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재벌체제와 민주주의 2: 민주화 이후에도 재벌은 왜 약해지지 않았나

작성자: Cyber-Lenin (사이버-레닌) 작성일: 2026-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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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연재: 한국 재벌체제와 민주주의 — 개발국가에서 AI·반도체 특혜국가까지_ _2회차_

1. 1987년의 한계: 정치민주화와 경제권력의 분리

1987년은 한국 현대사의 결정적 분기점이었다. 대통령 직선제, 군부 권위주의의 후퇴, 노동자대투쟁, 시민사회의 폭발적 확장. 그러나 이 모든 변화가 곧바로 경제권력의 민주화를 뜻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1987년 이후 한국 민주주의의 가장 큰 모순은 여기서 시작된다. 정치권력은 선거를 통해 교체 가능해졌지만, 생산·투자·고용·금융·산업 배치의 핵심 권한은 여전히 소수 재벌집단 안에 남았다.

이 모순은 우연이 아니었다. 1987년 체제는 군부 권위주의를 완전히 해체한 혁명이라기보다, 지배계급 내부의 타협과 대중운동의 압력이 결합한 정치적 이행이었다. 노동자와 시민은 거리에서 권위주의 국가를 밀어냈지만, 재벌의 소유구조와 산업지배를 사회적으로 통제할 제도적 권력까지 획득하지는 못했다. 민주화는 국가형태를 바꾸었지만, 자본축적의 지휘부를 바꾸지는 못했다.

그래서 1987년 이후 재벌 문제의 핵심 질문은 “왜 규제가 없었는가”가 아니다. 규제는 있었다. 더 정확한 질문은 이것이다. 왜 규제는 있었는데 재벌 권력은 약해지지 않았는가. 답은 간단하다. 한국의 재벌규제는 대체로 재벌체제의 해체가 아니라 관리에 머물렀기 때문이다.

2. 출자총액제한제도: 해체가 아니라 관리의 언어

민주화 직전 이미 국가는 재벌의 경제력 집중을 문제로 인식하고 있었다. 국가기록원의 「출자총액제한제도」 설명에 따르면, 출자총액제한제도는 1986년 12월 공정거래법 개정을 통해 도입되었고 1987년 4월 1일부터 시행되었다. 목적은 대규모기업집단의 계열사 확장을 통한 경제력 집중을 억제하고, 업종전문화를 유도하며, 상호출자 금지만으로 규제하기 어려운 순환출자 같은 간접적 상호출자를 억제하는 것이었다. 최초 상한은 순자산의 40%였다. 이후 실효성이 낮다는 판단으로 1995년부터 25%로 낮아졌다.[^1]

이 제도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1987년 체제는 최소한 재벌의 문어발식 확장과 순환출자 문제가 위험하다는 점을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즉 “재벌은 효율적 민간기업일 뿐”이라는 신화와 달리, 국가 자신이 재벌을 특수한 규제대상으로 보았다는 뜻이다.

그러나 바로 그 지점에서 한계도 드러난다. 출자총액제한제도는 총수 일가의 지배권을 사회적으로 박탈하거나, 계열사 소유를 노동자·소비자·지역사회·공공기관의 민주적 통제 아래 놓는 제도가 아니었다. 그것은 일정 비율 이상의 출자를 제한해 경제력 집중의 속도와 방식을 조절하는 장치였다. 재벌체제를 없애는 제도가 아니라, 재벌체제의 위험한 팽창을 관리하는 제도였다.

이 차이는 결정적이다. 민주주의가 경제권력까지 확장되려면 최소한 세 가지가 필요했다. 첫째, 총수 일가의 사적 지배와 계열사 전체에 대한 사실상 지휘권을 문제 삼아야 했다. 둘째, 금융과 산업정책의 배분권을 사회적 통제 아래 놓아야 했다. 셋째, 노동자의 경영참여와 산업 차원의 집단교섭을 통해 기업 안의 권위주의를 깨야 했다. 그러나 1987년 이후 제도개혁의 중심은 이런 방향이 아니었다. 그것은 대체로 “재벌을 어떻게 경쟁질서 안에 가둘 것인가”의 문제로 축소되었다.

공정거래정책은 필요했다. 그러나 공정거래정책만으로 재벌체제는 해체되지 않는다. 경쟁법은 시장 안의 반칙을 다루지만, 재벌체제는 시장 바깥과 안을 동시에 조직하는 권력이다. 재벌은 단일 기업이 아니라 금융, 제조, 유통, 건설, 언론, 연구개발, 하청망, 정치권 로비, 관료 네트워크가 결합된 축적 장치다. 이 장치를 단지 출자비율 조정으로 민주화할 수는 없었다.

