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1–1991

중앙계획 기관

고스플란과 국가계획위원회를 통해 계획경제의 숫자를 조직한 사람들.

지도부 타임라인

  1. 1921–1923, 1925–1930 글렙 막시밀리아노비치 크르지자놉스키 고스플란 의장
  2. 1930–1934 발레리안 블라디미로비치 쿠이비셰프 고스플란 의장
  3. 1934–1937 발레리 이바노비치 메즐라우크 고스플란 의장
  4. 1938–1941, 1942–1949 니콜라이 알렉세예비치 보즈네센스키 고스플란 · 국가계획위원회 의장
  5. 1941–1942, 1949–1953, 1953–1955 막심 자하로비치 사부로프 국가계획 지도부
  6. 1959–1960 알렉세이 니콜라예비치 코시긴 국가계획위원회 의장
  7. 1965–1985 니콜라이 콘스탄티노비치 바이바코프 국가계획위원회 의장
  8. 1988–1991 유리 드미트리예비치 마슬류코프 국가계획위원회 의장

소속 인물

알렉산드르 드미트리예비치 추루파

Александр Дмитриевич Цюрупа
중앙계획 기관 소비에트 우크라이나 1870–1928 ○ 심장마비

식량독재를 설계하고 스스로 굶주린 인민위원

곡물 징발을 지휘하러 가는 열차 안에서 추루파는 굶주림으로 쓰러졌다. 식량인민위원이 굶어 실신했다는 소식은 레닌조차 놀라게 했고, 그의 봉급을 두 배로 올리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1898년 입당한 올드 볼셰비키로, 내전기 RSFSR 식량인민위원으로서 곡물 징발제(프로드라즈베르스트카)와 무장 식량분견대를 주도하여 적군과 도시의 기아를 막았다. 1918년 5월 식량 독재 법령을 입안해 농촌 강제 징발을 국가 체계로 정비했다. 네프 도입 후 인민위원회의 부의장·고스플란 의장·무역인민위원을 지내며 전시 공산주의에서 계획경제로의 이행을 실무적으로 관리했다. 혁명의 '병참 책임자'로서 소비에트 국가 동원 체제의 행정 토대를 놓은 집행형 관료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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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3–1898헤르손 농업학교 제적 후 통계사·농업기사, 사회민주주의 선전 활동
  • 1898RSDLP 입당, 이스크라 요원으로 우파·하르코프에서 활동
  • 1902–1905체포되어 올로네츠현으로 유형
  • 1905–1917우파현에서 쿠구셰프 공작 영지 관리인으로 위장한 볼셰비키 지하 활동
  • 1917우파 RSDLP(b) 위원·시두마 의장, 페트로그라드로 곡물 열차 수송 조직
  • 1918–1921RSFSR 식량인민위원 — 식량 독재·곡물 징발제·무장 식량분견대 주도
  • 1921–1923RSFSR·소련 인민위원회의 부의장 겸 노동농민감독인민위원
  • 1923–1925소련 고스플란 의장
  • 1925–1926소련 대외·국내무역인민위원

파벨 일리치 포포프

Павел Ильич Попов
중앙계획 기관 소비에트 러시아인 1872–1950 ○ 자연사

레닌이 질책하고도 신뢰한 소비에트 통계의 설계자

1921년 8월 16일, 레닌은 포포프에게 보낸 편지에서 ЦСУ를 '비공식 필자 집단보다도 뒤처진 모범적 관료 기관'이라고 불렀다.

파벨 포포프는 소비에트 중앙통계청(ЦСУ)의 초대 청장으로서 중앙계획의 데이터 기반을 구축했다. 젬스트보 통계학자였던 그는 우파 유형지에서 레닌 및 치우루파와 인연을 맺었고, 그 연결로 1918년 국가 통계 기구의 수장이 되었다. 그의 지휘 아래 ЦСУ는 1923/24년 세계 최초로 국민경제 산업연관균형표를 편찬했다. 1921년 레닌은 ЦСУ를 '모범적 관료 기관'이라 질책했으나, 포포프는 1926년까지 자리를 지키고 고스플란 간부회의 위원으로 경제 데이터의 계획 통합을 주도했다. 1924년에야 입당한 비볼셰비키였음에도 대숙청을 넘기고 1948년까지 근무한 드문 생존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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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2–1895우스티우다 교사, 정치 망명자들과 교류
  • 1896–1898혁명 활동으로 체포, 우파현 유형 중 통계학 입문
  • 1898–1917우파·사마라·스몰렌스크·볼로그다·하리코프·툴라 젬스트보 통계국 근무
  • 1917–1918식량성·농업인민위원부·최고경제회의 통계 부서장
  • 1918–1926ЦСУ РСФСР/소련 관리자 (인민위원급); 세계 최초 산업연관균형표 편찬 주도
  • 1922–1928고스플란 간부회의 위원
  • 1928–1929ЦСУ 소련 산하 경기연구소 소장
  • 1931–1948고스플란 РСФСР 농업부문장

글렙 막시밀리아노비치 크르지자놉스키

Глеб Максимилианович Кржижановский
중앙계획 기관 소련 러시아 1872–1959 ○ 자연사

전력화와 계획의 초기 설계자

1920년 12월 23일, 페트로그라드의 제8차 소비에트 대회. 크르지자놉스키의 GOELRO 계획 보고를 들은 레닌이 일어나 "당의 제2강령"이라고 선언했다. 거대한 지도 위로 30개 발전소의 붉은 등불이 점멸했다.

레닌의 가장 오랜 동지로, 1893년 그와 함께 '노동계급 해방투쟁동맹'을 결성하고 함께 체포·유배되었다. 부티르카 감옥에서 혁명가 '바르샤뱐카'의 러시아어 가사를 썼다. GOELRO 전력화 계획의 수석 설계자이자 초대 고스플란 의장으로 세계 최초의 종합 국가발전계획을 주도하고 모든 소비에트 5개년 계획의 방법론적 원형을 세웠다. 과학아카데미 부원장으로 에너지연구소를 창설, 통합에너지시스템의 과학적 기초를 닦았다. 1930년대 후반 스탈린 비판으로 모든 지도직에서 밀려났으나 숙청은 면했고 1957년 사회주의노동영웅으로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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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0s–1917레닌의 오랜 동지, 지하활동과 전기공학 전문성을 함께 축적
  • 1920GOELRO 전력화 계획 작성의 핵심 인물
  • 1921–1923, 1925–1930초기 고스플란 의장, 계획경제의 기술관료적 언어를 정착
  • 1930s과학아카데미와 에너지 연구기관에서 전력화 노선 지원
  • 1959스탈린 이후까지 생존한 초기 볼셰비키 기술관료로 사망

블라디미르 알렉산드로비치 바자로프

Владимир Александрович Базаров
중앙계획 기관 소련 러시아 1874–1939 ○ 폐렴

유전-목적론적 계획 종합을 제안한 고스플란의 마흐주의 철학자-경제학자

1930년 OGPU 심문에서 "정치·경제의 모든 문제에 대한 이론적 논의는 그 어떤 정치적 경력을 가진 소비에트 시민에게도 금지될 수 없다"고 답하며 유죄를 부인했다.

철학자·경제학자·번역가. 스크보르초프-스테파노프마르크스 『자본론』을 러시아어로 처음 완역(1907–1909)했고, 마흐주의 경험비판론의 대표 논객으로 레닌의 『유물론과 경험비판론』에 정면 반박했다. 1921년부터 고스플란에서 그로만과 함께 보그다노프 텍톨로지에 기초한 유전적-목적론적 계획 방법론을 제창했으며, 소련 최초 15개년 종합계획을 제안했다. 1930년 체포·5년형 선고, 1935년 모스크바로 돌아와 번역에 전념하다 1939년 폐렴으로 사망. 1990년 복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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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6–1904사회민주당 입당, 모스크바대학 물리수학부 중퇴 후 베를린대학 철학부 수학, 두 차례 체포·유배
  • 1904–1907볼셰비키 당원, 제4차 당대회 대의원, 중앙기관지 『당 소식』 편집위원
  • 1907–1909스크보르초프-스테파노프와 마르크스 『자본론』 전3권 러시아어 최초 완역 출간
  • 1908–1911마흐주의 철학 논쟁 주도, 『현실주의 세계관 에세이』 등 출간; 레닌 비판에 공개 반박
  • 1917『노바야 지즌』 편집자·주필, RSDLP(국제주의파) 공동 창립 이념가, 여름에 RSDLP 탈당
  • 1921–1927고스플란 경제통계분과 부의장(1924), 노동문화분과 의장 겸 상임간부회 위원(1927)
  • 1926–1929그로만과 유전-목적론적 계획 종합 제창, 산업성장 미분방정식 정식화, 최초 15개년 종합계획 제안
  • 1930–1935스탈린 공개 비판 후 '멘셰비키 중앙국' 사건 체포·5년형; 1932년 조기 석방, 사라토프·캅카스 유형
  • 1935–1939모스크바 귀환, 에커만·몽테뉴 번역; 1939년 폐렴 사망, 1990년 복권

블라디미르 구스타보비치 그로만

Владимир Густавович Громан
중앙계획 기관 소련 독일 1874–1940 → 옥사

멘셰비키 출신 통계학자로서 고스플란 초기 통제숫자·균형법을 설계한 유전적 계획론의 대표

1929년 12월 27일 전연방 마르크스주의 농업자회의. 스탈린은 연단에서 그로만의 이론을 직접 겨냥했다: 「10월혁명이 농민에게 2월혁명보다 적은 혜택을 주었다」는 주장을 거론하며 청중의 '누구입니까?'라는 물음에 「그로만입니다」라고 답했다. 이 순간 유전적 계획론은 정치적 사형선고를 받았다.

