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한 살에 아르메니아 국가보안장관이 된 수사관
1937년, 시인 티치안 타비제를 두 달 고문해 자백을 받아냈다. 타비제가 공범으로 17세기 민족영웅 사카제를 지목하자, 크리먄은 그 유명한 이름을 몰라본 채 조서에 그대로 기재했다.
1913년 카르스의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나 18세에 자캅카스 GPU 견습으로 보안기관에 투신했다. 트빌리시에서 대숙청기 그루지야 NKVD 수사관으로 급부상해 수사부장까지 올랐으며, 1937년 오라헬라슈빌리 사건 수사를 지휘했다. 1945년 서른한 살의 나이로 아르메니아 국가보안장관에 임명되었으나, 1947년 '당적이지 않은 행동'으로 해임되고 울리야놉스크로 좌천되었다. 1951년 불법 수사와 체포로 보안기관에서 축출된 뒤, 베리야 몰락 후 체포되어 1955년 트빌리시 재판에서 사형 선고를 받고 총살되었다.
경력 연표
- 1932–1935자캅카스 GPU 경제부 견습, 이어 담당관
- 1935–1937그루지야 NKVD 국가보안관리국 선임요원, 이어 과 부책임자
- 1937–1938그루지야 NKVD 국가보안관리국 과장
- 1938–1940그루지야 NKVD 수사부 부부장, 이어 부장
- 1940–1941리보프주 NKVD 관리국 부국장
- 1941–1943야로슬라블주 NKGB·NKVD 관리국 부국장
- 1943–1945야로슬라블주 NKGB 관리국장
- 1945–1947아르메니아 국가보안인민위원, 이어 장관
- 1947–1950울리야놉스크주 MGB 관리국장
- 1951–1953아르메니아 식품공업부 인사부장
- 1953–1955체포, 트빌리시 재판과 처형
관련 역사 사건
1937~1938년의 고문 수사관
크리먄은 1937~1938년 대숙청기 그루지야 NKVD에서 가장 잔혹한 수사관 중 하나로 악명을 떨쳤다. 레프 루리예는 그를 '완전한 사디스트'로 규정했다. 베리야의 측근인 보그단 코불로프와 세르게이 고글리제 아래에서 크리먄은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건들을 전담했으며, 구타와 고문으로 자백을 받아내는 '전문가'로 통했다.
그의 대표적 피해자는 시인 티치안 타비제와 작가 미하일 자바히슈빌리였다. 크리먄은 타비제를 두 달간 고문해 자백을 받아냈고, 시인이 공범으로 17세기 민족영웅 게오르기 사카제를 지목하자 그 이름을 몰라본 채 조서에 그대로 기재했다. 자바히슈빌리는 반나절 만에 죽을 정도로 구타당했으며, 목격자 헴추모프는 '크리먄이 꼬인 채찍으로 때려 거의 죽였다'고 증언했다. 전직 NKVD 직원 페트로샨은 크리먄이 주먹으로 이빨 네 개를 부러뜨리고 바닥의 피를 핥게 했다고 진술했다.
크리먄의 고문 수법은 당시 그루지야 NKVD에서 체계화된 방식을 따랐다. 고무 곤봉과 밧줄 구타, 손가락 사이에 연필을 끼워 비트는 고문, 선 채로 무거운 짐을 등에 지우기, '뜨거운 방'과 '차가운 방'을 오가게 하는 온도 고문, 며칠 밤낮 잠을 재우지 않는 '컨베이어' 신문 등이 일상적이었다. 트빌리시 내부감옥의 의사 쿠렐리는 구타로 사망한 수감자들의 사인을 일률적으로 '심장병'으로 기재했으며 부검은 하지 않았다고 증언했다.
크리먄은 사형수를 형장으로 호송하는 트럭 안에서까지 구타를 멈추지 않았다. 감옥 간수 테스토프는 크리먄과 사비츠키, 감사후르디아가 총살장으로 향하는 트럭 안에서 사형수 지지구리를 권총 손잡이로 때려 총살 전에 죽였다고 증언했다. 또 다른 사형수 슬로보다는 얼굴이 '온통 피투성이 가면'이 될 정도로 구타당했다. 전직 보안기관 직원 마르코빈은 진급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호송 중 크리먄과 사비츠키에게 구타당하며 '이제 진급시켜 줄 거냐'는 조롱을 들었다.
이러한 가혹행위에도 불구하고 크리먄은 1937년 7월 적성훈장을 수여받았고 1939년 5월에는 당에 입당했다. 1955년 트빌리시 재판에서 전직 NKVD 동료 나다라야는 '코불로프, 사비츠키, 크리먄, 하잔이 모든 고문과 살인의 조직자'라고 증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