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로츠키의 카르노, 적군의 행정 두뇌이자 삭제된 창건자
트로츠키는 회고록에 이렇게 썼다: "스클랸스키를 나의 대리인으로 선택했다. 그 후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다. 프랑스 혁명의 라자르 카르노에 비견될 인물이 있다면 바로 스클랸스키다."
적군의 실질적 창설자 중 한 명이자 트로츠키의 가장 신뢰받는 대리인. 키예프 의대 출신의 볼셰비키로, 1918년 겨우 26세에 공화국 혁명군사평의회 부의장 겸 전쟁인민위원 대리에 임명되어 내전 내내 트로츠키가 전선을 누비는 동안 모스크바에서 적군의 전 행정·작전 기구를 지휘했다. 트로츠키는 그를 프랑스 혁명의 군사 조직가 라자르 카르노에 비견했다. 스탈린의 권력 장악 속에서 1924년 해임되어 섬유 트러스트로 좌천되었고, 이듬해 미국 출장 중 롱레이크 호수에서 의문의 익사로 사망했다. 스탈린 시기 이후 그의 이름은 소련 군사사에서 철저히 삭제되었다.
주요 활동과 소속
- 1917– 군사·지휘 · 소련 · 군사 · 국방
경력 연표
- 1913키예프 대학 의대 재학 중 볼셰비키 입당, 지하 선전 활동
- 1916–1917징집, 보병 복무 후 군의관; 5군 군사혁명위원회 지도부
- 1917.10페트로그라드 군사혁명위원회 위원, 2차 소비에트 대회 상임위원
- 1917–1918총참모부·최고사령부 정치위원, 구군 해체 및 군수물자 보존 책임
- 1918.3–9공화국 최고군사평의회 위원
- 1918–1924공화국 혁명군사평의회 부의장 겸 육해군 인민위원 대리 — 적군 행정·작전 총괄
- 1924–1925해임, 모스수크노 국영섬유트러스트 관리국장
- 1925독일·프랑스·미국 기술정보 출장 중 롱레이크 호수에서 익사
관련 역사 사건
1924년 해임: 트로이카의 첫 번째 단계
스클랸스키는 1924년 3월 11일 모든 군사 직책에서 해임되었고, 그의 자리에는 우크라이나에서 군을 지휘했던 미하일 프룬제가 임명되었다. 레닌 사망 직후 스탈린·지노비예프·카메네프의 삼두 정치(트로이카)는 트로츠키를 적군에서 밀어내기 위한 단계적 계획을 세웠다. 그 두 번째 단계가 바로 트로츠키의 대리인이었던 스클랸스키를 해임하고 프룬제를 앉히는 일이었다. 당시 스탈린의 개인 비서였던 보리스 바자노프는 이 해임을 폴리트뷰로 내부의 권력 투쟁으로 설명했다. 표면적 명분은 군사 행정의 실패였다. 구세프 위원회가 적군을 검열한 뒤 군이 전투 능력을 갖추지 못했다는 보고를 내놓았고, 스클랸스키와 그가 이끄는 혁명군사평의회 중앙 집단이 임무를 감당하지 못한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트로츠키 자신은 이 조치를 권력 투쟁의 산물로 보았다. 스클랸스키는 경력의 대부분을 군 행정에 바쳤기 때문에 군 밖에 자기 세력 기반이 없었고, 해임은 사실상 정치적 제거였다. 프룬제는 1924년 2월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이렇게 증언했다: "스클랸스키 동지가 어떤 조치를 취하지 않은 데 대해 그를 비난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는 군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스클랸스키가 충분한 당적 권위를 갖지 못해 그 노력이 거듭 성과를 내지 못했다고 덧붙였다. 한편 트로츠키는 프룬제를 "군사 행정가로서는 스클랸스키보다 비교할 수 없이 약했다"고 평가했다. 해임된 스클랸스키는 다음 달 모스수크노 국영섬유트러스트 이사장으로 좌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