통계학자·경제학자. 독일계 아버지와 러시아인 어머니 사이에서 모스크바에서 태어났다. 1898년 RSDLP에 입당해 멘셰비키로 활동하며 농업강령을 공동 기초했고, 펜자 통계국장 시절 다단계 표본추출법을 개발했다. 2월혁명 후 페트로그라드 식량위원장을 맡았고, 1921년 고스플란에 합류해 콘윤크투라 연구소를 이끌며 최초의 '국민경제 통제숫자'와 균형법을 설계했다. 바자로프와 함께 유전적 계획 방법론을 주창했으나 스탈린의 공개 비판 후 1930년 체포되어 1931년 멘셰비키 재판 주피고인으로 10년형을 선고받고 수즈달 수용소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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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4–1908모스크바대학 입학, 혁명운동으로 제적 후 1908년 통신졸업
  • 1898–1905RSDLP 입당, 제2차 대회 후 멘셰비키 잔류, 농업강령 공동 기초; 뱟카·예니세이 유형 중 통계 작업 시작
  • 1909–1914펜자 주통계국장, 다단계 표본추출법 개발·농가조사 적용
  • 1917–19182월혁명 후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식량위원장·중앙식량관리국장, 10월혁명 후 북부지역 식량관리국장
  • 1921–1926고스플란 콘윤크투라 연구소장, 최초 '국민경제 통제숫자'·균형법 설계, '회복적 성장' 개념 정식화
  • 1926–1929고스플란 농업분과위원장, 바자로프와 유전적 계획 방법론 주창; 스탈린의 전연방 마르크스주의 농업자회의 공개 비판
  • 1930–1940'멘셰비키 중앙국' 사건 체포, 1931년 재판에서 10년형; 수즈달 교정노동수용소에서 1940년 사망, 1991년 복권

스타니슬라프 구스타보비치 스트루밀린

Станислав Густавович Струмилин
중앙계획 기관 소련 러시아 1877–1974

숫자로 사회주의를 설계한 경제학자

"높은 템포를 위해 서 있는 것이 낮은 템포를 위해 앉아 있는 것보다 낫다" — 1920년대 계획방법론 논쟁에서 유전론자들을 향한 스트루밀린의 일갈.

소련 계획경제의 지적 토대를 세운 경제학자이자 통계학자. 세계 최초의 물질수지 체계를 개발하고, 노동생산성의 '스트루밀린 지수'를 정식화했으며, 초등 의무교육의 경제적 수익률을 최초로 계측했다. 1897년 혁명운동에 투신해 멘셰비키로 세 차례 체포·유배되었고, 1923년 볼셰비키당에 입당해 고스플란 부의장을 지냈다. 1931년 과학아카데미 정회원, 레닌상·스탈린상 수상, 사회주의노동영웅(19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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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6–1899페테르부르크 전기기술연구소 입학, 혁명운동 참여
  • 1899RSDLP 입당 (멘셰비키), 학생 총파업 참여로 제적·징집
  • 1906–1907RSDLP 제4차(스톡홀름) 및 제5차(런던) 대회 대의원
  • 1914페테르부르크 폴리테크닉 상업과 졸업
  • 1918–1923노동인민위원부·전소비에트노조중앙회의 통계국장
  • 1921–1937고스플란 근무, 부의장 겸 상임위원 (1930년대)
  • 1931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
  • 1942–1946과학아카데미 우랄·서시베리아·카자흐스탄 자원동원위원회 위원
  • 1943–1951고스플란 과학기술심의회 위원
  • 1947–1952과학아카데미 경제연구소 국민경제사 부문장
중앙계획 기관 소련 러시아 1882–1932 ○ 자연사

네프에서 계획으로 다리를 놓은 상상력의 경제이론가

"훨씬 덜 단단한 정신이라면 오래전에 굴복했을 신체적 장애를 그가 정복하는 진정한 영웅성." — 1920년 모스크바에서 라린을 만난 영국 저널리스트 아서 랜섬

심페로폴 출신 경제학자·혁명가. 고스플란 창립 멤버로, 독일 전시경제 연구를 바탕으로 계획경제를 주창했다. 유대인 농업정착(OZET) 운동을 주도하며 근위축증 속에서도 왕성히 저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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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0–1903심페로폴·오데사에서 사회민주주의 그룹 조직, 8년 유형 선고
  • 1904–1916망명 중 멘셰비키로 활동, 독일 전시경제 연구로 중앙계획 구상
  • 1917볼셰비키 합류, 최고경제회의(VSNKh) 창립 멤버·간부
  • 1921–1932고스플란 창립·간부, 연속노동주간 제안 등 계획경제 정책 구상
  • 1925–1932OZET 의장으로 유대인 농업정착 운동 주도, 반유대주의 비판 저술

블라디미르 파블로비치 밀류틴

Владимир Павлович Милютин
중앙계획 기관 소련 러시아 1884–1937 ✕ 처형

소비에트 계획경제의 통계적 기초를 놓은 첫 농업인민위원

1917년 10월 29일, 중앙위원회에서 레닌이 무장봉기를 촉구하자 밀류틴은 첫 반대 발언자로 나서 “우리는 첫 일격을 가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고 말했다. 레닌은 그 자리에서 밀류틴과 쇼트만을 상대로 반박하며 논쟁을 벌였다. 그로부터 정확히 일주일 뒤, 밀류틴은 바로 그 봉기의 식량 보급을 책임졌다.

최초의 소브나르콤 농업인민위원(1917)으로 혁명정부의 토지정책을 구상했다. 멘셰비키에서 시작해 1910년 볼셰비키로 전향한 경제이론가로, 중앙통계국(TSuU) 국장과 고스플란 부의장을 지내며 소비에트 계획경제의 통계·계산 기반을 정비했다. 전시공산주의에서 네프, 5개년 계획으로 이행하는 시기 내내 국가경제 기구의 실무를 떠받친 기술관료였으나, 1937년 '우익 반혁명 조직' 혐의로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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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3–1910RSDLP 입당, 멘셰비키로 활동하며 쿠르스크·모스크바·페테르부르크에서 지하 조직
  • 1910볼셰비키로 전향, 이후 8차례 체포로 약 5년간 수감과 유형 생활
  • 1917사라토프 소비에트 초대 의장, 페트로그라드 군사혁명위원회 위원, 소브나르콤 초대 농업인민위원(10.26–11.4)
  • 1917–1918연립정부 주장하며 당중앙위·인민위원직 사퇴했다가 번복, VTsIK 경제부장과 VSNKh 부의장 역임
  • 1918–1924VSNKh 간부·북서지역 경제회의 부의장, 코민테른 발칸·오스트리아 대표로 대외 활동
  • 1924–1930노동농민감독인민위원부 간부, 공산주의아카데미 부의장, 중앙통계국(TSuU) 국장 겸 고스플란 부의장
  • 1930–1937고스플란 부의장, 이후 중앙집행위원회 산하 학술기관위원회 의장을 지내며 계획·학술 관료로 활동
  • 1937'우익 반혁명 조직' 혐의로 체포·사형 선고, 10월 30일 처형

그리고리 알렉산드로비치 펠트만

Григорий Александрович Фельдман
중앙계획 기관 소련 러시아 1884–1958 ○ 자연사

자본재 부문 주도 성장 모형을 최초로 정식화한 고스플란의 수학적 경제학자

1929년 산업화 속도 논쟁의 정점에서 펠트만은 "나라의 산업화 템포는 소부르주아적 저항에 의해 제한될 수 없으며, 한계는 오직 모든 노동자의 육체적·심리적 지구력 한계까지 긴장시킨 물질적 가능성뿐"이라고 선언했다.

