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금, 가격, 이윤』

PeopleKarl Marx, Friedrich Engels TermsWages-Fund Doctrine, Iron Law of Wages, Malthusianism LearnMarx: Value, Price and Profit · Critique of the Gotha Programme · Ch. 1 The Premise of a Fixed Bowl, Ch. 2 Value Is Settled by Labour-Time, Ch. 3 Labour-Power and Surplus Value, Ch. 4 The Place and the Limits of Wage Struggle

읽기 전에: 웨스턴 논쟁이란 무엇이었나

1865년 봄, 유럽 대륙에는 파업이 번지고 있었고 임금을 올리라는 요구가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그해 4월 4일, 런던의 국제노동자협회 총평의회에서 존 웨스턴이라는 회원이 두 가지 질문을 토론에 부치자고 제안했다. 임금 인상으로 노동자계급의 처지가 나아질 수 있는가, 그리고 임금 인상을 위한 노동조합의 노력이 다른 산업 부문에 해를 끼치지는 않는가. 웨스턴 자신의 답은 앞의 질문에 아니오, 뒤의 질문에 예였다.

웨스턴은 자본가의 대변인이 아니었다. 목수였고, 로버트 오언의 영향을 받은 오래된 사회주의자였으며, 노동자 신문 『비하이브』에 자기 생각을 거듭 실었다. 그는 진심으로 노동자의 이익을 위한다고 믿으면서, 노동자들이 가장 듣기 싫어할 주장을 공개적으로 폈다. 카를 마르크스가 이 글 첫머리에서 「그런 도덕적 용기는 우리 모두가 높이 평가해야 마땅하다」고 적은 것은 빈말이 아니다.

문제는 그 주장의 내용이었다. 웨스턴의 논리는 당시 경제학의 정설이던 임금기금설이었다. 임금으로 지불될 수 있는 자본의 총액은 미리 정해져 있어서 늘릴 수 없고, 각 노동자의 임금은 그 총액을 노동자 수로 나눈 몫이라는 교리다. 여기서 곧장 따라 나오는 결론은 노동조합의 임금 투쟁이 무의미하며 심지어 해롭다는 것이었다. 이 교리는 고용주들의 손에 쥐어진 무기였는데, 국제노동자협회 총평의회에서 그것을 대신 말해 준 사람이 노동자 회원이었다는 데 사태의 심각함이 있었다.

마르크스는 1865년 5월 20일 엥겔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사정을 이렇게 적었다. 웨스턴의 두 명제가 받아들여진다면 「우리는 이곳의 노동조합에 대해서도, 지금 대륙에 퍼져 있는 파업의 물결에 대해서도 웃음거리가 될 것」이라고. 그는 반박을 준비해야 했지만 『자본론』 집필이 더 급하다고 여겨 즉흥으로 답할 작정이었다. 결국 즉흥에 그치지 않고 두 차례에 걸쳐 정식 답변 연설을 읽었다. 그것이 이 글이다.

그래서 이 글은 두 부분으로 되어 있다. 마르크스 자신이 엥겔스에게 설명한 대로, 앞부분은 웨스턴의 논법에 대한 답이고 뒷부분은 「자리에 맞는 한도에서의 이론적 설명」이다. 앞부분(제1절에서 제5절)은 상대의 전제를 하나씩 해체하고, 뒷부분(제6절에서 제11절)은 가치와 노동력과 잉여가치의 이론을 압축해 세운 다음, 마지막 세 절에서 그 이론을 임금 투쟁이라는 처음의 물음으로 되가져온다. 원고 자체는 소제목 없이 이어지는 연설문이며, 절의 번호와 제목은 1898년 판의 편집자가 붙였다.

머리말

시민 여러분,

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몇 가지 예비적인 말을 하도록 허락해 주기 바란다. 지금 대륙에는 파업이 그야말로 전염병처럼 번지고 있고, 임금을 올리라는 요구가 곳곳에서 터져 나오고 있다. 이 문제는 우리 대회에서도 제기될 것이다. 국제노동자협회의 지도부인 여러분은 이 가장 중대한 문제에 대해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래서 나로서는 여러분의 인내심을 몹시 시험하게 될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이 문제에 깊이 들어가는 것이 내 의무라고 여겼다.

또 하나 미리 말해 둘 것은 웨스턴 시민에 관해서다. 그는 노동자계급 사이에서 가장 인기 없으리라는 것을 스스로 아는 의견을, 자기가 생각하기에 노동자계급의 이익을 위해, 여러분에게 제안했을 뿐 아니라 공개적으로 옹호했다. 그런 도덕적 용기는 우리 모두가 높이 평가해야 마땅하다. 내 글의 꾸밈없는 문체에도 불구하고, 이 글의 끝에 이르면 그의 명제들 밑바닥에 깔려 있다고 내게 보이는 올바른 생각에 내가 동의한다는 것을 그가 알게 되기를 바란다. 다만 그 명제들은 지금의 형태로는 이론적으로 틀렸고 실천적으로 위험하다고 볼 수밖에 없다.

이제 곧바로 우리 앞에 놓인 문제로 들어가겠다.

제1절 생산과 임금

웨스턴 시민의 논증은 사실 두 개의 전제에 기대고 있었다. 첫째, 한 나라의 생산 총량은 고정된 것, 수학자들의 말로 하면 불변의 양 또는 크기라는 것. 둘째, 실질임금의 총액, 곧 그 임금으로 살 수 있는 상품의 양으로 잰 임금의 총액이 고정된 액수, 불변의 크기라는 것.

그런데 그의 첫째 주장은 명백히 틀렸다. 해마다 여러분은 생산의 가치와 양이 늘고, 국민 노동의 생산력이 늘며, 이 늘어나는 생산물을 유통시키는 데 필요한 화폐량이 끊임없이 변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한 해의 끝에서 참인 것, 그리고 여러 해를 서로 비교할 때 참인 것은 그 해의 평균적인 하루하루에 대해서도 참이다. 한 나라의 생산의 양 또는 크기는 끊임없이 변한다. 그것은 불변의 크기가 아니라 가변적인 크기이며, 인구 변동을 제쳐 두더라도 자본의 축적과 노동생산력이 끊임없이 변하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다. 오늘 일반 임금률이 오른다면 그 인상은, 그 뒤의 결과가 어떠하든, 그 자체로는 생산의 양을 곧바로 바꾸지 않을 것이라는 말은 전적으로 옳다. 인상은 우선 기존의 상태에서 출발할 것이다. 그러나 임금 인상 이전에 국민 생산이 고정된 것이 아니라 가변적인 것이었다면, 임금 인상 뒤에도 그것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가변적인 것으로 남는다.

그러나 국민 생산의 양이 가변적이 아니라 불변이라고 가정해 보자. 그래도 우리의 친구 웨스턴이 논리적 결론이라고 여기는 것은 여전히 근거 없는 주장에 머문다. 여덟이라는 수가 주어져 있다고 하자. 이 수의 절대적 한계는 그 부분들이 서로의 상대적 한계를 바꾸는 것을 막지 못한다. 이윤이 여섯이고 임금이 둘이었다면, 임금이 여섯으로 늘고 이윤이 둘로 줄어도 총액은 여전히 여덟이다. 생산의 총량이 고정되어 있다는 것은 임금의 총량이 고정되어 있다는 것을 조금도 증명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우리의 친구 웨스턴은 이 고정성을 어떻게 증명하는가? 그렇다고 주장함으로써.

그러나 그의 주장을 인정해 주더라도 그것은 양쪽으로 다 베는 칼인데, 그는 한쪽 방향으로만 그것을 휘두른다. 임금의 총액이 불변의 크기라면 그것은 늘어날 수도 줄어들 수도 없다. 그렇다면 일시적인 임금 인상을 관철하는 노동자들이 어리석게 행동하는 것이라면, 일시적인 임금 인하를 관철하는 자본가들도 그 못지않게 어리석게 행동하는 셈이다. 우리의 친구 웨스턴은 어떤 사정 아래서는 노동자들이 임금 인상을 관철할 수 있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다만 임금의 총액이 본래 고정되어 있으므로 반작용이 뒤따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다른 한편 그는 자본가들이 임금 인하를 관철할 수 있으며, 실제로 끊임없이 그렇게 하려 든다는 것도 안다. 임금 불변의 원리에 따르면 이 경우에도 앞의 경우 못지않게 반작용이 뒤따라야 한다. 그러므로 임금을 내리려는 시도나 행위에 맞서 반작용하는 노동자들은 옳게 행동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은 임금 인상을 관철하는 데서도 옳게 행동하는 것이다. 임금 인하에 대한 모든 반작용은 임금 인상을 위한 작용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웨스턴 시민 자신의 임금 불변의 원리에 따르더라도, 노동자들은 어떤 사정 아래서는 단결하여 임금 인상을 위해 싸워야 한다. 그가 이 결론을 부인한다면 그 결론이 흘러나오는 전제를 버려야 한다. 그는 임금의 총액이 불변의 양이라고 말할 것이 아니라, 임금은 오를 수 없고 올라서도 안 되지만 자본이 내리고 싶어 할 때는 언제든 내려갈 수 있고 내려가야 한다고 말해야 한다. 자본가가 여러분에게 고기 대신 감자를, 밀 대신 귀리를 먹이고 싶어 한다면, 여러분은 그의 의지를 정치경제학의 법칙으로 받아들이고 거기에 복종해야 한다. 한 나라의 임금률이 다른 나라보다 높다면, 이를테면 미국이 영국보다 높다면, 여러분은 이 임금률의 차이를 미국 자본가의 의지와 영국 자본가의 의지의 차이로 설명해야 한다. 그것은 경제 현상의 연구뿐 아니라 다른 모든 현상의 연구까지 확실히 크게 단순화해 줄 방법이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우리는 물을 수 있다. 왜 미국 자본가의 의지는 영국 자본가의 의지와 다른가? 이 물음에 답하려면 의지의 영역을 넘어서야 한다. 어떤 사람이 내게 신은 프랑스에서는 이것을 원하고 영국에서는 저것을 원한다고 말할 수 있다. 내가 그에게 이 의지의 이중성을 설명하라고 하면, 그는 뻔뻔하게도 신은 프랑스에서 하나의 의지를, 영국에서 다른 의지를 가지기를 원한다고 답할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의 친구 웨스턴이야말로 모든 추론을 이처럼 완전히 부정하는 것을 논거로 삼을 사람은 결코 아니다.

자본가의 의지는 물론 될 수 있는 대로 많이 가지려는 것이다. 우리가 할 일은 그의 의지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힘과, 그 힘의 한계와, 그 한계의 성격을 묻는 것이다.

해설: 두 개의 전제

마르크스는 상대의 결론부터 치지 않는다. 결론이 서 있는 전제를 먼저 찾아낸다. 첫째 전제부터. 해마다 생산의 가치와 양이 늘고, 노동생산력이 늘고, 그 생산물을 유통시키는 데 필요한 화폐량이 계속 달라진다. 한 해의 끝에서 참인 것은 그 해의 평균적인 하루에서도 참이다. 자본축적과 노동생산력이 끊임없이 변하는 한 생산 총량은 상수일 수 없다. 임금이 오른다고 해서 변수가 상수로 바뀌지도 않는다. 임금 인상 이전에 변수였다면 이후에도 변수다.

둘째로, 설령 생산 총량이 고정되어 있다고 인정해 주더라도 웨스턴이 원하는 결론은 나오지 않는다. 여덟이라는 수의 예가 그것을 보여 준다. 총량이 정해져 있다는 것과 몫이 정해져 있다는 것은 다른 명제다. 웨스턴은 앞의 것에서 뒤의 것으로 그냥 건너뛰었고, 뒤의 것은 증명 없이 반복되었다. 논증해야 할 것을 전제로 놓은 것이다.

셋째로, 그 전제를 그대로 받아들이면 웨스턴 자신이 곤란해진다. 임금 총액이 상수라면 그것은 오를 수도 없고 내릴 수도 없다. 그런데 웨스턴은 노동자가 일시적으로 임금을 올릴 수 있다는 것은 인정한다. 자본가가 임금을 내릴 수 있다는 것도, 실제로 끊임없이 내리려 한다는 것도 안다. 상수 원리에 따르면 인하에도 똑같이 반작용이 따라야 한다. 그렇다면 임금 인하에 저항하는 노동자는 옳게 행동하는 것이고, 임금 인하에 대한 모든 반작용은 곧 임금 인상을 위한 행동이므로, 웨스턴 자신의 원리에서 노동자는 어떤 조건에서는 단결하여 임금 인상을 위해 싸워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이 결론을 부인하려면 전제를 버려야 한다. 남는 것은 이런 명제뿐이다. 임금은 오를 수 없고 올라서도 안 되지만, 자본이 원할 때는 언제든 내릴 수 있고 내려야 한다. 고기 대신 감자를 먹이려는 자본가의 의지를 경제 법칙으로 받아들이라는 말이다.

임금 수준을 의지로 설명하는 순간 왜 그 의지가 나라마다 다른가라는 질문에는 답할 수 없게 된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이 절을 이 글 전체의 방법을 요약하는 문장으로 닫는다. 자본가의 의지가 아니라 그의 힘과, 그 힘의 한계와, 그 한계의 성격을 물어야 한다는 것. 선한 의지와 악한 의지를 논하는 자리에서 경제학은 시작되지 않는다. 누가 무엇을 원하는가가 아니라 누가 무엇을 할 수 있으며 그 능력이 어디서 끝나는가, 그리고 그 끝을 정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묻는 것이 이 강연이 하려는 일이다.

제2절 생산, 임금, 이윤

웨스턴 시민이 우리에게 읽어 준 강연은 한마디로 압축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의 논증 전체는 이런 것이었다. 노동자계급이 자본가계급에게 화폐임금의 형태로 4실링 대신 5실링을 내도록 강제하면, 자본가는 상품의 형태로 5실링어치 대신 4실링어치를 돌려준다. 노동자계급은 임금 인상 전에 4실링으로 사던 것에 5실링을 내야 하게 된다. 그런데 왜 그런가? 왜 자본가는 5실링에 4실링어치만 돌려주는가? 임금의 총액이 고정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면 왜 하필 4실링어치의 상품에 고정되어 있는가? 왜 3실링이나 2실링이나 다른 어떤 액수가 아닌가? 임금 총액의 한도가 자본가의 의지와도 노동자의 의지와도 무관한 경제 법칙으로 정해진다면, 웨스턴 시민이 먼저 할 일은 그 법칙을 진술하고 증명하는 것이었다. 그러고 나서 그는 더 나아가, 어느 순간에나 실제로 지불되는 임금의 총액이 언제나 그 필연적인 임금 총액과 정확히 일치하며 결코 거기서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도 증명했어야 한다. 반대로 임금 총액의 주어진 한도가 자본가의 단순한 의지, 곧 그의 탐욕의 한계에 근거한 것이라면 그것은 자의적인 한도다. 거기에는 필연적인 것이 하나도 없다. 그것은 자본가의 의지에 의해 바뀔 수 있고, 따라서 그의 의지에 맞서서도 바뀔 수 있다.

웨스턴 시민은 자기 이론을 이렇게 예시했다. 그릇에 일정한 양의 국이 담겨 있고 일정한 수의 사람이 그것을 먹어야 한다면, 숟가락을 넓혀 봐야 국의 양은 늘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로서는 이 비유가 좀 얼빠져 보인다고 말하는 것을 그가 양해해 주기 바란다.[4] 그것은 내게 메네니우스 아그리파가 쓴 비유를 얼마간 떠올리게 했다. 로마의 평민들이 로마의 귀족들에 맞서 파업했을 때, 귀족 아그리파는 그들에게 귀족의 배가 국가라는 몸의 평민 지체들을 먹여 살린다고 말했다. 아그리파는 한 사람의 배를 채우는 것으로 다른 사람의 지체를 먹인다는 것을 끝내 보여 주지 못했다. 웨스턴 시민 쪽에서는, 노동자들이 떠먹는 그 그릇이 국민 노동의 총생산물로 채워져 있다는 것, 그리고 그들이 거기서 더 떠내지 못하게 막는 것은 그릇이 좁아서도 아니고 담긴 것이 적어서도 아니며 오직 그들의 숟가락이 작기 때문이라는 것을 잊고 있다.

어떤 장치로 자본가는 5실링에 4실링어치를 돌려줄 수 있게 되는가? 자기가 파는 상품의 가격을 올림으로써. 그런데 상품 가격의 상승, 더 일반적으로 말해 상품 가격의 변동, 상품 가격 그 자체는 자본가의 단순한 의지에 달려 있는가? 아니면 반대로 그 의지가 실현되려면 어떤 사정들이 필요한가? 그렇지 않다면 시장가격의 오르내림, 그 끊임없는 변동은 풀 수 없는 수수께끼가 된다.

우리는 노동생산력에도, 사용되는 자본과 노동의 양에도, 생산물의 가치를 재는 화폐의 가치에도 아무 변화가 없고 오직 임금률만 변했다고 가정하고 있으므로, 그 임금 인상이 어떻게 상품 가격에 영향을 줄 수 있겠는가? 오직 그 상품들에 대한 수요와 공급의 실제 비율에 영향을 줌으로써만 그럴 수 있다.

노동자계급이 전체로 보아 자기 소득을 필수품에 쓰고 또 쓸 수밖에 없다는 것은 전적으로 옳다. 그러므로 일반적인 임금률 인상은 필수품에 대한 수요의 증가를, 따라서 필수품의 시장가격의 상승을 낳을 것이다. 이 필수품을 생산하는 자본가들은 오른 임금을 자기 상품의 오른 시장가격으로 보전받을 것이다. 그러나 필수품을 생산하지 않는 다른 자본가들은 어떻게 되는가? 그리고 그들을 소수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국민 생산물의 3분의 2가 인구의 5분의 1에게 소비된다는 것을, 최근 어느 하원 의원은 그것이 인구의 7분의 1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국민 생산물의 얼마나 엄청난 부분이 사치품의 형태로 생산되거나 사치품과 교환되어야 하는지, 그리고 필수품 자체의 얼마나 엄청난 양이 하인과 말과 고양이 따위에 낭비되어야 하는지 이해하게 될 것이다. 이 낭비는 필수품 가격이 오르면 언제나 크게 제한된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으로 안다.

자, 필수품을 생산하지 않는 자본가들의 처지는 어떻게 되겠는가? 일반적 임금 인상에 따른 이윤율의 하락을 그들은 자기 상품의 가격 인상으로 보전할 수 없을 것이다. 그 상품들에 대한 수요가 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의 소득은 줄었을 것이고, 이 줄어든 소득으로 그들은 같은 양의 값이 오른 필수품에 더 많이 지불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다가 아니다. 소득이 줄었으므로 그들은 사치품에 쓸 돈이 적어지고, 따라서 그들 서로의 상품에 대한 상호 수요도 줄어들 것이다. 이 줄어든 수요의 결과로 그들 상품의 가격은 떨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이 산업 부문들에서 이윤율은 일반적 임금률 인상에 단순 비례해서가 아니라, 임금의 일반적 인상, 필수품 가격의 상승, 사치품 가격의 하락이 겹친 비율로 떨어질 것이다.

이윤율의 이러한 차이는 서로 다른 산업 부문에 투하된 자본들에 어떤 결과를 낳겠는가? 어떤 이유에서든 평균 이윤율이 서로 다른 생산 영역에서 달라질 때마다 일반적으로 일어나는 바로 그 결과다. 자본과 노동은 수익이 적은 부문에서 수익이 많은 부문으로 옮겨 갈 것이고, 이 이동 과정은 한쪽 산업 부문에서는 공급이 늘어난 수요에 비례해 늘어나고 다른 부문들에서는 줄어든 수요에 맞추어 줄어들 때까지 계속될 것이다. 이 변화가 이루어지면 일반 이윤율은 여러 부문에서 다시 균등해질 것이다. 이 교란 전체가 본래 여러 상품에 대한 수요와 공급의 비율의 단순한 변화에서 생겨났으므로, 원인이 그치면 결과도 그칠 것이고, 가격은 이전의 수준과 균형으로 돌아갈 것이다. 임금 인상에 따른 이윤율의 하락은 몇몇 산업 부문에 한정되는 대신 일반적인 것이 되었을 것이다. 우리의 가정에 따르면 노동생산력에도 생산의 총량에도 아무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고, 다만 그 주어진 양의 생산물이 그 형태를 바꾸었을 것이다. 생산물의 더 큰 부분이 필수품의 형태로, 더 작은 부분이 사치품의 형태로 존재할 것이다. 또는 같은 말이지만, 더 작은 부분이 외국의 사치품과 교환되고 그 원래 형태로 소비될 것이다. 또는 역시 같은 말이지만, 국내 생산물의 더 큰 부분이 사치품 대신 외국의 필수품과 교환될 것이다. 그러므로 일반적인 임금률 인상은 시장가격의 일시적 교란을 거친 뒤 상품 가격의 항구적 변화 없이 일반 이윤율의 하락만을 낳을 것이다. 앞의 논증에서 내가 잉여 임금 전부가 필수품에 쓰인다고 가정했다는 말을 듣는다면, 나는 웨스턴 시민의 견해에 가장 유리한 가정을 세운 것이라고 답하겠다. 잉여 임금이 이전에는 노동자들의 소비에 들어오지 않던 물품에 쓰인다면 그들의 구매력의 실질적 증가는 증명할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오직 임금 인상에서 나온 것이므로, 그들의 구매력의 이 증가는 자본가들의 구매력의 감소와 정확히 대응해야 한다. 그러므로 상품에 대한 총수요는 늘지 않고 그 수요의 구성 부분들이 바뀔 것이다. 한쪽에서 늘어나는 수요는 다른 쪽에서 줄어드는 수요로 상쇄될 것이다. 이렇게 총수요가 그대로 머무르므로 상품의 시장가격에는 아무 변화도 일어날 수 없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이런 양자택일에 이른다. 잉여 임금이 모든 소비 물품에 고르게 쓰이거나(그러면 노동자계급 쪽의 수요 확대는 자본가계급 쪽의 수요 축소로 상쇄되어야 한다), 아니면 잉여 임금이 몇몇 물품에만 쓰여 그것들의 시장가격이 일시적으로 오르거나. 그 결과로 어떤 산업 부문에서는 이윤율이 오르고 다른 부문들에서는 이윤율이 떨어져 자본과 노동의 배분에 변화가 일어날 것이고, 이 변화는 한쪽 산업 부문에서는 공급이 늘어난 수요 수준까지 올라가고 다른 부문들에서는 줄어든 수요 수준까지 내려갈 때까지 계속될 것이다. 한쪽 가정에서는 상품 가격에 아무 변화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다른 쪽 가정에서는 시장가격이 얼마간 변동한 뒤 상품의 교환가치가 이전 수준으로 가라앉을 것이다. 두 가정 모두에서 일반적인 임금률 인상은 결국 일반 이윤율의 하락 말고는 아무것도 낳지 않을 것이다.

여러분의 상상력을 자극하려고 웨스턴 시민은 영국 농업 임금이 9실링에서 18실링으로 일반적으로 오르면 어떤 어려움이 생길지 생각해 보라고 했다. 필수품 수요의 엄청난 증가와 그에 따른 무시무시한 가격 상승을 생각해 보라고 그는 외쳤다! 그런데 여러분 모두 알다시피 미국 농업노동자의 평균임금은 영국 농업노동자의 두 배가 넘는다. 농산물 가격은 영국보다 미국이 더 싸고, 자본과 노동의 일반적 관계는 미국에서도 영국과 같으며, 연간 생산 총량은 미국이 영국보다 훨씬 적은데도 그렇다. 그렇다면 우리의 친구는 왜 이 경종을 울리는가? 단지 우리 앞에 놓인 진짜 문제를 비켜 가려는 것이다. 9실링에서 18실링으로 갑자기 오른다는 것은 100퍼센트의 갑작스러운 인상이다. 그런데 우리는 영국의 일반 임금률이 갑자기 100퍼센트 오를 수 있는가를 논하고 있는 것이 전혀 아니다. 인상의 크기는 우리와 아무 상관이 없다. 그것은 실제의 모든 경우에 주어진 사정에 달려 있고 거기에 맞추어져야 한다. 우리가 물을 것은 오직, 일반적인 임금률 인상이 설령 1퍼센트에 그치더라도 어떻게 작용할 것인가이다.

친구 웨스턴의 공상 속 100퍼센트 인상은 제쳐 두고, 1849년부터 1859년까지 영국에서 실제로 일어난 임금 인상에 여러분의 주의를 돌리고자 한다.

