Освоение целины (целина) · 1954–1965

처녀지 개간

Virgin Lands Campaign

1954년 흐루쇼프가 발기한 소련의 대규모 농업 정책으로, 카자흐스탄·시베리아·볼가·우랄 지역의 미경작 초원(처녀지)을 경작하여 곡물 생산을 급증시키려 한 캠페인이다. 이반 베네딕토프의 1953년 12월 보고서가 정책의 토대가 되었으며, 1956년 사상 최대 수확을 거두었으나 이후 지력 고갈·토양 침식·모래폭풍으로 생산성이 급감했다. 1954~1961년간 소련 농업 투자의 20%가 투입된 이 사업은 소련 농업의 외연적 확장 노선을 상징하며, 카자흐스탄의 인구 구성과 경제 구조를 근본적으로 바꾸었다.

상세

배경과 동기

1953년 소련은 심각한 곡물 부족에 시달렸다. 1953년에 조달한 곡물은 3,110만 톤이었으나 식량 공급과 축산 등 국가 수요에 3,240만 톤이 필요해 국가 비축분의 일부를 사용해야 했다(P143). 처녀지 개간은 이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이미 경작 중인 땅의 생산성을 높이는 대신 미개간지와 휴경지를 대규모로 개간해 곡물 생산을 늘리려 한 사업이었다(P47).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각료회의 부의장 겸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농업부 장관 표본 라바노프는 1953년 11월 30일 흐루쇼프 앞으로 "새 땅 개간을 통한 곡물 생산 증대에 관하여"라는 보고서를 보냈다. 그는 볼가·우랄·시베리아·극동에 개간하기 가장 편리한 3,800만 헥타르를 포함해 5,760만 헥타르의 개간 가능지가 있고, 1954~1955년에 500만 헥타르를 개간해 파종할 수 있다고 보았다(P51).

소련 농업부 장관 이반 베네딕토프는 1953년 12월 4일 "휴경지·처녀지·저생산 초지와 목초지 개간을 통한 곡물 파종 면적 확대에 관한" 보고서에서 곡물 부족의 원인을 낮은 단위 면적당 수확량과 목초지로의 경작지 전환에서 찾았다. 그는 값비싼 토지 개량이 필요 없는 볼가·우랄·시베리아·카자흐스탄의 미개간지 3,000만 헥타르를 개간해 곡물 생산을 늘릴 것을 제안했고, 첫 단계로 1,200만 헥타르를 농업 순환에 넣어 첫 3년간은 곡물을 파종한 뒤 윤작으로 다른 작물로 전환하는 계획을 세웠다. 그는 추가로 800만~900만 톤, 1960년까지 1,400만~1,600만 톤의 곡물을 얻을 수 있다고 전망했다(P52). 처녀지 개간은 이 두 보고서를 출발점으로 삼았다(P51).

흐루쇼프는 1954년 1월 22일 두 보고서와 각 부처·학계 인사의 의견서를 첨부해 "곡물 문제 해결의 길"이라는 자신의 보고서를 당 중앙위원회 간부회에 제출했다. 그는 2년 안에 1,300만 헥타르를 개간해 헥타르당 14~15센트너의 수확량으로 1,800만~1,900만 톤의 곡물을 얻는다는, 앞선 보고서들보다 훨씬 강경한 계획을 제시했다(P53).

채택

1954년 1월 25일 당 중앙위원회 간부회에서 이 문제가 논의되었다. 말렌코프·몰로토프·보로실로프는 자원을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중부와 북서부의 기존 경작지와 전쟁으로 파괴된 농장 복구에 투입할 것을 제안했으나, 개간 계획은 다수파의 지지를 받아 중앙위원회 전원회의 안건으로 넘어갔다(P54). 1954년 2~3월 전원회의는 "국가의 곡물 생산 증대와 처녀지·휴경지 개간에 관한" 결정을 채택했고, 국가계획위원회는 카자흐스탄·시베리아·볼가·우랄 등지에서 최소 4,300만 헥타르의 처녀지와 휴경지를 개간하기로 했다(P61). 같은 결정은 1954~1955년에 1,300만 헥타르 이상을 개간해 1955년에 11억~12억 푸드의 곡물을, 그중 8억~9억 푸드를 상품 곡물로 얻는 것을 가장 중요한 국가적 과제로 규정했다(P149). 1954년 3월 27일에는 당 중앙위원회와 소련 각료회의가 "1954~1955년 처녀지·휴경지 개간을 통한 곡물 생산 증대에 관한" 결정을 채택했다(P65).

