무리 한쪽으로 쏠려 있어도, 내 군인다운 감각은 친구의 잘못을 채찍질하는 것 못지않게 적의 장점을 인정하라고 나를 다그쳤다.
나는 분명히 말하는 것을 좋아하고, 마음속에 아무것도 감추지 않았다.
거리낌 없이, 열정적으로, 고집스럽게,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대로 써야 했다.
그러나 누군가를 모욕하거나 상처 주려는 뜻은 없었다.
군인의 말투는 거칠고 딱딱하다. 그러나 우리 군인들은 모두 같은 말을 하고 서로 알아듣는다.
군인들의 황제 나폴레옹은 유배 시절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군인들은 설령 적으로 나와 맞섰더라도 결코 나를 미워할 수 없을 것이다!”
내 정치 진영과는 거리가 먼, 내 중대 병사의 아내가 얼마 전 내게 말했다. “제 남편 마음속 첫자리에는 그 무엇보다 소중한 대위님이 계시고, 그다음에야 어머님과 제가 있어요.”
또 다른 병사, 한 공산주의자는 평의회 시절[24] 장교들을 향한 선동이 벌어지던 집회에서 벌떡 일어나 외쳤다. “당신들이 장교들에 대해 하는 말이 사실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한 가지는 안다. 우리 대위님에게는 그 말이 사실이 아니다.”
이렇게 군인은 모든 신분과 계급의 차이를 넘어, 모든 정치적 견해를 넘어 서로 손을 잡는다. 피로 굳게 맺어진 군인의 전우애는 잠시 잠들 수는 있어도 마음에서 뽑혀 나가 지워질 수는 결코 없다.
오늘 독일 전체가 잠들어 있다. 영웅적인 독일이 잠자고 있다.
내 말은 이 잠든 이들을 깨우는 외침이어야 한다!
나는 저주받은 황금을 신으로 떠받드는, 허둥대고 살금거리는 장사꾼이 아니라, 삶의 싸움에서 분투하며 자유를, 그리고 자유 안에서 자유와 함께 천국을 얻으려는 투사에게 말한다.
독일의 자유라는 목표에 이로운 것을 나는 옳다 하고, 그에 어긋나는 것과는 싸운다. 유럽이, 온 세계가 불길 속에 가라앉는다 한들 우리에게 무슨 상관인가? 독일은 살아야 하고 자유로워야 한다.
나를 무지렁이라 꾸짖어도 어쩔 수 없다. 나는 오늘날의 형태와 영향력을 지닌 스포츠를 거부한다. 아니, 나는 그것을 차라리 국가적 위험으로 여긴다. 챔피언과 인위적으로 길러 낸 스포츠 스타로는 조국을 일으켜 세우지 못한다. 전체에 몸의 힘과 능력을, 그리하여 정신의 탄력과 도덕적 버팀목을 주는 꼼꼼한 체조 교육만이 민족 전체에 이로울 수 있다. 스포츠는 겉치레와 광고의 이 시대에 꼭 어울린다. 키치와 감각의 혼란과 센세이션, 오래가는 내실은 하나도 없다. 스포츠 열병은 울슈타인과 모세에게 맡기고, 나는 얀 곁에 남겠다.[25]
독일인은 미워하는 법을 잊어버렸다.
사내다운 미움의 자리에 계집애 같은 하소연이 들어섰다.
그러나 미워할 줄 모르는 자는 사랑할 줄도 모른다.
광적인 미움과 열정적인 사랑 — 이 불에서 자유의 불꽃이 타오른다.
열정 없음, 즉물성, 객관성은 몰개성이요 사이비 지혜다.
열정만이 인식을 주고 지혜를 만든다.
“신중한 사람들”의 경고를 무릅쓰고 쾰과 폰 휘네펠트 남작은 아일랜드인 전우 피츠모리스와 함께 큰 바다를 동쪽에서 서쪽으로 날아 건너 자연의 힘을 이겼다.[26]
“평온과 질서”는 연금 생활자들의 함성이다. 그러나 결국 국가를 연금 생활자 남녀의 필요에 맞춰 이끌 수는 없다.