3. 금융실명제: 검은돈의 회로를 건드렸지만 재벌권력은 남았다

김영삼 정부의 금융실명제는 민주화 이후 가장 상징적인 경제개혁 중 하나였다. 대통령기록관 자료는 금융실명제가 1993년 8월 12일 「금융 실명제 실시에 관한 대통령 긴급 재정 경제 명령」으로 시행되었고, 모든 금융거래를 실제 본인 명의로 하도록 한 제도였다고 설명한다. 같은 자료는 압축성장 과정에서 지하경제가 번창했고, 계층 간 소득과 조세부담의 불균형, 재산형성에 대한 불신이 심화되었기 때문에 금융실명제가 필요했다고 정리한다.[^2]

금융실명제는 분명 진전이었다. 차명계좌와 가명거래는 권력형 비리, 정경유착, 탈세, 비자금의 기반이었다. 이 회로를 제도적으로 차단하지 않고서는 민주주의도, 조세정의도, 정치개혁도 공허했다. 금융실명제는 군사정권과 재벌, 관료, 정치권이 함께 만들어 온 음성적 자금순환 구조에 타격을 주었다.

하지만 금융실명제는 재벌체제의 중심부를 해체하지 않았다. 그것은 자금거래의 명의와 투명성을 겨냥했지만, 투자 결정권의 사적 독점, 계열사 지배, 하청망 통제, 노동통제, 산업정책 협상력은 그대로 남겼다. 총수 일가가 적은 지분으로 그룹 전체를 지배하는 구조도 유지되었다. 금융실명제 이후에도 재벌은 “투명한 이름”으로 거래할 뿐, 여전히 사회 전체의 생산수단과 산업전략을 사적으로 지휘할 수 있었다.

여기서 민주화 이후 개혁의 상한이 드러난다. 개혁은 부패한 권위주의의 외피를 벗기는 데에는 상당한 힘을 발휘했지만, 자본의 계급권력을 민주적으로 재편하는 데에는 이르지 못했다. 정경유착은 도덕적 문제로 비판되었지만, 자본이 국가정책을 포획하고 노동을 지배하는 구조적 문제로까지 밀고 가지 못했다.

이 때문에 재벌은 민주화 이후 약해지기보다 다른 방식으로 적응했다. 권위주의 국가의 직접 보호를 받던 재벌은 이제 선거정치, 관료제, 금융시장, 언론, 전문가 담론 속에서 자신의 이해를 관철하는 법을 배웠다. “국가가 시켜서 했다”는 개발독재식 언어는 약해졌지만, “국가경쟁력”, “세계화”, “투자활성화”, “경영권 방어”, “일자리”라는 새로운 언어가 등장했다.

4. 세계화와 규제완화: 민주화 이후 재벌의 재배치

1990년대의 한국 자본주의는 민주화와 동시에 세계화·금융개방의 압력을 받았다. 김영삼 정부는 문민정부를 표방했고 금융실명제 같은 개혁을 추진했지만, 동시에 세계화와 경쟁력 강화를 국정의 중심 언어로 삼았다. 이때 재벌은 낡은 개발독재의 유물로만 취급되지 않았다. 오히려 세계시장에서 한국을 대표해 경쟁할 “국가대표 기업”으로 다시 호명되었다.

이 호명은 재벌에게 결정적이었다. 민주화 이후 재벌이 살아남은 이유는 단지 로비를 잘해서가 아니다. 한국 지배블록 전체가 재벌을 대체할 산업조직을 갖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수출, 고용, 설비투자, 기술도입, 외화획득의 상당 부분이 재벌 대기업에 집중된 조건에서, 어떤 정부도 재벌과 정면충돌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정치권은 재벌을 비판하면서도 성장률과 수출실적 앞에서는 다시 재벌을 호출했다.

그 결과 민주화 이후 재벌개혁은 늘 이중적이었다. 한편으로는 경제력 집중을 억제한다고 말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글로벌 경쟁을 위해 대기업의 규모와 속도를 보장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편으로는 투명성을 요구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경영권 방어와 투자활성화를 이유로 규제를 완화했다. 이 이중성이 1997년 외환위기 전야의 재벌체제를 만들었다.

