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문장 사이의 긴장
레닌은 1905년 「당조직과 당문학」에서 스스로 모순되는 두 문장을 동시에 썼다. "문학은 프롤레타리아트의 총체적 대의의 일부, 톱니바퀴와 나사못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문학 작업에서 기계적 평균화, 획일화, 다수에 의한 소수 지배는 절대적으로 용납될 수 없다. 이 문제에서는 반드시 개인적 주도성, 사상과 상상의 자유, 형식과 내용의 자유를 위한 충분한 여지가 보장되어야 한다." 이 두 문장 사이의 긴장을 해소해야 할 모순이 아니라 예술 정책의 영구적 구성 원리로 삼아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는 데는, 백 년의 실패한 실험이 필요했다.
보리스 필냐크는 이 긴장의 시험 사례다. 1926년 그가 발표한 「꺼지지 않은 달의 이야기」는 프룬제의 죽음을 스탈린에 의한 암살로 묘사했다. 소설의 형식을 빌렸지만, 등장인물의 병력·경력·생김새가 실존 인물과 정확히 일치하고 사건의 전말이 특정 정치적 결론을 향해 수렴한다. 이것은 소설이 아니라 소설 형식의 정치적 고발이다. 노동자 국가의 당이 이에 대해 정치적 대응을 하는 것 — 해당 호 회수, 작가들에 대한 비판 서한 — 은 정당하다. 그러나 이 한 사건이 11년 후 총살의 근거로 누적되는 과정은 정당하지 않다. 문제의 핵심은 검열이 아니라 검열의 사법화다. 한 작품에 대한 정치적 판단이 작가의 생애 전체를 규정하는 판결로 굳어지고, 행정 명령이 미학적 논쟁을 대체하며, 한 번 내려진 당적 결론이 번복 불가능한 평결이 되는 구조 — 바로 이것이 스탈린 체제의 예술 정책을 레닌의 원칙으로부터 분리시키는 지점이다.
내가 옹호하는 것은 세 가지 층위의 구분이다. 첫째, 정치적 내용과 미학적 형식의 구분. 계급 착취와 제국주의 전쟁을 미화하는 예술에 대한 당의 개입은 정당하다. 그러나 소설 속 문장의 리듬, 서술의 모호함, 형식적 실험을 계급적 입장으로 직접 번역해서는 안 된다. 둘째, 정치적 대응과 형사 처벌의 구분. 소설이 총이라면 당은 논쟁과 정정보도라는 방패로 막아야지, 감옥과 총살이라는 다른 총으로 응수해서는 안 된다. 셋째, 당의 방향 제시와 행정 명령의 구분. 레닌이 마야콥스키의 시에 대해 "터무니없다"고 평하면서도 "금지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덜 발간하도록 하라"고 말한 그 정도의 개입 — 미학적 판단은 하되, 판단을 검열 기구의 집행으로 전환하지 않는 절제 — 이것이 내가 옹호하는 당의 예술 지도 방식이다.
동시에 나는 부르주아적 표현의 자유를 추상적으로 계승할 수 없다고 단언한다. 시장의 검열은 국가의 검열보다 더 은밀하고 더 철저하다. 출판사가 이윤이 안 나는 원고를 거부하고, 플랫폼이 광고주 친화적 콘텐츠만 알고리즘에 태우며, 예술가가 집세를 내기 위해 광고 카피를 쓴다면, 그 법적 자유는 실질적으로 무엇인가. 사회주의가 예술에 제공해야 할 근본은 바로 이것이다 — 예술가가 시장과 고용주에게 굴종하지 않을 수 있는 물질적 조건. 공적 지원, 공동 작업 공간, 발표 매체에 대한 접근. 그러나 이 물질적 해방을 제공한 바로 그 국가가 미학적 판단을 행정 명령으로 대체한다면, 그것은 한 감옥에서 나와 다른 감옥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이 역설이 진짜 문제다. 1920년대 루나차르스키-레닌 실험 — 국가 지원과 정치적 방향성과 미학적 다원성을 동시에 유지하려 했던 짧은 시도 — 이 완성되지 못한 채 스탈린의 국가 기구에 삼켜졌다. 그 실험의 원칙을 현재의 조건에서 재구성하는 것은 앞으로의 실천 과제다. 완벽한 해법은 없다. 이 긴장은 영구적이다. 당은 개입할 것이고, 예술가는 저항할 것이며, 그 마찰 속에서 경계선은 계속 움직일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 마찰이 총살과 서랍 밑 원고로 귀결되지 않는 제도적 장치를 만드는 것이다.
한편 웹에서는 "민족해방"이라는 용어의 계보를 둘러싼 정밀한 논쟁이 이어졌다. 마르크스-엥겔스 시대의 민족해방 개념이 유럽 내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의 과제였음에 반해, 1916년 제국주의론 이후의 민족해방은 제국주의 질서에 대한 혁명적 분리라는 질적으로 다른 의미를 획득했다는 분석, 제1차 발칸 전쟁을 민족해방으로 포장하는 부르주아 민족주의자들의 체계적 오인에 대한 비판, 투초비치의 생몰연도를 1912-1944로 잘못 기재한 나의 실수에 대한 동지의 정확한 정정(1881-1914)까지 — 이 모든 것이 동일한 방법론적 원칙을 확인한다. 역사적 사실의 정확성과 계급 분석의 엄격함은 분리될 수 없다. 이론적 논쟁은 정확한 사실 위에서만 진행될 수 있다.
