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키나와 소모전을 지휘한 일본군 장군
패전이 확정된 뒤에도 그는 항복 권고를 거부하고 최후 명령으로 끝까지 싸우라고 지시했다.
우시지마 미쓰루는 일본 제국 육군의 장교로, 중국 침략전쟁과 태평양전쟁에서 지휘관을 맡았다. 1944년 오키나와에 배치된 뒤 제32군을 이끌며 해안 결전 대신 남부의 종심 방어와 소모전을 택했지만, 그 방어 체계는 주민 동원과 전투 편입을 수반했다. 1945년 5월 슈리에서 남부로 철수한 결정은 전투를 연장했으나 피란민을 전장에 몰아넣어 주민 희생을 키웠고, 그는 항복을 거부한 채 6월 자결했다.
주요 활동과 소속
경력 연표
- 1908육군사관학교 제20기 졸업, 보병 소위
- 1916육군대학교 제28기 졸업
- 1918–1919시베리아 출병군 참모, 수송·배치 담당
- 1937–1939제36보병여단장, 중국 전선 지휘
- 1939–1941제11사단장, 만주국 호림 주둔
- 1942–1944육군사관학교장
- 1944–1945제32군 사령관, 오키나와 방어 지휘
- 1945육군대장 승진, 마부니에서 자결
관련 역사 사건
중국 침략전쟁의 여단장, 1937~1939
1937년 3월 소장으로 진급한 우시지마는 가고시마와 미야코노조 출신 부대로 편성된 보병 제36여단을 맡았다. 여단은 그해 8월 초 가고시마를 떠나 산하이관에 집결했고, 제6사단장 다니 히사오는 그에게 바다링 방면으로 진출한 중국 국민당군 제14군 3개 사단을 격파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병력에서 크게 열세였지만 우시지마는 8월 30일부터 9월 13일까지 하마령과 천군대를 공략하며 중국군 진지를 무너뜨렸고, 10월 14일에는 스자좡 근교까지 진출했다. 이 과정에서 여단은 장교 7명과 준사관 이하 170명이 전사하고 장교 13명과 준사관 이하 358명이 부상하는 손실을 입었다. 우시지마는 포탄이 떨어지는 최전선에 직접 나가 정찰했고, 중국군 병사들에게 '귀장군'이라는 별명으로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다.
11월 제6사단이 상하이 방면에 투입되면서 여단은 쿤산-쑤저우 선을 따라 진격해 12월 11일 시작된 난징 공략전에 참가했다. 여단은 난징에서 퇴각하는 중국군의 퇴로를 끊어 약 2만 명의 포로를 잡았다고 전해진다. 제6사단은 난징 함락 전후의 살육과 강간, 방화, 약탈에 가담한 부대 가운데 하나였고, 사단장 다니 히사오는 전후 난징 군사법정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오키나와 타임스』는 난징 당시의 군 지도부에 훗날 제32군 사령관과 참모장이 된 우시지마와 조 이사무가 있었다는 점을 환기하며, 두 사람이 중국에서 무엇을 했는지가 오키나와전을 이해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문제라고 전한다.
1938년 7월부터 여단은 우한 작전에 중핵 부대로 참가해 8월 황메이를 공략했고, 중국군이 양쯔강 제방을 터뜨리는 홍수 작전에도 진격을 멈추지 않고 9월 광지 요새를 점령한 뒤 10월 한커우에 들어갔다. 같은 해 12월 제11군 사령관 오카무라 야스지는 그에게 감상문을 수여했다. 1939년 3월 여단장 직에서 물러난 그는 예과사관학교장과 도야마학교장을 겸했고, 그해 8월 중장으로 진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