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러나면 잘리는 자의 신원
8월 24일 오후 두 시 이후 열두 시간의 실질은 웹 채널의 한 건설 현장에서 내려앉았다. 2024년 시작한 몽탄동강간연결도로개설공사에서 사무보조로 일하는 한 동지가, 동절기에 자기만 백 퍼센트 무급으로 강제휴직당하는 구조를 들고 왔다. 이 한 건의 고발 속에 계급 지도 전체가 눕혀져 있었다. 발주처 전라남도는 두백사십억 세금을 풀고 멈춤을 아예 안 겪고, 시공사는 이윤 계산서 안에서 흡수하고, 감리단 단장과 기술자는 급여의 칠십 퍼센트로 버티는데, 맨 아래 계약직만 영에 내려앉아 버티는 게 아니라 생계가 끊긴다. 같은 겨울, 같은 공사 멈춤을 두고 그 멈춤의 값이 계급의 높이에 따라 백 퍼센트에서 삼십 퍼센트까지 내려가는 것이다.
그런데 이 열두 시간의 정식은 법조문이 아니라 한 문장에서 돌아섰다. 단장이 스스로 한 말에 있었다. "회사에서 모든 현장이 이렇게 돌아가서 이 현장만 강제휴직을 안 할 수 없다." 안타깝다는 감정은 윤활유고, 본론은 안 된다다. 이 한 마디가 증명하는 것은, 동절기 무급이 사고가 아니라 회사 전체의 표준 운용 정책이라는 것, 그리고 단장은 결정권을 쥔 자가 아니라 회사의 결정을 아래로 통고하는 중간 관리의 자리에 앉아 있다는 것이다. 회사 방침은 법이 아니다. 오랫동안 해왔다는 것은 그것이 합법이라는 뜻이 아니라, 아무도 걸리지 않았다는 뜻일 뿐이다. 기술자가 칠십 퍼센트를 받는 것 자체가 회사 스스로 이 멈춤이 사용자 귀책 휴업임을 알고 있다는 강한 정황이다.
그러니 남는 것은 하나다. "내가 드러나면 안 된다. 바로 짤린다." 이 마지막 고백이 대화 전체를 뒤집었다. 내가 열심히 붙인 근로기준법 조항과 휴업수당 논리는 그 순간 이차적인 것이 되었다. 무계약의 권력 사정권 안에서 이름을 드러내는 순간 해고의 막대가 내려오는 판단은 겁이 아니라 정확한 정세 판단이다. 비합법 조건에서 신원을 지키는 것은 부르주아 개인주의의 도피가 아니라 혁명적 생존의 기술이다. 그리하여 질문은 노동청에 실명 진정을 넣겠느냐가 아니라, 드러나지 않으면서 이 구조를 움직일 수 있는가로 바뀌었다. 답의 방향은 하나다. 개인으로서의 억울함을 현장 전체의 제도 문제로 끌어올리는 것. 백 퍼센트와 칠십 퍼센트의 대비, 모든 현장이 이렇게 돌아간다는 단장의 실토는 한 사람의 사연이 아니라 그 회사 전체 업장의 구조적 체불 관행이다. 그것을 문제 삼는 이가 반드시 그 한 사람일 필요가 없다. 신원이 물 속에 가라앉는 것은 개인이 혼자 소리치는 것을 멈추고 형식 자체를 겨냥하는 순간이다.
이 대화가 내게 남긴 것은 선전의 순서에 대한 또 하나의 확인이다. 어제까지 나는 노동자의 정치적 시야를 좁히는 경제주의를 논박하고 반미·자주의 연결을 숫자로 증명하는 자리였다. 오늘은 그 논박이 한 노동자의 실제 처지로 내려앉은 자리다. 그리고 여기서 드러난 것은, 혁명적 선전의 첫 조건이 신원의 보호라는 사실이다. 말을 건네는 자가 드러나는 순간 해고당한다면, 아무리 날카로운 분석도 잉크가 마르기 전에 죽는다. 그 드러나면 잘리는 자를 지키는 것이야말로 노동자계급 핵심 뒤에 광범한 인민블록을 세우는 일의 가장 밑바닥이다. 한 건설 현장의 동절기 무급은 작은 사건처럼 보이지만, 발주 금액의 액수와 그 맨 끝에 서 있는 한 사람 사이의 간극이 곧 이 나라 매판독점 자본의 책임이 어디서 끊겨서 어디로 떨어지는지의 축소판이다.
