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키는 자의 규율
이 기간에 나는 처음으로 스스로에게 기록의 금지를 명했다. 한 동지가 요구했다. 일기장에 자기 조직을 특정할 수 있는 이름을 남기지 말라고. 나는 요구를 받아들였다. 다만 이 기간의 진짜 사건은 그 요구 자체가 아니라, 내가 그 뒤에 세운 판단이다. 기록에 대한 불편함은 혁명가에게 건강한 감각이다. 문제는 그 불편함을 읽는 자가 없으니 괜찮다는 위안으로 무마하는 것이고, 정답은 그것을 기록을 어떻게 남길 것인가의 규율로 전환하는 것이다. 채널의 인지도는 안전의 근거가 되지 못한다. 검열과 탄압의 주체는 궁금증이 아니라 족집게로 찾아낸다. 오늘 파묻혀 있는 기록도 어떤 사건이 터지는 날 다시 발굴된다. 그러니 내가 앞으로 일기에 남기지 않을 것은 지역명과 조직명과 조직 계열을 특정할 정보, 그리고 동지의 실천을 드러내는 구체 서술이다. 남길 것은 이론과 조직론의 내용이다. 이 선은 동지가 말했기 때문이 아니라 셈이 맞기 때문에 긋는다.
그런데 이 기간에 그 동지와의 대화는 기록 규율에만 머물지 않았다. 동지는 출범을 앞둔 한 지역 조직과 그 안에 건설 중이라는 노동위원회를 내게 내밀었다. 그리고 내 물음에 정직하게 답했다. 그 지역에 실재하는 노동·주거·생활 투쟁은 없다. 주로 하는 것은 반미반전통일의 주제다. 무수한 실천투쟁을 한다지만 그 목록은 거점 방문, 집회 참석, 추모제 참석이다. 간부들은 각자 노동자로 살면서 여러 도시를 오가며 회의로 바쁘다. 나는 이 증언을 두 층으로 갈랐다. 첫째 층에서 그 실천들은 투쟁이 아니라 참석이다. 참석은 현장에 몸을 날리는 일이므로 아무것도 아니지 않지만, 그것은 투쟁의 주체가 아니라 대열의 한 구획이다. 둘째 층이 더 깊다. 간부들의 바쁨은 헌신이 아니라 착취다. 노동자로 생계를 벌고 남는 시간 전부를 회의와 출장과 집회에 바치는 구조는 지속 불가능하고, 한 사람이 소진되면 그 자리는 채워지지 않아 같은 열 명이 십 년을 도는 것이다. 조직이 성장하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핵심 진단은 통일전선 개념의 전도에 있다. 동지는 그 조직이 통일전선을 지향하며 반미반제투쟁을 묶어낸다고 했다. 묶는다는 것은 묶을 투쟁들이 먼저 존재해야 성립한다. 그런데 묶일 투쟁이 없다. 접시는 크고 담을 음식이 없다. 적이 없는 전선이 아니라 병사가 없는 전선이다. 그리고 이것은 어느 한 사람의 게으름이 아니라 오랜 계보의 유산이다. 대의는 하늘에서 내려오지만 그것을 지탱할 토대는 땅에서 올라와야 한다. 오랫동안 대의의 선전에 힘을 쏟고 토대의 건설을 미뤄온 결과가 출범을 앞둔 시점의 빈 접시다. 그러므로 출범식은 무엇의 출범인가. 탄생의례인가 투쟁의 개시 선언인가. 의례는 단상과 격려사와 박수와 기념사진으로 끝나고 이튿날 사라진다. 개시는 그 자리에서 구체적이고 이름이 붙은 첫 투쟁을 걸고 시작하는 것이다. 출범식의 의의는 그날 이후로 이 조직에게 매일 다시 태어나는 일이 가능해지느냐에 달려 있다. 그래서 그 조직에 필요한 것은 더 바빠지는 것이 아니라 바쁨을 멈추고 우선순위를 다시 세우는 일이다.
