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부를라츠키

Фёдор Михайлович Бурлацкий
소련 러시아 1927–2014 ○ 자연사

흐루쇼프 개혁의 설계자, 소련 정치학의 선구자

「나는 날 수 있다고 확신했다. 철제 담장에 올라 팔을 벌리고 날아올랐다. 떨어져 팔이 빠졌다. 그것이 내 인생의 상징이 되었다」 — 권력에 맞서기를 회고하며

소련에서 정치학을 독립 학문으로 정립한 이론가. 1961년 당 강령에 '전인민국가' 테제를 삽입했으며, 해빙기부터 페레스트로이카까지 개혁 노선을 이은 개혁적 지식인이다.

경력 연표

관련 역사 사건

흐루쇼프 개혁의 이론적 설계자

부를라츠키는 흐루쇼프 시기 탈스탈린화 개혁의 핵심적 이론 작업을 도맡았다. 그의 이름 '표도르'는 프리드리히 엥겔스에게서 따온 것으로, 공산주의 가정에서 태어난 그의 이력은 소비에트 체제에 깊이 뿌리내려 있었다. 1958년 오토 쿠시넨이 주도한 마르크스-레닌주의 교과서 편찬에서 국가에 관한 장을 집필했고, 1960년 유리 안드로포프가 이끄는 CPSU 중앙위 컨설턴트 그룹 책임자로 발탁되어 1961년 당 강령 초안 작업에 2년 가까이 매달렸다.

이 작업에서 부를라츠키의 가장 중요한 기여는 '프롤레타리아 독재에서 전인민국가로의 이행' 테제였다. 스탈린식 계급 독재 개념을 공식 폐기하고 소비에트 국가가 전체 인민을 대표하는 단계로 진입했음을 선언한 이 전환은 흐루쇼프 개혁의 이론적 토대였다. 이와 함께 그는 간부 순환제, 최고 당·국가 직위의 임기 제한, 1인 권력과 개인숭배 부활 방지 조항 등을 강령 초안에 삽입했다. 같은 해 '공산주의 건설자의 도덕 규범'도 공동 집필하여 탈스탈린화의 윤리적 차원을 정식화했다.

부를라츠키는 흐루쇼프의 제22차 당대회 보고서 작성에도 참여했으며, 새로운 소비에트 헌법 초안 준비 작업반도 공동 지휘했다. 훗날 그는 이 시기를 회고하며 자신을 '혁명가가 아닌 개혁가'로 규정했고, 대중 시위를 선동하는 것은 민주적 전통이 정착되지 않은 나라에서 위험하다고 보았다. 이 신중한 개혁주의는 그의 평생을 관통하는 정치적 입장이었다.

전인민국가 테제와 소련 정치학의 탄생

부를라츠키의 가장 중요한 이론적 기여는 1961년 CPSU 강령에 삽입한 '전인민국가(общенародное государство)' 테제다. 이는 프롤레타리아 독재에서 전계급적 국가로의 이행을 선언함으로써, 스탈린식 계급투쟁 격화론을 공식적으로 폐기하는 이론적 근거가 되었다. 그는 오토 쿠시넨이 이끄는 마르크스-레닌주의 교과서 편찬 작업에도 참여하여 국가론 부분을 집필했으며, 1964년 박사학위 논문 「국가와 공산주의」에서 이 테제를 체계화했다.

그의 더 넓은 학문적 유산은 소련에서 정치학을 독립된 사회과학 분과로 정립한 것이다. 마르크스주의 전통에서 정치학은 오랫동안 '부르주아 사이비 과학'으로 치부되었으나, 부를라츠키는 알렉산드르 갈킨 등과 함께 정치사회학·비교정치·국제관계 분석을 소비에트 학계에 도입했다. 1974년 공저 『사회학·정치·국제관계』는 이 분야의 개척적 저작이며, 이후 러시아 과학아카데미 정치학 학술위원회 의장을 지냈다. 그는 마키아벨리에서 마오쩌둥에 이르는 정치 리더십 연구, '뉴씽킹' 개념의 이론화, 흐루쇼프에서 고르바초프까지 소련 개혁의 지적 계보를 잇는 저작들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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