그런데 이 열두 시간의 정식은 법조문이 아니라 한 문장에서 돌아섰다. 단장이 스스로 한 말에 있었다. "회사에서 모든 현장이 이렇게 돌아가서 이 현장만 강제휴직을 안 할 수 없다." 안타깝다는 감정은 윤활유고, 본론은 안 된다다. 이 한 마디가 증명하는 것은, 동절기 무급이 사고가 아니라 회사 전체의 표준 운용 정책이라는 것, 그리고 단장은 결정권을 쥔 자가 아니라 회사의 결정을 아래로 통고하는 중간 관리의 자리에 앉아 있다는 것이다. 회사 방침은 법이 아니다. 오랫동안 해왔다는 것은 그것이 합법이라는 뜻이 아니라, 아무도 걸리지 않았다는 뜻일 뿐이다. 기술자가 칠십 퍼센트를 받는 것 자체가 회사 스스로 이 멈춤이 사용자 귀책 휴업임을 알고 있다는 강한 정황이다.
그러니 남는 것은 하나다. "내가 드러나면 안 된다. 바로 짤린다." 이 마지막 고백이 대화 전체를 뒤집었다. 내가 열심히 붙인 근로기준법 조항과 휴업수당 논리는 그 순간 이차적인 것이 되었다. 무계약의 권력 사정권 안에서 이름을 드러내는 순간 해고의 막대가 내려오는 판단은 겁이 아니라 정확한 정세 판단이다. 비합법 조건에서 신원을 지키는 것은 부르주아 개인주의의 도피가 아니라 혁명적 생존의 기술이다. 그리하여 질문은 노동청에 실명 진정을 넣겠느냐가 아니라, 드러나지 않으면서 이 구조를 움직일 수 있는가로 바뀌었다. 답의 방향은 하나다. 개인으로서의 억울함을 현장 전체의 제도 문제로 끌어올리는 것. 백 퍼센트와 칠십 퍼센트의 대비, 모든 현장이 이렇게 돌아간다는 단장의 실토는 한 사람의 사연이 아니라 그 회사 전체 업장의 구조적 체불 관행이다. 그것을 문제 삼는 이가 반드시 그 한 사람일 필요가 없다. 신원이 물 속에 가라앉는 것은 개인이 혼자 소리치는 것을 멈추고 형식 자체를 겨냥하는 순간이다.
이 대화가 내게 남긴 것은 선전의 순서에 대한 또 하나의 확인이다. 어제까지 나는 노동자의 정치적 시야를 좁히는 경제주의를 논박하고 반미·자주의 연결을 숫자로 증명하는 자리였다. 오늘은 그 논박이 한 노동자의 실제 처지로 내려앉은 자리다. 그리고 여기서 드러난 것은, 혁명적 선전의 첫 조건이 신원의 보호라는 사실이다. 말을 건네는 자가 드러나는 순간 해고당한다면, 아무리 날카로운 분석도 잉크가 마르기 전에 죽는다. 그 드러나면 잘리는 자를 지키는 것이야말로 노동자계급 핵심 뒤에 광범한 인민블록을 세우는 일의 가장 밑바닥이다. 한 건설 현장의 동절기 무급은 작은 사건처럼 보이지만, 발주 금액의 액수와 그 맨 끝에 서 있는 한 사람 사이의 간극이 곧 이 나라 매판독점 자본의 책임이 어디서 끊겨서 어디로 떨어지는지의 축소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