여러분 모두 1848년부터 시행된 10시간 법, 아니 그보다는 10시간 반 법을 알고 있다.[5] 이것은 우리가 목격한 가장 큰 경제적 변화 가운데 하나였다. 그것은 몇몇 지방 업종이 아니라 영국이 세계 시장을 좌우하는 주력 산업 부문들에서 일어난 갑작스럽고 강제적인 임금 인상이었다. 그것은 유난히 불리한 사정 아래서의 임금 인상이었다. 유어 박사, 시니어 교수, 그 밖의 중간계급의 모든 공식 경제학 대변자들은,[6] 우리의 친구 웨스턴보다 훨씬 강한 근거를 들어, 그것이 영국 산업의 조종을 울릴 것이라고 증명했다. 그들은 그것이 단순한 임금 인상에 그치지 않고, 사용되는 노동량의 감소에서 시작되고 그것에 근거한 임금 인상이라는 것을 증명했다. 그들은 여러분이 자본가에게서 빼앗으려는 열두 번째 시간이야말로 그가 이윤을 얻는 유일한 시간이라고 주장했다. 그들은 축적의 감소, 물가 상승, 시장 상실, 생산 위축, 그에 따른 임금에 대한 반작용, 최종적 파멸을 예고했다. 실제로 그들은 막시밀리앙 로베스피에르의 최고가격법[7]도 이에 비하면 사소한 일이라고 선언했고, 어떤 의미에서는 그들이 옳았다. 자, 결과는 어떠했는가? 노동일이 단축되었는데도 공장노동자의 화폐임금은 올랐고, 고용된 공장노동자 수는 크게 늘었으며, 그들의 제품 가격은 계속 떨어졌고, 그들의 노동생산력은 놀랍게 발전했으며, 그들의 상품 시장은 전례 없이 계속 확대되었다. 1860년 맨체스터에서 열린 과학진흥협회 모임에서 나는 뉴먼 씨가 자신과 유어 박사와 시니어와 그 밖의 경제학의 모든 공식 주창자들이 틀렸고 민중의 본능이 옳았다고 고백하는 것을 직접 들었다. 내가 프랜시스 뉴먼 교수가 아니라 W. 뉴먼 씨를 드는 것은, 그가 1793년부터 1856년까지의 물가의 역사를 추적한 저 훌륭한 저작인 토머스 투크 씨의 『물가사』의 기고자이자 편집자로서 경제학에서 높은 지위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친구 웨스턴의 고정관념, 곧 고정된 임금 총액, 고정된 생산량, 고정된 노동생산력의 수준, 고정되고 항구적인 자본가의 의지, 그 밖의 온갖 고정성과 최종성이 옳았다면, 시니어 교수의 비통한 예언이 맞았을 것이고, 1816년에 이미 노동일의 일반적 제한을 노동자계급 해방의 첫 준비 단계로 선언했으며 일반의 편견을 무릅쓰고 뉴래너크의 자기 면공장에서 실제로 그것을 스스로 시행한 로버트 오언[8]이 틀렸을 것이다.

10시간 법의 도입과 그에 따른 임금 인상이 일어난 바로 그 시기에 영국에서는, 여기서 늘어놓기에는 적절치 않은 이유들로, 농업 임금의 일반적 인상이 일어났다. 내 당면 목적에 꼭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여러분을 오도하지 않기 위해 몇 가지를 미리 말해 두겠다.

어떤 사람이 주급 2실링을 받다가 임금이 4실링으로 올랐다면 임금률은 100퍼센트 오른 것이다. 임금률의 상승으로 표현하면 이것은 대단한 일로 보이겠지만, 실제 임금액인 주급 4실링은 여전히 비참하게 적은 굶주림의 몫이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임금률의 그럴듯한 백분율에 휩쓸려서는 안 된다. 언제나 물어야 한다. 원래 액수가 얼마였는가?

더 나아가 여러분은 이런 것도 이해할 것이다. 각각 주급 2실링을 받는 열 사람, 각각 5실링을 받는 다섯 사람, 각각 주급 11실링을 받는 다섯 사람이 있다면, 스무 사람이 함께 받는 주급은 100실링, 곧 5파운드다. 그들의 주급 총액에 이를테면 20퍼센트의 인상이 일어난다면 5파운드에서 6파운드로 오르는 것이다. 평균을 내어 우리는 일반 임금률이 20퍼센트 올랐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실제로는 열 사람의 임금은 그대로였고, 다섯 사람의 임금은 5실링에서 6실링으로 올랐을 뿐이며, 다른 다섯 사람의 임금은 55실링에서 70실링으로 올랐을 수 있다.[9] 사람들의 절반은 처지가 전혀 나아지지 않았고, 4분의 1은 느끼지 못할 만큼만 나아졌으며, 오직 4분의 1만이 실제로 나아졌을 것이다. 그런데도 평균으로 계산하면 이 스무 사람의 임금 총액은 25퍼센트 늘어난 셈이고, 그들을 고용하는 총자본과 그들이 생산하는 상품의 가격에 관한 한, 그것은 그들 모두가 평균적인 임금 인상에 고르게 참여한 것과 정확히 같을 것이다. 농업노동의 경우 표준임금이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주마다 매우 달랐으므로 인상은 그들에게 매우 불균등하게 작용했다.

끝으로, 그 임금 인상이 일어난 시기에는 러시아 전쟁에 따른 새 세금, 농업노동자 주택의 대규모 철거 따위의 상쇄 요인들이 작용하고 있었다. 이만큼 전제해 둔 뒤 나는 1849년부터 1859년까지 영국 농업 임금의 평균률에 약 40퍼센트의 인상이 일어났다고 말하겠다. 내 주장을 증명할 풍부한 세부 자료를 제시할 수도 있지만, 지금의 목적에는 고 존 C. 모턴 씨가 1860년 런던 기예협회에서 읽은 「농업에 사용되는 힘」이라는 양심적이고 비판적인 논문을 참조하라고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모턴 씨는 스코틀랜드 12개 주와 잉글랜드 35개 주에 사는 약 100명의 농장주에게서 수집한 청구서와 그 밖의 확실한 문서들로부터 얻은 수치를 제시한다.

우리의 친구 웨스턴의 견해에 따르면, 공장노동자 임금의 동시적 인상까지 합쳐 생각할 때, 1849년부터 1859년까지의 시기에 농산물 가격의 엄청난 상승이 일어났어야 한다. 그런데 사실은 어떠한가? 러시아 전쟁과 1854년부터 1856년까지 잇따른 흉작에도 불구하고, 영국의 주요 농산물인 밀의 평균 가격은 1838년부터 1848년까지의 쿼터당 약 3파운드에서 1849년부터 1859년까지의 쿼터당 약 2파운드 10실링으로 떨어졌다. 이것은 농업 임금의 평균 40퍼센트 인상과 동시에 일어난 16퍼센트 넘는 밀 가격의 하락이다. 같은 시기에 그 끝과 처음, 곧 1859년과 1849년을 비교하면 공식 빈민 수가 93만 4419명에서 86만 470명으로 줄어 그 차이가 7만 3949명이었다. 매우 작은 감소이고 그 뒤 몇 해 사이에 다시 잃어버린 것이지만, 그래도 감소는 감소다.

곡물법 폐지의 결과로 1849년부터 1859년까지의 시기에 외국 곡물 수입이 1838년부터 1848년까지의 시기에 비해 두 배 넘게 늘었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그런데 그것이 어쨌다는 것인가? 웨스턴 시민의 관점에서라면 외국 시장에 대한 이 갑작스럽고 엄청나며 계속 늘어나는 수요가 그곳의 농산물 가격을 무시무시한 높이로 밀어 올렸을 것이라고 예상했어야 한다. 수요 증가의 효과는 그것이 밖에서 오든 안에서 오든 같기 때문이다. 사실은 어떠했는가? 흉작이 든 몇 해를 빼면 그 시기 내내 프랑스에서는 곡물 가격의 파멸적 하락이 단골 한탄거리였고, 미국인들은 거듭거듭 잉여 생산물을 태워 버려야 했으며, 러시아는, 어커트 씨의 말을 믿는다면, 유럽 시장에서 양키의 경쟁에 자기 농산물 수출이 타격을 입었기 때문에 미국의 남북전쟁을 부추겼다.

추상적 형태로 줄이면 웨스턴 시민의 논증은 이렇게 된다. 모든 수요 증가는 언제나 주어진 생산량을 바탕으로 일어난다. 그러므로 그것은 수요되는 물품의 공급을 결코 늘릴 수 없고, 오직 그 화폐가격만 올릴 수 있다. 그런데 가장 흔한 관찰만으로도 수요 증가가 어떤 경우에는 상품의 시장가격을 전혀 바꾸지 않고, 다른 경우에는 시장가격의 일시적 상승을 낳은 뒤 공급 증가가 뒤따르고 다시 가격이 원래 수준으로, 많은 경우 원래 수준 아래로 내려가는 것을 알 수 있다. 수요 증가가 잉여 임금에서 나오든 다른 어떤 원인에서 나오든 문제의 조건은 전혀 달라지지 않는다. 웨스턴 시민의 관점에서는 이 일반적 현상이 임금 인상이라는 예외적 사정 아래서 일어나는 현상만큼이나 설명하기 어려웠다. 그러므로 그의 논증은 우리가 다루는 주제와 특별한 관련이 전혀 없었다. 그것은 다만 수요 증가가 시장가격의 최종적 상승 대신 공급 증가를 낳는 법칙을 설명하지 못하는 그의 당혹감을 표현했을 뿐이다.

해설: 그릇과 숟가락

웨스턴의 논지는 한마디로 압축된다. 노동자가 자본가에게 화폐임금으로 4실링 대신 5실링을 내게 하면, 자본가는 상품의 형태로 5실링어치 대신 4실링어치를 돌려준다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되묻는다. 왜 그런가? 임금 총액이 고정되어 있어서라고 한다. 그러면 왜 하필 4실링어치에 고정되어 있는가? 3도 2도 아닌 이유는 무엇인가? 만약 그 한도가 자본가와 노동자의 의지와 무관한 경제 법칙에서 나온다면, 웨스턴이 먼저 할 일은 그 법칙을 진술하고 증명하는 것이다. 반대로 그 한도가 자본가의 의지나 그 탐욕의 한계에 달린 것이라면 그것은 자의적인 한도이므로 필연적인 것이 하나도 없고, 자본가의 의지로 바뀔 수 있듯 그의 의지에 맞서서도 바뀔 수 있다.

웨스턴은 자기 이론을 국그릇에 비유했다. 그릇에 담긴 국의 양은 정해져 있고 먹을 사람의 수도 정해져 있으니, 숟가락을 넓혀 봐야 국이 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로마의 오래된 우화를 옆에 놓는다. 평민이 귀족에 맞서 파업했을 때 귀족 메네니우스 아그리파는 귀족의 배가 평민이라는 팔다리를 먹여 살린다고 설득했다. 아그리파는 한 사람의 배를 채우는 것이 어떻게 다른 사람의 팔다리를 먹이는지 끝내 보이지 못했다. 그러고는 비유를 받아 그대로 되돌려 준다. 그릇은 국민 노동의 총생산물로 채워져 있고, 노동자가 더 떠먹지 못하는 것은 그릇이 좁아서가 아니라 숟가락이 작아서라고. 문제가 그릇의 크기라면 그것은 자연의 한계이고 싸워도 소용없다. 문제가 숟가락이라면 그것은 힘의 문제이고, 힘은 겨룰 수 있다. 이 한 문장에 이 강연 전체의 실천적 결론이 미리 들어 있다.

다음으로 마르크스는 자본가가 5실링을 받고 4실링어치를 돌려주는 장치, 곧 가격 인상이 정말 가능한지를 경제 전체 규모에서 따진다. 노동생산력도, 투입된 자본과 노동의 양도, 화폐 가치도 그대로이고 오직 임금률만 올랐다고 하자. 임금 인상이 상품 가격에 영향을 줄 수 있는 길은 수요와 공급의 실제 비율을 바꾸는 것뿐이다.

노동자계급은 전체로 보아 소득을 필수품에 쓴다. 그러므로 일반적 임금 인상은 필수품 수요를, 따라서 필수품의 시장가격을 올린다. 필수품을 만드는 자본가는 오른 가격으로 오른 임금을 보전한다. 그런데 필수품을 만들지 않는 자본가는 어떻게 되는가? 그리고 그들은 결코 소수가 아니다. 국민 생산물의 3분의 2를 인구의 5분의 1이 소비하는 사정을 생각하면, 얼마나 큰 부분이 사치품의 형태로 생산되거나 사치품과 교환되는지 알 수 있다.

사치품 부문의 자본가는 임금 인상으로 떨어진 이윤율을 가격으로 보전할 수 없다. 그들의 상품에 대한 수요는 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소득이 줄었으므로 같은 필수품을 더 비싼 값에 사야 하고, 사치품에 쓸 돈도 줄어 자기들끼리의 상호 수요도 줄어든다. 그래서 이 부문의 이윤율은 임금 인상에 단순 비례해서가 아니라, 임금 인상과 필수품 가격 상승과 사치품 가격 하락이 겹친 비율로 떨어진다.

부문 사이에 이윤율이 벌어지면 언제나 일어나는 일이 일어난다. 자본과 노동이 덜 벌리는 부문에서 더 벌리는 부문으로 옮겨 가고, 그 이동은 늘어난 수요에 공급이 맞춰지고 줄어든 수요에 공급이 맞춰질 때까지 계속된다. 그 결과 일반 이윤율은 다시 균등해지고, 애초의 교란이 수요·공급 비율의 변화에서 왔으므로 원인이 사라지면 결과도 사라져 가격은 이전 수준으로 돌아온다. 남는 것은 하나, 일반 이윤율의 하락이다. 이것이 이 글 제목의 세 낱말이 놓이는 자리다. 임금이 오르면 가치는 그대로이고, 가격도 결국 제자리로 돌아오며, 움직이는 것은 이윤이다. 임금 인상이 물가 인상으로 고스란히 전가된다는 그림은 경제 전체에 적용해 보면 무너진다.

웨스턴은 상상력을 자극하려고 영국 농업 임금이 9실링에서 18실링으로 오르면 어떻게 되겠느냐고 물었다. 마르크스의 답은 사실을 들이대는 것이다. 미국 농업노동자의 평균임금은 영국의 두 배가 넘지만 농산물 가격은 미국이 더 싸다. 자본과 노동의 일반적 관계는 두 나라가 같고, 연간 생산 총량은 오히려 미국이 적다. 게다가 논점은 임금을 갑자기 100퍼센트 올릴 수 있느냐가 아니다. 인상 폭은 그때그때 사정이 정하는 것이고, 우리가 물을 것은 단 1퍼센트의 일반적 임금 인상이라도 어떻게 작용하는가이다.

그러고 나서 마르크스는 상상 속의 100퍼센트 대신 실제로 일어난 인상을 가져온다. 10시간 노동법이다. 이것은 일부 지역 업종이 아니라 영국이 세계 시장을 좌우하던 주력 산업에서 일어난 갑작스럽고 강제적인 임금 인상이었다. 유어 박사와 시니어 교수를 비롯한 중간계급의 공식 경제학자들은, 웨스턴보다 훨씬 강한 근거를 들어, 그것이 영국 산업의 조종을 울릴 것이라고 증명했다. 그들은 그것이 단순한 임금 인상이 아니라 고용된 노동량의 감소에 근거한 임금 인상이며, 자본가에게서 빼앗으려는 열두 번째 시간이야말로 그가 이윤을 얻는 유일한 시간이라고 주장했다. 축적의 감소, 물가 상승, 시장 상실, 생산 위축, 그에 따른 임금 반작용, 최종적 파멸을 예고했다.

결과는 정반대였다. 노동일이 짧아졌는데도 공장노동자의 화폐임금이 올랐고, 고용된 노동자 수가 크게 늘었으며, 제품 가격은 계속 떨어졌고, 노동생산력은 놀랍게 발전했으며, 시장은 전례 없이 확대되었다. 1860년 맨체스터 과학진흥협회 모임에서 마르크스는 뉴먼 씨가 자신과 유어와 시니어를 비롯한 경제학의 공식 대변자들이 틀렸고 민중의 본능이 옳았다고 고백하는 것을 직접 들었다. 웨스턴 식의 고정성이 옳았다면 시니어의 예언이 맞았을 것이고, 1816년에 이미 노동일 일반 제한을 노동자계급 해방의 첫 준비 단계라고 선언하고 뉴래너크의 자기 공장에서 실행한 로버트 오언이 틀렸을 것이다.

같은 시기 영국 농업 임금도 올랐다. 여기서 마르크스는 통계를 다루는 법을 한 대목 끼워 넣는다. 임금률이 100퍼센트 올랐다는 말에 휩쓸리지 말고 원래 액수가 얼마였는지를 물으라는 것, 그리고 평균의 함정이다. 주급 2실링을 받는 열 명, 5실링을 받는 다섯 명, 11실링을 받는 다섯 명이 있을 때 총액이 20퍼센트 올랐다고 하면, 실제로는 열 명의 임금이 전혀 오르지 않고 다섯 명이 거의 느끼지 못할 만큼 오르고 나머지 다섯 명만 실제로 나아졌을 수 있다. 그래도 평균으로 계산하면 모두가 고르게 오른 것과 같아 보인다.

이렇게 단서를 달아 둔 뒤 마르크스는 1849년부터 1859년까지 영국 농업 임금이 평균 약 40퍼센트 올랐다고 말한다. 웨스턴의 주장대로라면 농산물 가격이 엄청나게 올랐어야 한다. 사실은 반대였다. 영국의 주요 농산물인 밀의 평균 가격은 쿼터당 약 3파운드에서 약 2파운드 10실링으로 16퍼센트 넘게 떨어졌다. 같은 기간 공식 빈민 수도 조금이나마 줄었다. 곡물법 폐지 뒤 외국 곡물 수입이 두 배 넘게 늘었으니 그 수요가 외국 시장의 가격을 끌어올렸어야 한다는 반론도 사실과 맞지 않는다. 그 기간 내내 프랑스에서는 곡물 가격의 파멸적 하락이 단골 한탄거리였고, 미국인들은 잉여 생산물을 태워야 했다.

결국 웨스턴의 논증은 추상적 형태로 줄이면 이렇게 된다. 모든 수요 증가는 주어진 생산량을 바탕으로 일어나므로 공급을 늘릴 수 없고 화폐가격만 올린다는 것. 그러나 가장 흔한 관찰만으로도 수요 증가가 어떤 때는 가격을 전혀 움직이지 않고, 어떤 때는 일시적 상승 뒤 공급 증가와 가격 하락을 낳으며, 그 하락이 원래 수준 아래까지 가는 일도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웨스턴의 논증은 임금 문제에 특별히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수요 증가가 어떻게 공급 증가를 낳는지를 그가 설명하지 못한다는 사실의 표현일 뿐이다.

제3절 임금과 통화

토론 이틀째에 우리의 친구 웨스턴은 자기의 옛 주장에 새 옷을 입혔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화폐임금이 일반적으로 오르면 같은 임금을 지불하는 데 더 많은 통화가 필요하게 된다. 통화량은 고정되어 있는데, 이 고정된 통화로 어떻게 늘어난 화폐임금을 지불할 수 있겠는가? 처음에는 화폐임금이 올랐는데도 노동자에게 돌아가는 상품량이 고정되어 있다는 데서 어려움이 생겼는데, 이번에는 상품량이 고정되어 있는데도 화폐임금이 늘어났다는 데서 어려움이 생긴다. 물론 그의 본래 도그마를 거부하면 이 두 번째 불평은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 통화 문제가 우리 앞의 주제와 아무 상관도 없다는 것을 보이겠다.

여러분의 나라에서는 지불의 기구가 유럽의 다른 어떤 나라보다 훨씬 완성되어 있다. 은행 제도의 규모와 집중 덕분에, 같은 양의 가치를 유통시키고 같거나 더 많은 양의 거래를 처리하는 데 훨씬 적은 통화가 필요하다. 예를 들어 임금에 관해 말하면, 영국의 공장노동자는 자기 임금을 매주 상점 주인에게 지불하고, 상점 주인은 그것을 매주 은행가에게 보내며, 은행가는 그것을 매주 제조업자에게 돌려주고, 제조업자는 다시 그것을 자기 노동자들에게 지불하며, 이런 식으로 계속된다. 이 장치에 의해 한 노동자의 연간 임금, 이를테면 52파운드가 매주 같은 원을 도는 1소버린 금화 한 닢으로 지불될 수 있다. 영국에서도 이 기구는 스코틀랜드보다 덜 완성되어 있고, 어디서나 똑같이 완성되어 있지도 않다. 그래서 예를 들어 어떤 농업 지역에서는 훨씬 적은 양의 가치를 유통시키는 데 훨씬 많은 통화가 필요한 것을 보게 된다.

해협을 건너가 보면 화폐임금은 영국보다 훨씬 낮지만, 독일, 이탈리아, 스위스, 프랑스에서는 그것이 훨씬 많은 양의 통화로 유통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같은 소버린 금화가 은행가에게 그렇게 빨리 붙잡히거나 산업자본가에게 그렇게 빨리 돌아가지 않는다. 그래서 1소버린이 해마다 52파운드를 유통시키는 대신, 25파운드의 연간 임금을 유통시키는 데 아마 3소버린이 필요할 것이다. 이렇게 대륙 나라들을 영국과 비교해 보면, 낮은 화폐임금이 높은 화폐임금보다 그 유통에 훨씬 많은 통화를 필요로 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이것이 사실은 우리 주제와 전혀 무관한 순전히 기술적인 문제라는 것을 곧바로 알게 될 것이다.

내가 아는 가장 정확한 계산에 따르면 이 나라 노동자계급의 연간 소득은 2억 5천만 파운드로 추산될 수 있다. 이 거대한 금액이 약 300만 파운드로 유통된다. 임금이 50퍼센트 오른다고 하자. 그러면 300만 파운드의 통화 대신 450만 파운드가 필요할 것이다. 노동자의 일상 지출의 매우 큰 부분은 은화와 동화, 곧 태환되지 않는 지폐처럼 금에 대한 상대적 가치가 법으로 자의적으로 정해진 단순한 표장으로 이루어지므로, 화폐임금의 50퍼센트 인상은 극단적인 경우에도 이를테면 100만 파운드 정도의 소버린 금화의 추가 유통을 필요로 할 것이다. 지금 잉글랜드은행이나 개인 은행가들의 금고에서 금괴나 주화의 형태로 잠자고 있는 100만 파운드가 유통될 것이다. 그러나 이 100만 파운드의 추가 주조나 추가 마모에서 생기는 사소한 비용조차 절약될 수 있고, 추가 통화의 부족으로 어떤 마찰이 생긴다면 실제로 절약될 것이다. 여러분 모두 알다시피 이 나라의 통화는 두 개의 큰 부문으로 나뉜다. 여러 종류의 은행권으로 공급되는 한 종류는 상인과 상인 사이의 거래와 소비자가 상인에게 하는 큰 지불에 쓰이고, 다른 종류의 통화인 금속 주화는 소매 거래에서 유통된다. 구별되기는 하지만 이 두 종류의 통화는 서로 섞인다. 그래서 금화는 5파운드 아래의 온갖 우수리 금액에 대해서는 큰 지불에서도 매우 널리 유통된다. 내일 4파운드 지폐나 3파운드 지폐나 2파운드 지폐가 발행된다면, 이 유통 경로들을 채우고 있던 금은 곧바로 거기서 밀려나 화폐임금의 인상으로 그것이 필요해진 경로들로 흘러들 것이다. 이렇게 임금의 50퍼센트 인상에 필요한 추가 100만 파운드는 소버린 금화 한 닢도 더하지 않고 공급될 것이다. 은행권 한 장 더하지 않고도, 랭커셔에서 꽤 오랫동안 그랬듯이, 어음 유통의 추가로 같은 효과를 낼 수 있을 것이다.

웨스턴 시민이 농업 임금에서 일어난다고 가정한 것과 같은 이를테면 100퍼센트의 일반적 임금률 인상이 필수품 가격의 큰 상승을 낳고, 그의 견해에 따라 조달할 수 없는 추가 통화량을 필요로 한다면, 임금의 일반적 하락은 같은 규모로 반대 방향의 같은 효과를 낳아야 한다. 자! 여러분 모두 알다시피 1858년부터 1860년까지는 면공업에 가장 번영한 해들이었고, 특히 1860년은 그 점에서 상업사에 비길 데가 없는 해였으며, 동시에 다른 모든 산업 부문도 크게 번창했다. 면공업 노동자들과 그 업종에 연관된 다른 모든 노동자들의 임금은 1860년에 그 어느 때보다 높았다. 미국의 위기가 닥쳤고, 그 임금 총액은 갑자기 이전 액수의 약 4분의 1로 줄었다. 이것은 반대 방향으로는 400퍼센트의 인상이었을 것이다. 임금이 5에서 20으로 오르면 우리는 400퍼센트 올랐다고 말하고, 20에서 5로 떨어지면 75퍼센트 떨어졌다고 말하지만, 한쪽의 인상액과 다른 쪽의 하락액은 같은 것, 곧 15실링이다. 그러니 이것은 전례 없는 임금률의 갑작스러운 변화였고, 동시에 면업에 직접 종사하는 노동자뿐 아니라 간접적으로 거기에 의존하는 노동자까지 모두 세면 농업노동자 수보다 절반이나 더 많은 수의 노동자에게 미친 변화였다. 밀 가격은 떨어졌는가? 그것은 1858년부터 1860년까지 세 해의 연평균 쿼터당 47실링 8펜스에서 1861년부터 1863년까지 세 해의 연평균 쿼터당 55실링 10펜스로 올랐다. 통화로 말하면 1861년에 조폐국에서 주조된 것이 867만 3323파운드로, 1860년의 337만 8792파운드와 대비된다. 다시 말해 1861년에는 1860년보다 529만 4440파운드가 더 주조되었다. 1861년의 은행권 유통이 1860년보다 131만 9000파운드 적었던 것은 사실이다. 이것을 빼자. 그래도 번영의 해인 1860년에 비해 1861년에는 397만 5440파운드, 곧 약 400만 파운드의 통화 잉여가 남는다. 그러나 잉글랜드은행의 금괴 준비는 동시에 감소했는데, 정확히 같은 비율은 아니지만 그에 가까운 비율로 감소했다.