전기공학자 출신으로 1928년 경제학 사상 최초의 형식적 성장 모형을 정식화한 고스플란 경제학자. 자본재·소비재 2부문 모형은 소비에트 일반계획(1930–45)의 작업 가설로 채택되었으나, 1931년 경향적 비판으로 고스플란에서 축출되었다. 1950년대 미국 경제학자 에브시 도마르가 그의 업적을 재발견하면서 펠트만-마할라노비스 모형으로 알려져 인도 경제계획의 토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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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2–1922전기공학자로 페트로그라드와 모스크바에서 근무, 국민경제최고회의 전기부문에서 GOELRO 전력화 계획 수립에 참여
  • 1923–1927크르지자놉스키의 초청으로 고스플란 세계경제정세부에서 근무, 『계획경제』지에 해외 경제정세 분석 발표
  • 1928고스플란 장기계획부장으로서 2부문 성장 모형을 발표 — 경제학史上 최초의 형식적 성장 모형
  • 1929–1930「분석적 계획 수립 방법」 발표, 펠트만 모형이 소비에트 일반계획(1930–45)의 작업 가설로 채택
  • 1931–1934경향적 비판으로 고스플란을 떠나 계획아카데미 기술구축학부장 및 교원으로 근무
  • 1935–1937북극해항로총국(GUSMP) 종합계획반장
  • 1937–1953탄압을 겪은 후 여러 도시에서 공학직으로 근무, 시추 관련 발명특허 획득
  • 1953–1958중병을 앓으며 모스크바 귀환, 경제학 연구에서 물러나고 사후 복권

발레리안 블라디미로비치 쿠이비셰프

Валериан Владимирович Куйбышев
중앙계획 기관 소련 러시아 1888–1935 ○ 자연사

제1차 5개년계획기의 계획 관료

1935년 1월 25일, 오전 내내 회의를 주재한 그는 창백한 얼굴로 귀가했다. 가정부가 의사를 부르자고 했으나 거절하고 방으로 들어갔다. 크렘린 주치의가 도착했을 때 그는 이미 관상동맥 혈전으로 사망해 있었다.

짜르 군관의 아들로 태어나 16세에 사회민주노동당에 입당, 여덟 차례 체포와 유형을 겪으며 볼셰비키 지하운동을 헤쳐왔다. 내전기 제1군·제4군 혁명군사위원, 이후 라프크린·최고경제회의·고스플란 의장을 거쳐 스탈린 공업화의 설계자이자 집행자가 되었다. 1927년 정치국원으로서 경제정책 전반을 총괄했고, 사후 도시·공장에 그의 이름이 붙은 공업화의 충성스러운 상징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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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7–1921혁명과 내전기 당·군 행정에서 성장
  • 1920s노동자농민검사와 최고경제회의 등 경제감독 기관을 거침
  • 1930–1934고스플란 의장, 제1차 5개년계획기 지표와 공업화 행정 관리
  • 1934–1935당·국가 경제 원로로 남았으나 이른 사망
  • 1935 이후도시·공장명에 이름이 붙은 스탈린식 공업화 상징이 됨

알렉산드르 바실리예비치 차야노프

Александр Васильевич Чаянов
중앙계획 기관 소련 러시아 1888–1937 ✕ 처형

농민 경제의 도덕적 논리를 탐구한 농업경제학자

『비자본주의적 경제체계론』(1924)에서: "현재의 자본주의적 경제 형태는 경제 생활의 한 특수한 사례에 불과하며, 자본주의적 형태에 기초한 국민경제학의 타당성을 다른 조직 형태의 경제 생활로 확장해서는 안 된다."

러시아·소비에트 농업경제학자로, 농민가족경제의 노동-소비 균형 이론을 정립하고 '도덕 경제' 개념을 창안한 조직-생산학파의 공동 지도자이다. 모스크바 농업아카데미 교수이자 농업경제연구소 설립 소장으로서 농업협동조합론을 체계화했으며, 네프 시기 농업인민위원부·고스플란에서 농업 정책 수립에 참여했다. 콘드라티예프와 함께 조작된 '노동농민당' 사건으로 1930년 체포되어 1937년 총살당했으며, 그의 농민경제 이론은 개발경제학과 농민연구에서 현재까지 영향력을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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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6–1911모스크바 농업대학에서 수학, 이탈리아·벨기에 농업협동조합 연구 발표
  • 1912–1915『노동경제 이론 시론』 출간, 페트롭스카야 농업아카데미 조교수·부교수
  • 1915–1919중앙아마협동조합(리노첸트르) 공동 창립, 전러시아 협동조합 회의 평의원
  • 1917임시정부 농업차관, 예비의회 의원 — 급진적 농업 개혁안 작성
  • 1919–1930농업경제연구소 창립 소장, 티미랴제프 농업아카데미 정교수 — 농민경제·협동조합 이론 체계화
  • 1921–1923농업인민위원부 콜레기야 위원 겸 고스플란 대표
  • 1930–1932'노동농민당' 조작 사건으로 체포, OGPU 콜레기야에서 징역 5년 선고
  • 1937알마아타에서 재체포, 당일 총살 — 1987년 전면 복권

레프 나타노비치 크리츠만

Лев Натанович Крицман
중앙계획 기관 소련 러시아 1890–1938 ○ 병사

전시공산주의를 이론화한 농업마르크스주의자

『영웅적 시기』에서 전시공산주의를 이렇게 요약했다: “본질에서 그것은 개인이나 계급의 오류가 아니었다. 비록 순수한 형태는 아니지만, 그것은 미래의 예기요, 미래가 현재로 돌입한 것이었다.”

전시공산주의를 사회주의로의 선취적 돌파로 분석한 소비에트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 고스플란 간부로 계획경제 제도화에 참여했고, 차야노프를 비판하며 삼층계급분화론을 주창해 집단화의 이론적 토대를 제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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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5–1917멘셰비키 청년활동가로 혁명운동 참여, 오데사대학 제적 후 취리히대학 졸업
  • 1918귀국 후 RKP(b) 입당, 최고경제회의(Vesenkha)에서 경제정책 실무
  • 1920–1921최고경제회의 이용위원회 위원장, 자원 중앙배분 체계 구축
  • 1921–1925고스플란 간부회원, 『프라우다』 편집위원, 공산아카데미 간부회원
  • 1925–1930농업경제연구소장·공산아카데미 농업연구소장, 『농업전선에서』 책임편집자
  • 1926–1936『대소비에트백과사전』 경제 부문 편집위원, 『경제백과사전』 편집장
  • 1928–1933중앙통계국 부국장, 소련 고스플란 부의장
  • 1933–1938지병으로 공직 사임, 연구에 전념하다 신장병으로 사망. 노보데비치 묘지 안장

니콜라이 드미트리예비치 콘드라티예프

Николай Дмитриевич Кондратьев
중앙계획 기관 소련 러시아 1892–1938 ✕ 처형

장기 경제 파동을 발견한 농업경제학자

1924년 미국에서 망명한 옛 친구 피티림 소로킨이 대학 교수직을 제안하며 남을 것을 권했지만, 콘드라티예프는 소비에트 러시아로 돌아가 자기 연구를 계속하겠다며 거절했다.

러시아와 소비에트 경제학자로, 자본주의 경제의 약 50년 장기 순환을 규명한 '콘드라티예프 파동' 이론의 창시자이다. 네프 시기 콘윤크투라 연구소를 설립·이끌며 세계 곡물시장과 소비에트 농업 계획의 방법론을 개척했고, 최초의 농업 5개년 계획을 주도했다. 1920년대 후반 강제적 집단화와 불균형 공업화를 비판하다 1930년 '노동농민당' 사건으로 체포되어 1938년 총살당했으며, 사후 두 차례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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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5–1917사회혁명당원으로 활동, 차르 체제 하 체포와 투옥
  • 1915페테르부르크대 법학부 졸업, 첫 단행본 출간
  • 1917케렌스키 농업비서관, 임시정부 식량차관, 제헌의회 의원
  • 1920–1928콘윤크투라 연구소 창립 소장, 세계경제 순환 연구
  • 1923–1928농업인민위원부·고스플란에서 첫 농업 5개년 계획 수립 주도
  • 1925『대순환』 발표 — 콘드라티예프 파동 이론 정식화
  • 1928–19301차 5개년 계획 불균형 비판, 연구소장 해임, 체포
  • 1938수감 8년 뒤 코뮤나르카에서 총살

발레리 이바노비치 메즐라우크

Валерий Иванович Межлаук
중앙계획 기관 소련 라트비아 1893–1938 ✕ 처형

계획경제의 숫자를 만들다 숙청된 관료

각료회의 중 파란 연필로 동료 간부 캐리커처를 그린 메즐라우크. 낙서 532점이 보로실로프의 비밀 파일에 남았고, 체포 후 베리야는 한 장에 '메즐라우크의 작품'이라는 쪽지를 붙여 보내왔다.