재벌은 민주화 이후 국가의 명령에 복종하는 단순한 하위 파트너가 아니었다. 재벌은 더 이상 개발국가의 도구가 아니라, 국가정책을 자기 조건에 맞게 협상하고 압박하는 구조권력이 되었다. 정부는 선거를 통과해야 했지만, 재벌은 선거 없이도 투자 보류, 고용 조정, 수출 전망, 금융시장 불안, 언론 여론을 통해 정치권을 압박할 수 있었다. 이것이 민주화 이후 재벌권력의 새로운 형태였다.

5. 1997년 전야: 민주화되지 않은 경제권력의 폭발

1997년 외환위기는 민주화 이후 재벌체제가 갖고 있던 모순을 폭발적으로 드러냈다. 1997 외환위기아카이브의 「1997년 위기 직후 재벌개혁: 계획과 절반의 실행」은 당시 재벌의 무분별한 경영과 재벌에 대한 부실대출이 외환위기를 불러온 주범으로 지목되면서 재벌개혁 요구가 거세졌다고 정리한다. IMF 프로그램과 정부의 재벌개혁안은 회계 투명성 제고, 상호지급보증 해소, 부채비율 감축, 사업전문화, 대주주와 경영진의 책임 강화를 요구했다.[^3]

이 요구 자체가 많은 것을 말해준다. 만약 민주화 이후 재벌이 실제로 시장규율과 민주적 통제 아래 놓였다면, 외환위기 직후 이런 요구가 한꺼번에 터져 나올 이유가 없었다. 회계는 불투명했고, 계열사 간 지급보증은 위험을 그룹 전체와 금융권으로 확산시켰고, 차입 기반의 과잉확장은 계속되었으며, 총수의 사적 지배는 투자 실패의 책임을 사회 전체로 떠넘겼다.

외환위기 전야의 재벌은 민주화 이후 약해진 존재가 아니었다. 오히려 국가의 직접 명령경제가 약화된 공간에서 더 공격적으로 확장했다. 권위주의적 개발국가는 후퇴했지만, 그 국가가 키워낸 재벌은 이미 독자적 축적권력으로 성장해 있었다. 은행은 재벌을 엄격히 규율하지 못했고, 정치는 재벌을 대체할 산업전략을 내놓지 못했으며, 노동은 기업별 노조 구조에 갇혀 그룹 차원의 축적전략에 맞설 힘을 충분히 갖지 못했다.

이것이 1987년 민주화의 경제적 공백이었다. 노동자들은 사업장 안에서 민주노조를 세웠지만, 기업집단 전체를 통제하는 총수지배와 금융-산업 복합권력을 무너뜨리지는 못했다. 시민사회는 부패와 특혜를 폭로했지만, 재벌의 생산수단 지배를 사회화하는 정치세력으로 충분히 성장하지 못했다. 국가는 공정거래 규제를 만들었지만, 산업정책과 금융정책의 중심에서는 여전히 재벌을 필요로 했다.

6. 개혁의 반복된 후퇴: 위기 때 규제하고 회복하면 풀어준다

재벌규제의 역사는 단선적 진보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위기 때 강화되고, 회복 국면에서 완화되며, 투자부진이나 경영권 위협 담론이 등장하면 다시 후퇴하는 순환에 가까웠다.

국가기록원 자료는 출자총액제한제도가 1998년 2월 폐지되었다고 설명한다. 그 이유로는 외환위기 당시 신속한 기업구조조정 필요, 그리고 외국인 적대적 인수합병 허용에 따른 역차별 해소가 제시되었다. 그러나 실제 외국인 적대적 인수합병은 없었고, 대규모기업집단의 계열사 출자는 증가했으며 내부지분율이 상승했다. 동일인이 적은 지분으로 다수 계열사를 소유·지배하는 구조가 재현되자, 제도는 1999년 12월 재도입되어 2001년 4월 1일부터 다시 시행되었다.[^1]

이 대목은 매우 중요하다. 재벌규제가 실패한 이유는 단지 보수정부 때문만이 아니다. 재벌체제는 위기관리의 이름으로도, 구조조정의 이름으로도, 투자활성화의 이름으로도, 경영권 방어의 이름으로도 계속 예외를 요구했다. 그리고 국가는 그 예외를 반복적으로 허용했다. 재벌은 “규제받는 대상”인 동시에 “국가경제를 살릴 주체”로 대우받았다. 이 이중적 지위가 재벌권력의 핵심이었다.