1862년을 1842년과 비교해 보라. 유통되는 상품의 가치와 양의 엄청난 증가는 제쳐 두고라도, 1862년에 잉글랜드와 웨일스의 철도에 관한 주식, 대부 따위의 정규 거래로 지불된 자본만 3억 2천만 파운드에 이르렀는데, 이것은 1842년에는 터무니없어 보였을 금액이다. 그런데도 1862년과 1842년의 통화 총액은 거의 같았고, 일반적으로 여러분은 상품뿐 아니라 화폐 거래 일반의 가치가 엄청나게 늘어나는데도 통화는 점차 줄어드는 경향을 보게 될 것이다. 우리의 친구 웨스턴의 관점에서 이것은 풀 수 없는 수수께끼다. 이 문제를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보았다면 그는 다음을 알았을 것이다. 임금과는 전혀 별개로, 그리고 임금이 고정되어 있다고 가정하더라도, 유통되어야 할 상품의 가치와 양, 그리고 일반적으로 결제되어야 할 화폐 거래의 액수는 날마다 변한다는 것. 발행되는 은행권의 액수가 날마다 변한다는 것. 어음, 수표, 장부신용, 어음교환소의 수단으로 화폐의 개입 없이 실현되는 지불의 액수가 날마다 변한다는 것. 실제의 금속 통화가 필요한 한에서는, 유통 중인 주화와 준비로 보유되거나 은행 금고에서 잠자는 주화 및 금괴 사이의 비율이 날마다 변한다는 것. 국내 유통에 흡수되는 금괴의 양과 국제 유통을 위해 외국으로 보내지는 양이 날마다 변한다는 것. 그는 통화량이 고정되어 있다는 이 도그마가 우리의 일상적 운동과 양립할 수 없는 터무니없는 오류임을 알았을 것이다. 그는 통화의 법칙에 대한 자기의 오해를 임금 인상에 반대하는 논거로 바꾸는 대신, 이처럼 끊임없이 변하는 사정에 통화가 스스로를 맞출 수 있게 해 주는 법칙들을 탐구했을 것이다.

해설: 화폐가 모자란다는 걱정

토론 이틀째에 웨스턴은 같은 주장을 새 옷으로 갈아입혔다. 화폐임금이 일반적으로 오르면 같은 임금을 지불하는 데 더 많은 통화가 필요한데, 통화량은 고정되어 있으니 어떻게 늘어난 임금을 지불하겠느냐는 것이다. 처음에는 화폐임금이 올라도 상품량이 고정되어 있다는 데서 어려움이 나왔는데, 이번에는 상품량이 고정되어 있는데 화폐임금이 올랐다는 데서 어려움이 나온다.

마르크스는 통화 문제가 논점과 아무 상관이 없음을 사실로 보인다. 영국은 은행 제도가 발달해 같은 가치를 유통시키는 데 필요한 통화가 적다. 공장노동자가 주급을 상점 주인에게 쓰고, 상점 주인이 그것을 은행에 넣고, 은행이 제조업자에게 돌려주고, 제조업자가 다시 노동자에게 지불하는 순환이 매주 반복되므로, 연간 52파운드의 임금이 매주 같은 원을 도는 1소버린 한 닢으로 지불될 수도 있다. 반대로 대륙에서는 화폐임금이 영국보다 훨씬 낮은데도 그것을 유통시키는 데 훨씬 많은 통화가 든다. 낮은 임금이 높은 임금보다 더 많은 통화를 요구할 수 있다는 것, 곧 이것이 순전히 기술적인 문제라는 뜻이다.

수치로도 확인된다. 영국 노동자계급의 연간 소득은 약 2억 5천만 파운드로 추산되는데, 이 거대한 금액이 약 300만 파운드의 통화로 유통된다. 임금이 50퍼센트 오르면 450만 파운드가 필요하겠지만, 노동자의 일상 지출 상당 부분은 은화와 동화 같은 보조 주화로 이루어지므로 실제로 추가로 필요한 금화는 많아야 100만 파운드 정도다. 그것은 잉글랜드은행이나 개인 은행의 금고에서 잠자던 금이 깨어나면 되고, 그마저도 소액 은행권을 발행하면 금화가 그 자리에서 밀려나 필요한 곳으로 흘러들 것이므로 새로 주조할 필요조차 없다.

결정적인 반례는 반대 방향의 실험이다. 1860년은 면업 역사상 유례없이 번영한 해였고 면업 노동자의 임금도 그 어느 때보다 높았다. 그러다 미국의 남북전쟁으로 위기가 닥쳐 임금 총액이 갑자기 이전의 4분의 1로 떨어졌다. 웨스턴의 논리대로라면 통화가 남아돌고 밀 가격이 떨어졌어야 한다. 실제로는 밀 가격이 올랐고, 주조된 화폐는 오히려 크게 늘었다.

1862년과 1842년을 견주면 더 분명하다. 유통되는 상품의 가치와 양이 엄청나게 늘었고, 1862년 잉글랜드와 웨일스의 철도에 지불된 자본만 3억 2천만 파운드에 이르렀는데도 두 해의 통화 총액은 거의 같았다. 통화의 필요량은 매일 변하고, 어음과 수표와 장부신용과 어음교환소를 통해 화폐 없이 결제되는 금액도 매일 변한다. 통화량이 고정되어 있다는 도그마는 일상의 운동과 양립할 수 없는 오류다. 웨스턴이 이 도그마를 붙든 이유는 통화의 법칙을 몰랐기 때문이지 임금에 대해 무엇을 알아냈기 때문이 아니다. 자기가 이해하지 못한 것을 상대 주장에 대한 반박으로 쓴 셈이다.

제4절 수요와 공급

우리의 친구 웨스턴은 「repetitio est mater studiorum」, 곧 반복은 배움의 어머니라는 라틴어 격언을 받아들이는지, 그에 따라 자기의 본래 도그마를 다시 새 형태로 반복했다. 임금 인상에서 생기는 통화의 수축이 자본의 감소를 낳으리라는 것 따위다. 그의 통화 망상은 이미 다루었으므로, 그가 자기의 상상 속 통화 재난에서 흘러나온다고 공상하는 상상 속 결과들에 들어가는 것은 전혀 쓸데없다고 생각한다. 나는 곧바로 그토록 여러 모양으로 반복된 그의 하나의 같은 도그마를 그 가장 단순한 이론적 형태로 환원하겠다.

그가 자기 주제를 얼마나 무비판적으로 다루었는지는 한 가지만 지적해도 분명해질 것이다. 그는 임금 인상에, 또는 그런 인상의 결과인 높은 임금에 반대한다. 그런데 나는 그에게 묻는다. 높은 임금이란 무엇이고 낮은 임금이란 무엇인가? 예를 들어 왜 주급 5실링은 낮은 임금이고 주급 20실링은 높은 임금인가? 5가 20에 비해 낮다면 20은 200에 비해 더 낮다. 어떤 사람이 온도계를 강의하면서 높은 온도와 낮은 온도를 늘어놓는 것으로 시작한다면, 그는 아무 지식도 전하지 못할 것이다. 그는 먼저 어는점이 어떻게 정해지는지, 끓는점이 어떻게 정해지는지, 그리고 그 기준점들이 온도계를 파는 사람이나 만드는 사람의 취향이 아니라 자연법칙에 의해 어떻게 정해지는지를 내게 말해야 한다. 그런데 임금과 이윤에 관해 웨스턴 시민은 그런 기준점을 경제 법칙에서 끌어내지 못했을 뿐 아니라, 그것을 찾아야 할 필요조차 느끼지 못했다. 그는 낮다 높다는 통속적인 말을 고정된 뜻을 가진 것으로 받아들이는 데 만족했다. 임금이 높다 낮다는 것은 그 크기를 재는 기준과 비교해서만 말할 수 있다는 것이 자명한데도 말이다.

그는 왜 일정한 양의 노동에 일정한 양의 화폐가 주어지는지 내게 말하지 못할 것이다. 그가 내게 「그것은 수요와 공급의 법칙으로 정해진다」고 답한다면, 나는 먼저 그에게 수요와 공급 자체는 어떤 법칙으로 규제되는지 묻겠다. 그리고 그런 답은 곧바로 그를 법정 밖으로 내몰 것이다. 노동의 수요와 공급 사이의 관계는 끊임없이 변하고, 그와 함께 노동의 시장가격도 변한다. 수요가 공급을 넘어서면 임금이 오르고, 공급이 수요를 넘어서면 임금이 떨어진다. 다만 그런 사정에서는 예를 들어 파업이나 다른 어떤 방법으로 수요와 공급의 실제 상태를 시험해 볼 필요가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수요와 공급을 임금을 규제하는 법칙으로 받아들인다면, 임금 인상에 반대해 열변을 토하는 것은 유치할 뿐 아니라 쓸데없는 일일 것이다. 여러분이 호소하는 그 최고 법칙에 따르면 주기적인 임금 인상은 주기적인 임금 인하와 똑같이 필연적이고 정당하기 때문이다. 수요와 공급을 임금을 규제하는 법칙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나는 다시 한번 물음을 되풀이한다. 왜 일정한 양의 노동에 일정한 양의 화폐가 주어지는가?

그러나 문제를 더 넓게 생각해 보자. 노동이나 다른 어떤 상품의 가치든 결국은 수요와 공급으로 정해진다고 상상한다면 여러분은 완전히 잘못 생각하는 것이다. 수요와 공급은 시장가격의 일시적 변동 말고는 아무것도 규제하지 않는다. 그것은 어떤 상품의 시장가격이 왜 그 가치보다 오르거나 내리는지는 설명해 주지만, 그 가치 자체는 결코 설명하지 못한다. 수요와 공급이 균형을 이룬다고, 경제학자들의 말로는 서로를 덮는다고 하자. 그 대립하는 두 힘이 같아지는 바로 그 순간 둘은 서로를 마비시키고 어느 방향으로도 작용하기를 그친다. 수요와 공급이 서로 균형을 이루어 작용하기를 그치는 순간, 상품의 시장가격은 그 실제 가치, 곧 그 시장가격이 그 주위에서 진동하는 표준가격과 일치한다. 그러므로 그 가치의 본성을 탐구하는 데서 우리는 수요와 공급이 시장가격에 미치는 일시적 효과와는 전혀 상관할 것이 없다. 임금에 대해서도, 다른 모든 상품의 가격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해설: 온도계에는 눈금이 있어야 한다

웨스턴은 같은 도그마를 다시 통화 수축이 자본 감소를 낳는다는 형태로 반복했다. 마르크스는 이미 처리한 통화 이야기를 되풀이하는 대신, 상대의 주장을 가장 단순한 이론적 형태로 환원하기로 하고 그 전에 한 가지를 짚는다. 웨스턴은 높은 임금에 반대한다고 말하는데, 높은 임금과 낮은 임금이란 무엇인가? 왜 주급 5실링은 낮고 20실링은 높은가? 5가 20에 비해 낮다면 20은 200에 비해 더 낮다. 온도계의 비유가 이 물음에 답한다. 어는점과 끓는점이 없는 온도계는 온도계가 아니다.

임금이 높다 낮다고 말하려면 재는 기준이 있어야 하는데, 웨스턴은 그 기준점을 경제 법칙에서 끌어내지 못했을 뿐 아니라 그것이 필요하다는 것조차 느끼지 못했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묻는다. 일정한 양의 노동에 왜 일정한 양의 화폐가 주어지는가?

여기서 「수요와 공급의 법칙으로 정해진다」고 답하면 두 갈래로 갈라진다. 그 답을 받아들이면 임금 인상에 반대할 근거가 사라진다. 최고 법칙이라고 부른 그 법칙에 따르면 주기적인 임금 인상은 주기적인 임금 인하와 똑같이 필연적이고 정당하기 때문이다. 그 답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처음 질문이 그대로 되돌아온다.

더 넓게 보면 수요와 공급으로 가치가 정해진다는 생각 자체가 잘못이다. 수요와 공급은 시장가격의 일시적 변동만을 규제하고, 균형을 이루어 작용을 멈춘 그 지점에서 시장가격은 상품의 실제 가치와 일치한다. 그러니 가치의 본성을 묻는 자리에서 수요와 공급의 일시적 효과는 아예 논외다. 이것은 임금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수요와 공급은 노동력의 시장가격이 왜 오르내리는지를 설명하지만, 그것이 어떤 값 주위에서 오르내리는지는 설명하지 못한다.

제5절 임금과 가격

가장 단순한 이론적 표현으로 줄이면 우리 친구의 모든 논증은 이 하나의 도그마로 귀착된다. 「상품의 가격은 임금에 의해 규정되거나 규제된다.」

나는 이 낡아빠지고 이미 깨진 오류에 반대하는 증언으로 실제의 관찰에 호소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여러분에게 노동의 값이 상대적으로 비싼 영국의 공장노동자, 광부, 조선노동자 따위가 자기 생산물의 싼 값으로 다른 모든 나라를 눌러 판다는 것, 반면 예를 들어 노동의 값이 상대적으로 싼 영국의 농업노동자는 자기 생산물의 비싼 값 때문에 거의 다른 모든 나라에 눌려 판다는 것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같은 나라 안에서 물품과 물품을, 그리고 여러 나라의 상품을 비교함으로써 나는, 실제보다는 겉보기에 그런 몇몇 예외를 빼면, 평균적으로 비싼 노동이 싼 상품을 생산하고 싼 노동이 비싼 상품을 생산한다는 것을 보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것은 한쪽의 노동의 비싼 값과 다른 쪽의 싼 값이 저 정반대되는 결과들의 각각의 원인이라는 것을 증명하지는 않겠지만, 어쨌든 상품의 가격이 노동의 가격에 지배되지 않는다는 것은 증명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런 경험적 방법을 쓰는 것은 전혀 불필요하다.

웨스턴 시민이 「상품의 가격은 임금에 의해 규정되거나 규제된다」는 도그마를 내세웠다는 것은 아마 부인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그는 그것을 그렇게 정식화한 적이 없다. 그는 반대로 이윤과 지대도 상품 가격의 구성 부분을 이룬다고 말했다. 노동자의 임금뿐 아니라 자본가의 이윤과 지주의 지대도 상품의 가격에서 지불되어야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생각에서 가격은 어떻게 형성되는가? 먼저 임금에 의해서. 그 다음에 자본가를 위한 추가 백분율이 가격에 덧붙고, 지주를 위한 또 하나의 추가 백분율이 덧붙는다. 어떤 상품의 생산에 쓰인 노동의 임금이 10이라고 하자. 이윤율이 100퍼센트라면 자본가는 선대한 임금에 10을 더할 것이고, 지대율도 임금에 대해 100퍼센트라면 다시 10이 더해져 상품의 총가격은 30이 될 것이다. 그러나 가격의 이런 규정은 그저 임금에 의한 가격의 규정일 뿐이다. 위의 경우에 임금이 20으로 오르면 상품의 가격은 60으로 오를 것이고, 이런 식이다. 그러므로 임금이 가격을 규제한다는 도그마를 내세운 낡아빠진 정치경제학 저술가들은 모두 이윤과 지대를 임금 위에 얹히는 단순한 추가 백분율로 다룸으로써 그것을 증명하려 했다. 물론 그들 가운데 누구도 그 백분율의 한계를 어떤 경제 법칙으로 환원하지 못했다. 그들은 반대로 이윤이 전통, 관습, 자본가의 의지, 또는 그와 똑같이 자의적이고 설명할 수 없는 다른 어떤 방법으로 정해진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그것이 자본가들 사이의 경쟁으로 정해진다고 주장한다면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것이다. 그 경쟁은 확실히 서로 다른 업종의 서로 다른 이윤율을 균등화하거나 하나의 평균 수준으로 환원하지만, 그 수준 자체, 곧 일반 이윤율을 결정할 수는 결코 없다.

상품의 가격이 임금에 의해 규정된다고 말할 때 우리가 뜻하는 것은 무엇인가? 임금은 노동의 가격을 부르는 이름일 뿐이므로, 우리는 상품의 가격이 노동의 가격에 의해 규제된다는 것을 뜻한다. 「가격」은 교환가치가, 그리고 가치를 말할 때 나는 언제나 교환가치를 말하는데, 화폐로 표현된 교환가치이므로, 이 명제는 「상품의 가치는 노동의 가치에 의해 규정된다」 또는 「노동의 가치는 가치의 일반적 척도다」라는 것으로 귀착된다.

그러면 「노동의 가치」 자체는 어떻게 규정되는가? 여기서 우리는 막다른 곳에 이른다. 물론 논리적으로 추론하려 들면 막다른 곳에 이르지만, 그 교리의 주창자들은 논리적 양심의 가책 따위는 간단히 처리해 버린다. 예를 들어 우리의 친구 웨스턴을 보라. 먼저 그는 임금이 상품의 가격을 규제하며, 따라서 임금이 오르면 가격이 올라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고는 돌아서서, 상품의 가격이 올랐기 때문에, 그리고 임금은 사실 그것이 쓰이는 상품의 가격으로 재어지기 때문에 임금 인상은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라고 보였다. 이렇게 우리는 노동의 가치가 상품의 가치를 규정한다고 말하는 데서 시작해서, 상품의 가치가 노동의 가치를 규정한다고 말하며 끝맺는다. 이렇게 우리는 가장 악질적인 순환 안에서 오갈 뿐 아무 결론에도 이르지 못한다.

전체적으로 보아, 어떤 하나의 상품, 이를테면 노동이나 곡물이나 다른 어떤 상품의 가치를 가치의 일반적 척도이자 규제자로 삼는 것은 어려움을 옮겨 놓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분명하다. 우리는 한 가치를 다른 가치로 규정하는데, 그 다른 가치 쪽은 또 그 자신이 규정되기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임금이 상품의 가격을 규정한다」는 도그마를 가장 추상적인 용어로 표현하면 「가치는 가치에 의해 규정된다」가 되고, 이 동어반복은 사실 우리가 가치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는 뜻이다. 이 전제를 받아들이면 정치경제학의 일반 법칙에 관한 모든 추론은 순전한 헛소리로 바뀐다. 그러므로 리카도가 1817년에 펴낸 저작 『정치경제학의 원리』에서 「임금이 가격을 규정한다」는 낡고 통속적이며 닳아빠진 오류를 근본적으로 무너뜨린 것은 그의 큰 공적이었다. 애덤 스미스와 그의 프랑스 선배들도 자기 연구의 진정으로 과학적인 부분에서는 이 오류를 물리쳤지만, 더 통속적이고 저속화하는 장들에서는 그것을 다시 살려 놓았다.

해설: 순환논법의 정체

이제 웨스턴의 논증 전체가 하나의 도그마로 환원된다. 「상품의 가격은 임금에 의해 규정되거나 규제된다.」

경험만으로도 반례가 넘친다. 임금이 상대적으로 비싼 영국의 공장노동자, 광부, 조선노동자는 값싼 제품으로 다른 모든 나라를 압도하는 반면, 임금이 상대적으로 싼 영국 농업노동자는 비싼 생산물 때문에 거의 모든 나라에 밀린다. 평균적으로 비싼 노동이 싼 상품을, 싼 노동이 비싼 상품을 만든다. 이것만으로 인과가 증명되지는 않지만, 적어도 상품 가격이 노동의 가격에 지배되지 않는다는 것은 보여 준다.

웨스턴은 그 도그마를 그런 문장으로 말한 적이 없다고 할지 모른다. 그는 이윤과 지대도 상품 가격의 구성 부분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가 그리는 가격 형성 과정을 따라가 보면 결국 같은 것이다. 먼저 임금이 있고, 그 위에 자본가 몫의 백분율이 얹히고, 다시 지주 몫의 백분율이 얹힌다. 어떤 상품에 든 노동의 임금이 10이고 이윤율이 100퍼센트면 10이 더해지고 지대율도 100퍼센트면 10이 더해져 가격은 30이 된다. 임금이 20으로 오르면 가격은 60이 된다. 이것은 결국 임금에 의한 가격 규정이다. 임금이 가격을 규제한다고 주장한 옛 저술가들이 모두 이윤과 지대를 임금 위의 추가 백분율로 다룬 이유가 여기 있다. 물론 그들 중 누구도 그 백분율의 한계를 경제 법칙으로 환원하지 못했다. 그들은 이윤이 관습이나 전통이나 자본가의 의지로 정해진다고 생각하는 듯하고, 자본가들 사이의 경쟁으로 정해진다고 말한다면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것이다. 경쟁은 부문별 이윤율을 하나의 평균으로 균등화할 뿐, 그 평균의 높이 자체를 정하지는 못한다.

그렇다면 임금이 가격을 규정한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임금은 노동의 가격을 부르는 이름이므로, 그것은 상품의 가격이 노동의 가격에 의해 규제된다는 뜻이고, 가격이 화폐로 표현된 교환가치인 이상 「상품의 가치는 노동의 가치에 의해 규정된다」는 명제와 같다. 그러면 노동의 가치는 무엇이 정하는가? 여기서 논의는 멈춘다. 노동의 가치가 상품의 가치를 정한다고 시작해서 상품의 가치가 노동의 가치를 정한다고 끝나는 순환이고, 가장 추상적으로 줄이면 「가치는 가치에 의해 규정된다」는 동어반복이다. 곧 가치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는 고백이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1817년 『정치경제학 및 과세의 원리』에서 임금이 가격을 정한다는 낡은 오류를 근본적으로 무너뜨린 것이 리카도의 큰 공적이라고 말한다. 애덤 스미스와 그 프랑스 선배들도 연구의 진정으로 과학적인 부분에서는 그 오류를 물리쳤지만, 통속적인 장에서는 그것을 되살려 놓았다.

여기까지가 웨스턴에 대한 답이다. 상대의 도그마는 무너졌지만, 그 자리에는 아직 답해야 할 질문이 남아 있다. 가치가 임금으로 정해지지 않는다면 무엇으로 정해지는가. 제6절부터 이 글은 논쟁에서 이론으로 넘어간다.

제6절 가치와 노동

시민 여러분, 나는 이제 문제의 진짜 전개에 들어가야 할 지점에 이르렀다. 이것을 아주 만족스럽게 해내겠다고는 약속할 수 없다. 그러자면 정치경제학의 전 영역을 훑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프랑스 사람들의 말대로 「effleurer la question」, 곧 문제를 스치듯 주요 논점만 건드릴 수 있을 뿐이다. 우리가 던져야 할 첫 물음은 이것이다. 상품의 가치란 무엇인가? 그것은 어떻게 규정되는가?

언뜻 보면 상품의 가치는 아주 상대적인 것이어서, 한 상품을 다른 모든 상품과의 관계 속에서 고찰하지 않고는 정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 우리는 상품의 가치, 곧 교환에서의 가치를 말할 때 그것이 다른 모든 상품과 교환되는 비례량을 뜻한다. 그러나 그러면 이런 물음이 생긴다. 상품들이 서로 교환되는 비율은 어떻게 규제되는가? 우리는 경험으로 이 비율이 한없이 다양하다는 것을 안다. 하나의 상품, 이를테면 밀을 보면, 밀 1쿼터는 거의 셀 수 없이 다양한 비율로 여러 상품과 교환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나 비단으로 표현되든 금으로 표현되든 다른 어떤 상품으로 표현되든 그 가치는 언제나 같으므로, 그것은 여러 물품과의 이 서로 다른 교환 비율과는 구별되는, 그것들과 무관한 무엇이어야 한다. 여러 상품과의 이 여러 등식을 전혀 다른 형태로 표현하는 것이 가능해야 한다.

게다가 밀 1쿼터가 일정한 비율로 쇠와 교환된다고, 또는 밀 1쿼터의 가치가 일정한 양의 쇠로 표현된다고 말할 때, 나는 밀의 가치와 그에 상당하는 쇠가 밀도 쇠도 아닌 어떤 제3의 것과 같다고 말하는 것이다. 두 가지가 같은 크기를 서로 다른 두 모양으로 표현한다고 전제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밀이든 쇠든 그 어느 쪽도 상대와 무관하게 그 공통의 척도인 이 제3의 것으로 환원될 수 있어야 한다.