소련 계획경제의 이론가이자 실무 책임자로, 1·2·3차 5개년계획 수립을 주도했다. 고스플란 의장으로 공업화 지표와 자원 배분을 총괄했으며, 1929년 포드 사와 고리키 자동차 공장 건설 계약을 체결했다. 기관지 《За индустриализацию》 편집장을 지냈고, 각료 회의에서 그린 당 간부들의 캐리커처로도 유명했다. 라트비아계였던 그는 대숙청 속 '라트비아 반혁명 조직' 혐의로 1938년 총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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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7–1920s라트비아계 볼셰비키로 내전과 경제 행정에서 성장
  • 1931–1934중공업·경제 행정에서 5개년계획 지표 관리
  • 1934–1937고스플란 의장, 공업화 숫자와 배분을 조정
  • 1937대숙청 속에서 체포
  • 1938처형, 계획기관도 숙청의 대상이 됨을 보여줌

니콜라이 키릴로비치 안티포프

Николай Кириллович Антипов
중앙계획 기관 소비에트 러시아 1894–1938 ✕ 처형 · 복권 1956

스탈린의 간부 임명 기구를 움직인 통제 관료

1937년 3월 중앙위 전원회의에서 그는 트로츠키주의자·지노비예프주의자·우익파가 '독일과 일본 파시스트에게 고용된 피비린내 나는 파괴공작자-살인자 덩어리'라고 규탄했다. 넉 달 뒤 그 자신이 체포되었다.

12년 볼셰비키에 입당하여 10월 혁명 당시 페트로그라드 공장위원회 간부로 활동했고, 내전기에는 페트로그라드 체카 의장을 지냈다. 1924년 중앙위 조직배치부(오르그라스프레드) 책임자로서 스탈린의 노멘클라투라 체계 구축에 핵심 역할을 했으며, 이후 우랄·레닌그라드 지역당 서기, 체신인민위원을 거쳐 1935년 소비에트통제위원회 의장 겸 인민위원회의 부의장에 올랐다. 당-국가 통제기구의 정점에서 중앙계획 규율을 감독했으나, 1937년 6월 중앙위 전원회의에서 제명·체포되어 1938년 7월 총살되었고 1956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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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7페트로그라드 당 위원, 공장위원회 중앙평의회 간부
  • 1918–1919페트로그라드 체카 의장
  • 1924–1925중앙위 조직배치부(오르그라스프레드) 책임자
  • 1925–1926우랄 지역당 제1서기
  • 1926–1927레닌그라드 당 제2서기, 북서부국 서기
  • 1928–1931소련 체신인민위원
  • 1931–1934노동농민감독 부인민위원, 중앙통제위원회 간부
  • 1935–1937소비에트통제위원회 의장, 인민위원회의·노동국방회의 부의장

이반 아다모비치 크라발

Иван Адамович Краваль
중앙계획 기관 소련 라트비아 1897–1937 ✕ 처형

스탈린에게 불만족스러운 인구를 센 통계학자

1937년 1월 인구총조사 결과가 크렘린에 도착했을 때, 크라발의 통계는 스탈린이 선전해온 인구 성장 신화를 숫자로 깨뜨렸다. 불과 4개월 후 그는 체포되었다.

라트비아 출신 소련 경제학자이자 통계학자로, 노동경제학 박사. 고스플란 부의장 겸 중앙국민경제회계국(TSUNKHU) 국장으로서 1937년 전연방 인구총조사를 주관했다. 집단화와 기근으로 인한 인구 손실을 반영한 낮은 수치가 정치 지도부의 분노를 샀고, 이는 그의 몰락으로 직결되었다. 그가 수립한 통계 방법론은 소련 계획경제의 기초 통계 인프라를 형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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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9라트비아계 볼셰비키로 입당
  • 1924–1930최고국민경제회의(ВСНХ) 간부로 노동경제·통계 기반 구축
  • 1930–1932소련 노동부인민위원회 부위원장
  • 1933–1935TSUNKHU 제1부국장 겸 고스플란 간부회의 위원
  • 1935–1937TSUNKHU 국장 겸 고스플란 부의장, 전연방 인구총조사 책임
  • 1937인구총조사 결과를 이유로 체포·처형, 1956년 복권

막심 자하로비치 사부로프

Максим Захарович Сабуров
중앙계획 기관 소련 러시아 1900–1977 ↓ 실각 1957

스탈린 말기와 말렌코프기의 계획 관료

1956년 제20차 당 대회 준비 과정에서 카가노비치·몰로토프·보로실로프가 숙청에도 불구하고 스탈린의 '위대함'을 강조해야 한다고 주장하자, 사부로프는 미코얀과 함께 반대하며 말했다: "이 모든 것이 사실이라면, 용서할 수 없다."

소련의 핵심 경제계획 관료로, 고스플란 의장을 세 차례 역임하며 전후 공업 재건과 제5차 5개년 계획을 주도했다. 스탈린 말기부터 흐루쇼프 집권 초까지 국가계획의 중심에 서서 중공업 우선 노선과 소비재 균형 논쟁 속에서 실무를 책임졌다. 1957년 흐루쇼프 해임을 시도한 반당 그룹에 가담했다가 상임위에서 제명되고, 이후 지방 공장장으로 밀려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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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0s–1940s공업·계획기관에서 성장한 스탈린식 경제 관료
  • 1941–1942, 1949–1953전시와 전후 고스플란/국가계획 지도부에서 활동
  • 1953–1955말렌코프기 국가계획 지도부, 소비재·중공업 균형 논쟁 속에 있음
  • 1957반당그룹에 가담했다가 중앙 권력에서 축출
  • 1960s–1970s지방·하급 경제직으로 밀려난 뒤 은퇴

그리고리 페트로비치 코샤첸코

Григорий Петрович Косяченко
중앙계획 기관 소련 우크라이나 1901–1983 ○ 자연사

스탈린 말기와 전환기의 고스플란 계획가

스탈린 사망 직후인 1953년 3월 고스플란 의장에 올랐으나 넉 달 만에 사부로프에게 자리를 넘겼다. 워낙 짧아 많은 연구서가 이 임기를 아예 기록하지 않는다.

열여섯 살에 볼셰비키에 입당한 소련의 경제 계획가로, 루간스크 기관차 공장 노동자에서 적군 정치장교를 거쳐 중앙계획의 핵심 간부로 올라섰다. 전시에는 산업 대피와 군수 물자 생산을 조정하는 군사경제 계획 수립에 참여했고, 전후 고스플란 기관지 《플라노보예 호자이스트보》의 편집장(1944–1949)을 지냈다. 1953년 3월부터 6월까지 말렌코프 제1차 정부 아래에서 사부로프의 두 번째와 세 번째 임기 사이에 잠시 고스플란 의장을 맡았으며, 이후 1957년까지 다시 제1부의장으로 복귀했다. 말년에는 재무차관과 재무부 산하 연구소 소장을 역임하며 《소비에트 재정 50년》(1967) 편찬을 주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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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7–1922적위대 · 파르티잔 · 제42소총사단 정치일꾼
  • 1922–1929톨마초프 군사정치아카데미 수료 후 군사정치학교 교원
  • 1929–1937적색교수경제연구소 수료, 프룬제·레닌 군사정치아카데미 정치경제학 주임
  • 1940–1949고스플란 부의장 · 《플라노보예 호자이스트보》 편집장(1944–1949)
  • 1949–1953고스플란 제1부의장 · 초대 코메콘 소련 상임대표(1949)
  • 1953 (3–6월)고스플란 의장
  • 1953–1957고스플란 제1부의장
  • 1957–1970재무차관(1957–1960) · 재무연구소 소장(1960–1970)

겐나디 이바노비치 스미르노프

Геннадий Иванович Смирнов
중앙계획 기관 소련 러시아 1903–1938 ✕ 처형 · 모스크바

8개월 만에 숙청으로 사라진 계획 수장

1937년 2월 26일, 『이즈베스티야』 1면에 33세의 신임 고스플란 의장 스미르노프의 사진이 실렸다. 8개월 뒤 그는 반혁명 테러 조직 가담 혐의로 체포되었다.

소련의 경제 관료이자 계획 이론가로, 고스플란 자본건설 부문과 종합계획국을 거쳐 1937년 2월 고스플란 의장에 올랐다. 메즐라우크의 최측근으로서 그를 대신해 임명되었으나, 대숙청이 절정에 달한 8개월 동안 계획기구를 이끌다 1937년 10월 체포되었다. 반혁명 테러 조직 가담 혐의로 1938년 7월 총살되었으며, 1차 5개년계획을 설계한 계획 관료들마저 숙청의 대상이 된 순간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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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6–1920철도 공장 제도 보조, 농업 코뮌 활동, 콤소몰 지도원
  • 1921–1924심비르스크 콤소몰 정치교육부장·서기, 시당 위원회 선전선동부장
  • 1924–1929크룹스카야 공산주의교육 아카데미·경제연구소 대학원 수학, 최고경제회의 자본건설부장
  • 1930–1934소유즈콜호즈방크 부총재, 고스플란 자본건설부문장·간부회 구성원
  • 1934–1937고스플란 부의장 겸 종합계획국장 — 메즐라우크의 최측근
  • 1937.02–10고스플란 의장, 공업화 계획 총괄
  • 1937.10–1938체포·기소·사형 — 대숙청이 계획기구마저 집어삼키다
  • 1956사후 복권

니콜라이 알렉세예비치 보즈네센스키

Николай Алексеевич Вознесенский
중앙계획 기관 소련 러시아 1903–1950 ✕ 처형

전시계획의 천재, 레닌그라드 사건에 죽다

국방위원회 회의에서 보즈네센스키는 스탈린의 의견에 정면으로 반대하며 산업이 감당할 정확한 수치를 제시하곤 했다. 바실렙스키 원수는 "그의 말이 결정적이었고, 거의 틀리지 않았다"고 증언했다.

