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라브 콘스탄티노비치 마마르다슈빌리

Мераб Константинович Мамардашвили
소련 그루지야 1930–1990 ○ 심장마비

의식을 소리내어 말한 철학자

「영웅적 의식은, 우리가 정확히 사유하지 않을 때 악마가 우리를 가지고 논다는 것을 안다. 그러니 정확히 사유하라.」

소비에트 그루지야의 철학자. 마르크스에서 칸트·프루스트로 나아가며 의식과 자유를 비도그마적으로 탐구했다. 모스크바 논리학 서클을 공동 창립했고, 강의로 철학했으며 작업 대부분이 녹음으로 남았다.

경력 연표

모스크바 논리학 서클에서 '소리내어 사유하기'로

마마르다슈빌리는 1952년 모스크바 국립대 철학과에서 알렉산드르 지노비예프, 보리스 그루신, 게오르기 셰드로비츠키와 함께 모스크바 논리학 서클(Московский логический кружок)을 창립했다. 스탈린 사후 이념적 해빙기와 맞물려 탄생한 이 비공식 모임은 형식논리학을 넘어서는 '내용적 논리학'과 사고의 발생적 구조를 탐구했으며, 고리키 거리의 술집과 모스크바 거리를 배회하며 토론을 이어갔다. 그러나 마마르다슈빌리는 곧 조직화된 학파 운동에 회의를 품고 서클과 결별했다. 그는 '내적 정치적 이유'로 서클을 떠났다고 회고했으며, 자신에게 조직적·운동적 형태의 작업은 수용 불가능하다고 선언하고 철학을 '소크라테스적' 정신과 생활양식으로 재정의했다. 이후 그는 셰드로비츠키의 방법론적 체계화나 지노비예프의 논리학과는 전혀 다른 길: 강의실에서 실시간으로 수행되는 '살아있는 사유'로서의 철학으로 나아갔다. 연구자 빅토리야 파이비셴코가 지적하듯, 이 결별 이후 마마르다슈빌리는 자신의 산문에서 소비에트 변증법적 철학의 정형화된 의미 공식과 연결고리를 거의 완전히 제거했다. 그럼에도 그는 마르크스를 결코 버리지 않았고, 의식·형식·사회성 같은 개념들을 마르크스주의적 기초 위에서 재구성하며 독자적인 현상학적·칸트적 탐구로 발전시켰다.

실천으로서의 철학: 의식을 소리내어 말하기

마마르다슈빌리는 철학을 글로 남기는 체계가 아니라 살아 있는 의식의 행위로 보았다. 그가 평생 반복한 정의는 단순했다: 철학이란 '의식을 소리내어 말하는 것(сознание вслух)'이다. 그에게 진짜 철학('реальная философия')은 완성된 저작이 아니라, 사유가 일어나는 바로 그 현장: 강의실에서 말하고 듣는 가운데 구성되는 사건이었다. 이러한 입장은 실천적인 귀결을 낳았다. 그는 평생 거의 글을 쓰지 않았고, 출판된 네 권의 단행본 외에 대부분의 작업은 모스크바·트빌리시·빌뉴스·리가 등지에서 행한 강의를 제자와 동료들이 녹음한 테이프로 남았다. 자신의 철학함을 스스로 '소크라테스적'이라 불렀던 것도 이 때문이다. 소크라테스처럼 그는 저술 대신 대화를 철학의 매질로 삼았고, 사유를 타자 앞에서 수행하는 공적 행위로 실천했다. 데카르트·칸트·프루스트·후설에 관한 강의록들은 그가 사망한 후에야 책으로 묶여 출판되기 시작했으며, 오늘날 그의 철학적 유산은 문서보다 테이프와 구술의 형태로 전승되고 있다.

「시민을 창조하라」: 민족주의에 맞선 철학자의 마지막 싸움

1987년부터 마마르다슈빌리는 그루지야의 정치적 격변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었다. 그가 맞선 대상은 즈비아드 감사후르디아가 이끄는 급진적 민족주의였다. 마마르다슈빌리는 독립 자체를 반대한 것이 아니라, 민족적 정체성을 절대화하고 정치적 상대를 '파시스트' '협력자'로 낙인찍는 방식이야말로 공산당 독재의 또 다른 얼굴일 뿐이라고 보았다. 1990년 인터뷰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만약 내 민족이 감사후르디아를 선택한다면, 나는 내 민족을 거스를 수밖에 없다." 그가 내건 대안은 민족이 아니라 시민이었다. "우리의 목표는 시민을 창조하는 것이다. 어쩌면 위험한 일이고, 우리 모두가 멸망할지도 모른다." 1990년 11월, 감사후르디아 지지자들의 협박을 받으면서도 그는 대선을 앞둔 트빌리시로 향하던 중 모스크바 브누코보 공항에서 심장마비로 쓰러졌다. 향년 60세. 철학자의 죽음은 소련의 종말과 맞물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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