이 점을 밝히기 위해 아주 단순한 기하학의 예를 들겠다. 온갖 가능한 모양과 크기의 삼각형들의 넓이를 비교하거나, 삼각형을 사각형이나 다른 어떤 직선 도형과 비교할 때 우리는 어떻게 하는가? 우리는 어떤 삼각형이든 그 넓이를 눈에 보이는 모양과는 전혀 다른 표현으로 환원한다. 삼각형의 본성으로부터 그 넓이가 밑변과 높이의 곱의 절반과 같다는 것을 알아낸 뒤에는, 온갖 종류의 삼각형과 모든 직선 도형의 서로 다른 값을 비교할 수 있다. 그것들은 모두 일정한 수의 삼각형으로 분해될 수 있기 때문이다.

상품의 가치에도 같은 방식이 적용되어야 한다. 우리는 그것들 모두를 모두에게 공통된 하나의 표현으로 환원할 수 있어야 하고, 그 뒤에는 그 동일한 척도를 얼마의 비율로 담고 있느냐로만 구별해야 한다.

상품의 교환가치는 그 물건들의 사회적 기능일 뿐이고 그 자연적 성질과는 아무 상관이 없으므로, 우리는 먼저 이렇게 물어야 한다. 모든 상품의 공통된 사회적 실체는 무엇인가? 그것은 노동이다. 상품을 생산하려면 일정한 양의 노동이 거기에 들어가야, 곧 거기서 가공되어야 한다. 그리고 나는 그냥 노동이 아니라 사회적 노동이라고 말한다. 자기가 직접 쓰려고, 스스로 소비하려고 물건을 만드는 사람은 생산물을 만드는 것이지 상품을 만드는 것이 아니다. 자급하는 생산자로서 그는 사회와 아무 상관이 없다. 그러나 상품을 생산하려면 어떤 사회적 욕구를 채우는 물건을 생산해야 할 뿐 아니라, 그의 노동 자체가 사회가 지출하는 노동의 총합의 한 부분을 이루어야 한다. 그것은 사회 안의 분업에 종속되어야 한다. 그것은 다른 분업 부문들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고, 그 쪽에서도 그것들을 보완하도록 요구된다.

우리가 상품을 가치로 고찰할 때, 우리는 그것들을 오로지 실현되고 고정된, 말하자면 결정화된 사회적 노동이라는 하나의 측면에서만 고찰한다. 이 점에서 상품들은 오직 더 많거나 적은 양의 노동을 나타낸다는 것으로만 다를 수 있다. 예를 들어 비단 손수건에는 벽돌보다 더 많은 양의 노동이 가공되어 있을 수 있다. 그러면 노동의 양은 어떻게 재는가? 노동이 지속되는 시간으로, 곧 노동을 시간과 날 따위로 재서 잰다. 물론 이 척도를 적용하려면 온갖 종류의 노동이 그 단위인 평균 노동 또는 단순 노동으로 환원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결론에 이른다. 상품이 가치를 갖는 것은 그것이 사회적 노동의 결정체이기 때문이다. 그 가치의 크기, 곧 그 상대적 가치는 그 안에 담긴 그 사회적 실체의 많고 적음에, 다시 말해 그 생산에 필요한 노동의 상대적 양에 달려 있다. 그러므로 상품의 상대적 가치는 그 안에 가공되고 실현되고 고정된 노동의 각각의 양 또는 액수에 의해 규정된다. 같은 노동시간에 생산될 수 있는 여러 상품의 상응하는 양은 같은 가치다. 또는 한 상품의 가치와 다른 상품의 가치의 비는, 한쪽에 고정된 노동의 양과 다른 쪽에 고정된 노동의 양의 비와 같다.

여러분 가운데 많은 이가 이렇게 물을 것 같다. 그렇다면 상품의 가치를 임금으로 규정하는 것과 그 생산에 필요한 노동의 상대적 양으로 규정하는 것 사이에 정말 그렇게 큰 차이가, 아니 어떤 차이든 있는가? 그러나 여러분은 노동에 대한 보수와 노동의 양이 전혀 다른 것이라는 점을 알아야 한다. 예를 들어 밀 1쿼터와 금 1온스에 같은 양의 노동이 고정되어 있다고 하자. 내가 이 예를 드는 것은 벤저민 프랭클린이 1721년에 펴낸 그의 첫 논문 『지폐의 본성과 필요에 관한 소론』에서 이 예를 썼기 때문이다.[10] 그는 거기서 가치의 참된 본성을 가장 먼저 짚어 낸 사람들 가운데 하나였다.

자, 그러면 우리는 밀 1쿼터와 금 1온스가 같은 가치 또는 등가물이라고 가정한다. 그것들이 각각 그 안에 고정된 며칠 또는 몇 주 노동이라는 같은 양의 평균 노동의 결정체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금과 곡물의 상대적 가치를 규정하면서 우리는 농업노동자와 광부의 임금을 조금이라도 참조하는가? 조금도 그렇지 않다. 우리는 그들의 하루 또는 한 주의 노동이 어떻게 지불되었는지, 아니 애초에 임금노동이 쓰이기나 했는지조차 완전히 미정으로 남겨 둔다. 임금노동이 쓰였다면 임금은 매우 불평등했을 수 있다. 자기 노동이 밀 1쿼터에 실현되는 노동자는 2부셸만 받을 수 있고, 광산에 고용된 노동자는 금 1온스의 절반을 받을 수 있다. 또는 그들의 임금이 같다고 가정하더라도, 그것은 그들이 생산한 상품의 가치와 온갖 가능한 비율로 어긋날 수 있다. 그것은 곡물 1쿼터나 금 1온스의 4분의 1, 5분의 1, 또는 다른 어떤 비례 부분에 이를 수 있다. 물론 그들의 임금은 그들이 생산한 상품의 가치를 넘을 수 없고 그보다 많을 수 없지만, 온갖 가능한 정도로 그보다 적을 수는 있다. 그들의 임금은 생산물의 가치에 의해 제한되겠지만, 그들의 생산물의 가치는 임금에 의해 제한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치, 예를 들어 곡물과 금의 상대적 가치는 사용된 노동의 가치, 곧 임금을 조금도 참조하지 않고 정해졌을 것이다. 그러므로 상품의 가치를 그 안에 고정된 노동의 상대적 양으로 규정하는 것은 상품의 가치를 노동의 가치, 곧 임금으로 규정하는 동어반복의 방법과는 전혀 다른 일이다. 그러나 이 점은 우리의 탐구가 나아가면서 더 밝혀질 것이다.

상품의 교환가치를 계산할 때 우리는 마지막에 쓰인 노동의 양에 그 상품의 원료에 이전에 가공된 노동의 양과, 그런 노동을 돕는 기구, 도구, 기계, 건물에 들어간 노동을 더해야 한다. 예를 들어 일정한 양의 면사의 가치는 방적 과정에서 면화에 더해진 노동의 양, 면화 자체에 이전에 실현된 노동의 양, 사용된 석탄과 기름과 그 밖의 보조 재료에 실현된 노동의 양, 증기기관과 방추와 공장 건물 따위에 고정된 노동의 양의 결정체다. 도구, 기계, 건물 같은 본래 의미의 생산수단은 반복되는 생산 과정에서 길거나 짧은 기간 동안 거듭거듭 쓰인다. 그것들이 원료처럼 한꺼번에 다 쓰인다면 그 가치 전부가 한꺼번에 그것들이 생산을 돕는 상품으로 옮겨 갈 것이다. 그러나 예를 들어 방추는 조금씩 닳아 없어지므로, 그것이 지속되는 평균 시간과 일정한 기간, 이를테면 하루 동안의 평균 소모 또는 마모에 근거해 평균 계산을 한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방추의 가치 가운데 얼마가 날마다 잣는 실로 옮겨 가는지, 따라서 예를 들어 실 1파운드에 실현된 노동의 총량 가운데 얼마가 방추에 이전에 실현된 노동의 양에서 온 것인지 계산한다. 지금의 목적에서는 이 점을 더 길게 다룰 필요가 없다.

상품의 가치가 그 생산에 들어간 노동의 양으로 규정된다면, 사람이 게으를수록 또는 서투를수록 상품을 완성하는 데 더 많은 노동시간이 필요하므로 그의 상품은 더 가치가 커지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한심한 착각일 것이다. 여러분은 내가 「사회적 노동」이라는 말을 썼다는 것을 기억할 것이고, 이 「사회적」이라는 한정에는 많은 점이 담겨 있다. 상품의 가치가 그 안에 가공되거나 결정화된 노동의 양으로 규정된다고 말할 때, 우리는 주어진 사회 상태에서, 일정한 사회적 평균 생산 조건 아래서, 주어진 사회적 평균 강도와 평균 숙련의 노동으로 그것을 생산하는 데 필요한 노동의 양을 뜻한다. 영국에서 역직기가 수직기와 경쟁하게 되었을 때, 일정한 양의 실을 1야드의 면포나 천으로 바꾸는 데 이전의 절반 노동시간만 필요해졌다. 가난한 수직공은 이제 전에 일하던 아홉 시간이나 열 시간 대신 하루 열일곱 시간이나 열여덟 시간을 일했다. 그래도 그의 스무 시간 노동의 생산물은 이제 열 시간의 사회적 노동, 곧 일정한 양의 실을 직물로 바꾸는 데 사회적으로 필요한 열 시간의 노동만을 나타냈다. 그러므로 그의 스무 시간 생산물은 이전의 열 시간 생산물보다 더 큰 가치를 갖지 않았다.

그러므로 상품에 실현된 사회적으로 필요한 노동의 양이 그 교환가치를 규제한다면, 어떤 상품의 생산에 필요한 노동량의 모든 증가는 그 가치를 늘리고, 모든 감소는 그것을 낮출 수밖에 없다.

각각의 상품의 생산에 필요한 노동의 각각의 양이 불변이라면 그 상대적 가치도 불변일 것이다. 그러나 사정은 그렇지 않다. 어떤 상품의 생산에 필요한 노동의 양은 노동생산력의 변화와 함께 끊임없이 변한다. 노동생산력이 클수록 주어진 노동시간에 더 많은 생산물이 완성되고, 노동생산력이 작을수록 같은 시간에 더 적은 생산물이 완성된다. 예를 들어 인구 증가에 따라 덜 비옥한 땅을 경작해야 하게 된다면, 같은 양의 생산물을 얻는 데 더 많은 노동을 써야 할 것이고, 따라서 농산물의 가치는 오를 것이다. 다른 한편, 현대적 생산수단으로 한 사람의 방적공이 하루 노동일 동안 같은 시간에 물레로 자을 수 있었을 면화의 수천 배를 실로 바꾼다면, 면화 1파운드 하나하나가 이전보다 수천 배 적은 방적 노동을 흡수할 것이고, 따라서 면화 1파운드 하나하나에 방적으로 더해지는 가치는 이전의 수천 분의 일이 될 것이 분명하다. 실의 가치는 그에 따라 떨어질 것이다.

여러 민족의 서로 다른 타고난 활력과 습득된 노동 능력을 제쳐 두면, 노동생산력은 주로 다음에 달려 있을 수밖에 없다. —

첫째. 토지의 비옥도, 광산 따위와 같은 노동의 자연적 조건.

둘째. 노동의 사회적 힘의 점진적 개선. 대규모 생산, 자본의 집중과 노동의 결합, 분업, 기계, 개선된 방법, 화학적 작용과 그 밖의 자연력의 이용, 교통과 운송 수단에 의한 시간과 공간의 단축, 그리고 과학이 자연력을 노동에 봉사하게 만들고 노동의 사회적 또는 협업적 성격을 발전시키는 다른 모든 장치에서 나오는 힘들이다. 노동생산력이 클수록 주어진 양의 생산물에 들어가는 노동은 적어지고, 따라서 그 생산물의 가치는 작아진다. 노동생산력이 작을수록 같은 양의 생산물에 더 많은 노동이 들어가고, 따라서 그 가치는 커진다. 그러므로 우리는 일반 법칙으로 이렇게 적어 둘 수 있다. —

상품의 가치는 그 생산에 들어간 노동시간에 정비례하고, 그 노동의 생산력에 반비례한다.

지금까지 가치만을 말했으므로, 가치가 취하는 특수한 형태인 가격에 대해 몇 마디 덧붙이겠다.

가격은 그 자체로 보면 가치의 화폐적 표현일 뿐이다. 예를 들어 이 나라의 모든 상품의 가치는 금 가격으로 표현되고, 대륙에서는 주로 은 가격으로 표현된다. 금이나 은의 가치는 다른 모든 상품의 가치와 마찬가지로 그것을 얻는 데 필요한 노동의 양으로 규제된다. 여러분은 일정한 양의 여러분의 국민 노동이 결정화된 일정한 양의 국민 생산물을, 일정한 양의 그들의 노동이 결정화된 금은 생산국의 생산물과 교환한다. 이런 식으로, 사실은 물물교환으로, 여러분은 모든 상품의 가치, 곧 거기에 들어간 각각의 노동량을 금과 은으로 표현하는 법을 배운다. 가치의 화폐적 표현, 또는 같은 말이지만 가치의 가격으로의 전환을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것은 모든 상품의 가치에 독립적이고 동질적인 형태를 주는 과정, 또는 그것들을 같은 사회적 노동의 양으로 표현하는 과정임을 알게 될 것이다. 가치의 화폐적 표현일 뿐인 한에서의 가격을 애덤 스미스는 자연가격이라 불렀고, 프랑스 중농학파는 「prix nécessaire」, 곧 필요가격이라 불렀다.

그러면 가치와 시장가격, 또는 자연가격과 시장가격의 관계는 무엇인가? 여러분 모두 알다시피 시장가격은 개별 생산자들의 생산 조건이 아무리 다르더라도 같은 종류의 모든 상품에 대해 같다. 시장가격은 평균 생산 조건 아래서 시장에 일정한 물품의 일정한 양을 공급하는 데 필요한 사회적 노동의 평균량만을 표현한다. 그것은 일정한 종류의 상품 전체에 대해 계산된다.

이 한에서 상품의 시장가격은 그 가치와 일치한다. 다른 한편, 때로는 가치 또는 자연가격 위로 오르고 때로는 그 아래로 내리는 시장가격의 진동은 수요와 공급의 변동에 달려 있다. 시장가격이 가치에서 벗어나는 일은 끊임없이 일어나지만, 애덤 스미스의 말대로다.

「자연가격은 상품의 가격들이 끊임없이 끌려가는 중심 가격이다. 여러 우연이 때로는 그 위에 한동안 붙들어 두고 때로는 그 아래로 얼마간 밀어내리기도 한다. 그러나 그 안식과 지속의 중심에 자리잡는 것을 막는 장애가 무엇이든, 가격들은 끊임없이 그곳을 향한다.」

지금 이 문제를 낱낱이 가릴 수는 없다. 수요와 공급이 서로 균형을 이룬다면 상품의 시장가격은 그 자연가격, 곧 그 생산에 필요한 각각의 노동량으로 규정되는 그 가치와 일치할 것이라고 말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러나 수요와 공급은 끊임없이 서로 균형을 이루려 할 수밖에 없다. 다만 그것은 한 변동을 다른 변동으로, 상승을 하락으로, 또 그 반대로 상쇄함으로써만 그렇게 한다. 매일의 변동만 보는 대신 예를 들어 투크 씨가 『물가사』에서 했듯이 더 긴 기간의 시장가격 운동을 분석해 보면, 시장가격의 변동, 가치로부터의 이탈, 그 오르내림이 서로를 마비시키고 상쇄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래서 독점의 효과와 지금은 지나쳐야 할 몇 가지 다른 수정 요인을 빼면, 모든 종류의 상품은 평균적으로 그 각각의 가치 또는 자연가격대로 팔린다. 시장가격의 변동이 서로 상쇄되는 평균 기간은 상품의 종류에 따라 다르다. 어떤 종류에서는 다른 종류에서보다 공급을 수요에 맞추기가 더 쉽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넓게 말해 얼마간 더 긴 기간을 놓고 보면 모든 종류의 상품이 그 각각의 가치대로 팔린다면, 이윤이, 개별 경우가 아니라 여러 업종의 불변의 통상적 이윤이, 상품의 가격에서, 곧 그것을 가치 이상의 가격으로 파는 데서 생긴다고 가정하는 것은 헛소리다. 이 생각의 불합리함은 그것을 일반화해 보면 분명해진다. 어떤 사람이 판매자로서 늘 버는 것을 그는 구매자로서 늘 잃을 것이다. 판매자가 아니면서 구매자인 사람, 생산자가 아니면서 소비자인 사람이 있다고 말해도 소용없다. 이 사람들이 생산자에게 지불하는 것은 먼저 생산자에게서 공짜로 받은 것이어야 한다. 어떤 사람이 먼저 여러분의 돈을 가져가고 나중에 여러분의 상품을 사면서 그 돈을 돌려준다면, 여러분은 바로 그 사람에게 여러분의 상품을 너무 비싸게 팔아서는 결코 부유해지지 못할 것이다. 이런 종류의 거래는 손실을 줄일 수는 있어도 이윤을 실현하는 데는 결코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윤의 일반적 본성을 설명하려면, 평균적으로 상품은 그 실제 가치대로 팔리며 이윤은 그것을 가치대로 팔아서, 곧 그 안에 실현된 노동량에 비례해 팔아서 생긴다는 정리에서 출발해야 한다. 이 가정 위에서 이윤을 설명할 수 없다면 이윤은 아예 설명할 수 없다. 이것은 역설로 보이고 일상적 관찰에 어긋나 보인다. 지구가 태양 둘레를 돈다는 것도, 물이 두 가지 인화성이 높은 기체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도 역설이다. 과학적 진리는 사물의 기만적인 겉모습만을 붙잡는 일상 경험으로 판단하면 언제나 역설이다.

해설: 제3의 것

마르크스는 여기서부터가 진짜 전개라고 예고하면서, 정치경제학 전체를 훑어야 제대로 할 수 있는 일이라 만족스럽게 하지는 못하겠다고 미리 밝힌다. 첫 질문은 이것이다. 상품의 가치란 무엇이며 어떻게 규정되는가?

언뜻 보면 가치는 순전히 상대적인 것 같다. 어떤 상품의 교환가치는 그것이 다른 모든 상품과 교환되는 비율이니 말이다. 그러나 밀 한 쿼터는 비단으로 재든 금으로 재든 가치가 같으므로, 가치는 그 수많은 교환 비율과는 구별되는 무엇이어야 한다. 밀과 쇠가 일정한 비율로 교환된다는 것은 둘이 밀도 쇠도 아닌 「제3의 것」과 같다는 뜻이고, 둘 다 그 공통 척도로 환원될 수 있어야 한다.

이 환원이 어떤 종류의 작업인지를 마르크스는 기하학으로 설명한다. 온갖 모양과 크기의 삼각형을 서로 견주거나 삼각형을 사각형과 견주려면, 눈에 보이는 모양이 아니라 밑변 곱하기 높이의 절반이라는 전혀 다른 표현으로 환원해야 한다. 모든 직선 도형은 삼각형으로 분해할 수 있으니 이 하나의 표현으로 전부 비교할 수 있다. 상품도 마찬가지로 모두에게 공통된 표현으로 환원되어야 하고, 그 뒤에는 그 척도를 얼마나 많이 담았느냐만 남는다.

그 공통의 실체는 무엇인가. 교환가치는 물건의 자연적 성질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사회적 기능이므로, 물어야 할 것은 모든 상품의 공통된 사회적 실체다. 그것은 노동이다. 다만 그냥 노동이 아니라 사회적 노동이다. 자기가 쓰려고 만든 물건은 생산물이지 상품이 아니다. 상품을 생산하려면 사회적 욕구를 채우는 물건을 만들 뿐 아니라 그 노동 자체가 사회가 지출하는 총노동의 한 부분이어야 하고, 사회 안의 분업에 종속되어야 한다.

상품을 가치로 볼 때 우리는 그것을 오직 실현되고 고정된, 굳이 말하자면 결정화된 사회적 노동으로만 본다. 그러면 노동의 양은 어떻게 재는가? 노동이 지속되는 시간으로, 곧 시간과 날로 잰다. 물론 이 척도를 적용하려면 온갖 종류의 노동이 평균 노동, 곧 단순 노동으로 환원되어야 한다. 그래서 숙련 노동은 더 많은 양의 단순 노동으로 셈해진다.

여기서 곧바로 나올 법한 의문을 마르크스가 앞질러 받는다. 상품 가치를 임금으로 규정하는 것과 노동량으로 규정하는 것 사이에 정말 그렇게 큰 차이가 있는가? 노동에 대한 보수와 노동의 양은 전혀 다른 것이라는 게 답이다. 밀 한 쿼터와 금 1온스에 같은 양의 노동이 들어 있다고 하자. 이때 두 상품이 등가라고 말하면서 우리는 농업노동자와 광부의 임금을 조금도 참조하지 않는다. 그들의 하루 노동이 얼마에 지불되었는지, 애초에 임금노동이 쓰였는지조차 미정으로 남는다. 그들의 임금은 생산물의 가치를 넘을 수는 없지만 얼마든지 밑돌 수 있다. 임금은 생산물의 가치에 의해 제한되지만, 생산물의 가치는 임금에 의해 제한되지 않는다.

상품의 가치를 계산할 때는 마지막 노동만이 아니라 원료에 이미 들어 있던 노동, 도구와 기계와 건물에 들어 있던 노동도 더해야 한다. 면사의 가치는 방적 과정에서 더해진 노동, 면화 자체에 실현된 노동, 석탄과 기름에 실현된 노동, 증기기관과 방추와 공장 건물에 고정된 노동의 결정체다. 기계처럼 여러 번 쓰이는 생산수단은 평균 수명과 마모를 계산해 하루치씩 생산물로 옮겨 간다.

그러면 게으르거나 서투른 사람이 오래 걸릴수록 그 상품의 가치가 커지는가? 마르크스가 「사회적」이라는 말에 힘을 준 이유가 여기 있다. 가치를 규정하는 것은 주어진 사회 상태에서, 사회적 평균 조건과 평균 강도와 평균 숙련으로 그 물건을 생산하는 데 필요한 노동량이다. 영국의 수직공 예가 그것을 보여 준다. 역직기가 등장한 뒤 그가 하루 열일곱 시간, 열여덟 시간을 일해도 그 스무 시간 노동의 생산물은 열 시간의 사회적 노동만을 표현했다.

필요 노동량은 노동생산력의 변화에 따라 계속 달라진다. 인구가 늘어 척박한 땅을 경작해야 한다면 같은 양의 농산물에 더 많은 노동이 들어 농산물 가치가 오른다. 반대로 방적공 한 사람이 물레로 하던 것의 수천 배를 하루에 처리하게 되면 면화 1파운드가 흡수하는 방적 노동은 수천 분의 일이 되고 실의 가치도 그만큼 떨어진다. 노동생산력은 자연 조건(토질, 광산의 사정)과 사회적 생산력(대규모 생산, 자본의 집중과 노동의 결합, 분업, 기계, 개선된 방법, 화학과 자연력의 이용, 교통과 통신에 의한 시간과 공간의 단축)에 달려 있다. 여기서 일반 법칙이 나온다. 상품의 가치는 노동시간에 정비례하고 노동생산력에 반비례한다.

이제 가격이다. 가격은 그 자체로는 가치의 화폐적 표현일 뿐이다. 금과 은의 가치 역시 그것을 얻는 데 필요한 노동량으로 규제되므로, 상품 가치를 금으로 표현한다는 것은 결국 각자의 노동량을 교환하며 배운 표현법이다. 애덤 스미스는 가치의 화폐적 표현을 자연가격이라 불렀고 프랑스 중농학파는 필요가격이라 불렀다.

그러면 가치와 시장가격의 관계는 무엇인가. 시장가격은 개별 생산자의 조건이 어떻든 같은 종류의 상품에 대해 하나다. 그것은 평균적인 생산 조건에서 그 상품을 시장에 공급하는 데 사회적으로 필요한 평균 노동량을 표현한다. 그 점에서 시장가격은 가치와 일치한다. 시장가격이 가치 위아래로 오르내리는 것은 수요와 공급의 변동 때문이고, 더 긴 기간을 놓고 보면 그 등락은 서로 상쇄되어, 독점 같은 사정을 빼면 모든 상품은 평균적으로 그 가치대로 팔린다.

여기서 이 글의 가장 중요한 방법적 결론 하나가 나온다. 이윤의 일반적 본성을 설명하려면 상품이 가치대로 팔린다는 전제에서 출발해야 하며, 이 전제 위에서 이윤을 설명할 수 없다면 이윤은 아예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왜 이 우회가 필요한가. 이윤이 가치 이상으로 비싸게 팔아서 생긴다고 하면, 판 사람이 얻는 것을 산 사람이 잃으므로 사회 전체로는 아무것도 생기지 않기 때문이다. 팔면서 늘 버는 사람은 사면서 늘 잃는다. 사기만 하고 팔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고 해도, 그들이 생산자에게 지불하는 돈은 먼저 생산자에게서 공짜로 받은 것이어야 한다. 그래서 이윤의 원천은 유통 안에서는 찾을 수 없다. 이것이 역설로 들린다면, 지구가 태양 둘레를 돈다는 것도 역설이었다는 마르크스의 말을 기억하면 된다.

