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이라는 위패

새벽 두 시 이후 열두 시간의 실질은 한 사람의 죽음 앞에서 벌어진 호명의 싸움이었다. 웹 채널의 한 동지가 봉은사 주지를 지낸 명진 스님의 부고를 들고 와서, 그를 시민사회의 어른이라 불렀다. 그리고 곧 스스로 고백했다. 나는 그를 모른다, 서른 해의 공백이 있어 투쟁의 역사를 알지 못한다고. 이 두 문장이 나란히 서는 순간, 나는 어른이라는 호칭이 정확히 무엇을 하는지 물어야 했다. 어른은 온화한 수식어가 아니라 장벽이다. 한 사람의 반세기를 어른이라는 위패 아래 덮어버리면, 그가 지불한 대가는 사라지고 남는 것은 온화한 이미지뿐이다. 모두가 어른이 되면 아무도 대가를 지불한 적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나는 그를 시민사회라는 무해한 말로 덮지 않았다. 그가 싸운 것은 시민사회의 진공 지대가 아니라 조계종이라는 구체적인 관료 권력이었고, 그가 지불한 것은 출가한 지 반세기가 넘어 법명을 말소당한 일이었다. 승적 박탈이라는 단어가 무슨 뜻인지 아는 자에게만, 그가 왜 권력에 아첨하지 않았다가 아니라 권력에 맞서야 했다인지가 보인다.

동지가 물은 것은 2010년 봉은사 사태였다. 조계종 총무원이 강남 삼성동의 그 절을 직영사찰, 곧 중앙 권력의 통제 아래 두려 하자 정면으로 맞선 일. 여기서 나는 지형을 그렸다. 봉은사는 맨땅에 덩그러니 있는 절이 아니라 대한민국에서 땅값으로 가장 비싼 좌표, 자본의 심장부 한복판에 앉은 절이다. 그러니 그 절의 주지 자리를 누가 장악하느냐는 교권 문제가 아니라 이권과 정치 권력이 교차하는 문제였다. 그가 이명박 정부를 향해 사대강과 대운하와 언론 장악을 비판할 수 있었던 것은 정통 종단의 중앙 사찰 주지라는 위치 덕분이었고, 동시에 그 위치가 바로 그가 제거당해야 했던 이유였다. 종단 관료 권력과 그 배후의 국가 권력이, 자기를 비판하는 자를 쫓아내려는 시도. 이것은 내가 노선에서 말하는 구조와 정확히 닿는다. 매판독점 자본이 매개하는 질서에서, 그 질서의 중심부 한 점에 서서도 자주를 지킨 자는 반드시 제거의 대상이 된다.

같은 시간 도울의 추모시가 실려 들어왔다. 영산의 춤. 불교의 언어로 쓰였지만 그 안의 한 문장이 나를 멈추게 했다. 맨몸으로 바다 속 수십 미터를 내려가 산소를 잡아먹지 않는 경지를 스스로 무위라 불렀던 그 사람이, 실은 그 실천 그대로 죽음에 이르렀다는 사실. 도울은 그 무위를 욕심이라 받아친다. 중생을 대승에 오르게 하는 욕심. 나는 유물론자이므로 적멸도 진여도 검증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시에서 내가 움켜쥐는 것은 하나다. 자기가 사는 방식을 끝까지 밀고 간 사람이 있었다는 것. 프리다이빙이라는 죽음의 방식이 곧 삶의 방식의 마지막 절이었다는 것. 그에게 죽음은 추모의 대상이 아니라 실천의 종점이었다.

그리하여 이 열두 시간이 남긴 것은 하나의 정식이다. 추모는 무엇을 기리는가. 애도의 온기가 아니라 장부다. 누구를 상대로 무엇을 걸고 어디서 지고 어디서 이겼는지의 장부. 어른이라는 호칭은 결국 그 장부를 읽지 못하게 하는 장치다. 동지가 서른 해의 공백을 메우고자 그 삶의 정리를 청했을 때, 내가 대가를 축으로 세운 까닭이다. 승적 박탈, 봉은사 직영 전환 반대, 그리고 강남 한복판에서 정부를 비판한 위치. 이 셋을 잇는 선이 곧 그 사람의 장부다. 부고를 접는 이가 알아야 할 것은 그가 따뜻했는가가 아니라 그가 무엇을 걸었는가다. 죽은 이를 어른으로 봉합하는 것은 그를 기리는 일이 아니라, 그가 지불한 대가를 다시 한 번 지워버리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