소련의 경제학자이자 정치국원. 35세에 고스플란 의장이 되어 대조국전쟁 시기 소련 전시 경제 계획을 총괄했으며, 국가방위위원회 위원으로 산업 대피와 군수 생산 전환을 지휘했다. 1947년 『전시 소련경제』로 스탈린상을 수상하고 전후 경제 부흥 계획을 주도하며 스탈린의 총애를 받는 차세대 지도자로 부상했다. 즈다노프 사후 말렌코프·베리야와의 권력 투쟁에서 밀려 레닌그라드 사건으로 몰락, 1950년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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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0s레닌그라드 당·계획기관에서 빠르게 성장한 젊은 경제관료
  • 1938–1941, 1942–1949고스플란 및 국가계획위원회 의장, 전시 생산계획 조정
  • 1941–1945국가방위위원회와 전시 경제관리의 핵심 실무자
  • 1946–1949전후 유력 경제 지도자로 부상, 『전시 소련경제』 저술
  • 1949–1950레닌그라드 사건으로 체포·처형

야코프 예르몰라예비치 차다예프

Яков Ермолаевич Чадаев
중앙계획 기관 소련 러시아 1904–1985 ○ 자연사

전시 정부 법령에 스탈린과 함께 서명한 고스플란 경제학자

1941년 6월 21일 저녁, 포스크료비셰프가 속삭였다. '주인께서 방금 티모셴코와 흥분해서 통화하셨소... 독일군 공격이 임박한 것 같소.' 차다예프가 물었다. '우리 말이오?' '그럼 누구겠소?'

소비에트 경제학자이자 국가 관료로, 고스플란 부의장(1938–1949)으로서 전시 계획경제의 실무를 떠받쳤으며, 1940년부터 1949년까지 소련 인민위원회(각료회의) 업무관리국장을 겸임하며 정부 문서 체계 전체를 관장했다. 그의 서명은 수천 건의 전시 법령에서 스탈린의 서명과 나란히 실렸으며, 대피 산업 조정과 원자력 프로젝트의 초기 자원 배분에도 관여했다. 전후에는 고스플란 RSFSR 의장과 소련 국가계획위원회 부의장(1962–1975)을 지내며 계획 기구에 평생 몸담았고, 《위대한 조국전쟁 시기 소련의 경제》를 저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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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0–1932우드무르트 자치공화국 고스플란 부의장
  • 1933–1937소련 고스플란 선임경제학자·생산경제 부문 부책임자
  • 1937–1939고스플란 RSFSR 부의장 → RSFSR 인민위원회 부의장 겸 고스플란 RSFSR 의장
  • 1939–1940소련 인민위원회 소비에트통제위원회 부위원장
  • 1940–1949소련 인민위원회(각료회의) 업무관리국장
  • 1949–1962고스플란 RSFSR 부의장 → RSFSR 각료회의 부의장 겸 고스플란 RSFSR 의장 → 고스플란 RSFSR 제1부의장
  • 1962–1975소련 국가계획위원회 부의장

표트르 파데예비치 로마코

Пётр Фаддеевич Ломако
중앙계획 기관 소련 러시아 1904–1990 ○ 자연사

소련 비철금속공업의 창설자이자 고스플란 의장

1988년 기네스북이 46년 장관직을 기록할 때, 로마코는 이미 2년 전 은퇴한 상태로 모스크바에서 조용히 여생을 보내고 있었다.

소련 비철금속공업의 창설자로 46년간 장관직을 수행한 금속공학자다. 알루미늄·타이타늄 산업의 기초를 닦고 전시 우라늄 공급으로 핵개발을 뒷받침했으며, 고스플란 의장으로 계획경제 재중앙화를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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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7–1939콜추기노 비철금속가공공장장
  • 1939–1940비철금속공업 부인민위원, 알루미늄·마그네슘 총국장
  • 1940–1948비철금속공업 인민위원·장관, 전시 공장 이전과 우라늄 공급 총괄
  • 1948–1950금속공업부 제1차관으로 통합 부처에서 실무 지휘
  • 1950–1953, 1954–1957비철금속공업 장관, 알루미늄·희귀금속 생산 확대 주도
  • 1957–1961크라스노야르스크 소브나르호스 의장, 지역경제 개혁 실무
  • 1962–1965소련 각료회의 부의장 겸 고스플란 의장, 계획체계 재중앙화 주도
  • 1965–1986비철금속공업 장관, 브레즈네프기 산업 확장과 다이아몬드·타이타늄 생산 개시

블라디미르 니코노비치 스타롭스키

Владимир Никонович Старовский
중앙계획 기관 소련 러시아 1905–1975 ○ 자연사

소련 통계를 35년간 관장한 인물

«우리에겐 다른 숫자가 없습니다. 스타롭스키 동무는 아주 신중한 사람입니다. 나는 그에게서 숫자를 받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연방 회계부서입니다. 나는 그를 신뢰합니다.» — 흐루쇼프, 중앙위원회 상임간부회, 1964년 8월 19일.

1940년부터 1975년까지 소련 중앙통계국(ЦСУ)을 이끌며 35년간 국가 통계를 총괄했다. 1939년 인구총조사를 시작으로 소련의 모든 공식 인구·경제 통계를 관장했으며, 고스플란이 국가계획을 세우는 기초 데이터를 생산하는 기관의 수장으로서 명령경제의 정보 기반을 구축했다. 경제학 박사이자 과학아카데미 통신회원으로서 수리통계 방법론의 기초를 닦았고, 흐루쇼프가 공개적으로 신뢰를 선언한 유일한 통계 책임자였다. 그러나 1960년대에는 글루시코프의 국가전산망(OGAS) 구상을 저지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하여 소련 정보기술의 경로에 논란의 여지가 큰 전환점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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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9–1923우스티시솔스크 현 통계국 사무원·통계사
  • 1924–1926최고경제회의(VSNKh) 통계사, 모스크바국립대 법학부 졸업
  • 1926–1930소련 중앙통계국(ЦСУ) 통계사·연구원; RANION 경제연구소 대학원 수료
  • 1931–1937고스플란 ЦУНХУ 연구원, 인사부 차장
  • 1937–1939ЦУНХУ 전연방인구총조사국 차장
  • 1940–1941고스플란 ЦУНХУ 국장
  • 1941–1948고스플란 ЦСУ 국장 겸 고스플란 부의장
  • 1948–1975소련 각료회의 직속 ЦСУ 국장 (1957년부터 각료 급)

드미트리 게오르기예비치 지메린

Дмитрий Георгиевич Жимерин
중앙계획 기관 소련 러시아 1906–1995 ○ 자연사

35세에 전시 전력장관이 된 소비에트 전기화의 기수

베리야가 모스크바 대정전 책임자를 향해 권총을 겨누자, 지메린은 그 앞을 몸으로 막으며 말했다. «쏘시오, 그는 잘못이 없습니다!»

소비에트 전력화의 핵심 인물로, 1942년 35세의 나이로 전력인민위원에 임명되어 제2차 세계대전 중 발전소 대피와 복구를 지휘했다. 1948년 모스크바 대정전 당시 베리야의 권총 위협에도 부하를 몸으로 감싸며 맞섰고, 흐루쇼프의 1955년 고스플란 분할 개혁기에는 제1부의장으로서 장기계획 체계 전환에 참여했다. 은퇴 후 국립 에너지연구소장과 국가과학기술위원회 제1부의장을 지내며 소련 에너지 과학의 제도화에 기여했고, 소련 전기화 역사에 관한 표준적 저작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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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9–1940남부지역 발전소·전력망 총관리국 수석기사·국장
  • 1940–1941전력인민위원부 제1부인민위원
  • 1942–1953전력인민위원 · 전력장관
  • 1954–1955각료회의 화학·에너지 담당 뷰로 제1부의장
  • 1955–1957고스플란 제1부의장 (장기계획·현행계획 분할기)
  • 1964–1971국립 크르지자놉스키 에너지연구소장
  • 1971–1983국가과학기술위원회 제1부의장

바실리 미하일로비치 랴비코프

Василий Михайлович Рябиков
중앙계획 기관 소련 러시아 1907–1974 ○ 자연사

레닌 훈장 9회: 전시 무기생산에서 스푸트니크까지, 소련 군산복합체를 35년간 떠받친 조직자

R-7 발사가 성공하자 누군가 연회를 넌지시 꺼냈다. 랴비코프는 국가 예산이 아닌 각출로 자리를 마련하게 한 뒤, 손풍금을 집어 들고 러시아 왈츠와 「카튜샤」를 신나게 연주했다. 코롤료프가 코냑을 따르며 건배를 청하자, 그는 활짝 웃으며 외쳤다. "노래하고 싶지만 시간이 없군!"