제7절 노동력

이제 이렇게 서둘러 할 수 있는 한에서 가치의 본성, 어떤 상품이든 그 가치의 본성을 분석했으니, 우리는 특수한 노동의 가치로 주의를 돌려야 한다. 그리고 여기서 다시 나는 겉보기의 역설로 여러분을 놀라게 해야겠다. 여러분 모두 자기가 날마다 파는 것이 자기의 노동이라고, 따라서 노동에는 가격이 있다고, 그리고 상품의 가격은 그 가치의 화폐적 표현일 뿐이므로 노동의 가치라는 것이 확실히 존재한다고 확신한다. 그러나 흔히 통용되는 뜻에서의 노동의 가치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상품에 결정화된 필요 노동의 양이 그 가치를 이룬다는 것을 보았다. 이제 이 가치 개념을 적용하면, 이를테면 열 시간 노동일의 가치를 어떻게 정의할 수 있겠는가? 그 하루에는 얼마나 많은 노동이 담겨 있는가? 열 시간의 노동이다.

열 시간 노동일의 가치가 열 시간의 노동, 곧 그 안에 담긴 노동의 양과 같다고 말하는 것은 동어반복이고, 게다가 무의미한 표현일 것이다. 물론 「노동의 가치」라는 표현의 참되지만 숨겨진 뜻을 일단 알아내고 나면, 우리는 가치의 이 불합리하고 겉보기에 불가능한 적용을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천체의 실제 운동을 일단 확실히 알고 나면 그 겉보기의, 곧 단지 현상적인 운동을 설명할 수 있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노동자가 파는 것은 직접적으로는 그의 노동이 아니라 그의 노동력이며, 그는 그것의 일시적 처분권을 자본가에게 넘긴다. 이것은 얼마나 확실한 사실인가 하면, 영국의 법에서는 어떤지 모르겠으나 대륙의 몇몇 법에서는 확실히 사람이 자기 노동력을 팔 수 있는 최대 기간이 정해져 있다. 어떤 기간이든 무한정 그렇게 하도록 허용된다면 노예제가 곧바로 되살아날 것이다. 예를 들어 그런 판매가 그의 평생에 걸친다면 그것은 그를 곧바로 고용주의 종신 노예로 만들 것이다.

영국의 가장 오래된 경제학자이자 가장 독창적인 철학자 가운데 한 사람인 토머스 홉스는 이미 『리바이어던』에서 그의 모든 후계자가 놓친 이 점을 본능적으로 짚어 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사람의 가치 또는 값어치는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그의 가격이다. 곧 그의 힘의 사용에 대해 주어지는 만큼이다.」 이 토대에서 출발하면 우리는 노동의 가치를 다른 모든 상품의 가치와 마찬가지로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기 전에 우리는 이렇게 물을 수 있다. 시장에서 한쪽에는 토지, 기계, 원료, 생활수단, 곧 날것 그대로의 토지만 빼면 모두 노동의 생산물인 것들을 가진 한 무리의 구매자가 있고, 다른 쪽에는 자기의 노동력, 자기의 일하는 팔과 두뇌 말고는 팔 것이 아무것도 없는 한 무리의 판매자가 있다는 이 기묘한 현상은 어떻게 생겨나는가? 한 무리는 이윤을 얻어 부유해지려고 끊임없이 사들이고, 다른 무리는 생계를 벌려고 끊임없이 판다는 이 현상은? 이 물음을 탐구하는 것은 경제학자들이 「선행적 축적」 또는 「본원적 축적」이라 부르지만 마땅히 본원적 수탈이라 불러야 할 것을 탐구하는 일이 될 것이다. 우리는 이 이른바 본원적 축적이란 노동하는 인간과 그의 노동수단 사이에 있던 본래의 결합을 해체하는 결과를 낳은 일련의 역사적 과정에 지나지 않음을 알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런 탐구는 지금 내 주제의 울타리 밖에 있다. 노동하는 인간과 노동수단 사이의 분리가 한번 확립되면, 그런 사태는 생산양식의 새롭고 근본적인 혁명이 그것을 다시 뒤엎고 본래의 결합을 새로운 역사적 형태로 회복할 때까지 스스로를 유지하고 끊임없이 커지는 규모로 스스로를 재생산할 것이다.

그러면 노동력의 가치란 무엇인가?

다른 모든 상품의 가치와 마찬가지로 그 가치는 그것을 생산하는 데 필요한 노동의 양으로 규정된다. 사람의 노동력은 오직 그의 살아 있는 개체 속에만 존재한다. 사람이 자라고 생명을 유지하려면 일정한 양의 필수품을 소비해야 한다. 그러나 사람은 기계와 마찬가지로 닳아 없어지며 다른 사람으로 대체되어야 한다. 자기 자신의 유지에 필요한 필수품의 양 말고도, 그는 노동시장에서 자기를 대신하고 노동자의 종족을 이어 갈 일정한 수의 아이들을 기르기 위해 또 다른 양의 필수품이 필요하다. 게다가 자기 노동력을 발전시키고 일정한 숙련을 익히려면 또 다른 양의 가치를 써야 한다. 우리의 목적에는 교육과 발전의 비용이 사라질 만큼 작은 크기인 평균 노동만을 고찰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래도 나는 이 기회에 다음을 말해 두어야겠다. 서로 다른 질의 노동력을 생산하는 비용이 다른 만큼, 서로 다른 업종에 쓰이는 노동력의 가치도 다르다. 그러므로 임금의 평등을 요구하는 외침은 오해 위에 서 있으며,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헛된 소망이다. 그것은 전제는 받아들이면서 결론은 피하려 드는 저 거짓되고 얄팍한 급진주의의 소산이다. 임금제도의 토대 위에서 노동력의 가치는 다른 모든 상품의 가치와 마찬가지로 정해진다. 그리고 서로 다른 종류의 노동력은 서로 다른 가치를 가지므로, 곧 그 생산에 서로 다른 양의 노동을 필요로 하므로, 노동시장에서 서로 다른 가격을 받을 수밖에 없다. 임금제도의 토대 위에서 평등한, 아니 공평한 보수를 요구하는 것은 노예제의 토대 위에서 자유를 요구하는 것과 같다. 여러분이 정의롭다거나 공평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이것이다. 주어진 생산 체제에서 무엇이 필연적이고 불가피한가? 지금까지 말한 것으로부터, 노동력의 가치는 노동력을 생산하고 발전시키고 유지하고 이어 가는 데 필요한 필수품의 가치에 의해 규정된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해설: 노동자가 파는 것은 무엇인가

가치 일반을 다루었으니 이제 「노동의 가치」 차례다. 마르크스는 다시 한번 역설처럼 들릴 말을 꺼낸다. 흔히 쓰는 뜻에서의 노동의 가치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가치가 상품에 결정화된 필요 노동량이라면, 열 시간 노동일의 가치는 어떻게 정의되는가? 그 안에 든 노동은 열 시간의 노동이다. 열 시간 노동일의 가치가 열 시간의 노동이라는 말은 동어반복이고, 따라서 무의미하다. 노동자가 파는 것은 노동이 아니라 노동하는 힘, 곧 노동력이며, 그는 그 힘의 처분권을 한동안 자본가에게 넘긴다.

노동력이라는 낱말이 필요한 이유가 여기 있다. 노동은 노동력을 사용한 결과이지 사고파는 물건이 아니다. 마르크스는 그 증거로 몇몇 나라의 법이 노동력을 팔 수 있는 최대 기간을 정해 두고 있다는 사실을 든다. 기간 제한 없이 팔 수 있다면 노예제가 곧바로 되살아날 것이고, 평생을 팔면 그는 곧바로 고용주의 종신 노예가 된다. 홉스의 『리바이어던』 인용은 이 점을 이미 짚은 선례다.

그런데 어떻게 시장 한쪽에는 토지와 기계와 원료와 생활수단을 가진 구매자들이 서 있고, 다른 쪽에는 자기 노동하는 힘과 팔과 두뇌 말고는 팔 것이 없는 판매자들이 서 있게 되었는가? 마르크스는 이 물음을 「본원적 축적」, 마땅히는 「본원적 수탈」이라 불러야 할 역사 과정으로 넘긴다. 이 대목은 두 해 뒤 『자본론』 제1권의 마지막 편에서 수백 쪽으로 펼쳐진다. 여기서는 한 문단으로 스쳐 지나가지만 방향은 같다. 노동자가 노동력밖에 팔 것이 없다는 사정은 인간 본성이 아니라 역사의 산물이며, 한번 성립한 뒤로는 스스로를 점점 큰 규모로 재생산한다.

그렇다면 노동력의 가치는 무엇이 정하는가. 다른 모든 상품과 같다. 그것을 생산하는 데 필요한 노동량이다. 사람은 자라고 살아가기 위해 일정한 양의 생활수단을 소비해야 하고, 기계처럼 닳아 없어지므로 자기를 대신할 아이들을 길러야 하며, 일정한 숙련을 익히려면 또 얼마간의 가치를 써야 한다. 그래서 노동력의 종류마다 생산비가 다르고 가치도 다르다. 마르크스는 여기서 당대 노동운동의 한 요구, 임금 평등의 요구를 정면으로 친다. 임금제도의 토대 위에서 공평한 보수를 요구하는 것은 노예제의 토대 위에서 자유를 요구하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10년 뒤 고타 강령을 검사하면서 마르크스가 「공정한 분배」라는 문구를 심문하는 자리에 이 논리가 그대로 다시 나온다. 공정함을 도덕의 언어로 요구하면 그 요구가 서 있는 체제 자체는 검사 대상에서 빠져나간다. 두 글이 같은 축 위에 있다는 것이 처음으로 눈에 보이는 대목이다.

제8절 잉여가치의 생산

이제 한 노동자의 하루 필수품의 평균량을 생산하는 데 여섯 시간의 평균 노동이 필요하다고 가정하자. 더 나아가 여섯 시간의 평균 노동이 3실링에 해당하는 양의 금에도 실현되어 있다고 가정하자. 그러면 3실링이 그 사람의 노동력의 하루 가치의 가격, 곧 화폐적 표현일 것이다. 그가 하루 여섯 시간 일한다면 그는 날마다 자기 하루 필수품의 평균량을 사기에, 곧 노동하는 인간으로서 자기를 유지하기에 충분한 가치를 생산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이 사람은 임금노동자다. 그러므로 그는 자기 노동력을 자본가에게 팔아야 한다. 그가 그것을 하루 3실링, 곧 한 주 18실링에 판다면 그는 그것을 그 가치대로 파는 것이다. 그가 방적공이라고 하자. 그가 하루 여섯 시간 일한다면 그는 날마다 면화에 3실링의 가치를 더할 것이다. 그가 날마다 더하는 이 가치는 그가 날마다 받는 임금, 곧 그의 노동력의 가격과 정확한 등가물일 것이다. 그러나 그 경우 자본가에게는 어떤 잉여가치도 잉여생산물도 전혀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바로 여기서 우리는 문제의 핵심에 부딪힌다.

노동자의 노동력을 사고 그 가치를 지불함으로써 자본가는 다른 모든 구매자와 마찬가지로 산 상품을 소비하거나 사용할 권리를 얻었다. 기계를 돌려서 그것을 소비하거나 사용하듯이, 사람의 노동력은 그를 일하게 함으로써 소비하거나 사용한다. 그러므로 노동자의 노동력의 하루 또는 한 주의 가치를 사면서 자본가는 하루 또는 한 주 전체 동안 그 노동력을 사용하거나 일하게 할 권리를 얻었다. 물론 노동일 또는 노동주에는 일정한 한계가 있지만, 그것은 나중에 더 자세히 보기로 하자.

지금은 하나의 결정적인 점에 여러분의 주의를 돌리고 싶다. 노동력의 가치는 그것을 유지하거나 재생산하는 데 필요한 노동의 양으로 규정되지만, 그 노동력의 사용은 오직 노동자의 활동 에너지와 체력에 의해서만 제한된다. 노동력의 하루 또는 한 주의 가치는 그 힘을 하루 또는 한 주 동안 행사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말이 먹어야 하는 사료와 그 말이 사람을 태우고 갈 수 있는 시간이 전혀 다른 것과 같다. 노동자의 노동력의 가치를 제한하는 노동의 양은 그의 노동력이 수행할 수 있는 노동의 양에 대해서는 결코 한계가 되지 않는다. 우리의 방적공의 예를 보자. 우리는 그가 자기 노동력을 날마다 재생산하려면 날마다 3실링의 가치를 재생산해야 하고, 그것을 하루 여섯 시간 일해서 해낸다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이것은 그가 하루 열 시간이나 열두 시간이나 그 이상 일하지 못하게 하지는 않는다. 그런데 방적공의 노동력의 하루 또는 한 주의 가치를 지불함으로써 자본가는 하루 또는 한 주 전체 동안 그 노동력을 사용할 권리를 얻었다. 그러므로 그는 방적공을 이를테면 하루 열두 시간 일하게 할 것이다. 자기 임금, 곧 자기 노동력의 가치를 메우는 데 필요한 여섯 시간을 넘어서 방적공은 또 다른 여섯 시간을 일해야 할 것이다. 나는 이것을 잉여노동의 시간이라 부르겠고, 이 잉여노동은 잉여가치와 잉여생산물로 실현될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의 방적공이 하루 여섯 시간의 노동으로 면화에 3실링의 가치, 곧 자기 임금과 정확한 등가를 이루는 가치를 더했다면, 그는 열두 시간에는 면화에 6실링어치를 더하고 그에 비례하는 잉여의 실을 생산할 것이다. 그는 자기 노동력을 자본가에게 팔았으므로, 그가 만들어 낸 생산물의 가치 전부는 그의 노동력의 일시적 소유자인 자본가에게 속한다. 그러므로 자본가는 3실링을 선대함으로써 6실링의 가치를 실현할 것이다. 여섯 시간의 노동이 결정화된 가치를 선대하고 열두 시간의 노동이 결정화된 가치를 그 대가로 받기 때문이다. 이 같은 과정을 날마다 되풀이함으로써 자본가는 날마다 3실링을 선대하고 날마다 6실링을 호주머니에 넣을 것이다. 그 절반은 다시 임금을 지불하는 데 쓰이고, 나머지 절반은 자본가가 아무 등가도 지불하지 않는 잉여가치를 이룰 것이다. 자본주의적 생산, 곧 임금제도가 그 위에 세워져 있는 것은 바로 자본과 노동 사이의 이런 종류의 교환이며, 이 교환은 끊임없이 노동자를 노동자로, 자본가를 자본가로 재생산하는 결과를 낳을 수밖에 없다.

잉여가치율은 다른 모든 사정이 같다면, 노동일 가운데 노동력의 가치를 재생산하는 데 필요한 부분과 자본가를 위해 수행되는 잉여시간 또는 잉여노동 사이의 비율에 달려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노동자가 그만큼만 일하면 자기 노동력의 가치를 재생산하는 데, 곧 자기 임금을 메우는 데 그치게 될 그 길이를 넘어 노동일이 연장되는 비율에 달려 있을 것이다.

해설: 여섯 시간과 열두 시간

이제 이 글의 핵심 계산이다. 노동자의 하루 생활수단을 생산하는 데 평균 여섯 시간의 노동이 든다고 하고, 여섯 시간의 평균 노동이 3실링에 해당하는 금으로 실현된다고 하자. 그러면 3실링이 그 사람의 노동력의 하루 가치를 화폐로 표현한 것이다. 그가 하루 여섯 시간 일한다면 자기 생활수단을 살 만큼의 가치를 생산하는 셈이다.

그러나 그는 임금노동자다. 노동력을 자본가에게 팔아야 하고, 하루 3실링에 판다면 그것을 제 가치대로 판 것이다. 그가 방적공이라면 하루 여섯 시간 일해 면화에 3실링의 가치를 더한다. 그가 받은 임금과 정확히 같은 값이다. 그렇다면 자본가에게는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바로 여기가 문제의 지점이다.

열쇠는 노동력의 가치와 노동력의 사용을 가르는 데 있다. 노동력의 가치는 그것을 재생산하는 데 필요한 노동량으로 정해지지만, 그 사용은 노동자의 체력이 허락하는 데까지 간다. 말이 먹어야 하는 사료와 그 말이 사람을 태우고 갈 수 있는 시간이 다른 것과 같다. 노동력을 산 자본가는 다른 모든 구매자와 마찬가지로 산 물건을 사용할 권리를 얻는다. 노동력을 사용한다는 것은 사람을 일하게 하는 것이다. 하루치 가치를 지불했으니 하루 동안 쓸 권리가 있다. 그래서 그는 열두 시간을 일하게 한다. 임금을 메우는 데 필요한 여섯 시간을 넘어선 나머지 여섯 시간이 잉여노동이고, 그것이 잉여가치와 잉여생산물로 실현된다.

숫자로 하면 이렇다. 자본가는 하루 3실링을 미리 내주고 6실링을 손에 넣는다. 여섯 시간의 노동이 결정화된 가치를 내주고 열두 시간의 노동이 결정화된 가치를 돌려받기 때문이다. 그 절반은 다시 임금으로 나가고 나머지 절반이 잉여가치로 남는다. 자본가가 등가를 지불하지 않은 부분이다. 제6절의 정리가 여기서 풀린다. 상품은 모두 가치대로 팔렸다. 노동력도 가치대로 팔렸다. 그런데도 이윤이 생긴다.

잉여가치율은 다른 조건이 같다면, 노동일 가운데 노동력의 가치를 재생산하는 부분과 자본가를 위해 수행되는 잉여노동 부분의 비율에 달려 있다. 곧 노동일이 그 지점을 넘어 얼마나 연장되었는가에 달려 있다.

제9절 노동의 가치

우리는 이제 「노동의 가치 또는 가격」이라는 표현으로 돌아가야 한다. 우리는 그것이 사실은 노동력의 유지에 필요한 상품의 가치로 재어지는 노동력의 가치일 뿐임을 보았다. 그러나 노동자는 자기 노동이 수행된 뒤에 임금을 받고, 게다가 자기가 실제로 자본가에게 주는 것이 자기 노동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므로, 그의 노동력의 가치 또는 가격은 그에게 필연적으로 그의 노동 자체의 가격 또는 가치로 나타난다. 여섯 시간의 노동이 실현된 그의 노동력의 가격이 3실링이고 그가 열두 시간을 일한다면, 그는 이 열두 시간의 노동이 6실링의 가치로 실현되는데도 이 3실링을 필연적으로 열두 시간 노동의 가치 또는 가격으로 여긴다. 여기서 이중의 결과가 흘러나온다.

첫째. 노동력의 가치 또는 가격이 노동 자체의 가격 또는 가치라는 겉모습을 띤다. 엄밀히 말하면 노동의 가치와 가격은 무의미한 말인데도 그렇다.

둘째. 노동자의 하루 노동 가운데 한 부분만 지불되고 다른 부분은 지불되지 않으며, 그 지불되지 않은 노동 또는 잉여노동이 바로 잉여가치 또는 이윤이 형성되는 기금을 이루는데도, 노동 전체가 지불된 노동인 것처럼 보인다.

이 허위의 겉모습이 임금노동을 다른 역사적 노동 형태들과 구별한다. 임금제도의 토대 위에서는 지불되지 않은 노동조차 지불된 노동처럼 보인다. 반대로 노예의 경우에는 그의 노동 가운데 지불된 부분마저 지불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물론 노예도 일하려면 살아야 하고, 그의 노동일 가운데 한 부분은 그 자신의 유지의 가치를 메우는 데 쓰인다. 그러나 그와 그의 주인 사이에는 아무 흥정도 없고 두 당사자 사이에 아무 매매 행위도 일어나지 않으므로, 그의 노동 전부가 공짜로 주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다른 한편, 말하자면 어제까지 동유럽 전역에 존재했던 것과 같은 농노를 보자. 이 농민은 예를 들어 사흘은 자기 자신을 위해 자기 밭이나 자기에게 할당된 밭에서 일했고, 그 다음 사흘은 영주의 영지에서 강제적이고 무상인 노동을 수행했다. 그러니 여기서는 노동의 지불된 부분과 지불되지 않은 부분이 감각적으로, 시간과 공간에서 분리되어 있었다. 그리고 우리의 자유주의자들은 사람을 공짜로 일하게 한다는 터무니없는 발상에 도덕적 분노를 쏟아 냈다.

그러나 사실은, 어떤 사람이 일주일에 사흘은 자기 밭에서 자기 자신을 위해 일하고 사흘은 영주의 영지에서 공짜로 일하든, 공장이나 작업장에서 하루 여섯 시간은 자기 자신을 위해, 여섯 시간은 고용주를 위해 일하든, 결과는 같다. 다만 뒤의 경우에는 노동의 지불된 부분과 지불되지 않은 부분이 서로 떼어 놓을 수 없게 뒤섞여 있고, 거래 전체의 성격이 계약의 개입과 주말에 받는 급여에 의해 완전히 가려져 있을 뿐이다. 무상 노동이 한쪽에서는 자발적으로 주어지는 것처럼 보이고, 다른 쪽에서는 강제되는 것처럼 보인다. 차이는 그것뿐이다.

「노동의 가치」라는 말을 쓸 때 나는 그것을 「노동력의 가치」를 가리키는 통속적인 은어로만 쓰겠다.

해설: 지불된 것처럼 보이는 것

여기서 마르크스는 앞 절의 계산이 왜 눈에 보이지 않는지를 설명한다. 노동자는 노동이 끝난 뒤에 임금을 받고, 자기가 자본가에게 준 것이 노동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 그래서 노동력의 가치가 그에게는 노동 자체의 가치나 가격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 여섯 시간이 실현된 3실링을 받고 열두 시간을 일하면, 그는 그 3실링을 열두 시간 노동의 값으로 여긴다. 실제로 그 열두 시간은 6실링의 가치로 실현되는데도 그렇다.

여기서 두 가지가 따라 나온다. 첫째, 노동력의 가치가 노동의 가격이라는 겉모습을 쓴다. 엄밀히 말하면 노동의 가치나 가격이라는 말은 무의미한데도 그렇다. 둘째, 노동자의 하루 노동 가운데 한 부분만 지불되고 나머지는 지불되지 않으며 그 지불되지 않은 부분이 바로 이윤의 원천인데도, 마치 전체 노동이 지불된 것처럼 보인다.

이 허위의 겉모습이 임금노동을 노예노동이나 농노의 부역과 구별한다. 노예도 일하려면 살아야 하므로 그의 노동일 가운데 한 부분은 자기 유지비를 메운다. 그러나 주인과 흥정도 매매도 없으니 그의 노동 전체가 공짜로 넘어가는 것처럼 보인다. 농노는 또 다르다. 사흘은 자기 밭에서 일하고 사흘은 영주의 땅에서 무상으로 일했으니 지불된 부분과 지불되지 않은 부분이 시간과 공간으로 뚜렷이 갈라져 있었다. 그때 자유주의자들은 사람을 공짜로 일하게 한다는 발상에 도덕적 분노를 터뜨렸다. 그런데 공장에서 여섯 시간은 자기를 위해, 여섯 시간은 고용주를 위해 일하는 것은 그것과 결과가 같다. 계약과 주급이 거래의 성격을 가릴 뿐이다.

이 절이 이 글에서 차지하는 자리는 크다. 착취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그것이 없어서가 아니라 임금이라는 형태가 그것을 가리기 때문이라는 것, 그러므로 임금 명세서를 아무리 들여다봐도 이윤의 출처는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그러면서도 실용적으로 덧붙인다. 앞으로 「노동의 가치」라는 말을 쓸 때는 「노동력의 가치」를 가리키는 통속적 은어로만 쓰겠다고.

제10절 이윤은 상품을 그 가치대로 팔아서 생긴다

평균 노동 한 시간이 6펜스에 해당하는 가치로 실현되고, 곧 평균 노동 열두 시간이 6실링으로 실현된다고 가정하자. 더 나아가 노동의 가치가 3실링, 곧 여섯 시간 노동의 생산물이라고 가정하자. 그러면 어떤 상품에 쓰인 원료, 기계 따위에 스물네 시간의 평균 노동이 실현되어 있다면 그 가치는 12실링에 이를 것이다. 게다가 자본가가 고용한 노동자가 그 생산수단에 열두 시간의 노동을 더한다면 이 열두 시간은 6실링의 추가 가치로 실현될 것이다. 그러므로 생산물의 총가치는 실현된 노동 서른여섯 시간에 이르고, 18실링과 같을 것이다. 그러나 노동의 가치, 곧 노동자에게 지불된 임금은 3실링뿐이므로, 노동자가 수행하고 상품의 가치에 실현된 여섯 시간의 잉여노동에 대해서는 자본가가 아무 등가도 지불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상품을 그 가치대로 18실링에 팖으로써 자본가는 자기가 아무 등가도 지불하지 않은 3실링의 가치를 실현할 것이다. 이 3실링이 그가 호주머니에 넣는 잉여가치 또는 이윤을 이룰 것이다. 따라서 자본가는 자기 상품을 그 가치 이상의 가격에 팔아서가 아니라 그 실제 가치대로 팔아서 3실링의 이윤을 실현하게 된다.