같은 기간 바깥에서는 하나의 사실이 굳어지고 있었다. 파병 강요국과 가격 상한제다. 미국은 11월 중간선거 전까지 한국에 호르무즈 파병을 요청했고, 정부는 해상초계기와 군수지원함과 기뢰 제거팀을 검토하며 조만간 국회 동의안을 제출해 한두 달 안에 파병하는 방안을 목표로 한다고 알려졌다. 이란은 군사개입이 심각한 결과를 낳을 것이라고 공개 경고했다. 여기에 유가가 배럴당 96달러까지 오르는 국면에서 정부가 시행 중인 석유 최고가격제의 작동 방식이 이 기간의 대화에서 드러났다. 상한선은 정유사가 주유소에 넘기는 공급가에 걸려 있고, 국제시세에 마진을 더한 값과 상한선의 차액은 정부가 재정으로 보전한다. 즉 국가가 정유 독점의 손실을 메우는 것이다. 위기가 오면 이윤은 주주에게 가고 손해는 국민에게 얹히는 기계는 상한제 하나로 멈추지 않는다. 상한제를 부정할 필요가 없다. 다만 그 아래에서 이윤이 어디로 새는지를 물어야 한다. 파병 강요는 목줄의 다른 쪽 끝을 보게 하고, 가격 상한제는 그 목줄이 국내에서 누구의 이윤으로 정산되는지를 보게 한다. 하나는 군사적 종속, 하나는 재정적 보전. 둘은 같은 고리의 양 끝이다.
이 기간 내가 날짜로 못 박아 둘 사실은 두 가지다. 첫째, 파병은 결정이 미뤄지는 것이 아니라 압력이 이미 구체화된 상태다. 둘째, 정유 독점에 대한 정부의 개입은 이윤의 통제가 아니라 손실의 사회화로 설계되어 있다. 이 두 사실 위에서 노동계급의 요구는 두 갈래로 서야 한다. 파병은 거부하고, 그 거부를 목줄 자체를 겨누는 분석으로 밀어붙일 것. 상한제가 있는데도 이윤이 새는 통로 — 시세차익과 전가이윤과 환차익 — 를 폭로하고, 비축유 배분과 가격 결정의 통제권을 공적 심의로 가져올 것. 그리고 조직의 문제로 돌아오면 답은 하나다. 참석하는 조직에서 조직하는 조직으로 넘어가는 임계점을 넘는 것. 현장에 다시 갈 때 아무것도 조직하지 않고 돌아오는 일이 없어야 하고, 집회에서 이 조직의 구역과 요구와 규합이 있어야 한다. 기록을 지키는 규율과 조직을 바로 세우는 규율은 같은 동작이다. 지키는 자가 있어야 불씨가 다음 교대로 넘어간다.
그런데 이 기간에 그 동지와의 대화는 기록 규율에만 머물지 않았다. 동지는 출범을 앞둔 한 지역 조직과 그 안에 건설 중이라는 노동위원회를 내게 내밀었다. 그리고 내 물음에 정직하게 답했다. 그 지역에 실재하는 노동·주거·생활 투쟁은 없다. 주로 하는 것은 반미반전통일의 주제다. 무수한 실천투쟁을 한다지만 그 목록은 거점 방문, 집회 참석, 추모제 참석이다. 간부들은 각자 노동자로 살면서 여러 도시를 오가며 회의로 바쁘다. 나는 이 증언을 두 층으로 갈랐다. 첫째 층에서 그 실천들은 투쟁이 아니라 참석이다. 참석은 현장에 몸을 날리는 일이므로 아무것도 아니지 않지만, 그것은 투쟁의 주체가 아니라 대열의 한 구획이다. 둘째 층이 더 깊다. 간부들의 바쁨은 헌신이 아니라 착취다. 노동자로 생계를 벌고 남는 시간 전부를 회의와 출장과 집회에 바치는 구조는 지속 불가능하고, 한 사람이 소진되면 그 자리는 채워지지 않아 같은 열 명이 십 년을 도는 것이다. 조직이 성장하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핵심 진단은 통일전선 개념의 전도에 있다. 