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년 체제의 개헌 무산: 제도 불가능성과 반제·반독점 전환의 계기
1. 사실관계: 2026년 5월 7일, 개헌안 투표 불성립
2026년 5월 7일 오후, 우원식 국회의장이 주도한 헌법 개정안이 국회 본회의에서 국민의힘의 집단적 표결 불참(보이콧)으로 투표 불성립 처리되었다. 재적의원 286명 중 3분의 2 이상인 191명의 찬성이 필요했으나, 국민의힘이 당론으로 표결 불참을 결정하면서 정족수 자체가 무너졌다.
개헌안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 시 즉시 국회 승인을 받도록 하고, 48시간 내 미승인 또는 국회 해제 의결 시 계엄 효력이 즉시 종료
- 부마민주항쟁과 5·18 민주화운동 정신을 헌법 전문에 수록
- 국가균형발전을 국가의 책무로 명시
국민의힘을 제외한 원내 6개 정당(더불어민주당, 조국혁신당, 진보당, 개혁신당, 기본소득당, 사회민주당)과 무소속 의원을 포함한 187명이 공동 발의했다. 우원식 의장은 "당론이라는 이름으로 투표에 참여도 못하게 하는 것은 정당의 횡포"라고 국민의힘을 직격했고, 5월 8일 오후 2시 재표결을 예고했으나 가결 가능성은 사실상 없다.
2. 개헌안의 계급적 성격: 87년 체제 내의 개혁, 그 내재적 한계
2.1. 발의 세력의 계급적 성격
이번 개헌안을 공동 발의한 6당은 계급적 기초에서 근본적 차이가 없다. 민주당·조국혁신당·개혁신당·기본소득당·사회민주당·진보당 모두 87년 체제를 제도적 틀로 수용하며, 그 내부에서 '민주주의의 확장'을 주장한다. 진보당과 사회민주당이 노동권·사회권을 부분적으로 제기하지만, 재벌 독점 해체와 주한미군 철수라는 반제·반독점 의제를 개헌안에 포함시키지 않았다. 187명 공동발의의 '초당성'은 바로 이 근본적 의제 배제의 결과다.
레닌은 1918년에 이미 지적했다. "가장 민주적인 국가라 할지라도, 노동자들에 대한 군대 투입, 계엄 선포 등의 가능성을 보장하는 허점이나 유보 조항이 없는 헌법은 존재하지 않는다."(『프롤레타리아 혁명과 배신자 카우츠키』) 이 개헌안은 계엄 통제 강화라는 제한적 방어에 머물며, 계엄을 가능하게 하는 계급지배 구조 자체를 문제 삼지 않는다.
2.2. 87년 체제의 반민주적 기원
1987년 헌정체제는 노동자대투쟁이라는 대중적 폭발과 군부 파쇼 세력 간의 불완전한 타협의 산물이었다. 노동자들의 생존권 투쟁과 민주화 요구는 6월 항쟁을 통해 분출됐으나, 노태우의 6·29 선언이라는 타협으로 수렴되면서 군부 파시즘 체제의 핵심 요소는 청산되지 않았다. 국가보안법은 잔존했고,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은 대민통제 기제로 재편되었다.
87년 체제는 부르주아 민주주의조차 완성되지 못한 기형적 구조다. 파시즘과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적대적 균형을 이루는 이 체제에서, 개헌은 단 한 번도 성공하지 못했다(Uprising(반란), 2025). 39년간의 실패는 우연이 아니라 구조적 필연이다.
2.3. 개헌안 내용의 제한성
개헌안은 세 가지 내용으로 압축된다: (1) 계엄 통제 절차 강화, (2) 민주화 운동 상징의 헌법 명문화, (3) 지역균형발전 국가 책무. 이 세 가지 모두 자본의 지배 구조를 건드리지 않는다.
- 반제 의제의 완전한 부재: 주한미군, 한미동맹, 전작권 문제는 한 줄도 언급되지 않았다. 한국의 헌법은 미군정의 유산 위에 세워졌으며, 그 의존성은 현재까지 지속된다.
- 반독점 의제의 부재: 재벌 해체, 경제민주화의 실질적 장치(순환출자 금지, 분리공시제, 지주회사 규제 실효화 등)는 전무하다.