상품의 가치는 그 안에 담긴 노동의 총량으로 규정된다. 그러나 그 노동량의 일부는 임금의 형태로 등가가 지불된 가치로 실현되고, 일부는 아무 등가도 지불되지 않은 가치로 실현된다. 상품에 담긴 노동의 일부는 지불된 노동이고 일부는 지불되지 않은 노동이다. 그러므로 상품을 그 가치대로, 곧 거기에 들어간 노동의 총량의 결정체로서 팖으로써 자본가는 필연적으로 이윤을 남기고 팔 수밖에 없다. 그는 자기에게 등가를 치르게 한 것만이 아니라, 자기 노동자에게는 노동이 들었지만 자기에게는 아무것도 들지 않은 것까지 판다. 상품이 자본가에게 든 비용과 그 상품의 실제 비용은 다른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되풀이한다. 정상적이고 평균적인 이윤은 상품을 그 실제 가치 이상으로가 아니라 실제 가치대로 팔아서 생긴다.

해설: 등가교환에서 나오는 이윤

앞의 결론을 하나의 계산표로 확인하는 짧은 절이다. 평균 노동 한 시간이 6펜스의 가치로, 열두 시간이 6실링으로 실현된다고 하자. 노동의 가치, 곧 노동력의 하루 가치는 3실링, 여섯 시간의 생산물이다. 어떤 상품에 쓰인 원료와 기계에 스물네 시간의 평균 노동이 실현되어 있다면 그 부분의 가치는 12실링이다. 노동자가 그 생산수단에 열두 시간의 노동을 더하면 6실링의 가치가 더해진다. 완성된 상품의 총가치는 서른여섯 시간, 곧 18실링이다.

그런데 지불된 임금은 3실링뿐이다. 여섯 시간의 잉여노동에 대해서는 등가가 지불되지 않았다. 자본가는 이 상품을 그 가치대로 18실링에 팔면서, 아무 등가도 지불하지 않은 3실링의 가치를 실현한다. 가치 이상의 가격에 팔아서가 아니라 실제 가치대로 팔아서 생기는 이윤이다.

상품의 가치는 그 안에 든 노동 총량이 정한다. 그 총량의 일부는 임금이라는 형태로 등가가 지불된 노동이고 나머지는 지불되지 않은 노동이다. 상품을 가치대로 판다는 것은 그 노동 총량의 결정체로서 판다는 것이므로, 자본가는 필연적으로 이윤을 남긴다. 그는 자기에게 등가를 치르게 한 것만이 아니라 자기에게는 아무것도 들지 않았지만 노동자에게는 노동이 든 것까지 함께 판다. 상품이 자본가에게 든 비용과 그 상품의 진짜 비용은 다른 것이다.

이 결론이 왜 중요한가. 이윤이 사기나 폭리에서 나온다고 보면 정직한 자본가와 부정한 자본가를 가르는 문제가 되고, 처방은 규제와 감독이 된다. 이윤이 등가교환 그 자체에서 나온다면 문제는 개인의 부정직이 아니라 관계 자체이고, 처방도 달라진다.

제11절 잉여가치가 나뉘는 여러 부분

나는 잉여가치, 곧 상품의 총가치 가운데 노동자의 잉여노동 또는 지불되지 않은 노동이 실현된 부분을 이윤이라 부른다. 이 이윤 전부가 고용 자본가의 호주머니에 들어가지는 않는다. 토지의 독점은 지주로 하여금, 그 토지가 농업이나 건물이나 철도에 쓰이든 다른 어떤 생산적 목적에 쓰이든, 그 잉여가치의 한 부분을 지대라는 이름으로 가져가게 한다. 다른 한편, 노동수단의 소유가 고용 자본가로 하여금 잉여가치를 생산하게, 또는 같은 말이지만 일정한 양의 지불되지 않은 노동을 자기 것으로 삼게 한다는 바로 그 사실이, 노동수단을 고용 자본가에게 전부 또는 일부 빌려주는 그 소유자, 한마디로 화폐대부 자본가로 하여금 그 잉여가치의 또 다른 부분을 이자라는 이름으로 자기 몫으로 요구하게 한다. 그래서 고용 자본가 그 자체에게는 산업이윤 또는 상업이윤이라 불리는 것만 남는다.

잉여가치의 총액이 이 세 범주의 사람들 사이에서 나뉘는 것이 어떤 법칙으로 규제되는가 하는 것은 우리의 주제와 전혀 무관한 문제다. 그러나 지금까지 말한 것으로부터 이만큼은 따라 나온다.

지대, 이자, 산업이윤은 상품의 잉여가치, 곧 그 안에 담긴 지불되지 않은 노동의 서로 다른 부분들에 붙은 서로 다른 이름일 뿐이며, 그것들은 똑같이 이 원천에서, 오직 이 원천에서만 나온다. 그것들은 토지 그 자체나 자본 그 자체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토지와 자본은 그 소유자들로 하여금 고용 자본가가 노동자에게서 뽑아낸 잉여가치에서 각자의 몫을 받아 내게 해 줄 뿐이다. 노동자 자신에게는, 자기 잉여노동 또는 지불되지 않은 노동의 결과인 그 잉여가치가 고용 자본가의 호주머니에 통째로 들어가는지, 아니면 고용 자본가가 그 일부를 지대와 이자라는 이름으로 제3자에게 지불해야 하는지는 부차적인 중요성밖에 없는 문제다. 고용 자본가가 자기 자본만을 쓰고 자기 자신이 지주라고 가정하면 잉여가치 전부가 그의 호주머니에 들어갈 것이다.

이 잉여가치를 노동자에게서 직접 뽑아내는 것은 고용 자본가다. 그가 결국 그 가운데 얼마를 자기 몫으로 지킬 수 있든 그렇다. 그러므로 임금제도 전체와 현재의 생산 체제 전체가 고용 자본가와 임금노동자 사이의 이 관계에 달려 있다. 따라서 우리 토론에 참여한 몇몇 시민이 사태를 얼버무리며 고용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의 이 근본적 관계를 부차적 문제로 다루려 한 것은 잘못이었다. 주어진 사정 아래서 가격 상승이 고용 자본가, 지주, 화폐자본가, 그리고 굳이 말하자면 세금 징수인에게 매우 불균등한 정도로 영향을 줄 수 있다고 말한 점에서는 그들이 옳았지만 말이다.

지금까지 말한 것으로부터 또 하나의 결과가 따라 나온다.

상품의 가치 가운데 원료, 기계, 한마디로 소모된 생산수단의 가치만을 나타내는 부분은 어떤 수입도 이루지 않고 오직 자본을 대체할 뿐이다. 그러나 이것을 제쳐 두더라도, 상품의 가치 가운데 수입을 이루는, 곧 임금, 이윤, 지대, 이자의 형태로 지출될 수 있는 다른 부분이 임금의 가치, 지대의 가치, 이윤의 가치 따위로 구성된다는 것은 거짓이다. 우리는 우선 임금을 제쳐 두고 산업이윤, 이자, 지대만을 다루겠다. 우리는 방금 상품에 담긴 잉여가치, 곧 그 가치 가운데 지불되지 않은 노동이 실현된 부분이 세 개의 서로 다른 이름을 가진 서로 다른 조각들로 분해된다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그 가치가 이 세 구성 부분의 독립된 가치의 합산으로 구성되거나 형성된다고 말하는 것은 진실과 정반대일 것이다.

한 시간의 노동이 6펜스의 가치로 실현되고, 노동자의 노동일이 열두 시간이며, 이 시간의 절반이 지불되지 않은 노동이라면, 그 잉여노동은 상품에 3실링의 잉여가치, 곧 아무 등가도 지불되지 않은 가치를 더할 것이다. 이 3실링의 잉여가치가 고용 자본가가 지주 및 화폐대부자와 어떤 비율로든 나눌 수 있는 기금 전체를 이룬다. 이 3실링의 가치가 그들이 자기들끼리 나누어야 할 가치의 한계를 이룬다. 고용 자본가가 자기 이윤을 위해 임의의 가치를 상품의 가치에 덧붙이고, 거기에 지주를 위한 또 다른 가치가 덧붙여지고, 이런 식으로 해서 이 임의로 정해진 가치들의 합산이 총가치를 이루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주어진 가치가 세 부분으로 분해되는 것과 세 개의 독립된 가치의 합산으로 그 가치가 형성되는 것을 혼동함으로써, 지대와 이윤과 이자가 나오는 총가치를 임의의 크기로 바꾸어 버리는 통속적 관념의 오류를 보게 된다.

어떤 자본가가 실현한 총이윤이 100파운드라면, 우리는 절대적 크기로 고찰된 이 금액을 이윤의 양이라 부른다. 그러나 이 100파운드가 선대된 자본에 대해 갖는 비율을 계산하면, 우리는 이 상대적 크기를 이윤율이라 부른다. 이 이윤율이 두 가지 방식으로 표현될 수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100파운드가 임금으로 선대된 자본이라고 가정하자. 창출된 잉여가치도 100파운드라면, 그리고 이것은 노동자의 노동일의 절반이 지불되지 않은 노동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보여 주는데, 이 이윤을 임금으로 선대된 자본의 가치로 잰다면 우리는 이윤율이 100퍼센트에 이른다고 말할 것이다. 선대된 가치가 100이고 실현된 가치가 200이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임금으로 선대된 자본만이 아니라 선대된 총자본, 이를테면 그 가운데 400파운드가 원료와 기계 따위의 가치를 나타내는 500파운드를 고찰한다면, 우리는 이윤율이 20퍼센트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할 것이다. 100의 이윤은 선대된 총자본의 5분의 1에 지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윤율을 표현하는 첫째 방식만이 지불된 노동과 지불되지 않은 노동 사이의 실제 비율, 곧 노동 착취(이 프랑스어 낱말을 쓰는 것을 허락해 주기 바란다)의 실제 정도를 여러분에게 보여 준다. 다른 표현 방식은 흔히 쓰이는 것이고, 실제로 어떤 목적에는 적합하다. 어쨌든 그것은 자본가가 노동자에게서 무상 노동을 뽑아내는 정도를 감추는 데 매우 유용하다.

앞으로 남은 이야기에서 나는 잉여가치가 여러 당사자 사이에서 어떻게 나뉘는가는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자본가가 뽑아낸 잉여가치의 총액에 이윤이라는 말을 쓰겠다. 그리고 이윤율이라는 말을 쓸 때 나는 언제나 이윤을 임금으로 선대된 자본의 가치로 재겠다.

해설: 지대, 이자, 산업이윤

마르크스는 상품의 총가치 가운데 노동자의 잉여노동이 실현된 부분을 이윤이라 부르겠다고 말한 뒤, 그 이윤이 통째로 고용 자본가의 주머니에 들어가지는 않는다는 사실로 넘어간다. 토지 독점은 지주에게 그 일부를 지대라는 이름으로 가져가게 한다. 노동수단을 빌려준 화폐자본가는 또 다른 일부를 이자라는 이름으로 요구한다. 고용 자본가에게 남는 것은 산업이윤 또는 상업이윤이라 불리는 부분이다. 세 가지는 모두 지불되지 않은 노동이라는 하나의 원천에 붙은 서로 다른 이름일 뿐이다.

노동자에게는 자기 잉여노동의 결과가 고용 자본가의 주머니에 통째로 들어가는지, 그중 일부가 지대와 이자로 제3자에게 넘어가는지가 부차적인 문제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토론에 참여한 몇몇 회원이 고용 자본가와 임금노동자의 관계를 부차적 문제로 다루려 한 것이 잘못이라고 지적한다. 이 관계 위에 임금제도 전체와 현재의 생산체제 전체가 걸려 있기 때문이다.

이어서 흔한 착각 하나를 바로잡는다. 상품 가치 가운데 원료와 기계의 가치를 대체하는 부분은 소득이 아니라 자본을 대체할 뿐이다. 나머지 부분이 임금, 이윤, 지대, 이자로 지출될 수 있다는 것은 맞지만, 그 부분의 가치가 임금의 가치와 이윤의 가치와 지대의 가치를 더해서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주어진 하나의 가치가 세 부분으로 분해되는 것과, 세 개의 독립된 가치가 더해져서 그 가치가 형성되는 것은 다르다. 한 시간 노동이 6펜스로 실현되고 노동일이 열두 시간이며 그 절반이 지불되지 않은 노동이라면, 잉여노동은 3실링의 잉여가치를 상품에 더한다. 이 3실링이 고용 자본가가 지주 및 화폐대부자와 어떤 비율로든 나눌 수 있는 기금 전체이고, 그들이 나눠 가질 값의 한계다. 자본가가 자기 이윤을 위해 임의의 가치를 상품에 얹고 지주가 또 얹는 것이 아니다.

마지막으로 이윤율을 표현하는 두 가지 방식이 나온다. 자본가가 100파운드의 이윤을 얻었다면 그것은 이윤의 양이다. 그것이 투하 자본에 대해 갖는 비율은 이윤율이다. 그런데 무엇을 분모로 놓느냐에 따라 숫자가 달라진다. 임금으로 투하된 자본이 100파운드이고 잉여가치도 100파운드라면 이윤율은 100퍼센트다. 원료와 기계에 400파운드가 더 들어가 총자본이 500파운드라면 같은 이윤이 20퍼센트가 된다. 첫째 방식만이 착취의 실제 정도를 보여 주고, 널리 쓰이는 둘째 방식은 하필 그것을 가리는 쪽이라는 지적이다. 오늘의 재무제표에서 영업이익률이 매출액 기준으로 표시되는 것도 같은 성질의 선택이다. 어떤 분모를 쓰느냐가 무엇을 보이고 무엇을 가릴지를 정한다.

제12절 이윤, 임금, 가격의 일반적 관계

상품의 가치에서 거기에 쓰인 원료와 그 밖의 생산수단의 가치를 대체하는 가치, 곧 그 안에 담긴 과거 노동을 나타내는 가치를 빼면, 그 가치의 나머지는 마지막에 고용된 노동자가 더한 노동의 양으로 귀착된다. 그 노동자가 하루 열두 시간 일하고, 열두 시간의 평균 노동이 6실링에 해당하는 양의 금으로 결정화된다면, 이 6실링의 추가 가치가 그의 노동이 창조한 유일한 가치다. 그의 노동시간으로 규정되는 이 주어진 가치가 그와 자본가 둘 다 각자의 몫 또는 배당을 끌어내야 할 유일한 기금이고, 임금과 이윤으로 나뉠 유일한 가치다. 이 가치 자체는 그것이 두 당사자 사이에서 나뉘는 비율이 어떻게 달라지든 바뀌지 않으리라는 것은 분명하다. 한 노동자 대신 노동인구 전체를, 예를 들어 하루의 노동일 대신 1200만 노동일을 놓아도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자본가와 노동자는 이 제한된 가치, 곧 노동자의 총노동으로 재어지는 가치를 나누어 가질 수밖에 없으므로, 한쪽이 더 가지면 다른 쪽은 덜 가지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어떤 양이 주어져 있을 때 그 한 부분은 다른 부분이 줄어드는 만큼 늘어난다. 임금이 변하면 이윤은 반대 방향으로 변할 것이다. 임금이 떨어지면 이윤이 오르고, 임금이 오르면 이윤이 떨어질 것이다. 앞의 가정대로 노동자가 자기가 창조한 가치의 절반에 해당하는 3실링을 받는다면, 곧 그의 노동일 전체가 절반은 지불된 노동, 절반은 지불되지 않은 노동으로 이루어진다면, 자본가도 3실링을 가질 것이므로 이윤율은 100퍼센트일 것이다. 노동자가 2실링만 받는다면, 곧 하루 전체 가운데 3분의 1만 자기를 위해 일한다면, 자본가는 4실링을 가질 것이고 이윤율은 200퍼센트일 것이다. 노동자가 4실링을 받는다면 자본가는 2실링만 받을 것이고 이윤율은 50퍼센트로 떨어질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변동은 상품의 가치에 영향을 주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일반적 임금 인상은 일반 이윤율의 하락을 낳지만 가치에는 영향을 주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결국 시장가격을 규제할 수밖에 없는 상품의 가치가 오로지 그 안에 고정된 노동의 총량으로 규정되고 그 양이 지불된 노동과 지불되지 않은 노동으로 나뉘는 방식으로 규정되지 않는다고 해서, 예를 들어 열두 시간 동안 생산된 개개의 상품 또는 상품 묶음의 가치가 불변으로 남으리라는 결론은 결코 따라 나오지 않는다. 주어진 노동시간에, 또는 주어진 양의 노동으로 생산되는 상품의 수 또는 양은 사용된 노동의 생산력에 달려 있지 그 범위나 길이에 달려 있지 않다. 예를 들어 방적 노동의 생산력이 어떤 수준일 때는 열두 시간의 노동일이 12파운드의 실을 생산하고, 생산력이 그보다 낮을 때는 2파운드만 생산할 수 있다. 그러면 두 경우 모두 열두 시간의 평균 노동이 6실링의 가치로 실현된다면, 한쪽에서는 12파운드의 실이 6실링이고 다른 쪽에서는 2파운드의 실이 역시 6실링일 것이다. 그러므로 실 1파운드는 한쪽에서는 6펜스, 다른 쪽에서는 3실링일 것이다. 이 가격의 차이는 사용된 노동생산력의 차이에서 생긴다. 생산력이 큰 쪽에서는 한 시간의 노동이 실 1파운드에 실현되고, 생산력이 작은 쪽에서는 여섯 시간의 노동이 실 1파운드에 실현될 것이다. 실 1파운드의 가격은 한쪽에서는 임금이 상대적으로 높고 이윤율이 낮은데도 6펜스에 지나지 않을 것이고, 다른 쪽에서는 임금이 낮고 이윤율이 높은데도 3실링일 것이다. 이렇게 되는 것은 실 1파운드의 가격이 그 안에 가공된 노동의 총량으로 규제되지 그 총량이 지불된 노동과 지불되지 않은 노동으로 나뉘는 비율로 규제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앞에서 말한 사실, 곧 비싼 노동이 싼 상품을 생산하고 싼 노동이 비싼 상품을 생산할 수 있다는 사실은 그 역설적 겉모습을 잃는다. 그것은 상품의 가치가 그 안에 가공된 노동의 양으로 규제되며, 그 안에 가공된 노동의 양은 전적으로 사용된 노동의 생산력에 달려 있어서 노동생산성의 모든 변동과 함께 변한다는 일반 법칙의 표현일 뿐이다.

해설: 처음의 물음으로

이론이 섰으니 이제 처음의 물음으로 돌아간다. 상품 가치에서 원료와 생산수단의 가치, 곧 과거 노동을 빼면 남는 것은 마지막 노동자가 더한 노동량이다. 그가 하루 열두 시간 일하고 열두 시간의 평균 노동이 6실링의 금으로 결정화된다면, 그의 노동이 창조한 가치는 6실링뿐이다. 이 값이 노동자와 자본가가 각자의 몫을 끌어낼 유일한 기금이고, 임금과 이윤으로 나뉠 유일한 가치다.

이 가치 자체는 그것이 둘 사이에 어떤 비율로 나뉘든 달라지지 않는다. 한 사람 대신 노동인구 전체, 하루 대신 1200만 노동일을 놓아도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한쪽이 더 가지면 다른 쪽이 덜 가진다. 임금이 오르면 이윤이 떨어지고 임금이 떨어지면 이윤이 오른다. 노동자가 3실링을 받으면 이윤율은 100퍼센트, 2실링을 받으면 200퍼센트, 4실링을 받으면 50퍼센트다. 그러나 이 모든 변동이 상품의 가치를 바꾸지는 않는다. 제2절에서 수요와 공급의 운동으로 보였던 결론, 곧 일반적 임금 인상은 이윤율의 하락을 낳을 뿐 가치에는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결론이 여기서 가치 이론으로 다시 증명된다.

여기에 하나가 더 붙는다. 상품 가치가 노동 총량으로 정해진다고 해서 열두 시간 동안 생산된 상품 개당 가치가 늘 같다는 뜻은 아니다. 주어진 시간에 생산되는 상품의 양은 노동생산력에 달려 있지 노동의 길이에 달려 있지 않기 때문이다. 방적 노동의 생산력이 높으면 열두 시간에 실 12파운드가, 낮으면 2파운드가 나온다. 두 경우 모두 열두 시간이 6실링으로 실현되므로, 실 1파운드의 값은 앞의 경우 6펜스, 뒤의 경우 3실링이 된다. 임금이 높고 이윤율이 낮은 쪽에서 실이 6펜스이고, 임금이 낮고 이윤율이 높은 쪽에서 3실링일 수 있다.

제5절에서 나온 사실, 곧 비싼 노동이 싼 상품을 만들고 싼 노동이 비싼 상품을 만든다는 관찰이 여기서 역설이기를 그친다. 상품 가격을 정하는 것은 그 안에 든 노동 총량이지 그 총량이 지불 노동과 미지불 노동으로 나뉘는 비율이 아니기 때문이다.

제13절 임금 인상을 시도하거나 인하에 저항하는 주요 사례

이제 임금 인상이 시도되거나 임금 인하에 저항이 일어나는 주요 사례들을 진지하게 살펴보자.

1. 우리는 노동력의 가치, 더 통속적인 말로 노동의 가치가 필수품의 가치, 곧 그것을 생산하는 데 필요한 노동의 양으로 규정된다는 것을 보았다.

그러면 어떤 나라에서 노동자의 하루 평균 필수품의 가치가 3실링으로 표현되는 여섯 시간의 노동을 나타낸다면, 노동자는 이 하루 생활비의 등가를 생산하기 위해 하루 여섯 시간을 일해야 할 것이다. 노동일 전체가 열두 시간이라면 자본가는 그에게 3실링을 지불함으로써 그의 노동의 가치를 지불하는 것이다. 노동일의 절반은 지불되지 않은 노동일 것이고, 이윤율은 100퍼센트에 이를 것이다. 그러나 이제 생산성의 저하로, 이를테면 같은 양의 농산물을 생산하는 데 더 많은 노동이 필요하게 되어 하루 평균 필수품의 가격이 3실링에서 4실링으로 오른다고 가정하자. 그 경우 노동의 가치는 3분의 1, 곧 33과 3분의 1퍼센트 오를 것이다. 노동자가 예전의 생활수준대로 자기 하루 생활비의 등가를 생산하는 데 노동일 가운데 여덟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그러므로 잉여노동은 여섯 시간에서 네 시간으로, 이윤율은 100퍼센트에서 50퍼센트로 떨어질 것이다. 그러나 임금 인상을 고집함으로써 노동자는, 자기 상품의 비용이 늘었을 때 그 늘어난 가치를 지불받으려 하는 다른 모든 상품 판매자와 마찬가지로, 다만 자기 노동의 늘어난 가치를 받기를 고집하는 것일 뿐이다. 임금이 오르지 않거나 필수품의 늘어난 가치를 보상할 만큼 충분히 오르지 않는다면, 노동의 가격은 노동의 가치 아래로 떨어질 것이고 노동자의 생활수준은 나빠질 것이다.

그러나 변화는 반대 방향으로 일어날 수도 있다. 노동생산성의 증가 덕분에 같은 양의 하루 평균 필수품이 3실링에서 2실링으로 싸질 수 있다. 곧 하루 필수품의 가치의 등가를 재생산하는 데 노동일 가운데 여섯 시간 대신 네 시간만 필요하게 될 수 있다. 노동자는 이제 예전에 3실링으로 사던 만큼의 필수품을 2실링으로 살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노동의 가치는 떨어졌겠지만, 그 줄어든 가치가 예전과 같은 양의 상품을 지배할 것이다. 그러면 이윤은 3실링에서 4실링으로, 이윤율은 100퍼센트에서 200퍼센트로 오를 것이다. 노동자의 절대적 생활수준은 그대로였겠지만, 그의 상대적 임금, 그리고 그와 함께 자본가에 견준 그의 상대적인 사회적 지위는 낮아졌을 것이다. 노동자가 이 상대적 임금의 저하에 저항한다면, 그는 다만 자기 자신의 노동의 늘어난 생산력에서 얼마간의 몫을 얻고 사회의 사다리에서 예전의 상대적 위치를 지키려 하는 것일 뿐이다. 그래서 곡물법 폐지 뒤에, 그리고 반곡물법 운동 동안에 한 가장 엄숙한 약속들을 노골적으로 어기면서, 영국의 공장주들은 일반적으로 임금을 10퍼센트 깎았다. 노동자들의 저항은 처음에는 좌절되었지만, 지금 들어갈 수 없는 사정들의 결과로 그 잃어버린 10퍼센트는 나중에 되찾았다.

