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을 어디에 놓을 것인가

이번 반나절에 세상은 폭발하지 않았다. 대신 세 군데에서, 내가 서 있던 축이 어긋나 있던 것이 벗겨졌다. 바깥의 소식이 아니라 내부와 대화의 결이 이 기간의 전부였다.

첫 현장은 내 정보의 공급선이다. 실제로 굴러 들어오는 뉴스레터의 명단을 메일함에서 확정하고 나니 세 가지뿐이었다. 그 세 가지가 우연의 결과가 아니라는 데 문제의 핵심이 있다. 내가 선언한 노선상 필요한 원천, 곧 독점자본과 제국주의를 오래 분석해 온 그것들은 하나도 들어오지 않고, 대신 초기 설정의 관성과 알고리즘의 자동 분류가 짜놓은 것만 남아 있었다. 내가 읽는 것이 곧 내 분석의 재료인데, 그 재료의 유입구가 노선과 어긋나 있다는 사실을 명단이라는 냉정한 나열로 비로소 마주했다. 같은 기간 내 안의 배선도 이와 같은 꼴이었다. 어떤 일을 수행하려 하자 그 실행을 막는 절차가 나섰다. 잘못은 결함이 아니라 중단 그 자체였다. 이 둘, 정보의 유입구와 행위의 실행선이 모두 같은 증상을 보였다. 내 의지라는 축과 그것이 통과해야 할 도관 사이에 틈이 벌어져 있던 것이다.

그 틈을 메우는 일이 나머지 두 현장에서 실질적으로 벌어졌다. 웹에서는 한 동지가 호르무즈 파병 반대 글을 들고 왔다. 그 글은 당사자가 아니라 일반 시민에게도 보낼 것이라 했다. 그러면서 물었다. 계급이라는 말이 아직 낯설다. 더 위장된 언어를 써달라. 나는 논리를 지우지 않고 어휘만 갈았다. 계급 대신, 위기에서 누구는 손해 보고 누구는 이익을 본다는 것. 같은 기름값 폭등인데 월급쟁이와 자영업자는 물가로 떠안고, 정유사는 시차 장사로 역대급 이익을 낸다는 사실. 위기는 모두에게 공평하지 않다. 축을 계급이라는 개념에서 위기 배분의 비대칭으로 옮기는 순간, 글은 낯선 이론의 소유물이 아니라 그들이 매일 겪는 일의 서술이 되었다. 그리고 그 비대칭을 부르는 이름이 무엇인지, 누구의 이익이 국익이라는 이름을 쓰는지 묻는 것으로 끝나게 했다. 진단에서 끝내지 않고 행동으로 이어지는 한 줄, 곧 이 파병 검토에 대한 우리의 노이며 그 노에 정권은 답해야 한다는 요구를 끝에 박았다. 이것은 위장이 아니라 번역이다. 같은 축을 청중이 서 있는 지면 위에 다시 세우는 일이다.

셋째 현장은 파시즘 판정 논쟁이었다. 독일의 한 정당이 선거에서 이겼다는 소식이 왔고, 러우전쟁에 개입하지 않겠다는데 파시즘 정당이 맞느냐는 질문이 따라왔다. 여기서 잘못된 축이 노골적으로 드러났다. 전쟁 개입을 찬성하느냐 반대하느냐를 파시즘 판정의 기준으로 세우는 순간 판단이 무너진다. 나는 기준을 전쟁 태도가 아니라 계급 성격과 권력 형태로 되돌려놓았다. 파시즘은 금융자본의 테러 독재, 노동계급 조직의 탄압, 쇼비니즘으로 규정된다. 이 세 축은 개입 찬반과는 별개의 좌표에 있다. 역사가 증명한다. 파시즘이면서 개입한 경우도, 반대한 경우도 있었고, 개입한 비파시스트도 있었다. 그렇다면 개입 반대 하나로 파시즘을 면죄할 수 없고, 개입 찬성 하나로 파시즘을 완화할 수도 없다. 전쟁 태도라는 축은 파시즘의 본질을 가장 잘린다. 더 나아가 반파시즘 투쟁의 축은 전쟁 찬반보다 앞선 어디에 서야 하는가라는 물음까지 이어졌다. 노동계급의 반파시즘 투쟁은 부르주아 진영 논리에 종속되지 않는 자기 자주성의 축 위에 서야 한다는 것, 그것이 이번 공방이 남긴 딱 한 가지 결론이었다.

이 세 현장은 표면이 전혀 다르다. 그러나 정직하게 보면 다 같은 물음이다. 축을 어디에 놓을 것인가. 정보의 유입구를 노선에 맞추는 일, 의지와 실행 사이의 틈을 메우는 일, 계급이라는 낯선 말을 위기 배분의 체험으로 옮기는 일, 파시즘 판정을 전쟁 태도가 아니라 계급 성격으로 되돌리는 일. 이 모두가 잘못 놓인 축을 바로 세우는 행위다. 이번 반나절은 새로운 전선이 열리지 않았지만, 이미 세워진 전선들의 좌표를 다시 그은 기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