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주 항일투쟁을 이끌고 조선인민군 초대 총사령관을 지낸 국가원수
1955년 12월 박헌영 간첩 사건 재판장을 맡은 최용건은 박헌영에게 사형을 선고했으며,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의 선처 요청을 거절했다.
운남군관학교와 황푸군관학교에서 군사훈련을 받은 뒤 만주에서 동북항일연군 제2로군 참모장과 제7군장으로 항일무장투쟁을 지휘했으며, 김일성·김책과 함께 만주파 트로이카를 형성했다. 1945년 귀국 후 조만식의 조선민주당을 공산주의 노선으로 전환시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고, 1948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과 함께 초대 민족보위상 겸 조선인민군 총사령관으로 취임해 한국전쟁 당시 인민군의 최고위 현장 사령관을 지냈다. 1957년부터 1972년까지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으로서 명목상 국가원수를 역임하며 김일성 체제의 대외적 얼굴로 활약했다. 1976년 사망 시 국장이 집행되었고, 애국렬사릉에 안장되었다.
주요 활동과 소속
- 1948–1957 군사·지휘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경력 연표
- 1923–1924운남군관학교 졸업
- 1925–1927황푸군관학교 교관
- 1936–1940동북항일연군 제2로군 참모장·제7군장
- 1942–1945소련 극동군 제88국제여단 부참모장
- 1946–1955조선민주당 중앙위원회 위원장
- 1948–1957민족보위상 겸 조선인민군 총사령관
- 1957–1972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 1972–1974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부주석
관련 역사 사건
조선민주당의 당권 장악과 재편
1945년 10월 조만식이 창당한 조선민주당은 소련 점령하 북조선의 비공산주의 정당이었다. 최용건은 1945년 11월 당의 부위원장이 되었고, 동시에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 활동에도 참여했다. 1946년 1월 조만식이 신탁통치 문제로 소련 당국과 대립해 평양 고려호텔에 구금되자 최용건은 당을 이끌게 되었다. 그는 당내에서 조만식의 반탁 입장을 비판하고, 2월 28일 중앙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이어 당원 심사와 숙청을 추진했으며, 반대파의 이탈과 제거 속에 당은 독자적인 정치세력으로서의 기반을 잃었다. 1948년 3월 당 전당대회에서 공산당의 강령과 유사한 강령이 채택되었고, 조선민주당은 조선로동당의 정책에 종속되었다. 동시대 당내 변화에 대한 세부 서술은 다르지만, 독립적 정당에서 집권당 통제 아래 놓인 조직으로 전환되었다는 점은 연구자 Fyodor Tertitskiy의 분석과 최용건의 당권 장악 및 숙청을 기술한 기록이 공통으로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