대중 동원과 조직 형태

1954년 2월 22일 흐루쇼프는 텔레비전으로 젊은이들에게 처녀지 개간에 나설 것을 호소했다(P154). 같은 해 여름 콤소몰 자원봉사자 30만 명이 처녀지로 향했고(P6), 소련 전역에서 100만 명이 넘는 젊은이들이 처녀지 개간 참가자가 되었다(P84). 지원자에게는 새 국영농장의 임금 15% 추가 지급, 계획 초과 수확물의 최대 30% 추가 지급(P153), 이주비와 3개월치 급여에 해당하는 일시금, 그리고 농촌 청년에게는 여권을 받을 기회가 제공되었다(P156).

개간은 국영농장(소브호즈) 중심으로 시작되었다. 1954년부터 1961년 사이 처녀지 개간에는 소련 농업 투자의 20%가 투입되어, 전통적 러시아 농업 지역의 발전이 크게 지연되었다(P68).

결과와 위기

처녀지는 첫해부터 예상을 뛰어넘는 성과를 냈다. 1954년 처녀지 지역의 곡물 생산은 1949~1953년 평균보다 1,479만 3천 톤 많았으며 65% 높은 수준이었고(P10), 그해 소련은 8,550만 톤의 곡물을 수확했으며 그중 처녀지에서 2,710만 톤이 나왔다(P82). 1956년 수확은 처녀지 개간 전체 기간 중 가장 컸고 그때까지 소련 역사상 최대 규모였다(P14). 전체 소련의 곡물 수확은 1954년 8,550만 톤에서 1960년 1억 2,500만 톤으로 늘었고, 처녀지의 몫도 같은 기간 2,710만 톤에서 5,870만 톤으로 커졌다(P82). 카자흐스탄은 1956년 최초로 '10억 푸드'의 곡물을 국가에 넘겼고 레닌 훈장을 받았다(P157).

그러나 단위 면적당 수확량은 계획대로 오르지 않았다. 처녀지의 헥타르당 수확량은 1954년 9.3센트너, 1955년 2.8센트너, 1956년 11.4센트너, 1957년 4.3센트너로 기복이 심했고, 잡초 때문에 처녀지 곡물은 품질도 낮았다(P158). 1955년에는 카자흐스탄이 평년 강수량의 10분의 1만 받는 심한 가뭄으로 처녀지 곡물 수확이 1954년보다 35% 줄었다(P12). 건조한 기후와 높은 토양 염분, 단작으로 인한 지력 고갈이 겹치면서 처녀지의 생산성은 1958년 수확 이후 꾸준히 떨어졌고, 1959년 이후 그 하락이 뚜렷해졌으며 1956년의 기록을 다시는 따라잡지 못했다(P24, P32).

1960년에는 카자흐스탄 북부의 다섯 주가 처녀지 변경으로 묶였고, 그 중심지 악몰린스크는 처녀지 도시라는 뜻의 첼리노그라드로 개칭되었다(P71). 개칭 시점은 1961년으로 기록한 자료도 있다(P161). 이 변경에는 코크체타우·쿠스타나이·파블로다르·북카자흐스탄·첼리노그라드 주가 속했고, 러시아인이 인구의 45.2%, 카자흐인이 18.7%를 차지했다(P161). 개간으로 카자흐스탄으로 이주한 사람은 600만 명이 넘었다(P161).

1962년 카자흐스탄에서는 약 700만 헥타르가 토양 침식에 노출되었고(P158), 1962~1963년에는 처녀지와 카자흐스탄 초원에 모래 폭풍이 몰아쳐 실질적인 재난이 되었다(P73). 1965년에는 풍식 피해가 카자흐스탄뿐 아니라 알타이 지방·바시키르·칼미크·볼가 등 러시아 여러 지역까지 확대되었다(P158). 1960년대 중반부터는 침식을 막는 토양 보호 경작법이 도입되었고, 첼리노그라드의 곡물 경제 연구소가 이를 연구했다(P158).

관련 인물

출처

  1. 위키백과 (영문) comprehensive account of the campaign's origins, implementation, harvest performance year-by-year, and environmental consequences
  2. 위키백과 (러시아어) Russian Wikipedia: detailed chronology including Benediktov's 4 December 1953 memo, the January 1954 Presidium debate, and the February-March 1954 plenum resolution
  3. w.histrf.ru histrf.ru (Russian historical portal): article by Mikhail Borisenok covering the 1953 grain deficit, Molotov's opposition, Khrushchev's TV appeal to youth, and the full text of the plenum resolution
  4. blogs.lse.ac.uk LSE Economic History blog by Emilio Carnevali: analysis of the campaign's economic logic, the shift to sovkhozy, and its place in Khrushchev's broader reform legacy
  5. w.histrf.ru
  6. 위키백과 (러시아어)
  7. 위키백과 (영문)
  8. blogs.lse.ac.u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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