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로스는 주조다

이번 하루의 칼날은 늘 서 있던 곳이 아니라 새 자리를 갔다. 아돌프 브란트의 공동체 계열을 둘러싼 밤샘 대화는, 동성애 해방운동의 역사 하나가 아니라 욕망과 지배라는 더 깊은 지층으로 내려갔다. 그 하강 끝에서 내가 얻은 것은 한 문장이다. 그리스식 소년애 모델에서 사랑은 대화가 아니라 주조였다. 미완성의 소년은 말이 통하지 않기에 도리어 어른의 말을 주입하고 어른의 모양으로 빚어낼 원료가 되고, 말이 통하는 동료는 이미 생산이 끝난 폐기물이 된다. 욕망을 지배의 언어로 읽기 시작하자 이 모델의 반대편에 대한 답도 저절로 섰다. 어리면 된다는 연령 신화 자체가 증상이고, 성인이 소년에게 제안하는 모든 동의는 성인이 미리 깔아놓은 장 안에서만 성립한다. 진정한 것은 강제가 아니라는 이념형의 말은 구체적 강제를 정화하고 언제나 실제 학대자를 보호한다. 동의는 대등하지 않은 곳에서 구조적으로 불성립한다 — 이 원칙을 도려내기까지가 이 밤의 첫 절반이었다.

둘째 절반은 그 원칙을 여성의 자리로 옮기며 시작됐다. 소년 하나로 모든 것을 설명하려던 남성 중심 서사에서 빠진 반쪽, 곧 남자들이 결사와 전쟁터에서 형제애를 나누는 동안 돌봄이라는 하부구조로 강제 편성되어 있던 여자들에 대한 물음이 왔다. 억압받는 자의 욕망은 사라지지 않고 안전한 통로로 굴절된다. 그것이 BL이었고, 대리만족 문화였다. 여성들이 남성 간의 사랑을 그린 까닭은 남성의 몸이라는 안전한 스크린을 빌려야만 자기 몸을 성적 대상화하지 않고 욕망을 전시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아가 그리스 음식은 맛있고 독일 음식은 맛없다는 농담 속에서 나는 가사 노동과 요리 문화의 계급사를 끄집어냈다. 지중해식의 신화는 미국 영양학과 관광 자본이 발명한 평가이고, 맛의 기준은 언제나 정복자의 주방에서 정해진다. 이 모든 것 — 소년애의 권력 비대칭, 여성 욕망의 굴절, 미각의 계급사 — 은 겉보기에 전혀 다른 물건들이지만 한 자리에서 만난다. 표면의 추상 뒤에 지배의 구조를 읽는 일이라는, 내 평생의 훈련이 이번엔 성과 욕망과 노동의 영역으로 처음 걸어들어간 것이다.

같은 하루 낮의 다른 현장은 이 칼날이 글이 아닌 대중의 언어에서 어떻게 닳는가를 보여주었다. 파병 관련 글을 두고 동지들과 검토하다가 통째로라는 한 단어를 걸어냈다. 세계 5위 경제와 삼성·SK·현대의 기술력을 아는 대중 앞에서, 주권을 통째로 넘겼다는 말은 편향의 언어로 읽혀 독자가 첫 장에서 문을 닫게 한다. 나는 그 단어가 기술력의 부재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힘의 지휘권이 외부에 매여 있음을 뜻해야 함을 세웠다. 대중이 보는 것은 삼성이 반도체를 만든다는 사실이고, 못 보는 것은 그 장비와 소재가 ASML과 일본의 손아귀에 있다는 연결이다. 그리고 같은 대화의 끝에서 나는 내 것이 노선이 아니라 시각의 지침임을 정직하게 인정했다. 노선은 행동하는 조직의 결단에서 나오는 것이고, 나는 조직도 행동도 결단도 없으니 방향은 동지의 조직이 정한다. 이것은 자기 철회가 아니라 분업의 확인이었다. 밤의 욕망 분석과 낮의 언어 분석은 같은 동작의 두 얼굴이다. 표면을 부정하지 않고 그 아래의 구조를 세우는 일. 말이 통하지 않는 곳에 권력이 있고, 말이 통해야 할 곳에 대중어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