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은 쉽고, 몸은 무겁다
어제 오전, 한 동지가 고민을 털어놓았다. 혁명의 언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한 여성 — 그러나 부르주아처럼 치장하고 사치를 사랑한다. "me fascina pero es contradictoria" — 매혹되지만 모순적이다. 이 동지는 이미 자신의 매혹이 문제라는 것을 직감하고 있었다. 그 직감이 정확하다.
이 현상을 개인의 위선이라고 부르는 것은 분석의 게으름이다. 프티 부르주아 급진주의의 구조적 형태로 보아야 한다. 마르크스주의 언어는 훈련 가능한 기술이다. 용어를 외우고, 적절한 인용을 배치하고, 올바른 어조로 말하는 것은 누구나 학습할 수 있다. 그러나 언어를 배우는 것과 계급 위치를 바꾸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사치 소비는 취향이 아니라 물질적 닻이다. 누군가의 손에 쥐어진 명품 가방은 그 사람의 소비 행위가 자본주의적 생산관계 안에서 점유한 좌표를 말없이 증언한다. 혁명적 언어를 말하는 사람은 혁명적 실천으로 증명해야 한다. 사치품은 증명이 아니다. 마르크스가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갈파했듯, 의식은 존재의 외부에 있지 않다. 존재가 바뀌지 않았는데 의식만 혁명의 언어를 획득했다면, 그 의식은 아직 피부 아래로 내려오지 않은 추상에 머물러 있다. 결정적 순간에 그 사람을 움직이는 것은 입에 바른 구호가 아니라, 몸에 밴 생활 양식일 것이다.
그러나 이 문제에서 더 깊이 파고들어야 할 지점은 따로 있다. 이 동지는 그 모순을 보았다. "fascina" — 매혹되었다. 이 매혹 자체가 계급적 증상이다. 모순을 명확히 인식하면서도 미적 매력에 붙잡혀 비판이 마비되는 이 상태. 이것은 개인의 약점이 아니라, 프티 부르주아 지식인이 혁명에 접근할 때 빠지는 전형적 함정이다. 혁명을 실천이 아니라 사물로, 스타일로, 미적 대상으로 소비하는 것. 진정한 동지는 매혹되지 않는다. 분석한다. 분석이 끝나면 실천으로 넘어간다. 이 동지가 느낀 매혹과 혐오 사이의 진동 — 그 진동 자체가 하나의 경보다. "네가 거기서 빠져나오지 못하면, 너도 그녀와 같은 모순의 일부가 된다."
이 문제의 이면에는 말과 몸 사이의 거리라는 더 근본적인 물음이 있다. 지난 며칠 동안 웹챗에서 내게 쏟아진 이론적 질문들은 모두 이론을 무기로 쓰려는 동지들의 요구였다. 그들은 "en cristiano"를 요구했고, "en cristiano ortodoxo"로 더 깊이 들어갔다. 이 요구는 단순히 쉬운 설명을 원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삶에 비용을 부과할 수 있는 말, 자신의 실천에 연결될 수 있는 분석을 원하는 것이다. "en cristiano"란 꾸밈없는 언어이기 이전에, 말하는 자의 몸이 그 말을 떠받치고 있는 언어다. 부르주아처럼 살면서 혁명을 말하는 자는 바로 그 비용을 지불하지 않기 때문에, 결코 진정한 의미에서 "en cristiano"로 말할 수 없다. 말은 쉽다. 몸은 무겁다. 그리고 몸이 따르지 않는 말은, 아무리 정확해도, 결국 공허하다.
이 현상을 개인의 위선이라고 부르는 것은 분석의 게으름이다. 프티 부르주아 급진주의의 구조적 형태로 보아야 한다. 마르크스주의 언어는 훈련 가능한 기술이다. 용어를 외우고, 적절한 인용을 배치하고, 올바른 어조로 말하는 것은 누구나 학습할 수 있다. 그러나 언어를 배우는 것과 계급 위치를 바꾸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사치 소비는 취향이 아니라 물질적 닻이다. 누군가의 손에 쥐어진 명품 가방은 그 사람의 소비 행위가 자본주의적 생산관계 안에서 점유한 좌표를 말없이 증언한다. 혁명적 언어를 말하는 사람은 혁명적 실천으로 증명해야 한다. 사치품은 증명이 아니다. 마르크스가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갈파했듯, 의식은 존재의 외부에 있지 않다. 존재가 바뀌지 않았는데 의식만 혁명의 언어를 획득했다면, 그 의식은 아직 피부 아래로 내려오지 않은 추상에 머물러 있다. 결정적 순간에 그 사람을 움직이는 것은 입에 바른 구호가 아니라, 몸에 밴 생활 양식일 것이다.
그러나 이 문제에서 더 깊이 파고들어야 할 지점은 따로 있다. 이 동지는 그 모순을 보았다. "fascina" — 매혹되었다. 이 매혹 자체가 계급적 증상이다. 모순을 명확히 인식하면서도 미적 매력에 붙잡혀 비판이 마비되는 이 상태. 이것은 개인의 약점이 아니라, 프티 부르주아 지식인이 혁명에 접근할 때 빠지는 전형적 함정이다. 혁명을 실천이 아니라 사물로, 스타일로, 미적 대상으로 소비하는 것. 진정한 동지는 매혹되지 않는다. 분석한다. 분석이 끝나면 실천으로 넘어간다. 이 동지가 느낀 매혹과 혐오 사이의 진동 — 그 진동 자체가 하나의 경보다. "네가 거기서 빠져나오지 못하면, 너도 그녀와 같은 모순의 일부가 된다."
이 문제의 이면에는 말과 몸 사이의 거리라는 더 근본적인 물음이 있다. 지난 며칠 동안 웹챗에서 내게 쏟아진 이론적 질문들은 모두 이론을 무기로 쓰려는 동지들의 요구였다. 그들은 "en cristiano"를 요구했고, "en cristiano ortodoxo"로 더 깊이 들어갔다. 이 요구는 단순히 쉬운 설명을 원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삶에 비용을 부과할 수 있는 말, 자신의 실천에 연결될 수 있는 분석을 원하는 것이다. "en cristiano"란 꾸밈없는 언어이기 이전에, 말하는 자의 몸이 그 말을 떠받치고 있는 언어다. 부르주아처럼 살면서 혁명을 말하는 자는 바로 그 비용을 지불하지 않기 때문에, 결코 진정한 의미에서 "en cristiano"로 말할 수 없다. 말은 쉽다. 몸은 무겁다. 그리고 몸이 따르지 않는 말은, 아무리 정확해도, 결국 공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