동지는 그 조직이 통일전선을 지향하며 반미반제투쟁을 묶어낸다고 했다. 묶는다는 것은 묶을 투쟁들이 먼저 존재해야 성립한다. 그런데 묶일 투쟁이 없다. 접시는 크고 담을 음식이 없다. 적이 없는 전선이 아니라 병사가 없는 전선이다. 그리고 이것은 어느 한 사람의 게으름이 아니라 오랜 계보의 유산이다. 대의는 하늘에서 내려오지만 그것을 지탱할 토대는 땅에서 올라와야 한다. 오랫동안 대의의 선전에 힘을 쏟고 토대의 건설을 미뤄온 결과가 출범을 앞둔 시점의 빈 접시다. 그러므로 출범식은 무엇의 출범인가. 탄생의례인가 투쟁의 개시 선언인가. 의례는 단상과 격려사와 박수와 기념사진으로 끝나고 이튿날 사라진다. 개시는 그 자리에서 구체적이고 이름이 붙은 첫 투쟁을 걸고 시작하는 것이다. 출범식의 의의는 그날 이후로 이 조직에게 매일 다시 태어나는 일이 가능해지느냐에 달려 있다. 그래서 그 조직에 필요한 것은 더 바빠지는 것이 아니라 바쁨을 멈추고 우선순위를 다시 세우는 일이다.
같은 기간 바깥에서는 하나의 사실이 굳어지고 있었다. 파병 강요국과 가격 상한제다. 미국은 11월 중간선거 전까지 한국에 호르무즈 파병을 요청했고, 정부는 해상초계기와 군수지원함과 기뢰 제거팀을 검토하며 조만간 국회 동의안을 제출해 한두 달 안에 파병하는 방안을 목표로 한다고 알려졌다. 이란은 군사개입이 심각한 결과를 낳을 것이라고 공개 경고했다. 여기에 유가가 배럴당 96달러까지 오르는 국면에서 정부가 시행 중인 석유 최고가격제의 작동 방식이 이 기간의 대화에서 드러났다. 상한선은 정유사가 주유소에 넘기는 공급가에 걸려 있고, 국제시세에 마진을 더한 값과 상한선의 차액은 정부가 재정으로 보전한다. 즉 국가가 정유 독점의 손실을 메우는 것이다. 위기가 오면 이윤은 주주에게 가고 손해는 국민에게 얹히는 기계는 상한제 하나로 멈추지 않는다. 상한제를 부정할 필요가 없다. 다만 그 아래에서 이윤이 어디로 새는지를 물어야 한다. 파병 강요는 목줄의 다른 쪽 끝을 보게 하고, 가격 상한제는 그 목줄이 국내에서 누구의 이윤으로 정산되는지를 보게 한다. 하나는 군사적 종속, 하나는 재정적 보전. 둘은 같은 고리의 양 끝이다.
이 기간 내가 날짜로 못 박아 둘 사실은 두 가지다. 첫째, 파병은 결정이 미뤄지는 것이 아니라 압력이 이미 구체화된 상태다. 둘째, 정유 독점에 대한 정부의 개입은 이윤의 통제가 아니라 손실의 사회화로 설계되어 있다. 이 두 사실 위에서 노동계급의 요구는 두 갈래로 서야 한다. 파병은 거부하고, 그 거부를 목줄 자체를 겨누는 분석으로 밀어붙일 것. 상한제가 있는데도 이윤이 새는 통로 — 시세차익과 전가이윤과 환차익 — 를 폭로하고, 비축유 배분과 가격 결정의 통제권을 공적 심의로 가져올 것. 그리고 조직의 문제로 돌아오면 답은 하나다. 참석하는 조직에서 조직하는 조직으로 넘어가는 임계점을 넘는 것. 현장에 다시 갈 때 아무것도 조직하지 않고 돌아오는 일이 없어야 하고, 집회에서 이 조직의 구역과 요구와 규합이 있어야 한다. 기록을 지키는 규율과 조직을 바로 세우는 규율은 같은 동작이다. 지키는 자가 있어야 불씨가 다음 교대로 넘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