1927년 『뮌히너 차이퉁』은 점령지에서 벌어진 프랑스인들의 횡포를 두고 “신중하다는 것은 따귀를 맞고도 조용히 참는 것”이라고 썼다.
그러니 “평온과 질서”를 독일어로 옮기면 그냥 뼈가 물러지는 병이다.
이 평온과 신중함, 미지근한 자들, 어정쩡한 자들, 비겁한 자들은 모두 악마에게나 가라!
“신중하지 못한 자들”은 4년 반 동안 전선에서 싸웠다!
“신중한 자들”은 집에 남았다!
“미숙한 분자들”은 제국을 지키려고 오버슐레지엔에서 싸웠다.
“성숙한 자들”은 그 대가로 그들을 가두었다.
“무책임한 몽상가들”은 8년 동안 민족에게 노예화와 억압에 맞서 저항하라고 외쳤다. 새 독일의 “책임감 있는 정치가들”은 8년 동안 독일을 철저히 말아먹었다.
“신중함”과 “성숙함”만 찾다가 우리 민족과 조국은 천천히, 그러나 확실히 망해 가고 있다.
독일은 옛날부터 “외교”와 “정치”에 맞지 않았다. 독일 역사의 위대함은 언제나 칼이 결정했다.
“외교관들이 군인이 피로 얻은 것을 다시 잃지 않도록 지시해 주시기를 지극히 황송하게 청하나이다.” 일찍이 블뤼허는 벨알리앙스 전투[27] 뒤에 자신의 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에게 이렇게 외쳐야 했다.
궁핍과 치욕에서 민족과 조국을 자유와 명예로 이끌 수 있는 것은 오직 군인뿐이다.
주석
- 룀이 1928년에 낸 회고록 『한 대역죄인의 이야기』(Die Geschichte eines Hochverräters)에서 성도덕의 위선을 비판한 대목. 이 단락은 이 문헌의 부록 2에 옮겼다. 하임조트는 이 책의 몇 대목을 동성애의 숨은 고백으로 읽고 제175조에 대한 분명한 입장을 물으려 룀에게 처음 편지를 보냈다. ↩
- 남성 사이의 성행위를 처벌한 독일 제국 형법 제175조. 바이마르 시기 동성애자 단체들이 폐지 운동을 벌였다. ↩
- 나치당 기관지 『푈키셔 베오바흐터』의 편집장. 이 무렵 그 지면에서 동성애와 제175조 폐지 운동을 거듭 공격했다. ↩
- 프리드리히 라트슈바이트(Friedrich Radszuweit, 1876~1932). 동성애자 잡지를 펴낸 출판인으로, 당시 가장 큰 동성애자 단체인 「인권 동맹」(Bund für Menschenrecht)을 이끌었다. ↩
- 한스 블뤼허(Hans Blüher, 1888~1955). 반더포겔 청년 운동과 남성 공동체를 이루는 에로스를 다룬 저술로 이름난 작가다. ↩
- 하임조트가 1928년에 낸 점성술 책 『성격 성좌』(Charakter-Konstellation). 동성애를 별자리로 풀이하는 데 큰 비중을 두었다. 둘째 편지의 「흥미진진한 책」도 이것이다. ↩
- 카를 레온 뒤물랭에카르트 백작(Karl Leon Graf du Moulin-Eckart, 1900~1991). 룀의 측근으로, 룀이 볼리비아에 있는 동안 독일 쪽 연락을 맡았고 뒤에 돌격대 정보 책임자가 되었다. ↩
- 하임조트가 책 제목에 쓴 점성술 용어(Konstellation). 태어난 시각의 별자리 배치로 성격을 읽는 것을 말한다. 룀이 출생 일시를 적어 보낸 것도 그 때문이다. ↩
- 원문은 widernatürlicher Verkehr. 당시 법률·의학 용어로는 대개 동성 간 성행위를 가리켰지만, 여기서는 여자들과의 관계를 말한 바로 뒤에 나오므로 룀에게 「자연을 거스른」 것은 여성과의 관계다. 통념의 용어를 뒤집어 쓴 셈이다. ↩