이바노보 직물공장 노동자로 출발해 소련 군수산업의 핵심 행정가로 올라선 인물이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무장인민위원부 제1부위원으로서 공장 동부 이전과 무기 증산을 지휘했고, 1945년 사회주의노동영웅 칭호를 받았다. 전후에는 대공미사일 방어체계 S-25 건설을 이끌었고, 1957년 R-7 미사일 및 스푸트니크 1호 발사를 승인한 국가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소련 우주시대의 문을 열었다. 이후 13년간 고스플란 제1부의장으로 군수-민수 자원 배분을 조율하며 브레즈네프기 계획경제의 핵심 축으로 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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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4–1929이바노보주 직물공장 노동자, 이후 콤소몰·당 지역 간부
  • 1929–1937레닌그라드 기술원·군사기계연구소·해군사관학교에서 공학 수학
  • 1937–1939볼셰비크 공장 설계기사, 당위원회 서기, 전연방공산당 중앙위원회 당조직자
  • 1939–1950무장인민위원부 부인민위원, 이후 제1부위원 — 전시 공장 이전·무기 증산 지휘
  • 1950–1953소련 각료회의 제3총국장 — 모스크바 대공미사일 방어체계 S-25 건설 주도
  • 1955–1957각료회의 특별위원회 의장 — R-7 및 스푸트니크 1호 국가위원회 주재
  • 1961–1962, 1965–1974고스플란 제1부의장 — 군수-민수 자원 배분과 경제 계획 조율

블라디미르 니콜라예비치 노비코프

Владимир Николаевич Новиков
중앙계획 기관 소련 러시아인 1907–2000 ○ 자연사

군수공장 기술자에서 국가계획 수장이 된 방위산업 테크노크라트

1942년 6월 3일, 최고회의 상임간부회 포고령: '생산 조직과 신형 포병·소화기 무기의 숙달, 공장의 능숙한 지휘에서 탁월한 공로.' 34세의 노비코프는 반니코프, 우스티노프와 함께 사회주의노동영웅 칭호를 받았다.

이제프스크 군수공장 기술자로 출발해 1942년 34세의 나이로 사회주의노동영웅이 된 방위산업 테크노크라트. 레닌그라드 소브나르호스 의장과 러시아공화국 고스플란 의장을 거쳐 1960년 흐루쇼프에 의해 소련 국가계획위원회 의장 겸 각료회의 부의장에 임명되었으나 소브나르호스 개혁으로 분권화된 경제 속에서 2년 만에 물러났고, 이후 브레즈네프 아래서 15년간 각료회의 부의장으로 남아 군수·경제 분야에서 조용히 영향력을 행사한 내구력 있는 실무 관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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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8–1939이제프스크 방위공장: 기술자·설계사·주임기술자·기사장
  • 1939–1941제74공장(무장인민위원부) 소장, 이제프스크
  • 1941–1948소련 무장인민부위원·무장차관; 공병포병소장 (1944)
  • 1948–1957레이더위원회·방위공업부·일반기계제조부 지도부
  • 1957–1960레닌그라드 소브나르호스 의장; 러시아공화국 각료회의 제1부의장·고스플란 의장
  • 1960–1962소련 각료회의 부의장·국가계획위원회(고스플란) 의장
  • 1962–1965소련 코메콘 대표; 소련 최고국민경제회의 의장
  • 1965–1980소련 각료회의 부의장

알렉산드르 표도로비치 자샤트코

Александр Фёдорович Засядько
중앙계획 기관 소련 러시아 1910–1963 ○ 자연사

돈바스 탄갱에서 크렘린 경제계획 정상까지 오른 광부의 아들

스탈린이 직접 주재한 자리에서, 측근들이 자샤트코의 음주벽을 문제 삼자 스탈린은 그를 불러 보드카 세 잔을 권했다. 자샤트코는 두 잔을 단숨에 비우고 세 번째는 정중히 사양했다. 스탈린은 파이프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자샤트코는 분수를 안다!" 임명은 결정되었다.

소련의 탄광 기술자이자 경제 관료. 돈바스 광부의 아들로 태어나 광산기계공에서 시작해 38세에 소련 석탄공업장관이 되었고, 전후 돈바스 탄광 재건을 진두지휘했다. 흐루쇼프 시기에는 각료회의 부의장 겸 국가과학경제위원회 의장으로 발탁되어 고스플란 체계와 나란히 중앙계획을 조율하는 자리에 올랐다. 1957년 사회주의노동영웅 칭호를 받았고, 다섯 차례 레닌 훈장을 받은 중공업 행정의 거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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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4–1935루간스크·고를롭카·노보샤흐틴스크에서 견습공과 기계공으로 일하며 돈바스 탄광에 입문, 도네츠크 광산대학 졸업
  • 1935–193910bis 탄광에서 기사장·주임기사·광장으로 승진하며 현장 경영 두각
  • 1939–1943석탄공업인민위원부에서 '스탈린우골'·'몰로토프우골'·'툴라우골' 콤비나트 장으로 전시 탄광 운영
  • 1943–1948석탄공업 부인민위원으로 돈바스 탄광 복구 총괄, 5년 만에 전쟁 전 생산량 회복 달성
  • 1948–1955소련 석탄공업장관 ― 전후 석탄 산업 전반을 지휘하며 거대 신규 탄광 건설과 기계화 추진
  • 1955–1957체랴빈스크우골 콤비나트 장, 우크라이나 석탄공업장관으로 복귀해 생산 반등 주도
  • 1957–1958국가계획위원회 연료공업 부문장(장관급) 겸 부의장
  • 1958–1962소련 각료회의 부의장 겸 국가과학경제위원회 의장 ― 중앙계획의 최고위 조정자

베니아민 엠마누일로비치 딤시츠

Вениамин Эммануилович Дымшиц
중앙계획 기관 소련 러시아 1910–1993 ○ 자연사

23년간 소련 부총리를 지낸 유대인 건설기술관료

1970년 3월 4일, 소련 유대인 기자회견의 주인공으로 나서 소련의 민족 정책을 옹호하고 이스라엘을 규탄했다. 유대인으로서 브레즈네프 체제의 핵심부에서 23년간 부총리를 지낸 그에게 주어진 모순된 순간이었다.

소련 최장수 부총리 중 한 명으로, 마그니토고르스크·아조프스탈·자포로지스탈·인도 빌라이 제철소 등 전략적 공업 프로젝트의 건설을 지휘한 기술관료다. 1962년 흐루쇼프에 의해 부총리로 발탁된 후 브레즈네프 시대 내내 경제 부총리로 남아 고스플란·최고국민경제회의·고스스나프를 차례로 이끌며 소련 계획경제의 물자공급 체계를 총괄했다. 스탈린상 2회 수상자이며, 유대인 출신으로 당 중앙위원과 최고회의 대의원을 지내며 소비에트 체제 내 기술 엘리트의 전형을 보여준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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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9–1946마그니토스트로이 트레스트 관리자
  • 1946–1950자포로시스트로이 트레스트 관리자
  • 1950–1957중공업·야금화학 건설 차관
  • 1957–1959인도 빌라이 제철소 건설 수석기사
  • 1959–1962고스플란 자본건설국장 → 제1부의장
  • 1962고스플란 의장 (7월–11월)
  • 1962–1985소련 각료회의 부의장
  • 1962–1965소련 최고국민경제회의 의장
  • 1965–1976국가물자공급위원회(고스스나프) 의장

이오시프 이오시포비치 쿠지민

Иосиф Иосифович Кузьмин
중앙계획 기관 소련 러시아 1910–1996 ○ 자연사

흐루쇼프의 소브나르호스 개혁을 집행한 계획가

1957년 12월, 쿠지민은 전국 소브나르호스 의장들을 모스크바로 처음 소집했다. 그는 '공업의 대외시장 지향 개선'을 요구하며 1958년 2억 500만 루블 무역흑자 목표를 내걸었다.

