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오르기 미하일로비치 포포프

Георгий Михайлович Попов
소련 러시아 1906–1968 ○ 자연사

전후 모스크바 재건을 이끌었으나 후계 구도에서 밀려난 당 보스

1949년 12월 16일, 중앙위 전원회의는 포포프를 서기직과 모스크바 당 제1서기에서 해임했다. 공식 이유는 '비판 억압, 자기비판 부재, 간부에 대한 그릇된 태도'였다. 그 자리에는 흐루쇼프가 앉았다.

셰르바코프 사후 모스크바 시·주 당 제1서기(1945~1949)를 맡아 전후 복구와 800주년 기념 사업을 진두지휘했으며, 동시에 중앙위 서기(1946~1949)로 발탁되어 스탈린의 후계 구도에서 잠시 거론될 만큼 급부상했다. 1949년 12월 '비판 억압과 간부 운용의 오류'를 이유로 전격 해임되었고, 흐루쇼프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그 후 도시건설·농기계 장관, 항공공장장, 폴란드 대사를 거쳐 변방 공장장으로 밀려났으며, 1965년 연금 생활에 들어갔다.

경력 연표

관련 역사 사건

1949년 12월의 몰락

포포프의 몰락은 몇 달에 걸쳐 누적된 정치적 공격의 결과였다. 1949년 1월 모스크바 시·주 당 합동 전원회의에서 흐루쇼프 측근이 포포프의 '비판 억압'과 측근 정치를 공개 비판했다. 이어 포포프가 스탈린의 70세 생일 선물로 추진한 전기 콤바인 시연이 『프라우다』 기사로 보도되자, 모스크바 시당이 각료회의 의장을 건너뛰고 연방 기업들에 지시를 내렸다는 이유로 스탈린이 직접 질책했다. 결정타는 익명의 편지였다. 작성자는 포포프가 '수령병에 사로잡혀' 측근들을 요직에 심었고, 모스크바 800주년 기념 연회에서 "미래의 당 지도자 포포프를 위하여"라는 건배가 나왔다고 고발했다. 스탈린은 말렌코프·베리야·카가노비치·수슬로프로 조사위원회를 꾸렸고, 1949년 12월 16일 중앙위는 포포프를 서기직과 모스크바 당 제1서기에서 해임했다. 흐루쇼프가 그 자리를 이어받았다. 레닌그라드 사건의 희생자들과 달리 포포프는 체포되지 않았지만, 그의 정치 경력은 사실상 여기서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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