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스코레니예(가속화)
Uskoreniye (Acceleration)
1985년 4월 플레넘에서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선언한 초기 개혁 슬로건이자 정책으로, 사회·경제 발전의 '가속화'를 내걸고 기계제작 부문에 2000억 루블이라는 사상 유례없는 투자를 집중했다. 행정명령에 의존한 이 캠페인은 생산성 향상으로 이어지지 못했고, 수입 기계 구매가 소비재·식량 수입을 잠식하면서 1985년 전후 최초의 재정적자를 발생시켰다. 1987년 여름까지 사실상 실패로 판명나고 '페레스트로이카(개혁)'로 대체되었다.
상세
배경과 기원
'우스코레니예'라는 용어 자체는 1982년 11월 유리 안드로포프가 처음 사용했고, 1983년부터 고스플란(국가계획위원회)이 2000년까지의 장기 전망을 검토하는 과정에서 구체적 내용이 채워지기 시작했다. 콘스탄틴 체르넨코도 1984년 9월 작가동맹 플레넘에서 이 개념을 언급했다. 그러나 본격적인 국가정책으로 선언된 것은 고르바초프의 1985년 4월 플레넘 연설에서였다.
주요 내용
제27차 당대회(1986년 2~3월)에서 기계제작 부문의 우선발전이 제1과제로 확정되었다. 제12차 5개년계획(1986~1990)은 민간기계제작의 85%를 세계수준으로 끌어올린다는 목표 아래 이 부문에 2000억 루블을 배정했는데, 이는 직전 두 차례 5개년계획을 합친 것보다 많은 금액이었다. 중공업 우선이라는 마르크스주의 경제학 명제에 충실한 접근이었고, 여기에 '인간 요소' 동원, 노동규율 강화, 당기관원의 책임성 제고가 결합되었다.
실패의 경로
투자는 생산성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기계제작용 수입 장비 구매가 확대되면서 소비재와 곡물 수입 예산을 잠식했고, 이는 상품 부족과 숨은 인플레이션을 부채질했다. 1985년 국가예산은 전후 처음으로 적자로 돌아섰고, 1986년에는 그 적자폭이 3배로 뛰었다. 반알코올 캠페인으로 인한 세수 감소와 1986년 봄부터 시작된 국제유가 폭락, 체르노빌 사고 대응 비용이 적자를 더욱 키웠다.
폐기와 유산
1987년 6월 중앙위원회 플레넘에서 '우스코레니예'의 실패가 사실상 인정되었고, 슬로건은 '페레스트로이카'로 대체되었다. 이후 기업 자율성 확대, 협동조합 허용, 나아가 1989~1990년의 '500일 계획'으로 이어지는 개혁의 동기가 바로 이 행정명령형 가속화의 실패였다.
출처
- 위키백과 (러시아어) core definition; 200 billion ruble machine-building investment; budget deficit mechanism; 1985–1987 timeline; Andropov origin
- 위키백과 (영문) policy dates (20 April 1985 Plenum); relation to perestroika, glasnost, demokratizatsiya; monetary emission into heavy industry; June 1987 de facto abandonment
- expert.ru 200 billion rubles (more than two previous five-year plans); 85% machine-building target; first post-war budget deficit in 1985; deficit tripled in 1986; anti-alcohol campaign revenue loss; oil price collapse; policy abandoned by 19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