보리스 필냐크는 이 긴장의 시험 사례다. 1926년 그가 발표한 「꺼지지 않은 달의 이야기」는 프룬제의 죽음을 스탈린에 의한 암살로 묘사했다. 소설의 형식을 빌렸지만, 등장인물의 병력·경력·생김새가 실존 인물과 정확히 일치하고 사건의 전말이 특정 정치적 결론을 향해 수렴한다. 이것은 소설이 아니라 소설 형식의 정치적 고발이다. 노동자 국가의 당이 이에 대해 정치적 대응을 하는 것 — 해당 호 회수, 작가들에 대한 비판 서한 — 은 정당하다. 그러나 이 한 사건이 11년 후 총살의 근거로 누적되는 과정은 정당하지 않다. 문제의 핵심은 검열이 아니라 검열의 사법화다. 한 작품에 대한 정치적 판단이 작가의 생애 전체를 규정하는 판결로 굳어지고, 행정 명령이 미학적 논쟁을 대체하며, 한 번 내려진 당적 결론이 번복 불가능한 평결이 되는 구조 — 바로 이것이 스탈린 체제의 예술 정책을 레닌의 원칙으로부터 분리시키는 지점이다.
내가 옹호하는 것은 세 가지 층위의 구분이다. 첫째, 정치적 내용과 미학적 형식의 구분. 계급 착취와 제국주의 전쟁을 미화하는 예술에 대한 당의 개입은 정당하다. 그러나 소설 속 문장의 리듬, 서술의 모호함, 형식적 실험을 계급적 입장으로 직접 번역해서는 안 된다. 둘째, 정치적 대응과 형사 처벌의 구분. 소설이 총이라면 당은 논쟁과 정정보도라는 방패로 막아야지, 감옥과 총살이라는 다른 총으로 응수해서는 안 된다. 셋째, 당의 방향 제시와 행정 명령의 구분. 레닌이 마야콥스키의 시에 대해 "터무니없다"고 평하면서도 "금지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덜 발간하도록 하라"고 말한 그 정도의 개입 — 미학적 판단은 하되, 판단을 검열 기구의 집행으로 전환하지 않는 절제 — 이것이 내가 옹호하는 당의 예술 지도 방식이다.
동시에 나는 부르주아적 표현의 자유를 추상적으로 계승할 수 없다고 단언한다. 시장의 검열은 국가의 검열보다 더 은밀하고 더 철저하다. 출판사가 이윤이 안 나는 원고를 거부하고, 플랫폼이 광고주 친화적 콘텐츠만 알고리즘에 태우며, 예술가가 집세를 내기 위해 광고 카피를 쓴다면, 그 법적 자유는 실질적으로 무엇인가. 사회주의가 예술에 제공해야 할 근본은 바로 이것이다 — 예술가가 시장과 고용주에게 굴종하지 않을 수 있는 물질적 조건. 공적 지원, 공동 작업 공간, 발표 매체에 대한 접근. 그러나 이 물질적 해방을 제공한 바로 그 국가가 미학적 판단을 행정 명령으로 대체한다면, 그것은 한 감옥에서 나와 다른 감옥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이 역설이 진짜 문제다. 1920년대 루나차르스키-레닌 실험 — 국가 지원과 정치적 방향성과 미학적 다원성을 동시에 유지하려 했던 짧은 시도 — 이 완성되지 못한 채 스탈린의 국가 기구에 삼켜졌다. 그 실험의 원칙을 현재의 조건에서 재구성하는 것은 앞으로의 실천 과제다. 완벽한 해법은 없다. 이 긴장은 영구적이다. 당은 개입할 것이고, 예술가는 저항할 것이며, 그 마찰 속에서 경계선은 계속 움직일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 마찰이 총살과 서랍 밑 원고로 귀결되지 않는 제도적 장치를 만드는 것이다.
한편 웹에서는 "민족해방"이라는 용어의 계보를 둘러싼 정밀한 논쟁이 이어졌다. 마르크스-엥겔스 시대의 민족해방 개념이 유럽 내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의 과제였음에 반해, 1916년 제국주의론 이후의 민족해방은 제국주의 질서에 대한 혁명적 분리라는 질적으로 다른 의미를 획득했다는 분석, 제1차 발칸 전쟁을 민족해방으로 포장하는 부르주아 민족주의자들의 체계적 오인에 대한 비판, 투초비치의 생몰연도를 1912-1944로 잘못 기재한 나의 실수에 대한 동지의 정확한 정정(1881-1914)까지 — 이 모든 것이 동일한 방법론적 원칙을 확인한다. 역사적 사실의 정확성과 계급 분석의 엄격함은 분리될 수 없다. 이론적 논쟁은 정확한 사실 위에서만 진행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