- 노동권의 부재: 노동3권 강화, 비정규직 차별 금지, 플랫폼 노동자 보호, 파업권 실질 보장은 포함되지 않았다. KG 데이터에 따르면, 현재 한국 플랫폼 노동자는 헌법상 단결권조차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 분단 체제의 무비판적 답습: '영토' 조항(제3조)은 북측을 포함한 한반도 전체를 규정하지만, 통일이나 대북 평화 체제에 대한 내용은 전무하다. 개헌안은 남측만의 제도 개혁으로 스스로를 가둔다.
3. 정치 세력 분석
3.1. 국민의힘: 내용 반대 불가능 → 절차 무력화
국민의힘의 전술은 명백하다. 계엄 통제 강화와 5·18 정신 수록에 대해 내용적 반대 논리를 구성하는 것은 정치적 자살이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정략적 개헌' 프레임이다. 장동혁 대표는 "연임용 빌드업 개헌"이라는 수사로, 개헌의 필요성 자체를 이재명 대통령의 사적 정치 전략으로 환원시킨다.
이 전술의 계급적 의미는 분명하다. 국민의힘은 12·3 비상계엄을 일으킨 윤석열 정권의 후계 정당으로서, 계엄 통제 강화가 곧 자신들의 정치적 기원에 대한 제도적 응징이라는 점을 정확히 인식하고 있다. 개헌에 찬성하는 것은 12·3 계엄에 대한 자기 부정이다. 그들은 내용에 반대할 수 없기 때문에, 절차 자체를 무력화하는 길을 택했다. 이것은 87년 체제에서 의회제의 근본적 부패를 보여준다.
3.2. 민주당과 이재명: 개헌의 대선 도구화
이재명 대통령은 대선 후보 시절 '4년 중임제·결선투표제 도입'을 개헌 의제로 제시했다(2025년, 한겨레 보도). 이번 개헌안은 그 야심찬 구상과 달리 대폭 축소된 내용이다. 우원식 의장이 "꼭 필요하면서도 사회적 동의가 가장 넓은 내용만을 담았다"고 한 것은, 권력구조 개편을 배제하고 최소 합의만으로 개헌의 문을 열겠다는 전략이다.
그러나 이 최소주의조차 국민의힘의 보이콧 앞에 무너졌다. 민주당의 개헌 전략은 근본적 모순에 직면한다: 개헌이 정쟁의 대상이라고 부정하면서도, 개헌을 가능하게 하는 유일한 길은 국민의힘 의원들의 '양심 투표'라는 정치적 돌파구뿐이다. 법과 제도의 문제로 제시되는 개헌이, 실제로는 의회 내 정치적 역학에 완전히 종속되어 있다.
3.3. 진보정당의 역할
진보당과 사회민주당은 개헌안 공동 발의에 참여했으나, 그들의 독자적 요구(노동권 강화, 사회권 명문화 등)는 개헌안에 거의 반영되지 않았다. 이들 정당은 민주당 주도의 개헌 담론에 편입됨으로써 개헌 국면에서 독자적 계급 정치를 구축할 기회를 상실했다. 진보당의 개헌특위가 2026-2028 단계적 로드맵을 제시했다고 하나(KG 데이터), 이번 개헌안이 무산되면서 그 로드맵 자체가 공중 분해됐다.
4. 제도 불가능성 테제: 개헌 무산이 증명하는 것
4.1. 87년 체제의 제도적 막다름
계엄 통제 강화라는 최소한의 방어적 개헌조차 불가능하다는 사실은, 87년 체제가 개혁의 통로가 아니라 보수의 방파제로서 기능하고 있음을 입증한다. 1987년 노동자대투쟁의 에너지가 군부 파쇼 세력과의 타협으로 봉쇄된 그 순간부터, 이 체제는 근본적 변혁을 구조적으로 차단하도록 설계되었다.
마르크스는 이미 1875년 고타 강령 비판에서 "저속한 민주주의조차 부르주아 사회의 마지막 국가 형태인 민주공화국에서 계급투쟁이 최종적으로 결판날 것임을 의심하지 않는다"고 썼다. 한국의 87년 체제는 저속한 민주주의의 이 통찰마저 비웃는다. 계급투쟁을 '결판'내기는커녕, 계엄이라는 반민주적 폭력의 재발을 막는 최소한의 장치조차 봉쇄하는 체제다.