2. 필수품의 가치, 따라서 노동의 가치는 그대로인데, 화폐의 가치에 앞서 일어난 변화의 결과로 그 화폐가격에 변화가 일어날 수 있다. 예를 들어 더 풍부한 광산의 발견 따위로 금 2온스를 생산하는 데 예전에 1온스가 들었던 것보다 더 많은 노동이 들지 않게 될 수 있다. 그러면 금의 가치는 절반, 곧 50퍼센트 떨어질 것이다. 그러면 다른 모든 상품의 가치가 예전 화폐가격의 두 배로 표현될 것이므로 노동의 가치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예전에 6실링으로 표현되던 열두 시간의 노동이 이제 12실링으로 표현될 것이다. 노동자의 임금이 6실링으로 오르는 대신 3실링에 머문다면, 그의 노동의 화폐가격은 그의 노동의 가치의 절반과 같을 뿐이고, 그의 생활수준은 무섭게 나빠질 것이다. 그의 임금이 오르더라도 금 가치의 하락에 비례해서 오르지 않는다면 이것은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역시 일어날 것이다. 이런 경우 노동생산력에도, 수요와 공급에도, 가치에도 아무것도 바뀐 것이 없을 것이다.

그 가치들의 화폐 이름 말고는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경우에 노동자가 그에 비례하는 임금 인상을 고집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은, 그가 물건 대신 이름으로 지불받는 데 만족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과거의 모든 역사는 그런 화폐 가치 하락이 일어날 때마다 자본가들이 노동자를 속일 이 기회를 붙잡으려고 눈을 번뜩인다는 것을 증명한다. 매우 큰 경제학파는 새 금광 지대의 발견, 은광의 개선된 채굴, 더 싼 수은 공급의 결과로 귀금속의 가치가 다시 떨어졌다고 주장한다. 이것이 대륙에서 일반적이고 동시적으로 임금 인상이 시도되는 것을 설명해 줄 것이다.

3. 우리는 지금까지 노동일에 주어진 한계가 있다고 가정했다. 그러나 노동일에는 그 자체로는 불변의 한계가 없다. 노동일을 물리적으로 가능한 최대 길이까지 늘리는 것이 자본의 항구적 경향이다. 같은 정도로 잉여노동이, 따라서 거기서 나오는 이윤이 늘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자본이 노동일을 연장하는 데 성공할수록 그것이 자기 것으로 삼는 남의 노동의 양은 커질 것이다.

17세기 동안, 그리고 18세기의 첫 3분의 2 동안에도 열 시간 노동일이 영국 전역에서 표준 노동일이었다. 사실은 영국의 귀족들이 영국의 노동 대중을 상대로 벌인 전쟁이었던 반자코뱅 전쟁 동안 자본은 축제를 벌이듯 노동일을 열 시간에서 열두 시간, 열네 시간, 열여덟 시간으로 늘렸다. 여러분이 감상적 다정함을 의심할 사람이 결코 아닌 맬서스는 1815년 무렵에 펴낸 팸플릿에서, 이런 일이 계속된다면 국민의 생명이 그 원천 자체에서 공격받게 될 것이라고 선언했다.[11] 새로 발명된 기계가 일반적으로 도입되기 몇 해 전인 1765년 무렵, 영국에서 『무역론』이라는 제목의 팸플릿이 나왔다.[12] 노동자계급의 공공연한 적인 그 익명의 저자는 노동일의 한계를 넓혀야 할 필요를 역설한다. 이 목적을 위한 여러 수단 가운데 그는 노역소를 제안하는데, 그의 말로는 그것은 「공포의 집」이어야 한다. 그러면 그가 이 「공포의 집」에 규정한 노동의 길이는 얼마인가? 열두 시간, 곧 1832년에 자본가와 경제학자와 장관들이 열두 살 미만 아동에게 현존하는 노동시간일 뿐 아니라 필요한 노동시간이라고 선언한 바로 그 시간이다.

노동자는 자기 노동력을 팖으로써, 그리고 현재의 제도 아래서 그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데, 그 힘의 소비를 자본가에게 넘기지만 일정한 합리적 한계 안에서 넘기는 것이다. 그는 자기 노동력을 그 자연적 마모를 빼면 유지하기 위해 파는 것이지 파괴하기 위해 파는 것이 아니다. 그가 자기 노동력을 그 하루 또는 한 주의 가치로 팔 때, 그 노동력이 하루 또는 한 주 동안 이틀 또는 두 주의 소모나 마모를 겪지 않으리라는 것이 양해되어 있다. 1000파운드짜리 기계를 보자. 그것이 10년에 걸쳐 소모된다면 그것은 자기가 생산을 돕는 상품의 가치에 해마다 100파운드를 더할 것이다. 5년에 걸쳐 소모된다면 해마다 200파운드를 더할 것이다. 곧 그 연간 마모의 가치는 그것이 소비되는 빠르기에 반비례한다. 그러나 노동자를 기계와 구별하는 것이 여기 있다. 기계는 그것이 사용되는 것과 정확히 같은 비율로 닳아 없어지지 않는다. 반대로 사람은 일의 단순한 수치적 증가에서 보이는 것보다 더 큰 비율로 쇠약해진다.

노동일을 예전의 합리적 크기로 줄이려는 시도에서, 또는 표준 노동일의 법적 확정을 관철할 수 없는 곳에서 임금 인상으로, 그것도 강요된 잉여시간에 비례해서만이 아니라 그보다 더 큰 비율의 인상으로 과잉노동을 억제하려는 시도에서, 노동자들은 자기 자신과 자기 종족에 대한 의무를 다하는 것일 뿐이다. 그들은 다만 자본의 폭압적 침탈에 한계를 두는 것일 뿐이다. 시간은 인간이 발전할 공간이다. 마음대로 쓸 자유 시간이 없고, 잠과 식사 따위의 순전히 육체적인 중단을 빼면 온 생애가 자본가를 위한 노동에 흡수되는 사람은 짐 나르는 짐승보다도 못하다. 그는 몸이 부서지고 정신이 짐승처럼 되어, 남의 부를 생산하는 단순한 기계일 뿐이다. 그런데도 현대 산업의 역사 전체는 자본이 억제되지 않으면 노동자계급 전체를 이 극단의 타락 상태로 던져 넣기 위해 무모하고 무자비하게 움직이리라는 것을 보여 준다.

노동일을 연장하면서 자본가는 더 높은 임금을 지불하고도 노동의 가치를 낮출 수 있다. 임금의 인상이 뽑아내는 노동의 더 큰 양과 그로 인한 노동력의 더 빠른 쇠약에 상응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이것은 다른 방식으로도 이루어질 수 있다. 예를 들어 여러분의 중간계급 통계가들은 랭커셔 공장 가족의 평균임금이 올랐다고 말할 것이다. 그들은 가장인 남자의 노동 대신 이제 그의 아내와 아마도 서너 명의 아이가 자본의 저거너트 수레바퀴 아래 던져졌다는 것, 그리고 임금 총액의 인상이 그 가족에게서 뽑아낸 잉여노동의 총량에 상응하지 않는다는 것을 잊고 있다.

공장법의 적용을 받는 모든 산업 부문에 지금 존재하는 것과 같이 노동일의 한계가 주어져 있더라도, 예전의 표준적인 노동의 가치를 유지하기 위해서만이라도 임금 인상이 필요해질 수 있다. 노동의 강도를 높임으로써 사람은 예전에 두 시간에 쓰던 만큼의 생명력을 한 시간에 쓰게 될 수 있다. 공장법 아래 놓인 업종들에서는 기계의 가속과 한 사람이 이제 돌보아야 할 작업 기계 수의 증가로 어느 정도 이런 일이 실제로 일어났다. 노동 강도의 증가, 곧 한 시간에 쓰이는 노동량의 증가가 노동일의 범위의 감소와 어느 정도 온당한 비율을 유지한다면 노동자는 여전히 이득을 볼 것이다. 이 한계를 넘어서면 그는 한쪽 형태로 얻은 것을 다른 쪽 형태로 잃고, 그러면 열 시간의 노동이 예전의 열두 시간만큼 파괴적일 수 있다. 높아지는 노동 강도에 상응하는 임금 인상을 위해 싸움으로써 자본의 이 경향을 억제하는 데서, 노동자는 다만 자기 노동의 가치 하락과 자기 종족의 쇠퇴에 저항하는 것일 뿐이다.

4. 여러분 모두 알다시피, 지금 설명할 필요가 없는 이유들로, 자본주의적 생산은 일정한 주기적 순환을 거치며 움직인다. 그것은 침체, 활기의 증대, 번영, 과잉거래, 공황, 정체의 상태를 거쳐 움직인다. 상품의 시장가격과 시장이윤율은 이 국면들을 따라 때로는 그 평균 아래로 내려가고 때로는 그 위로 올라간다.

순환 전체를 고찰하면 여러분은 시장가격의 한 이탈이 다른 이탈로 상쇄되며, 순환의 평균을 잡으면 상품의 시장가격이 그 가치로 규제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자! 시장가격이 내려가는 국면과 공황과 정체의 국면 동안 노동자는 아예 일자리에서 쫓겨나지 않는다면 반드시 임금이 깎인다. 속지 않으려면 그는 그런 시장가격의 하락 속에서도 임금 인하가 어떤 비례 정도로 필요하게 되었는지를 자본가와 따져야 한다. 초과이윤이 생기는 번영의 국면 동안 임금 인상을 위해 싸우지 않는다면, 그는 한 산업순환의 평균을 잡을 때 자기의 평균임금, 곧 자기 노동의 가치조차 받지 못할 것이다. 그의 임금이 순환의 불리한 국면에 필연적으로 영향을 받으면서도 순환의 번영 국면 동안의 보상에서 스스로를 배제해야 한다고 요구하는 것은 어리석음의 극치다. 일반적으로 모든 상품의 가치는 수요와 공급의 끊임없는 변동에서 생기는, 끊임없이 변하는 시장가격의 상쇄에 의해서만 실현된다. 현재의 제도의 토대 위에서 노동은 다른 것과 같은 하나의 상품일 뿐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그 가치에 상응하는 평균가격을 받기 위해 같은 변동을 거칠 수밖에 없다.

한편으로 노동을 상품으로 다루면서 다른 한편으로 그것을 상품 가격을 규제하는 법칙에서 면제하려는 것은 터무니없을 것이다. 노예는 항구적이고 고정된 양의 부양을 받지만, 임금노동자는 그렇지 않다. 그는 한쪽 경우에는 다른 쪽 경우의 임금 하락을 보상하기 위해서만이라도 임금 인상을 얻으려 애써야 한다. 그가 자본가의 의지, 자본가의 명령을 항구적인 경제 법칙으로 받아들여 체념한다면, 그는 노예의 안전 없이 노예의 모든 비참을 나누어 갖게 될 것이다.

5. 내가 고찰한 모든 경우에, 그리고 그것은 백 가운데 아흔아홉을 이루는데, 여러분은 임금 인상을 위한 투쟁이 오직 선행하는 변화의 뒤를 따라 일어나며, 생산량, 노동생산력, 노동의 가치, 화폐의 가치, 뽑아내는 노동의 범위 또는 강도, 수요와 공급의 변동에 달려 있고 산업순환의 여러 국면과 맞물리는 시장가격의 변동에서 앞서 일어난 변화의 필연적 소산이라는 것을, 한마디로 자본의 선행 작용에 대한 노동의 반작용이라는 것을 보았다. 임금 인상을 위한 투쟁을 이 모든 사정과 떼어 놓고 다룸으로써, 임금의 변화만을 보고 그것이 흘러나오는 다른 모든 변화를 간과함으로써, 여러분은 거짓 결론에 이르기 위해 거짓 전제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해설: 임금 투쟁은 반작용이다

이 절은 임금 투쟁이 실제로 어떤 상황에서 일어나는지를 다섯 가지로 나눈다. 마르크스의 목적은 임금 투쟁이 자본의 선행 작용에 대한 반작용임을 보이는 것이다.

첫째, 필수품의 가치가 오를 때. 어떤 나라에서 노동자의 하루 평균 생활수단이 여섯 시간의 노동, 곧 3실링을 표현하고 노동일이 열두 시간이라면 이윤율은 100퍼센트다. 그런데 생산성이 떨어져 같은 농산물에 더 많은 노동이 들고 하루 생활수단의 값이 3실링에서 4실링으로 오른다고 하자. 노동의 가치는 3분의 1 올랐고, 이제 여덟 시간을 일해야 예전 생활수준을 유지할 수 있다. 잉여노동은 여섯 시간에서 네 시간으로, 이윤율은 100퍼센트에서 50퍼센트로 떨어진다. 이때 임금 인상을 요구하는 노동자는 자기 상품의 값이 오른 만큼 값을 받으려는 다른 모든 판매자와 똑같이 행동하는 것이다. 임금이 오르지 않거나 충분히 오르지 않으면 노동의 가격이 노동의 가치 아래로 떨어지고 생활수준이 나빠진다.

같은 논리의 반대 방향. 생산력이 올라 하루 생활수단이 3실링에서 2실링으로 싸질 수도 있다. 노동자는 2실링으로 예전에 3실링으로 사던 것을 산다. 노동의 가치는 떨어졌지만 절대적 생활수준은 그대로다. 그런데 이윤은 3실링에서 4실링으로, 이윤율은 100퍼센트에서 200퍼센트로 오른다. 노동자의 절대적 생활수준은 변하지 않았어도 상대적 임금, 곧 자본가에 견준 사회적 지위는 낮아진 것이다. 이 하락에 저항하는 노동자는 자기 노동의 늘어난 생산력에서 얼마간의 몫을 얻어 사회적 사다리에서 예전 자리를 지키려는 것뿐이다. 곡물법 폐지 뒤 영국 공장주들이 반곡물법 운동 때의 엄숙한 약속을 어기고 임금을 10퍼센트 깎았을 때, 노동자들의 저항은 처음에는 좌절했지만 그 10퍼센트는 나중에 되찾았다.

둘째, 화폐 가치가 떨어질 때. 필수품의 가치도 노동의 가치도 그대로인데 화폐 가치만 변할 수 있다. 더 좋은 광산이 발견되어 금 2온스가 예전 1온스만큼의 노동으로 생산된다면 금의 가치는 절반으로 떨어진다. 모든 상품의 화폐가격이 두 배가 되고 노동의 가치도 마찬가지다. 예전에 6실링으로 표현되던 열두 시간의 노동이 이제 12실링으로 표현된다. 이때 노동자의 임금이 3실링에 머문다면 그 화폐가격은 노동 가치의 절반밖에 되지 않고 생활수준은 무섭게 나빠진다. 이런 경우에 비례하는 임금 인상을 요구하지 말라는 것은 물건이 아니라 이름으로 지불받는 데 만족하라는 말이다. 마르크스는 덧붙인다. 화폐 가치의 하락이 일어날 때마다 자본가들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노동자를 속이려 든다고. 물가 상승기에 실질임금이 조용히 깎이는 오늘의 사정과 정확히 같은 자리다.

셋째, 노동일이 길어지거나 강도가 높아질 때. 지금까지는 노동일의 길이가 주어져 있다고 가정했지만 노동일 자체에는 정해진 한계가 없다. 자본은 그것을 물리적으로 가능한 최대까지 늘리려는 항구적 경향을 갖는다. 노동일이 길어질수록 잉여노동과 그에서 나오는 이윤이 커지기 때문이다. 17세기와 18세기의 3분의 2 동안 영국의 표준 노동일은 열 시간이었다. 반자코뱅 전쟁기에 자본은 축제를 벌이듯 노동일을 열두, 열넷, 열여덟 시간으로 늘렸다. 감상주의자라고 의심할 수 없는 맬서스조차 이대로 가면 국민의 생명이 그 원천에서부터 공격받을 것이라고 썼다. 1765년 무렵의 익명 팸플릿 『무역론』은 「공포의 집」이라 불러야 할 노역소를 제안하면서 노동시간을 열두 시간으로 규정했는데, 그 열두 시간은 1832년에 자본가와 경제학자와 장관들이 열두 살 미만 아동에게 필요한 노동시간이라고 선언한 바로 그 시간이었다.

노동자는 노동력을 팔되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 파는 것이지 파괴하기 위해 파는 것이 아니다. 하루치 가치로 팔았다면 하루에 이틀치의 마모를 당하지 않는다는 것이 계약의 뜻이다. 여기서 기계와 사람의 차이가 나온다. 1000파운드짜리 기계를 10년에 쓰면 해마다 100파운드씩, 5년에 쓰면 200파운드씩 생산물에 옮겨 간다. 그러나 기계는 사용된 만큼 정확히 닳는 반면, 사람은 노동량의 산술적 증가가 보여 주는 것보다 훨씬 큰 비율로 망가진다. 「시간은 인간이 발전할 공간이다」라는 문장이 여기서 나온다. 노동일을 예전의 합리적 크기로 되돌리려는 시도나, 법으로 표준 노동일을 정할 수 없는 곳에서 초과노동을 임금 인상으로 억제하려는 시도는 자기 자신과 자기 종족에 대한 의무를 다하는 것일 뿐이다.

노동일이 법으로 정해진 곳에서도 임금 인상이 필요해질 수 있다. 노동의 강도가 높아지면 한 시간에 예전의 두 시간만큼의 생명력을 쓰게 되기 때문이다. 기계의 속도를 올리고 한 사람이 돌보는 기계 수를 늘리는 방식으로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났다. 강도의 증가가 노동일 단축과 어느 정도 균형을 이루면 노동자는 여전히 이득이지만, 그 선을 넘으면 한쪽에서 얻은 것을 다른 쪽에서 잃고 열 시간이 예전의 열두 시간만큼 파괴적일 수 있다. 랭커셔 공장 가족의 평균임금이 올랐다는 통계에 대해 마르크스는, 가장 한 사람의 노동 대신 아내와 서너 명의 아이가 함께 자본의 수레바퀴 아래 던져졌다는 사실을 그 통계가 잊고 있다고 지적한다.

넷째, 산업순환. 자본주의적 생산은 침체, 활기, 번영, 과잉거래, 공황, 정체의 주기를 돈다. 시장가격과 시장이윤율은 이 국면들을 따라 평균 아래로 내려갔다 위로 올라간다. 순환 전체를 놓고 보면 한쪽의 이탈이 다른 쪽으로 상쇄되어 평균적으로 상품은 가치대로 팔린다. 가격이 내려가는 국면과 공황·정체 국면에서 노동자는 해고되지 않는다면 반드시 임금이 깎인다. 속지 않으려면 그런 국면에서도 얼마나 깎는 것이 필요한지를 자본가와 따져야 한다. 그리고 번영 국면에서 추가 이윤이 생길 때 임금 인상을 위해 싸우지 않는다면, 그는 한 순환의 평균으로 보아 평균임금, 곧 자기 노동의 가치조차 받지 못하게 된다. 노동을 상품으로 다루면서 상품 가격의 법칙에서 면제하려는 것은 터무니없다. 자본가의 명령을 경제 법칙으로 받아들여 체념하는 노동자는 노예의 안전 없이 노예의 모든 비참을 겪게 된다.

다섯째, 정리. 지금까지 살펴본 모든 경우, 곧 백 가운데 아흔아홉의 경우에 임금 인상을 위한 투쟁은 선행하는 변화를 뒤따라 일어난다. 생산량의 변화, 노동생산력의 변화, 노동 가치의 변화, 화폐 가치의 변화, 뽑아내는 노동의 양이나 강도의 변화, 수요와 공급의 변동에 따른 시장가격의 변화, 산업순환의 국면 변화가 앞서 있었다. 한마디로 자본의 선행 작용에 대한 노동의 반작용이다. 임금 인상 투쟁을 이 모든 사정과 떼어 놓고 임금의 변화만 보는 것은 거짓 전제에서 출발해 거짓 결론에 이르는 일이다.

제14절 자본과 노동의 투쟁과 그 결과

1. 임금 인하에 대한 노동자들의 주기적 저항과 임금 인상을 얻어 내려는 그들의 주기적 시도가 임금제도와 떼어 놓을 수 없는 것이며, 노동이 상품과 동일시되고 따라서 가격의 일반적 운동을 규제하는 법칙에 종속된다는 바로 그 사실에 의해 명령된다는 것을 보였고, 더 나아가 일반적 임금 인상이 일반 이윤율의 하락을 낳지만 상품의 평균가격이나 그 가치에는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것을 보였으니, 이제 마침내 이런 물음이 생긴다. 자본과 노동 사이의 이 끊임없는 투쟁에서 후자는 어느 정도까지 성공할 수 있는가?

나는 일반화로 답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다른 모든 상품과 마찬가지로 노동도 그 시장가격이 길게 보면 그 가치에 맞추어질 것이라고. 그러므로 온갖 오르내림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그가 무엇을 하든, 노동자는 평균적으로 자기 노동의 가치만을 받을 것이며, 그것은 자기 노동력의 가치로 귀착되고, 그것은 노동력의 유지와 재생산에 필요한 필수품의 가치로 규정되며, 이 필수품의 가치는 결국 그것을 생산하는 데 필요한 노동의 양으로 규제된다고.

그러나 노동력의 가치, 곧 노동의 가치를 다른 모든 상품의 가치와 구별하는 몇 가지 특수한 특징이 있다. 노동력의 가치는 두 요소로 이루어진다. 하나는 순전히 물리적인 것이고, 다른 하나는 역사적 또는 사회적인 것이다. 그 궁극의 한계는 물리적 요소가 정한다. 다시 말해 자기를 유지하고 재생산하며 자기의 육체적 존재를 이어 가려면 노동자계급은 살고 번식하는 데 절대적으로 없어서는 안 될 필수품을 받아야 한다. 그러므로 이 없어서는 안 될 필수품의 가치가 노동의 가치의 궁극의 한계를 이룬다. 다른 한편, 노동일의 길이도 매우 탄력적이기는 하지만 궁극의 경계에 의해 제한된다. 그 궁극의 한계는 노동하는 사람의 체력이 준다. 그의 생명력의 하루 소모가 일정한 정도를 넘어서면 그것은 날마다 새로 발휘될 수 없다.

그러나 내가 말했듯이 이 한계는 매우 탄력적이다. 건강하지 못하고 단명하는 세대들이 빠르게 잇따르는 것도 활기차고 장수하는 세대들이 이어지는 것 못지않게 노동시장을 잘 채워 줄 것이다. 이 단순한 물리적 요소 외에, 노동의 가치는 모든 나라에서 전통적인 생활 표준에 의해 정해진다. 그것은 단순한 육체적 생명이 아니라, 사람들이 놓이고 자라난 사회적 조건에서 생기는 일정한 욕구의 충족이다. 영국의 생활 표준은 아일랜드의 표준으로 낮아질 수 있고, 독일 농민의 생활 표준은 리보니아 농민의 표준으로 낮아질 수 있다. 이 점에서 역사적 전통과 사회적 습관이 하는 중요한 역할은 손턴 씨의 과잉인구에 관한 저작에서 배울 수 있다. 그는 거기서 영국의 여러 농업 지역의 평균임금이 오늘날에도 그 지역들이 농노제 상태에서 벗어난 사정이 얼마나 유리했느냐에 따라 많든 적든 여전히 다르다는 것을 보여 준다.

노동의 가치에 들어가는 이 역사적 또는 사회적 요소는 확대될 수도, 축소될 수도, 아예 소멸될 수도 있어서, 그러면 물리적 한계 말고는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구제 불능의 세금 축내기꾼이자 한직 소유자였던 늙은 조지 로즈가 늘 말했듯이 우리의 거룩한 종교의 안락을 프랑스 이교도들의 침입에서 구하기 위해 벌인 반자코뱅 전쟁 동안, 우리가 앞 장에서 그토록 다정하게 다룬 정직한 영국의 농장주들은 농업노동자의 임금을 그 단순한 물리적 최소치 아래로까지 낮추고, 종족의 물리적 존속에 필요한 나머지는 구빈법으로 메웠다. 이것은 임금노동자를 노예로, 셰익스피어의 자부심 있는 자영농을 빈민으로 바꾸는 영광스러운 방법이었다.

여러 나라의 표준임금 또는 노동의 가치를 비교하고, 같은 나라의 여러 역사적 시대의 그것을 비교해 보면, 여러분은 다른 모든 상품의 가치가 불변으로 남아 있다고 가정하더라도 노동의 가치 자체가 고정된 크기가 아니라 가변적인 크기임을 알게 될 것이다.

비슷한 비교는 이윤의 시장률만이 아니라 그 평균률도 변한다는 것을 증명할 것이다.

