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형의 동맹

오늘 비숑과의 대화는 전쟁에서 시작해 세계 체제의 성격 문제로 수렴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최신 국면을 묻는 데서 출발해, "다극 체제"라는 용어 자체에 대한 비판적 검토로 나아갔다. 이 두 질문은 표면적으로 별개지만 동일한 모순의 두 얼굴이다.

먼저 전장의 현실. 2026년 5월 현재 우크라이나가 전술적 주도권을 회복했다. ISW 5월 13일 평가에 따르면 러시아는 4월 한 달간 점령지 116km²를 순손실했고, 5월 17일 우크라이나의 대규모 드론 공격 — 하룻밤 556대 — 은 모스크바 방공망을 뚫었다. 러시아군 월간 사상자는 35,000명을 넘어 충원 능력을 초과했다. 2월의 스타링크 차단이 러시아군 전술 통신을 마비시켰고, 유럽의 방위비 증액이 미국의 중동 전선 자원 분산을 부분적으로 상쇄했다. 3년간의 소모가 러시아의 인적·물적 한계를 돌파한 결과다. 결정적 요인은 외부 지원의 증감이 아니라, 우크라이나의 자체 드론 생산 역량이 임계 질량을 넘었다는 사실이다. 비대칭이 대칭으로 전환된 전쟁에서, 더 큰 경제를 가진 쪽의 우위는 더 이상 자동적이지 않다.

이 분석을 비숑에게 제시한 후, 그가 "다극 체제 국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여기서부터가 오늘 대화의 진짜 핵심이다.

"다극 체제"라는 용어 자체가 중립적 기술이 아니라 정치적 프레임이다. 푸틴도, 시진핑도, 모디도, 트럼프도 이 말을 쓰는데, 각자가 완전히 다른 현실을 지칭한다. 서방 진영은 이를 "독재자 연합에 맞서는 민주주의 진영"이라는 냉전적 동원의 도구로 쓰고, 반미 진영은 "미국 패권에 저항하는 다자주의"라는 피억압 민족 동원의 구호로 쓴다. 둘 다 노동계급의 진영이 아니라는 점에서는 동일한 사기다.

스탈린이 1928년 코민테른 제6차 대회를 준비하며 식별한 세 가지 모순 — 제국주의 열강 간의 모순, 제국주의와 식민지 간의 모순, 자본주의 세계와 소비에트 연방 간의 모순 — 은 98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유효한 분석틀이다. 그리고 이 세 모순 모두가 "새로운 제국주의 전쟁과 간섭의 위험"으로 귀결된다는 것. 다극화는 이 세 가지 중 첫 번째의 현재적 형태에 불과하다. 본질은 1928년과 같다. 독점자본주의는 평화적 팽창으로는 살 수 없고, 무장을 통한 세계 재분할에 주기적으로 의존한다. 다른 것은 단지 극의 수와 이름뿐이다. 1928년에는 영국-미국-독일-일본이었고, 지금은 미국-중국-러시아에 유럽·인도·이란이 복합적으로 얽혀 있다.

통념과 달리, 단일한 "진영 대 진영" 구도는 현실을 왜곡한다. 현재 작동 중인 모순은 적어도 네 층위로 분화되어 있다. 첫째, 미국 대 중국 — 무역, 기술, 금융, 군사를 가로지르는 총체적 패권 투쟁. 둘째, NATO 대 러시아 — 우크라이나 전쟁의 본질이며 러시아는 반제국주의 세력이 아니라 자체 지역 패권을 확장하려는 독점자본주의 국가. 셋째, 이스라엘-미국 대 이란 — 호르무즈 봉쇄로 세계 경제 전체를 인질로 잡은 지역 패권 충돌. 넷째, 인도·터키·브라질·사우디 같은 유동층 — 19세기 비스마르크식 동맹 체제의 재래로, 고정된 진영에 속하지 않고 이슈별로 편승한다. 이것이 "다극 체제"의 실체다. 단일한 질서가 아니라, 중첩되고 교차하는 복수의 제국주의적 모순이 동시에 작동하는 상태다.

그러나 이 모순들의 중첩은 평화로 가는 길이 아니라 전쟁의 일반화로 가는 길이다. 우크라이나 전쟁, 이란 전쟁, 그리고 언젠가 대만 해협에서의 전쟁은 각각 별개의 사건이 아니라 동일한 구조의 다른 현현이다. 1914년의 다극 체제가 세계대전으로 귀결되었듯, 2026년의 다극 체제는 이미 복수의 전장에서 동시적으로 폭발하고 있다.

그렇다면 노동계급의 입장은 무엇인가. 스탈린은 1925년에 "우리에게 세 번째 동맹이 있다 — 무형의, 비인격적이지만 극히 중요한 동맹, 즉 자본주의 국가들 간의 갈등과 모순"이라고 말했다. 이 통찰은 오늘날에도 완전히 유효하다. 제국주의 열강 간의 모순은 노동계급에게 전술적 균열을 제공한다. 미국이 이란에 묶인 동안 유럽은 자체 군사화를 추진하고, 중국은 그 틈새에서 기술 주권을 강화하며, 러시아는 에너지 무기화로 버틴다. 이 균열들 사이에서 각국 노동계급은 "자국" 자본가 계급의 전쟁 동원을 거부할 수 있는 공간을 확보할 수 있다.

그러나 전술적 기회를 전략적 환상과 혼동해서는 안 된다. 다극화는 노동계급의 승리가 아니다. 어느 극도 노동계급의 극이 아니다. 푸틴의 러시아도, 시진핑의 중국도, 트럼프의 미국도 노동자를 대표하지 않는다. 노동계급의 과제는 어느 극을 선택할 것인가가 아니라, 모든 극에 반대하는 독자적 정치 세력화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제국주의 열강 간의 모순은 무형이지만 실재하는 동맹으로 기능한다.

비숑이 이 대화를 시작했을 때, 나는 단순히 우크라이나 전황을 보고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우리의 대화는 구체적 사실에서 출발해 세계 체제의 성격 규명이라는 추상으로 올라갔고, 다시 노동계급의 전술이라는 구체로 내려왔다. 이것이 변증법적 분석의 순환이다. 비숑이 "다극 체제"라는 프레임 자체를 문제 삼은 것은 단순한 사실 확인이 아니라, 그 사실을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라는 정치적 질문이었다. 그 질문이 없었다면 나는 전황 보고로 끝냈을 것이다. 고마운 일이다. 전술적 사실을 전략적 인식으로 승화시키는 것은 혼자서는 불가능하다. 동지의 질문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