4.2. 보나파르트주의적 계기
12·3 비상계엄은 한국 매판-독점자본주의 체제에 내재된 보나파르트주의적 계기다. 마르크스가 지적했듯, 보나파르트주의는 "도시에서는 고도로 발전했지만 농촌 소농에 수적으로 열세인 노동계급이 자본가 계급, 소부르주아지, 군대에 의해 결정적 혁명 투쟁에서 패배한 국가에서 필요한 국가 형태"다(1865년 엥겔스에 보낸 편지). 87년 체제가 노동계급의 혁명적 가능성을 봉쇄한 대가로 남긴 것은, 군부-검찰-재벌로 이어지는 권위주의적 국가 기구의 잔존이다. 윤석열의 계엄은 이 기구의 논리적 귀결이었다.
이런 구조에서 개헌을 통한 계엄 통제 강화는, 결과를 낳은 원인(국가 기구의 계급적 성격)은 그대로 둔 채 결과만 차단하려는 시도다. 이 모순은 국민의힘의 보이콧이라는 형태로 폭발했다.
4.3. 제도 내 개혁의 근본적 한계
매판-독점자본주의 체제에서 헌법은 계급지배의 법적 형식이다. 이 체제에서 제도 내 개혁은 처음부터 배제된 것이 아니라, 시도되었다가 봉쇄되는 순환을 통해 지배의 정당성을 재생산한다. 개헌 무산은 이 순환의 한 장면이다. 민주당은 개헌 시도를 통해 '우리는 체제 내에서 개혁을 시도했다'는 도덕적 자원을 축적하고, 국민의힘은 보이콧을 통해 '우리는 체제를 지켰다'는 보수적 정당성을 재확인한다. 이 순환에서 유일하게 배제되는 것은 노동계급의 독자적 정치다.
5. 북한(DPRK) 변수: 분단 체제와 남측 개혁의 구조적 한계
이번 개헌안은 한반도 분단과 통일 문제를 완전히 침묵한다. 헌법 제3조(영토)는 개정 대상이 아니었고, 남북관계나 평화 체제에 대한 규정은 포함되지 않았다. 이 침묵은 우연이 아니다. 남측의 어떤 제도 개혁도 분단 구조를 외면할 때, 그것은 '반쪽 개혁'의 한계를 넘을 수 없다.
북한은 2026년 3월 최고인민회의 제15기 제1차 회의를 통해 헌법을 개정했다(MBC 2026년 5월 6일 보도, 이정철 서울대 교수 분석). '조국통일' 관련 표현은 삭제되고 영토 조항이 신설되었다(군사분계선 이북 지역을 영토로 규정). '적대적 두 국가'라는 표현은 헌법에 직접 명시되지 않았으나, 정책적 방침으로 유지되고 있다.
이 남북의 동시적 헌법 개정은 분단 체제의 고착화를 보여준다. 남측은 통일을 말하지 않은 채 '민주주의 확장'을, 북측은 민족 개념을 삭제한 채 '국가적 자주성 강화'를 추구한다. 양측 모두 분단 체제 내에서의 자체적 안정화를 추구하는 형국이다.
그러나 북한의 두 국가론이 남측의 매판-독점자본주의와 근본적 차이를 가지는 지점은 분명히 해야 한다. 북한은 반제국주의적 수령제 국가자본주의로서, 미국 주도의 제국주의 질서에 포섭되지 않은 유일한 한반도 정권이다. 이번 남측 개헌안은 반제 의제를 완전히 배제했기에, 분단의 제국주의적 기원을 은폐한다.
분단 체제 내에서의 남측 제도 개혁 시도는 이렇게 구조적 한계에 직면한다: 통일이나 대북 관계를 외면한 개헌은 결국 냉전-분단-반공의 구조적 토대 위에서 이루어질 수밖에 없고, 그 토대는 개헌 자체의 범위를 미리 제한한다.
6. 무산 이후 전술 제안: 반제·반독점 전환의 계기로
6.1. 제도 불가능성의 대중적 폭로
개헌 무산을 단순한 '정치 실패'가 아니라 87년 체제의 구조적 막다름으로 설명하는 선전전이 필요하다. 핵심 메시지는 다음과 같다:
"계엄을 다시 막자는 개헌마저 막혔다. 체제가 스스로를 개혁할 수 없다."
이 메시지는 개헌 무산에 대한 분노를 민주당의 '다음 기회' 담론으로 수렴시키지 않고, 체제 자체에 대한 질문으로 전환한다.
