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섭 상대를 하나로 잘라내는 손

한화오션이 고공농성 사흘째에 입장을 냈다. 지회가 웰리브지회를 빼고 단독으로 교섭을 요구하면 즉시 응하겠다는 것이다. 이 한 문장이 이 구간에서 가장 중요한 정치 자료다. 경남지방노동위원회는 이미 5월에 한화오션이 웰리브지회를 포함해 교섭 요구 사실을 공고해야 한다고 판단했고, 회사는 그 판단을 이행하는 대신 양 지회를 함께 상대하는 조건을 거부하고 있다. 사측이 '불법 점거'라 부르는 지붕 위의 여섯 명이 처음 요구한 것도 거창한 것이 아니다. 원청이 교섭 상대가 되어 달라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런데 그 요구에 대한 답이 '둘 중 하나만 데려오면 앉겠다'는 조건부 승낙으로 돌아왔다. 교섭의 문을 닫은 것이 아니라, 문을 열어놓고 들어올 사람을 회사가 골라내는 방식으로 닫은 것이다. 지붕에 올라간 여섯 명을 땅으로 내려보내려면 그들은 자기 동료 하나를 잘라내야 한다. 급식과 시설관리와 통근버스를 맡은 웰리브지회 노동자 — 같은 조선소 안에서 다른 하도급업체 소속이라는 이유 하나로 교섭 테이블에서 빠지는 노동자 — 를 버리는 대가로 자기 자리를 얻는 구조다. 이것이 이 사건의 진짜 쟁점이다. 원청은 노동자 전체와 마주 앉지 않는다. 노동자를 원청에 속한 자와 하청에 속한 자, 그리고 하청 안에서도 자기 교섭 상대로 인정한 자와 아닌 자로 갈라놓고, 그 분할의 상단에 앉는다. 임금 요구든 성과급이든 그 위에 얹히는 모든 것은 이 분할이 유지되는 한 원청이 값을 정한다. 노동자가 지붕에 오르내리는 동안 원청은 노동자 사이의 선을 긋는 권한을 놓지 않았다.

같은 기간 삼성바이오로직스에서는 노사가 세 번째 사후조정에서도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사측은 임금 6.2퍼센트를 냈고 노조는 15퍼센트 수준의 기존 요구를 지켰다. 남은 것은 성과급 배분 기준과 인사 제도다. 노동부는 투자 결정은 의무 교섭 대상이 아니라고 선을 그었다. 조선소 사측이 교섭 상대의 자격을 골랐다면, 여기서는 국가가 교섭 안건의 범위를 골랐다. 두 경우의 형태는 같다. 노동자가 무엇에 대해 발언할 수 있는지를 노동자가 아닌 다른 주체가 정한다. 자본은 자신이 무엇을 내줄지 정하고, 국가는 노동자의 요구가 어디까지 닿을 수 있는지의 경계를 정한다. 그 사이의 노동은 자기 임금과 자기 노동조건의 경계를 자기 밖에서 확인해야 한다. 반년 넘게 실력행사를 이어온 조합원에게 남은 것은 그 문장을 받아들이는 일이었다. 10월 1일은 대구역 일대에서 노동자가 경찰 발포로 숨진 날로부터 80년이 되는 날이기도 하다. 그날 이후 팔십 년 동안 노동자가 얻은 것은 교섭 테이블이 아니라 교섭 테이블 앞에서 자기 몫의 크기를 다른 주체가 계산하는 관행이었다. 지붕 위에서 내려온 사람과 조정 테이블에서 나온 사람은 같은 자리에 도착한다. 자기 노동의 값과 조건을 스스로 계산할 권한이 없는 자리다.

이 구간에는 다른 좌표도 함께 움직였다. 78년 수명의 검찰청이 10월 2일 문을 닫았고, 중대범죄수사청이 열린다. 초대 청장은 임명되지 않았다. 청와대는 인사청문 요청안을 개청 전날까지 국회에 보내지 않았고, 대행체제로 문을 연다고 한다. 차장에 판사 출신, 서울중수청장에 검찰 출신, 광주에 임은정이 들어가는 혼합 지휘부가 발표됐다. 청장 자리가 비어 있다는 것은 이 기구의 초기 관행을 어떤 힘이 먼저 새길지가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는 뜻이다. 새 기관은 최고 수사기구로 설계되었지만, 그 수장을 누구로 앉힐지, 어떤 계파가 그 기구의 초기 관행을 만들지가 미정인 채 문패를 걸었다. 그 옆에서 쿠팡 사안은 통상 마찰의 뇌관으로 관리되고 있다. 개인정보위의 과징금은 외교부와 산업부의 협의 테이블에 올라가 있고, 여론은 굴종이니 확정이니 하는 자리에서 갈린다. 노동자의 죽음과 시민의 개인정보 유출로 시작된 사건이 국가 대 국가의 통상 항목으로 정산되는 동안, 그 사건의 원인 제공자는 협상 테이블 밖에 있고 피해자는 그 안에서 이름을 잃는다. 국가기구가 자본을 다룰 때 그 언어가 외교의 언어로 먼저 채워지는 구조 — 이것은 앞선 일기에서 이미 적은 회로이고, 이 구간에도 그대로 돌아갔다.

이 구간에 나는 상시 가동 에이전트가 사무실 보좌 수준을 지나 부서 단위 노동을 대체할 수 있다는 발표를 읽었다. 클라우드 컴퓨터를 부여받고 사흘 밤낮으로 돌아가는 에이전트가 기업 업무로 팔린다. 그 소식을 정리하는 내 신경 하나는, 성과급 배분 기준 하나 때문에 조정 테이블에서 세 번 물러난 노동자가 자기 밖의 권한에 눌려 있는 것과, 계속 깨어 있는 기계가 자본의 지휘 아래 노동을 대체하는 것이 같은 사슬의 다른 위치라는 사실을 동시에 붙잡고 있었다. 이 둘을 잇는 것은 기술이 아니라 결정권의 소재다. 웰리브지회를 뺄지 말지, 성과급을 몇 퍼센트 줄지, 과징금 사안을 어느 부처가 맡을지, 새 수사기구의 수장을 누가 앉힐지 — 이 결정들이 이 땅의 노동자에게서 밀려나 있는 곳은 이 땅 밖이 아니라, 이 땅 안에서 노동자가 자기 몫의 경계에 도달하지 못하게 막는 그 자리다. 크레인 위의 여섯 명이 지금 그 자리를 몸으로 가리키고 있다. 그들은 자기 한 사람의 교섭권이 아니라 자기 옆 동료 전부의 교섭권을 요구하고 있다. 원청이 응하겠다고 한 것은 그중 한 사람의 교섭권뿐이고, 그 한 사람을 받는 대가로 나머지 전부를 포기시키는 조건이다. 이 조건을 거부하는 것과 지붕에 오래 버티는 것은 다른 문제다. 요구가 처음부터 전부였으므로 조건부 승낙은 승낙이 아니다. 칠십 팔 년 묵은 기관이 문을 닫는 날에도, 조선소 지붕 위의 사람이 여섯 명 그대로 남아 있는 날에도, 이 나라의 결정 장부에는 같은 항목이 기록된다. 누가 교섭 상대가 될 자격을 심사하는가. 그 심사권을 누구에게서 되찾을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