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콜라이 알렉세예비치 필류긴

Николай Алексеевич Пилюгин
소련 러시아 1908–1982 ○ 자연사

스푸트니크에서 부란까지: 소련 우주시대의 두뇌를 설계한 유도·항법 수석설계자

1946년 코롤료프가 젊은 필류긴을 찾아와 "로켓이 어디로 가야 할지 아는 뇌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필류긴은 자이로스코프 하나로 시작해 35년간 소련의 모든 우주비행을 조종하는 두뇌를 설계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근교 군인 가정에서 태어나 바우만 공대를 졸업하고 ЦАГИ에서 정밀기계공으로 일했다. 전후 독일에서 V-2 잔해를 연구하고 1946년 코롤료프의 추천으로 NII-885 자율제어계 수석설계자가 되었다. 그의 유도·항법·제어 시스템은 R-1과 R-7(스푸트니크·가가린), 프로톤, 행성간 탐사선, 부란 왕복선까지 소련 로켓의 거의 모든 계보를 관통했다. 코롤료프·글루시코·바르민과 함께 수석설계자회의에서 소련 우주개발 방향을 결정했으며, 1975년 사하로프의 노벨평화상을 비난한 아카데미 성명에 서명한 72인 중 하나였다.

경력 연표

관련 역사 사건

자율관성 대 무선지령 — 유도 방식 투쟁

초기 소련 로켓 개발에서 가장 첨예한 기술적 논쟁은 유도 방식이었다. 미하일 랴잔스키가 이끄는 무선교정 방식은 지상국이 로켓 궤도를 보정해주는 체계였고, 필류긴과 보리스 체르토크가 밀었던 자율관성 방식은 탑재된 자이로스코프와 가속도계만으로 로켓이 스스로 위치를 알아내는 체계였다. 무선 방식은 지상국 하나만 목표로 삼으면 되었지만, 자율관성 방식은 사전에 전자교란을 당하지 않으며 다수의 목표를 동시에 겨냥할 수 있다는 군사적 이점이 있었다.

체르토크는 회고록에서 이렇게 기록했다. "나는 초기부터 순수 자율관성 유도 체계를 주장했다. 랴잔스키는 내 제안이 비현실적이라고 반박했다. 필류긴은 논쟁에서 한 발 물러서 있었지만, 사적으로는 내게 동의했다." 어느 1대1 면담에서 필류긴은 체르토크에게 "미하일을 다시 건드리지 말게. 아직 이르고, 그를 화나게 할 필요는 없어. 세르게이(코롤료프)를 무선 제어에 등 돌리게 하지도 말게. 아직 때가 아니야"라고 말했다. 필류긴은 기술적 신념을 가지면서도, 코롤료프가 이끄는 수석설계자회의라는 정치적 공간에서 합의를 깨지 않고 점진적으로 방향을 바꾸는 전략을 구사한 것이다.

이 내부 투쟁은 1950년대 중반 NII-885 내에서도 재연되었다. 필류긴의 관성유도 진영과 코노플레프의 무선제어 진영이 연구·생산 우선권을 놓고 충돌했을 때, 코롤료프와 협의한 랴잔스키가 필류긴 편을 들면서 사실상 결판이 났다. 코노플레프는 반발했지만 대세는 기울었다. 이후 R-7 대륙간탄도미사일의 성공은 완전 자율관성 유도가 소련 로켓 공학의 표준이 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고, 필류긴의 NII-885는 스푸트니크부터 부란까지 모든 주요 기체의 '두뇌'를 독점 설계하는 위치에 올랐다.

← 카드로 돌아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