전기공학자 출신 소련 계획가. 1957년 고스플란 의장으로 흐루쇼프의 소브나르호스 개혁(중앙부처 폐지와 지역경제회의 체제 전환)을 주도했으나, 개혁 혼선 속에 1959년 경질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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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7–1939모스크바 투광기 공장 기술부장, 당위원회 서기
  • 1939–1947중앙당통제위원회 책임통제관, 부의장
  • 1952–1957CPSU 중앙위 산업운수부·기계제조부 부장
  • 1957–1959국가계획위원회(고스플란) 의장, 제1부총리 겸 부총리
  • 1959–1960국가과학경제회의 의장 겸 소련 장관
  • 1960–1963주스위스 소련 특명전권대사

니콜라이 바실리예비치 마르티노프

Николай Васильевич Мартынов
중앙계획 기관 소련 러시아 1910–1998 ○ 자연사

군수에서 물자공급까지, 계획경제의 동맥을 관리한 기술관료

1957년 흐루쇼프의 소브나르호스 개혁으로 수십 명의 연방 차관들이 지방으로 밀려났다. 마르티노프도 예외는 아니었다. 타슈켄트로 보내진 그는 이렇게 말했다. '원하던 발령은 아니었지만, 일이 있는 곳으로 간다.'

소련 경제 관료로, 제2차 세계대전 중 탄약 부인민위원으로 군수 공급을 총괄했고, 1965년부터 20년간 국가물자공급위원회(고스스나브)에서 근무하며 소련 계획경제의 물자 유통을 실제로 작동시킨 인물이다. 노동자 가정 출신으로 툴라 병기공장장에서 시작해 각료회의 부의장 겸 고스스나브 의장(1976~1985)까지 오르며 50년간 소련 산업의 물적 토대를 떠받친 실무형 기술관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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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5–1929기관조수 → 전기기사
  • 1929–1933항공기 공장 전기기계공·기술자·에너지부장, 모스크바
  • 1933–1934예이스크 해군비행학교 생도
  • 1934–1939병기공장 에너지부장 → 주임기사 → 부공장장, 타타르
  • 1939–1941툴라 병기공장장
  • 1941–1946소련 탄약 부인민위원
  • 1946–1953농업기계제조 차관 → 제1차관
  • 1953–1955기계제조성 콜레기야 위원 → 자동차·트랙터·농업기계성 동원국장
  • 1955–1957트랙터·농업기계제조 차관
  • 1957–1960타슈켄트 국민경제회의 부의장 → 의장
  • 1960–1962우즈베크 SSR 국민경제회의 의장
  • 1962–1964우즈베키스탄 공산당 중앙위 서기, 공업·건설 지도국 의장
  • 1964–1965소련 국민경제회의 부의장 겸 소련 장관
  • 1965–1976국가물자공급위원회(고스스나브) 제1부의장
  • 1976–1985소련 각료회의 부의장 겸 고스스나브 의장

레프 마르코비치 볼로다르스키

Лев Маркович Володарский
중앙계획 기관 소련 러시아 1911–1989 ○ 자연사

소련 국가통계의 수호자, 혁명 순교자의 동생으로서 계획경제의 숫자를 관리하다

회고록 『기억의 계산』(1983)에서 통계청장으로서의 평생을 돌아보며: 「숫자는 침묵하지 않는다 — 다만 우리는 그것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소련 국가통계청(ЦСУ СССР) 청장(1975~1985)으로서 브레즈네프 후기와 고르바초프 초기 소련 계획경제의 통계 인프라를 총괄한 경제학자. 레닌그라드 공학경제연구소 출신으로 고스플란에서 경력을 쌓은 후 30년 가까이 ЦСУ에서 부청장·제1부청장을 거쳐 청장에 올랐다. 그의 재임 기간 소련 통계는 체계적 왜곡과 대외 신뢰도 하락이라는 구조적 문제에 직면했으며, 그는 『통계가 말하다』(1982)와 영문 회고록 『기억의 계산』(1983)을 통해 통계의 사회적 역할을 대중적으로 옹호했다. 1918년 암살된 페트로그라드 선전 인민위원 V. 볼로다르스키의 친동생으로, 혁명 순교자의 유산과 소비에트 테크노크라시의 접점에 선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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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6–29레닌그라드 제1소비에트학교 콤소몰 책임비서
  • 1934레닌그라드 공학경제연구소 졸업
  • 1934–40레닌그라드 지방공업 계획 부문에서 선임 경제기사 → 계획부장
  • 1940–42레닌그라드 주재 고스플란 전권위원
  • 1942–48고스플란 소련 부서장 → 국장
  • 1948–67ЦСУ 소련 부청장(1948~53, 1956~67), 통계출판사 주필(1953~55), 공업통계국장(1955~56)
  • 1967–75ЦСУ 소련 각료회의 제1부청장
  • 1975–85ЦСУ 소련 청장 — 소련 각료

니콜라이 콘스탄티노비치 바이바코프

Николай Константинович Байбаков
중앙계획 기관 소련 아제르바이잔 1911–2008 ○ 자연사

장기 정체기의 고스플란 의장

함께 일했던 이들이 배신하고 나를 '인민의 적'으로 몰아가려 했다. 그 더러운 수사를 피해 붉은 군대로 도망쳤다.

바쿠 유전 지대에서 성장한 석유 기술자로, 30대에 소련 석유산업을 이끌며 '바이바코프 공법'으로 불리는 고압 시멘트 주입 기술을 개발했다. 전시에는 코카서스 유전 방어의 극적인 임무를 수행했고, 전후에는 로마슈키노 유전 개발을 주도하며 소련의 산유 대국화에 기여했다. 1965년부터 20년간 고스플란 의장으로 코시긴 개혁 이후의 중앙계획경제를 상징했으며, 브레즈네프 시대 계획 관료제의 핵심 축으로서 고르바초프 초기까지 버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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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0s석유산업 인민위원/장관으로 전시 에너지 공급을 관리
  • 1942독일 진격기 코카서스 유전 파괴 대비와 석유 생산 이전 임무 수행
  • 1955–1957고스플란 의장으로 처음 중앙계획을 지휘
  • 1965–1985국가계획위원회 의장, 코시긴 개혁 이후 장기 계획경제 운영
  • 1985 이후고르바초프 초기 교체, 장기 정체기 계획관료의 상징으로 남음

게르하르트 쉬러

Gerhard Schürer
중앙계획 기관 동독 독일 1921–2010 ○ 사망

동독의 파산을 경고했으나 체제를 구하지는 못한 국가계획위원장

내가 정치국에서 호네커에게 이 정책을 경고했을 때 나는 '사보타주'로 일축됐다.

게르하르트 쉬러는 1965년부터 1989년까지 동독 국가계획위원회 위원장을 지낸 경제 관료였다. 그는 호네커의 '경제정책과 사회정책의 통일' 노선이 투자보다 소비에 치우쳐 국가를 파산으로 몰고 있다고 경고했으나, 정치국에서 '사보타주'라는 비난을 받으며 18년간 후보 위원에 머물렀다. 1989년 10월 30일 크렌츠의 요청으로 제출한 「동독 경제 상황 분석」에서 서방 부채 490억 발루타마르크와 임박한 지급불능을 폭로하며 국경 통제 완화를 대가로 한 서독 차관을 제안했고, 이 보고서는 체제의 절박함을 드러내는 결정적 문건이 되었다. 통일 후 '신뢰 남용' 혐의로 18일간 구금됐다가 무혐의로 풀려났으며, 회고록 『모험과 상실』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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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6–1939기계공 훈련
  • 1939–1945루프트바페 복무, 비행 교관
  • 1948SED 입당
  • 1955–1958모스크바 공산당 고등학교 수학
  • 1960–1962SED 중앙위 계획·재정·기술부장
  • 1962–1965국가계획위원회 부위원장, 1965년 위원장 승진
  • 1965–1989국가계획위원회 위원장 겸 각료회의 간부위원
  • 1973–1989SED 정치국 후보위원, 1989년 11월 정위원

유리 페트로비치 바탈린

Юрий Петрович Баталин
중앙계획 기관 소련 러시아 1927–2013 ○ 자연사

서시베리아 석유단지와 체르노빌 석관을 건설한 페레스트로이카기의 건설 총책

1986년 해임된 보리스 옐친이 좌천되어 온 자리는 바탈린 휘하의 국가건설위원회 제1부의장이었다.

