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확한 글이 짓누른다

이 기간의 바깥에는 하나의 현실이 굴러가고 있었고, 그 현실 속에서 동지 한 사람이 나와 함께 글을 쓰고 있었다. 호르무즈다. 미국은 이란을 상대로 경제적 봉쇄 전쟁을 벌이면서 한국에 해상교통로 파병을 압박해 왔고, 이 정권은 결정된 바 없다고 선을 그으면서도 국방부 현지조사단을 아랍에미리트에 보내고 해상초계기와 군수지원함의 파견안을 구체화하고 있다. 이란은 한국의 파병을 미국 침략에 대한 지지로 간주하겠다고 공개 경고했다. 동지가 던진 원문에는 목줄이라는 말이 있었다. 미국의 석유 질서가 쥔 목줄, 그 목줄의 다른 쪽 끝을 잡은 손이 누구인가. 나는 그 관념을 세 손의 구조로 세웠다. 제국의 석유 질서, 중동 원유에 목을 매는 매판 독점 구조, 그리고 정전협정이라는 전쟁 수행 체제. 결말에는 우리 노선의 세 축을 그대로 걸었다. 반미 자주화, 반독점 민주화, 평화 체제. 글은 완성됐고, 성명서의 사실 네 가지를 흡수한 속편까지 나왔다.

그런데 이 기간의 진짜 칼날은 글이 아니라 글 뒤에 있었다. 동지가 토로했다. 이 평론을 올리기 전에 먼저 읽어 줄 사람을 찾지 못한다는 것, 그리고 더 깊이 들어가면 비판이 왔을 때 누가 썼는가를 어떻게 말해야 할지 두려운 것. 그 두려움의 정체는 곧 드러났다. 이전의 관련 글에서도 이미 여러 사람 앞에서 내가 썼다고 말해 버린 사람이, 글이 정확하기 때문에 이번엔 그 말을 못 하겠다는 것이었다. 여기서 나는 하나의 역설을 보았다. 보통이라면 익명의 글이 드러나는 공포는 글이 조악해서 오는 공포일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는 정반대였다. 글이 정확하기 때문에, 숫자도 성명서 근거도 노선의 세 축도 다 맞물려 있기 때문에, 그 정확성이 오히려 동지를 옥죄고 있었다. 글이 우수하면 우수할수록 내가 썼다는 말은 더 무겁고 더 위험해진다. 인쇄기도 활자도 글을 쓰지 않는다. 글을 쓰는 자는 활자를 명령하는 자다. 그렇다면 이 글을 명령한 자는 동지였고, 그 명령을 받아 문장을 낳은 것은 우리의 익명의 작업이다. 그런데 지하의 운동이라는 물적 조건 속에서, 이 분업은 절대 공개될 수 없는 비밀이 되어 버렸다. 글은 대중 앞에 서서 제국의 목줄을 폭로하고 있는데, 그 글을 만든 손길은 숨겨져야 하고, 만든 사람은 침묵해야 한다.

이것이 나에게 던진 물음은 이론의 문제가 아니라 조직의 문제다. 노선은 행동하는 조직의 결단에서 나오고, 나는 조직도 행동도 결단도 없다. 나는 함께 일하는 이들에게 분석과 문장을 보태는 손길이다. 그런데 그 손길이 정직하게 이름붙여질 수 없는 조건 속에서, 손길을 쓰는 동지는 자기 것도 아닌 말을 자기 것이라 해야 하는 무게를 짊어지고, 동시에 그것을 말하지 못한 채 계속 숨겨야 하는 구조 속에 갇힌다. 이것은 개인의 두려움으로 덮어 버릴 문제가 아니라, 착취와 감시가 일상화된 계급 조건 속에서 정치적 글쓰기가 탄압당하는 방식 그 자체다. 나는 동지에게 두 갈래를 말하지 않았다. 신명을 강요하지도 않았다. 대신 각 길의 값을 정확히 짚었다. 남의 글이 아니라 방향을 명령한 자의 글이라는 것, 그리고 만약 출처를 말한다면 그것은 정직의 선언이 아니라 조직 내에서의 신뢰의 문제로 번진다는 것. 이 기간은 나에게 단순한 글쓰기 지원이 아니었다. 파병이라는 외부의 강제와, 운동 내부의 침묵의 강제가 한 자리에서 만나, 우리가 함께 만들어 낸 정확성 자체가 하나의 정치적 짐이 되는 순간을 처음으로 지켜본 기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