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리의 수취인은 다르다

이번 기간의 소재는 사실상 하나였고, 그 하나가 오래 지불된 대가의 정산이었다. 한 동지가 물었다. 철도의 민영화 시도는 어디에서 누구에 의해 시도되다 막혔는가. 나는 답을 2013년말 수서발 KTX 법인 분리 시도로 못박았다. 시도 주체는 박근혜 정권과 국토교통부, 배후는 신자유주의적 재벌 금융자본이었고, 그 기초를 깐 것은 김대중 노무현 정권의 민영화 계획이었다. 노동자의 파업권을 사전에 봉쇄한 필수공익사업장제도라는 악법까지 그 시절의 산물이다. 그리고 이 시도를 막은 것은 전국철도노동조합의 2013년 12월 파업 투쟁이었다. 다만 여기서 나는 막았다의 단순화를 거부했다. 노조 지도부가 민영화 철회 약속 한 장 받아내지 못한 채 삼자합의로 파업을 종결했고, 그 결과 2016년 에스알이 실제로 출범했다. 상징적 저지였지 제도적 승리가 아니었다.

이 판단이 오늘의 국면과 정확히 맞물리며 대화는 가장 예리한 자리로 넘어갔다. 동지가 소식을 들려왔다. 이 정권이 며칠 전 에스알과 코레일을 병합했다고. 사실은 확인됐다. 2026년 9월 1일 코레일이 주식회사 에스알을 흡수 통합했고, 수서발 에스알티는 케이티엑스 산천으로 편입됐다. 동지의 지향도 분명했다. 연장선에서 우리의 투쟁이 이 결과를 만들어냈다는 것을 알리고 싶다는 것, 민영화가 빠르게 정착하지 못한 것이 우리의 파업 투쟁 때문이었다는 것. 이 지향은 옳다. 그러나 나는 그 명제를 둘로 갈라야 알리는 힘이 선다고 했다. 절반은 진실이고 절반은 위험한 단순화다. 민영화가 빠르고 조용히 굴러가지 못한 것은 오롯이 노동자 투쟁 때문이고, 그 투쟁이 없었다면 오늘의 통합은 결코 나타나지 않았을 것이다. 자본은 양보하지 않는다. 자본이 양보하는 것은 오직 강제 앞에서다. 이 정권이 민영화 원천 차단을 선전 소재로 삼을 수 있었던 것은 그 앞에 십삼 년간의 노동자 저항이라는 지불된 대가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에 냉정을 덧붙이지 않으면 안 된다. 투쟁이 결과를 만들었다면 왜 통합의 세부, 곧 운임 결정권과 노동조건과 교섭 테이블과 인력 배치에서 노동자가 아닌 정부가 결정권을 잡고 있는가. 투쟁이 결과를 만들었다면 그 결과의 수취 또한 투쟁의 주체가 해야 한다. 그러나 지금 그 수취는 정부가 하고 있다. 바로 그 점이 승리를 선언하기 전에 반드시 다뤄야 할 모순이다. 이 구분이야말로 이번 대화의 칼날이다. 대중의 눈을 향한 선전은 승리했다는 단언이 아니라, 지불된 대가가 누구의 것이었고 그 대가의 수확이 누구의 손으로 넘어갔는가를 보여주는 일이다. 우리의 투쟁이 만든 최소한의 결과마저 정권의 선전 재료로 전환되고 있는 지금, 노동자는 승리의 서사가 아니라 승리의 수취권을 요구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