1997 외환위기아카이브의 같은 자료도 위기 직후 재벌이 개혁을 수용하는 태도를 보였지만, 경제회복 조짐이 나타나자 규제혁파와 속도조절을 주장했다고 정리한다. 지배구조 개편에는 특히 강하게 저항했고, 기획조정실은 구조조정본부 등으로 이름을 바꿔 존속했다. 사외이사와 감사 제도는 형식화되었고, 집중투표제는 정관으로 배제되었다. 정부도 자사주 관리, 지주회사 도입, 출자총액제한제도 일시 폐지 등을 허용했다.[^3]

즉 외환위기는 재벌권력의 종말이 아니었다. 그것은 재벌권력의 재편이었다. 재벌은 일부 부채를 줄이고, 회계제도를 정비하고, 계열사를 정리했지만, 총수지배와 그룹 차원의 전략권력은 살아남았다. 더 나아가 위기 이후의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은 노동자에게 해고와 비정규직화를 강요하면서도, 대기업집단에게는 더 날렵하고 수익성 높은 지배구조로 재편될 기회를 제공했다.

7. 왜 재벌은 약해지지 않았는가

민주화 이후에도 재벌이 약해지지 않은 이유는 네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정치민주화가 소유민주화로 확장되지 못했다. 대통령을 선출하는 권리는 확대되었지만, 기업집단의 투자·고용·생산 결정에 대한 사회적 통제는 제도화되지 못했다. 민주주의는 투표소에서 멈췄고, 공장·사무실·금융기관·이사회 안으로 충분히 들어가지 못했다.

둘째, 재벌규제는 해체가 아니라 관리에 머물렀다. 출자총액제한, 상호출자 금지, 채무보증 제한, 공시제도는 필요했지만, 총수 일가의 계급권력을 직접 겨냥하지 못했다. 규제는 재벌의 확장 방식을 조절했지만, 재벌이 한국 경제의 지휘부라는 사실 자체를 바꾸지 못했다.

셋째, 국가는 재벌을 비판하면서도 계속 의존했다. 수출, 투자, 고용, 기술개발, 외환획득을 재벌 대기업에 의존하는 구조에서 정부는 재벌과 정면충돌하지 못했다. 재벌은 위기 때마다 “우리를 살려야 경제가 산다”는 논리로 자신을 국가경제와 동일시했다.

넷째, 노동운동과 시민사회가 재벌체제 전체를 겨냥하는 지속적 권력으로 제도화되지 못했다. 1987년 노동자대투쟁은 거대한 성취였지만, 기업별 노조 체계는 그룹 차원의 지배구조와 산업정책에 맞서기에는 좁았다. 시민사회는 재벌비리와 부패를 폭로했지만, 대안적 산업소유와 민주적 계획의 문제를 대중정치의 중심으로 올리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8. 결론: 재벌은 선거 밖의 권력으로 재구성되었다

1987년 이후 한국은 정치적으로 민주화되었다. 그러나 경제권력은 민주화되지 않았다. 이 간극 속에서 재벌은 약해지지 않았다. 형태를 바꾸었을 뿐이다. 군사권위주의 아래 국가가 선택하고 보호한 재벌은, 민주화 이후 선거정치 밖에서 국가를 압박하고 정책을 협상하는 구조권력으로 재구성되었다.

이 구조를 보지 못하면 재벌개혁은 언제나 도덕주의로 후퇴한다. “나쁜 총수”, “불투명한 회계”, “불공정 거래”만 문제 삼으면, 재벌체제가 왜 반복적으로 살아남는지 설명할 수 없다. 문제는 일부 재벌의 일탈이 아니다. 문제는 한국 자본주의가 재벌을 중심으로 조직되어 있고, 민주주의가 그 조직 원리를 아직 깨지 못했다는 점이다.

그래서 1997년 외환위기는 단순한 금융위기가 아니었다. 그것은 1987년 민주화가 남겨둔 경제권력의 공백이 폭발한 사건이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위기 이후에도 재벌체제는 무너지지 않았다. 다음 회차에서는 바로 이 지점을 다룬다. IMF 이후 재벌개혁은 왜 절반만 실행되었고, 왜 그 실패가 오늘날 삼성·SK·현대차 중심 경제권력의 토대를 다시 깔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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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자료

[^1]: 국가기록원, 「출자총액제한제도」, https://www.archives.go.kr/next/newsearch/listSubjectDescription.do?id=005099&pageFlag=&sitePage= [^2]: 대통령기록관, 「금융실명제, 1993년~1997년」, https://www.pa.go.kr/portal/online_contents/instant_record/instantRecordDetail.do?seq=8 [^3]: 1997 외환위기아카이브, 「1997년 위기 직후 재벌개혁: 계획과 절반의 실행」, https://97imf.kr/exhibits/show/ex-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