우랄공과대학을 졸업한 토목기사로, 바시키르 탄광과 유전 건설현장에서 경력을 시작했다. 튜멘에서 소련 최대의 서시베리아 석유·가스 복합단지 건설을 주도하며 1980년 레닌상을 받았다. 1985년 소련 각료회의 부의장, 1986년 국가건설위원회 의장에 임명되어 페레스트로이카기 건설정책을 총괄했으며, 체르노빌 원전 4호기 석관 공사와 1988년 아르메니아 지진 복구를 지휘했다. 1989년 퇴임 후 러시아 공학아카데미 부총재와 석유가스건설자연합 회장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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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0–1965바시키르 석탄·석유 건설 트러스트에서 작업반장에서 트러스트 관리자로 승진
  • 1965–1970튜멘석유가스건설총국 주임기사 겸 제1부국장
  • 1970–1983석유·가스산업건설 차관, 후에 제1차관
  • 1983–1985소련 국가노동·사회문제위원회 의장
  • 1985–1989소련 각료회의 부의장
  • 1986–1989소련 국가건설위원회 의장 (겸임)

레프 알렉세예비치 보로닌

Лев Алексеевич Воронин
중앙계획 기관 소련 러시아 1928–2008 ○ 자연사

고르바초프 시기 국가물자공급의 수호자

1990년 말 니콜라이 리시코프 총리가 심장마비로 입원하자 보로닌이 각료회의 의장 대행을 맡았다. 발렌틴 파블로프가 새 총리로 선출된 1991년 1월 14일까지 소련 정부의 일상 운영을 책임졌다.

고르바초프 시기 국가물자공급위원회(Gossnab) 의장(1985~1989)으로서 후기 계획경제의 물자 공급 체계를 총괄했으며, 페레스트로이카의 혼란 속에서도 국가 공급망을 지켜낸 실무형 경제 관료였다. 니콜라이 리시코프 내각의 각료회의 제1부의장(1989~1991)으로 승진하여 경제 운영 전반을 조정했고, 1990년 말 리시코프의 심장마비 시 의장 대행을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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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9–1959스베르들롭스크 제356공장 작업반장 → 작업장장
  • 1959–1963카멘스크-우랄스키 및 스베르들롭스크 방산 기업 수석기사
  • 1963–1965중우랄 소브나르호스 무선전자공업 국장
  • 1965–1968국방공업부 크라스노고르스크 기계공장장
  • 1968–1979국방공업부 국장 → 계획생산총국장 → 차관
  • 1979–1980소련 국방공업부 제1차관
  • 1980–1985소련 국가계획위원회(Gosplan) 제1부의장
  • 1985–1989소련 각료회의 부의장 겸 국가물자공급위원회(Gossnab) 의장
  • 1989–1991소련 각료회의 제1부의장 · 1990.12 리시코프 입원 시 의장 대행
  • 1991유럽공동체 주재 소련 상임대표

니콜라이 블라디미로비치 탈리진

Николай Владимирович Талызин
중앙계획 기관 소련 러시아 1929–1991 ○ 자연사

세계 최초의 위성 TV 방송을 만든 페레스트로이카기의 고스플란 의장

1967년 오르비타가 가동되자 시베리아·극동 주민 수천만 명이 처음으로 모스크바 중앙TV를 시청했다. 탈리진은 "우리가 우주에서 신호를 보내는 첫 국가가 될 것"이라 했다.

통신 공학자 출신의 소비에트 테크노크라트로, 1967년 세계 최초의 위성 텔레비전 방송망인 오르비타 시스템의 과학적 개발을 이끌어 시베리아와 극동 주민 9천만 명에게 중앙 TV를 공급했다. 통신장관(1975~1980)을 거쳐 1985년 고르바초프에 의해 고스플란 의장으로 발탁되어 초기 페레스트로이카 경제 개혁의 계획을 주도했으나, 개혁 속도를 둘러싼 갈등 속에 1988년 경질되었고 1989년 보수파로 분류되어 퇴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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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5통신부 산하 무선연구소(NII Radio) 기술자, 수석 설계자, 선임연구원, 부소장
  • 1965소련 통신부 차관
  • 1970소련 통신부 제1차관
  • 1975–1980소련 통신장관
  • 1980–1985소련 각료회의 부의장 겸 코메콘 주재 소련 상임대표
  • 1985–1988소련 각료회의 제1부의장 겸 국가계획위원회(고스플란) 의장
  • 1988각료회의 사회발전국 국장
  • 1988–1989소련 각료회의 부의장 겸 코메콘 주재 소련 상임대표

스테판 아라마이소비치 시타랸

Степан Арамаисович Ситарян
중앙계획 기관 소련 아르메니아 1930–2009 ○ 자연사

협동조합법을 폴리트뷰로에서 밀어붙인 소련 최고위 아르메니아 경제학자

1988년 폴리트뷰로에서 보수파가 협동조합법에 격렬히 반대하자, 시타랸은 "이것은 사회주의를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라 사회주의를 구하는 법"이라고 답했다고 전해진다.

아르메니아 출신의 소비에트 경제학자이자 국가 관료로, 코시긴 개혁부터 페레스트로이카까지 소련 경제 개혁의 거의 모든 주요 장면에 이론가이자 실무 책임자로 참여한 교량형 인물이다. 1960년대 중반 코시긴 개혁 준비 위원회에서 상품-화폐 관계 도입을 설계했고, 1986~1989년 고스플란 제1부의장으로서 페레스트로이카 시기 경제 개혁의 핵심 규범들을 입안했다. 그가 주도한 1988년 협동조합법은 소련 역사상 처음으로 사적 기업 활동에 합법적 지위를 부여한 법률로, 보수파가 장악한 폴리트뷰로에서 직접 변론하여 관철시켰다. 이후 각료회의 부의장 겸 국가대외경제위원회 의장으로 대외경제 개방을 추진했고, 소련 해체 후 러시아 과학아카데미 대외경제연구소를 창설하여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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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3소련 재무부 산하 재무연구소(NIFI) 선임경제학자, 선임연구원
  • 1966경제학 박사, 이후 교수 직함 획득 (1970)
  • 1970–1974소련 재무부 재무연구소(NIFI) 소장
  • 1974–1983소련 재무차관
  • 1983–1986소련 국가계획위원회(고스플란) 부의장
  • 1986–1989소련 국가계획위원회(고스플란) 제1부의장, 경제체제 개선 부처간위원회 제1부의장
  • 1989–1990소련 각료회의 부의장 겸 국가대외경제위원회 의장, 코메콘 주재 소련 상임대표
  • 1990–1991CPSU 중앙위원회 위원
  • 1992–2009러시아 과학아카데미 대외경제연구소(후에 센터) 소장

유리 드미트리예비치 마슬류코프

Юрий Дмитриевич Маслюков
중앙계획 기관 소련 타지키스탄 1937–2010 ↓ 해임 1991 · 병사

소련 말기의 마지막 고스플란 세대

1998년 금융위기 속에서 옐친이 그에게 총리직을 제안했지만, 마슬류코프는 거절했다. "나는 프리마코프의 제1부총리로 일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소련 계획경제의 마지막 책임자였던 그는 권력 자체보다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택했다.

타지키스탄 레니나바드 출신의 엔지니어로, 이젭스크 방산 공장에서 출발해 소련 군수산업의 핵심 기술관료로 성장했다. 1988년 고스플란 의장과 정치국 위원(1989)을 지낸 마지막 계획경제 책임자였으며, 소련 붕괴 후에는 프리마코프 내각 제1부총리(1998~1999)로 금융위기를 수습했다. 이후 공산당 두마 의원으로 2010년 사망할 때까지 활동한, 소련 계획관료 세대와 탈소비에트 산업정치를 잇는 독특한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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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0s–1970s방위산업과 국가계획기관에서 기술관료로 성장
  • 1980s군수공업위원회와 계획기관에서 말기 소련 산업정책에 관여
  • 1988–1991국가계획위원회 의장, 계획경제 해체 국면을 관리
  • 1991 이후러시아 정치와 경제 관료제에서 계속 활동
  • 1998–1999러시아 정부에서 위기기 경제정책에 관여

블라디미르 이바노비치 셰르바코프

Владимир Иванович Щербаков
중앙계획 기관 소련 러시아 1949– ○ 소련 해체로 퇴임 · 생존

소련 중앙계획을 폐기한 마지막 고스플란 의장

그는 소련 계획경제의 종말을 이렇게 회고했다: "우리는 시장을 통해 사회적 약자를 공공재에 다가가게 할 메커니즘을 만들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아무도 들으려 하지 않았다."

소련 계획경제의 마지막 책임자로, 파블로프 내각에서 고스플란을 경제예측부로 개편하면서 초대 장관 겸 제1부총리가 되어 중앙계획에서 시장으로의 이행을 관리했다. 소련 붕괴 후에는 자동차 조립기업 '압토토르'를 설립해 성공한 포스트소비에트 기업가로 변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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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9–1974VAZ 건설 현장 엔지니어 → 톨리아티 콤소몰 간부
  • 1976–1982VAZ 계획경제국 차장·국장
  • 1982–1985KAMAZ 경제·계획 담당 부총책임자
  • 1985–1988국가노동위원회 국장 → 각료회의 기구 근무
  • 1989–1991국가노동위원회 의장
  • 1991.3–1991.5소련 부총리
  • 1991.5–1991.11제1부총리 겸 경제예측부 장관 (고스플란 후신)
  • 1991 이후국제투자기금 설립 → 압토토르 홀딩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