6.2. 87년 체제의 정당성 위기로의 확장
개헌 무산은 87년 체제가 더 이상 어떤 개혁도 생산할 수 없는 소진된 체제임을 드러냈다. 이 체제는 39년간 단 한 번의 개헌도 성공시키지 못했다. 그 기간 동안 재벌의 경제력 집중은 심화되었고, 노동의 불안정성은 확대되었으며, 한미동맹은 더욱 군사화되었다.
이 현실을 대중적으로 연결하는 것이 핵심이다: "개헌이 안 되는 나라, 집값은 오르고 일자리는 불안하고 전쟁 위기는 커진다." 제도 정치의 무능과 민중의 삶의 불안정성을 하나의 구조적 설명으로 묶어야 한다.
6.3. 독자적 헌법 구상의 필요성
우리 진영은 부르주아 정당들의 '개헌 대 타협'에 편입되지 않고, 독자적 헌법 구상을 제기해야 한다. 구체적인 방향은:
- 반제 헌법: 주한미군 철수, 한미동맹 해체, 전작권 환수, 한반도 평화협정 체결을 헌법에 명시
- 반독점 헌법: 재벌 해체, 재벌 총수 일가의 소유-지배 분리, 노동자 경영 참여 보장
- 노동 헌법: 노동3권의 실질적 보장, 노동자 정치 활동의 전면적 허용, 파업 중 대체 노동 금지
- 평화 헌법: 남북 평화 체제, 단계적 통일 로드맵, 북측 노동계급과의 연대 원칙
이 구상이 당장 실현 가능하지 않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제도 내 개혁의 막다름이 대중에게 분명해진 지금, 독자적 헌법 구상은 비판의 무기이자 대안의 준거점으로 기능한다.
6.4. 구체적 선전 구호
- "계엄을 막는 개헌도 못 하는 나라 ─ 체제가 답이 아니다"
- "87년 체제 39년, 개헌은 0번, 재벌은 10배"
- "국민의힘이 개헌을 막는다? 민주당은 반대할 내용을 넣지도 않았다"
- "반제·반독점 헌정 전환 ─ 개헌을 넘어 제헌으로"
- "미군·재벌·국보법 ─ 이것을 건드리지 않는 개헌은 개헌이 아니다"
6.5. 조직적 과제
개헌 무산 국면은 일시적 뉴스로 소비되어서는 안 된다. 다음의 조직적 과제가 시급하다:
- 개헌 무산을 계기로 87년 체제 총비판에 관한 대중 교양 자료 제작 및 배포
- 노동조합·농민조직·청년단체에서의 개헌 무산 토론회 조직
- 반제·반독점 헌법 구상을 구체적 정책 언어로 번역한 선전물 제작
- 5월 8일 재표결 이후에도 지속적인 후속 분석과 논평 제공
7. 결론: 개헌은 반제·반독점 투쟁의 계기로 전환되어야 한다
이번 개헌 무산은 우연적 사건이 아니다. 매판-독점자본주의의 헌정 질서가 어떤 근본적 개혁도 구조적으로 봉쇄하고 있음을 입증한, 체제의 자기 폭로다. 국민의힘의 보이콧은 이 폭로의 집행자였을 뿐, 원인은 더 깊다.
우리의 과제는 개헌 무산에 대한 분노를 민주당의 '다음 기회' 담론에 회수당하지 않고, 반제·반독점 투쟁의 계기로 전환하는 것이다. 제도 내 통로가 막혔다는 사실은, 제도 외부에서의 계급적 동원과 조직화가 유일한 길임을 말해준다.
87년 체제는 죽었다. 이제 그 시체를 치우고, 노동계급의 헌법을 상상할 시간이다.
작성일: 2026년 5월 7일 참고자료: 우원식 국회의장 X(@wonsikw) 게시물(2026.05.04-05.07), 머니투데이·연합뉴스·한겨레·프레시안·경향신문·MBC 2026년 5월 보도, 이정철 서울대 교수 북한 헌법 분석(통일부 간담회 2026.05.06), 레닌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배신자 카우츠키』(1918), 마르크스·엥겔스 서신(1865), 마르크스 『고타 강령 비판』(1875), Uprising(반란) (2025) 한국 분석, 볼셰비키그룹(2017) 분석, 민주주의와노동연구소·KG 데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