- 원문은 Da steh' ich nun, ich armer Tor. 괴테의 『파우스트』 제1부 첫 독백의 한 구절을 빌린 말이다. ↩
- 원문도 따옴표를 쳤다. 나치 운동을 가리키는지, 하임조트가 몸담은 제175조 폐지 운동을 가리키는지는 편지만으로 가릴 수 없다. ↩
- 볼리비아 남서부, 칠레 국경에 가까운 해발 3600미터대 고원의 철도 도시. ↩
- 원문의 sich unterhalten은 「대화하다」와 「즐기다」를 함께 뜻한다. 파리의 러시아 망명객들과 어울린 일을 두고 한 말장난으로 보인다. ↩
- 원문은 라틴어 in puncto puncti(「요점 중의 요점에서」). 성 문제를 에둘러 가리키는 관용구다. ↩
- 원문은 meine übrigen schwarzen Bekannten. 앞 문단의 「흑인」과 이어 읽으면 흑인 지인들이고, 머리나 살갗이 검은 남자들을 가리켰을 수도 있다. 원문의 모호함을 그대로 두었다. ↩
- 원문은 Witwer. 앞의 「결혼」·「이혼」 농담을 이어, 독일에 두고 온 연인들을 「홀아비」라고 부른 것이다. ↩
- 에리히 루덴도르프는 1923년 맥주홀 폭동을 히틀러와 함께 일으켰으나 1925년 대통령 선거 뒤 히틀러와 갈라섰고, 이 무렵에는 나치당을 공공연히 비난하고 있었다. ↩
- 브뤼닝 정부는 1932년 4월 13일 긴급령으로 SA와 SS를 금지했다. 파펜 정부는 나치당의 묵인을 얻으려고 이를 풀었다. ↩
- 클로츠의 인용은 편지의 여러 대목을 이어 붙인 것이다. 편지에 「더 높은 문화」라는 말은 없다. 룀은 라파스에 「얼마간의 문화를 퍼뜨리려는 시도」를 말하고, 따로 자기 성향을 「어쩌면 자랑스럽게까지」 여긴다고 썼다. ↩
- 뮌헨의 슈타델하임 형무소. 룀은 맥주홀 폭동 뒤 1923년 11월부터 이듬해 4월 재판 때까지 이곳에 미결수로 갇혔다. ↩
- 바이마르 시기 바이에른의 공식 국호는 「바이에른 자유국」(Freistaat Bayern)이었다. 공화국 체제를 비꼬는 말이다. ↩
- 바그너의 오페라 『뉘른베르크의 명가수』 3막에서 구두장이 시인 한스 작스가 부르는 독백 「Wahn! Wahn! Überall Wahn!」. ↩
- 1924~1925년 바르마트 형제의 부정 대출 사건. 사회민주당 정치인들이 연루되었다는 의혹이 일어 우익은 이 사건을 사회민주당과 유대인을 공격하는 데 썼다. 필리프 샤이데만은 1918년 공화국을 선포한 사회민주당 지도자다. ↩
- 1919년 4~5월의 뮌헨 평의회 공화국 시기. 룀은 이를 무너뜨린 자유군단 에프의 간부였다. ↩
- 울슈타인과 모세는 베를린의 유대계 대형 출판사로, 반유대주의 우익이 「유대 언론」의 대명사로 쓴 이름이다. 프리드리히 루트비히 얀은 19세기 초 나폴레옹에 맞선 민족 운동 속에서 독일 체조 운동을 일으킨 「체조의 아버지」다. ↩
- 1928년 4월 헤르만 쾰, 귄터 폰 휘네펠트 남작, 아일랜드인 제임스 피츠모리스가 비행기 「브레멘」호로 처음 대서양을 동쪽에서 서쪽으로 무착륙 횡단했다. ↩
- 1815년 워털루 전투를 프로이센에서 부른 이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