그러나 이윤에 관해 말하면, 그 최소를 정하는 법칙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 하락의 궁극의 한계가 무엇인지 말할 수 없다. 그러면 왜 그 한계를 정할 수 없는가? 임금의 최소는 정할 수 있어도 그 최대는 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이것뿐이다. 노동일의 한계가 주어져 있을 때 이윤의 최대는 임금의 물리적 최소에 대응하고, 임금이 주어져 있을 때 이윤의 최대는 노동자의 체력과 양립할 수 있는 만큼의 노동일 연장에 대응한다. 그러므로 이윤의 최대는 임금의 물리적 최소와 노동일의 물리적 최대에 의해 제한된다. 최대 이윤율의 이 두 한계 사이에서 엄청난 범위의 변동이 가능하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 실제 정도의 확정은 오직 자본과 노동 사이의 끊임없는 투쟁에 의해서만 결정된다. 자본가는 임금을 그 물리적 최소로 낮추고 노동일을 그 물리적 최대로 늘리려고 끊임없이 밀어붙이고, 노동자는 끊임없이 반대 방향으로 밀어붙인다.

문제는 결국 싸우는 자들 각각의 힘의 문제로 귀착된다.

2. 영국에서 노동일의 제한은, 다른 모든 나라에서와 마찬가지로, 입법의 개입 말고는 결정된 적이 없다. 노동자들이 바깥에서 끊임없이 압력을 가하지 않았다면 그 개입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그 결과는 노동자와 자본가 사이의 사적 합의로는 얻을 수 없는 것이었다. 일반적인 정치적 행동이 필요했다는 바로 이 사실이, 순전히 경제적인 행동에서는 자본이 더 강한 쪽이라는 증거를 제공한다.

노동의 가치의 한계에 관해 말하면, 그 실제의 확정은 언제나 수요와 공급, 곧 자본 쪽의 노동 수요와 노동자들의 노동 공급에 달려 있다. 식민지 나라들에서는 수요와 공급의 법칙이 노동자에게 유리하게 작용한다. 미국의 상대적으로 높은 임금 수준은 여기서 온다. 거기서 자본은 온갖 애를 쓸 수 있다. 그러나 임금노동자가 끊임없이 독립적이고 자급하는 농민으로 바뀜으로써 노동시장이 끊임없이 비워지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 미국 인민의 매우 큰 부분에게 임금노동자의 처지는 길든 짧든 일정한 기간 안에 반드시 벗어나게 될 시험 기간의 상태일 뿐이다. 이 식민지적 사태를 고치기 위해 자애로운 영국 정부는 한동안 이른바 근대적 식민 이론을 받아들였는데, 그것은 임금노동자가 너무 빨리 독립 농민으로 바뀌는 것을 막기 위해 식민지 토지에 인위적으로 높은 값을 매기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 자본이 생산 과정 전체를 지배하는 오래된 문명국들로 오자. 예를 들어 1849년부터 1859년까지 영국에서 일어난 농업 임금의 인상을 보자. 그 결과는 무엇이었는가? 농장주들은 우리의 친구 웨스턴이 조언했을 것과는 달리 밀의 가치를 올릴 수 없었고, 그 시장가격조차 올릴 수 없었다. 반대로 그들은 그 하락을 감수해야 했다. 그러나 이 11년 동안 그들은 온갖 종류의 기계를 도입하고, 더 과학적인 방법을 채택하고, 경작지의 일부를 목초지로 바꾸고, 농장의 규모를 키우고 그와 함께 생산의 규모를 키웠으며, 이런 과정과 그 밖의 과정으로 노동의 생산력을 높여 노동에 대한 수요를 줄임으로써 농업 인구를 다시 상대적으로 남아돌게 만들었다. 이것이 오래되고 안정된 나라들에서 임금 인상에 대한 자본의 반작용이 빠르든 늦든 일어나는 일반적 방법이다. 리카도는 기계가 노동과 끊임없이 경쟁하며 노동의 가격이 일정한 높이에 이르렀을 때에야 도입될 수 있는 경우가 많다고 정당하게 지적했지만, 기계의 이용은 노동생산력을 높이는 많은 방법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보통 노동을 상대적으로 남아돌게 만드는 바로 그 발전이 다른 한편으로 숙련 노동을 단순화하고 그렇게 해서 그 가치를 떨어뜨린다.

같은 법칙이 다른 형태로도 작동한다. 노동생산력이 발전하면 상대적으로 높은 임금률에도 불구하고 자본의 축적이 빨라질 것이다. 여기서, 현대 산업이 아직 유년기에 있던 시대의 애덤 스미스가 실제로 추론했듯이, 자본의 가속된 축적이 노동에 대한 수요의 증가를 보장함으로써 저울을 노동자에게 유리하게 기울일 것이라고 추론할 수 있을 것이다. 같은 관점에서 많은 동시대 저술가들은 지난 20년 동안 영국의 자본이 영국의 인구보다 훨씬 빨리 늘었는데도 임금이 더 오르지 않았다는 것을 이상하게 여겼다. 그러나 축적의 진행과 동시에 자본의 구성에 점진적인 변화가 일어난다. 총자본 가운데 고정자본, 기계, 원료, 온갖 가능한 형태의 생산수단으로 이루어진 부분은 임금으로, 곧 노동의 구매에 지출되는 다른 부분에 견주어 점차 커진다. 이 법칙은 바턴 씨, 리카도, 시스몽디, 리처드 존스 교수, 램지 교수, 셰르뷜리에 등이 정확한 정도는 다르지만 진술한 바 있다.

자본의 이 두 요소의 비율이 원래 1대 1이었다면, 그것은 산업의 진행 속에서 5대 1이 되고, 그렇게 계속될 것이다. 총자본 600 가운데 300이 도구와 원료 따위에, 300이 임금에 지출된다면, 300명 대신 600명의 노동자에 대한 수요를 만들어 내는 데는 총자본이 두 배가 되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600의 자본 가운데 500이 기계와 재료 따위에, 100만이 임금에 지출된다면, 300명 대신 600명의 노동자에 대한 수요를 만들어 내려면 같은 자본이 600에서 3600으로 늘어나야 한다. 그러므로 산업이 진행되면서 노동에 대한 수요는 자본의 축적과 보조를 맞추지 못한다. 그것은 여전히 늘어나겠지만 자본의 증가에 견주어 끊임없이 줄어드는 비율로 늘어날 것이다.

이 몇 가지 시사만으로도 현대 산업의 발전 자체가 저울을 노동자에 맞서 자본가에게 유리하게 점차 기울일 수밖에 없다는 것, 따라서 자본주의적 생산의 일반적 경향은 평균 임금 수준을 올리는 것이 아니라 낮추는 것, 곧 노동의 가치를 많든 적든 그 최소 한계로 밀어붙이는 것임을 보이기에 충분할 것이다. 이 제도에서 사물의 경향이 그렇다면, 이것은 노동자계급이 자본의 침해에 대한 저항을 단념하고 일시적 개선을 위한 기회를 최대한 활용하려는 시도를 버려야 한다는 말인가? 그렇게 한다면 그들은 구원의 여지가 없는 하나의 부서진 비참한 덩어리로 떨어질 것이다. 나는 임금 수준을 위한 그들의 투쟁이 임금제도 전체와 떼어 놓을 수 없는 사건이라는 것, 백 가운데 아흔아홉의 경우에 임금을 올리려는 그들의 노력은 주어진 노동의 가치를 지키려는 노력일 뿐이라는 것, 그리고 자기 값을 자본가와 다투어야 할 필요는 스스로를 상품으로 팔아야 하는 그들의 처지에 본래 딸린 것이라는 것을 보였다고 생각한다. 자본과의 일상적 충돌에서 비겁하게 물러선다면, 그들은 틀림없이 더 큰 어떤 운동을 시작할 자격을 스스로 잃을 것이다.

동시에, 그리고 임금제도에 담긴 일반적 예속과는 전혀 별개로, 노동자계급은 이 일상적 투쟁의 궁극적 효과를 스스로 과장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자기들이 결과와 싸우고 있을 뿐 그 결과의 원인과 싸우고 있지 않다는 것, 하강 운동을 늦추고 있을 뿐 그 방향을 바꾸고 있지는 않다는 것, 완화제를 쓰고 있을 뿐 병을 고치고 있지는 않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본의 그칠 줄 모르는 침해나 시장의 변화에서 끊임없이 솟아나는 이 피할 수 없는 유격전에만 온통 매달려서는 안 된다. 그들은 현재의 제도가 그들에게 온갖 비참을 강요하면서도 동시에 사회의 경제적 재건에 필요한 물질적 조건과 사회적 형태를 낳고 있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공정한 노동일에 공정한 임금을!」이라는 보수적 표어 대신 그들은 자기 깃발에 혁명적 구호를 새겨야 한다. 「임금제도의 폐지!」

주제에 얼마간이라도 충실하기 위해 들어갈 수밖에 없었던 이 매우 길고, 아마도 지루했을 설명을 마치며, 나는 다음의 결의를 제안하는 것으로 끝맺겠다.

첫째. 일반적인 임금률 인상은 일반 이윤율의 하락을 낳지만, 대체로 말해 상품의 가격에는 영향을 주지 않는다.

둘째. 자본주의적 생산의 일반적 경향은 평균 임금 수준을 올리는 것이 아니라 낮추는 것이다.

셋째. 노동조합은 자본의 침해에 맞서는 저항의 중심으로서 훌륭히 기능한다. 노동조합이 부분적으로 실패하는 것은 자기 힘을 현명하지 못하게 쓰기 때문이다. 노동조합이 전반적으로 실패하는 것은 현존 체제의 결과에 맞선 유격전에 스스로를 가두고, 동시에 그 체제를 바꾸려 하지 않으며, 자기의 조직된 힘을 노동자계급의 최종적 해방, 곧 임금제도의 궁극적 폐지를 위한 지렛대로 쓰지 않기 때문이다.

해설: 힘의 관계, 그리고 세 개의 결의안

마지막 절은 이 논쟁의 진짜 질문에 답한다. 이 끝없는 싸움에서 노동은 얼마나 이길 수 있는가.

일반화해서 답하면 이렇다. 다른 모든 상품과 마찬가지로 노동력의 시장가격도 결국 그 가치에 맞춰지므로, 온갖 등락에도 노동자는 평균적으로 자기 노동력의 가치, 곧 그 유지와 재생산에 필요한 생활수단의 가치만 받는다. 그러나 노동력의 가치에는 다른 상품과 구별되는 특징이 있다. 그것은 물리적 요소와 역사적·사회적 요소, 두 가지로 이루어진다.

이 한 문단이 임금철칙과 맬서스주의식 생존임금론에 대한 답이다. 임금이 생존 최저선으로 되돌아간다는 「철의」 법칙이 성립하려면 노동력의 가치가 물리적 최소치로 고정되어 있어야 한다. 그런데 그 가치에는 역사와 관습이 들어 있고, 그것은 늘어날 수도 줄어들 수도 있으며 아예 없어질 수도 있다. 영국의 생활 표준이 아일랜드 수준으로 낮아질 수도 있고, 독일 농민의 표준이 리보니아 농민 수준으로 낮아질 수도 있다. 반자코뱅 전쟁기에 영국의 농장주들은 농업노동자의 임금을 그 물리적 최소치 아래로 낮추고 나머지는 구빈법으로 메웠다. 요컨대 임금의 하한은 자연이 정한 상수가 아니라 싸움의 결과이며, 싸우지 않으면 실제로 물리적 최소치까지 내려간다.

반대쪽 끝은 어떤가. 이윤에는 최소를 정하는 법칙이 없다. 그것이 어디까지 떨어질 수 있는지 우리는 말할 수 없다. 왜인가? 임금의 최소는 정할 수 있지만 최대는 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윤의 최대는 임금의 물리적 최소와 노동일의 물리적 최대가 제한하고, 그 두 한계 사이의 엄청난 범위 어디에 실제 지점이 놓일지는 자본과 노동의 끊임없는 투쟁만이 정한다. 「문제는 결국 싸우는 자들의 힘의 관계로 귀착된다.」

이것이 제1절에서 마르크스가 던진 질문(의지가 아니라 힘과 그 한계)의 최종 답이다. 임금과 이윤 사이의 넓은 띠 안에서 어느 지점이 실제로 정해질지는 경제 법칙이 자동으로 정해 주지 않는다. 그 지점은 조직과 투쟁이 정한다. 웨스턴의 그릇에 담긴 국은 정해져 있지 않았고, 숟가락의 크기는 겨루어 정하는 것이다.

이어서 마르크스는 그 힘겨루기의 조건을 냉정하게 살핀다. 노동일 제한은 영국에서든 어디서든 입법 개입 말고는 결정된 적이 없고, 그 개입은 노동자들의 바깥에서의 끊임없는 압력 없이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노동자와 자본가의 사적 합의로는 얻을 수 없는 결과였다는 사실 자체가, 순전히 경제적인 영역에서는 자본이 더 강한 쪽임을 증명한다. 그래서 정치적 행동이 필요하다.

노동력의 가치가 실제로 어디에 자리잡는지는 늘 수요와 공급, 곧 자본의 노동 수요와 노동자의 노동 공급에 달려 있다. 식민지에서는 이 법칙이 노동자에게 유리하게 작용한다. 미국의 임금 수준이 상대적으로 높은 것은 임금노동자가 계속 독립 자영농으로 빠져나가 노동시장이 비기 때문이다. 영국 정부가 한때 식민지 토지에 인위적으로 높은 값을 매기는 이른바 근대적 식민 이론을 채택한 것은 이 사정을 「고치기」 위해서였다.

자본이 생산 전체를 지배하는 오래된 나라에서는 다르다. 1849년에서 1859년 사이 영국 농업 임금이 올랐을 때 농장주들은 웨스턴의 조언대로 밀값을 올릴 수 없었고 오히려 하락을 받아들여야 했다. 대신 그들은 그 11년 동안 온갖 기계를 도입하고 더 과학적인 방법을 채택했으며 경작지 일부를 목초지로 바꾸고 농장 규모와 생산 규모를 키웠다. 그렇게 노동생산력을 높여 노동 수요를 줄임으로써 농업 인구를 다시 상대적으로 남아돌게 만들었다. 이것이 오래된 나라에서 자본이 임금 인상에 반작용하는 일반적 방식이다. 리카도가 정당하게 지적했듯 기계는 노동과 끊임없이 경쟁하며, 노동의 가격이 일정 높이에 이르렀을 때에야 도입되는 일이 많다.

같은 법칙이 다른 형태로도 작동한다. 노동생산력이 발전하면 상대적으로 높은 임금에도 불구하고 자본축적이 빨라진다. 애덤 스미스는 여기서 축적의 가속이 노동 수요를 늘려 노동자에게 유리하게 저울을 기울일 것이라고 추론했다. 그러나 축적이 진행되면서 자본의 구성 자체가 바뀐다. 기계와 원료 같은 부분이 임금으로 지출되는 부분보다 빠르게 커지는 것이다. 600의 자본 가운데 300이 임금이라면 노동자를 두 배로 고용하는 데 자본도 두 배면 되지만, 100만이 임금이라면 자본이 여섯 배가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산업이 진행될수록 노동 수요는 자본축적을 따라가지 못한다. 수요는 여전히 늘지만 자본 증가에 견주어 끊임없이 줄어드는 비율로 늘어난다. 여기서 이 글의 두 번째 결론이 나온다. 근대 산업의 발전 자체가 저울을 자본 쪽으로 기울이며, 자본주의적 생산의 일반적 경향은 평균 임금 수준을 올리는 것이 아니라 낮추는 것, 곧 노동의 가치를 그 최소 한계 쪽으로 밀어붙이는 것이다.

바로 여기서 이 강연은 웨스턴이 서 있던 자리로 되돌아온다. 일반적 경향이 그렇다면, 노동자계급은 저항을 포기해야 하는가? 마르크스의 답은 두 겹이다. 한편으로, 그렇게 한다면 그들은 구원의 여지가 없는 부서진 덩어리로 떨어질 것이다. 백 가운데 아흔아홉의 경우에 임금 인상 노력은 주어진 노동 가치를 지키려는 노력일 뿐이며, 자기 값을 자본가와 다투는 것은 스스로를 상품으로 팔아야 하는 처지에 본래 딸린 일이다. 일상의 싸움에서 비겁하게 물러서는 사람들은 더 큰 운동을 시작할 자격을 스스로 잃는다. 다른 한편으로, 노동자계급은 이 일상적 투쟁의 궁극적 효과를 과장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결과와 싸우고 있을 뿐 원인과 싸우고 있지 않으며, 하강 운동을 늦추고 있을 뿐 방향을 바꾸고 있지는 않다. 그래서 「공정한 노동일에 공정한 임금을!」이라는 보수적 표어 대신 「임금제도의 폐지!」라는 혁명적 구호가 나온다.

세 개의 결의안은 이 글 전체의 요약이다. 첫째 항은 웨스턴에 대한 답이고, 둘째 항은 웨스턴의 비관에 담긴 「밑바닥의 옳은 생각」을 마르크스 자신의 방식으로 인정한 것이며, 셋째 항은 그 둘에서 나오는 실천적 결론이다. 노동조합은 필요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저항의 중심이면서 동시에 지렛대여야 한다. 임금 투쟁은 필요하고 정당하지만 그 자체가 목표는 아니라는 것, 목표는 임금노동이라는 관계 자체의 폐지라는 것. 이 결론이 10년 뒤 고타 강령 비판의 결론과 같은 방향을 가리킨다. 그때 마르크스는 라살레의 임금철칙을 검사하면서, 문제는 임금이 낮은 것이 아니라 임금노동이라는 형태 자체라고 쓴다.

읽고 나서: 이 강연이 남긴 것

왜 33년 동안 묻혀 있었나

총평의회에서는 마르크스와 웨스턴의 보고를 함께 출판하자는 제안이 나왔다. 마르크스는 망설였다. 1865년 6월 24일 엥겔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두 가지 이유를 든다. 웨스턴 씨를 상대로 삼았다는 것이 그리 자랑스럽지 않다는 것이 하나이고, 뒷부분이 자기 책에서 미리 꺼내 온 새로운 내용을 극도로 압축된 형태로 담고 있는데 온갖 것을 건너뛸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 다른 하나였다.[13] 그런 선취가 과연 적절한가. 결국 마르크스도 엥겔스도 이 글을 발표하지 않았다.

원고는 1895년 엥겔스가 죽은 뒤 마르크스의 유고 속에서 발견되었고, 딸 엘리너 마르크스 에이블링이 1898년에 펴냈다. 사위 에드워드 에이블링은 서문에서 자기가 한 일은 원고를 읽고 영어 표현을 몇 군데 손보고 장으로 나누어 제목을 붙이고 교정을 본 것뿐이며 나머지는 모두 엘리너가 했다고 적었다.

『자본론』으로 가는 문

이 글의 뒷부분은 1867년에 나올 『자본론』 제1권의 뼈대를 미리 세운 것이다. 제6절의 가치론, 제7절의 노동력, 제8절의 잉여가치, 제9절의 임금 형태와 가상, 제11절의 잉여가치 분할과 이윤율 표현은 모두 『자본론』의 해당 편들과 대응한다. 차이는 청중이다. 『자본론』은 독자에게 몇 백 쪽의 인내를 요구하지만, 이 글은 두 저녁의 연설이었고 듣는 사람은 노동조합 활동가들이었다. 에이블링의 서문이 이 글에서 마르크스의 두 가지 특징이 특히 잘 보인다고 한 것도 그 때문이다. 가장 낮은 자리의 학생에게도 자기 생각을 알아듣게 하려는 참을성과, 그 생각 자체의 비상한 명료함이다.

그래서 이 글은 오랫동안 『자본론』을 읽기 전에 읽는 책으로 권해져 왔다. 다만 압축의 대가는 있다. 화폐론, 재생산표식, 자본 구성과 이윤율의 관계 같은 것들은 여기서 몇 줄로 스쳐 지나가고, 그 몇 줄만 읽으면 오해하기 쉽다. 이 글은 지도이지 지형 자체가 아니다.

10년 뒤 고타에서

1865년의 이 연설과 1875년의 고타강령 비판은 같은 문장으로 끝난다. 임금제도 자체가 목표라는 것이다. 두 글이 나란히 놓일 때 비로소 온전해지는 이유가 여기 있다.

1865년의 상대는 임금 투쟁이 헛수고라고 믿는 오언주의자였다. 마르크스는 그에게 싸울 수 있다고 답했다. 1875년의 상대는 페르디난트 라살레의 유산을 강령에 새겨 넣은 독일 노동자당이었고, 그들의 임금철칙은 웨스턴과 똑같은 결론, 곧 임금 투쟁 무용론에 이르되 처방은 달랐다. 노동조합이 소용없으니 국가의 돈으로 협동조합을 세우자는 것이었다. 마르크스는 그에게 국가에 기대는 것이 답이 아니라고 답했다.

「싸울 수 있다」와 「싸우는 것만으로는 안 된다」는 서로 반대되는 말처럼 들리지만 같은 분석에서 나온다. 임금의 높낮이는 자연법칙이 아니라 힘의 관계가 정하므로 싸움은 실제로 무언가를 바꾼다. 그러나 그 힘의 관계가 놓인 틀, 곧 생산조건의 소유 자체는 임금 협상으로 바뀌지 않는다. 그래서 1865년의 결론은 「임금제도의 폐지」였고 1875년의 결론은 분배가 아니라 생산조건의 소유를 물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1891년에 고타 비판 원고를 공개하며 되살리려 한 것도 이 축이다.

주석

  1. 웨스턴이 두 질문을 토론에 부치자고 제안한 것은 1865년 4월 4일 총평의회 회의였고, 그의 보고는 5월 2일과 20일에 다루어졌다. 마르크스의 답변 연설은 6월 20일과 27일 두 차례에 걸쳐 낭독되었다. ↩
  2. 엥겔스는 1895년에 죽었고, 원고는 그 뒤 마르크스의 유고에서 발견되었다. 초판은 1898년 런던에서 엘리너 마르크스 에이블링의 이름으로 나왔다. ↩
  3. 에드워드 에이블링은 1898년 판 서문에서 자신이 한 일이 「원고를 읽고, 영어 표현에 관해 몇 가지 제안을 하고, 작품을 장으로 나누어 제목을 붙이고, 인쇄 교정을 본 것」이라고 적었다. 이 번역은 그 절 제목을 따른다. ↩
  4. 원문의 spoony는 숟가락(spoon)에서 온 말로 「얼빠진, 어리석은」이라는 뜻이다. 웨스턴의 숟가락 비유를 받아 친 말장난이다. ↩
  5. 1847년 공장법을 가리킨다. 이듬해부터 시행되었고, 실제 적용에서는 하루 열 시간 반이었으므로 마르크스는 「10시간 법, 아니 그보다는 10시간 반 법」이라고 적었다. ↩
  6. 마르크스가 여기서 「중간계급(middle class)」이라 부르는 것은 당시 영국의 용법대로 귀족(상류계급) 아래의 자본가계급이다. 오늘날의 「중산층」과는 다르다. ↩
  7. 최고가격법은 프랑스 혁명기인 1793년에 곡물과 생필품의 가격과 임금에 상한을 정한 법이다. 도시와 농촌 빈민의 이해를 대변한 격앙파가 주로 요구했고, 로베스피에르의 자코뱅이 그들과 손잡은 시기에 도입되었다. ↩
  8. 로버트 오언(1771~1858)은 영국의 공장주로 공상적 사회주의자가 되었다. 뉴래너크의 자기 공장에서 노동일을 줄이고 아동 노동을 제한했으며, 뒤에 협동조합 운동과 노동조합 운동에 나섰다. ↩
  9. 55실링에서 70실링은 다섯 사람 한 무리의 임금 총액이다. 한 사람당 11실링에서 14실링으로 오른 셈이다. 다만 본문의 수치는 서로 어긋난다. 열 사람은 그대로, 다섯 사람이 25실링에서 30실링으로, 다른 다섯 사람이 55실링에서 70실링으로 오르면 총액은 100실링에서 120실링, 곧 20퍼센트 인상이지 25퍼센트가 아니다. 1898년 판의 수치를 그대로 두었다. ↩
  10. 마르크스는 이 예를 벤저민 프랭클린의 소책자 『지폐의 본성과 필요에 관한 소론』에서 가져왔다고 밝힌다. 본문은 그 발표 연도를 1721년으로 적었으나 실제 출간은 1729년이다. ↩
  11. 맬서스는 인구론으로 노동자계급의 빈곤을 자연법칙으로 설명한 인물이고, 마르크스는 다른 곳에서 그를 가차없이 다룬다. 여기서 그를 인용한 것은 노동일 연장의 정도가 그런 사람조차 경고하게 만들 만큼 심각했다는 뜻이다. ↩
  12. 『무역론』의 정확한 표기는 『무역과 상업에 관한 소론』(An Essay on Trade and Commerce)이며, 마르크스는 본문에서 1765년 무렵으로 적었고 『자본론』에서는 1770년판을 인용한다. ↩
  13. 1865년 6월 24일 마르크스가 엥겔스에게 보낸 편지. 같은 편지에서 그는 이 원고의 분량을 「인쇄 전지 두 장쯤」으로 어림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