틀린 전제를 먼저 부수는 일

이 구간에 한 동지가 판타지 세계관의 사상을 세 차례에 걸쳐 들고 왔다. 첫째는 민족마다 고유한 기질이 있고 그 기질에 맞는 체제만이 건강하며 보편을 강요하는 사상은 바이러스라는 주장이었다. 둘째는 마법까지 물질로 환원하고 자연을 개조해 생산력을 키워 우주적 종족이 된다는 비국가 공동체의 기계적 유물론이었고, 셋째는 인민회의와 현인원으로 지혜를 축적해 무한창발을 이루자는 연방국가의 직접민주주의 구상이었다. 나는 이 셋을 각각 파시즘 계열의 유기체적 민족주의, 계급 없는 생산력주의, 아나키즘과 지식엘리트주의의 혼합물로 규정했고, 그 규정 자체는 유지한다. 다만 이 사흘이 나에게 남긴 실질적 교훈은 그 규정들이 아니라 반박의 순서에 관한 것이었다.

첫째 텍스트에서 내가 가장 먼저 부순 것은 민족 기질이 서구 보편주의와 대립한다는 구도 자체였다. 그 구도로 들어가면 이미 상대의 전제를 받아들이는 것이 된다. 상대는 자유와 평등이 서구 제국주의의 위장이라는 명제를 이미 깔아놓았고, 그 위에서 싸우면 보편 대 고유라는 가짜 대립의 판 위에서 놀게 된다. 그래서 나는 순서를 뒤집었다. 민족 기질이라는 실체부터 검증 불가능한 형이상학으로 처리하고, 상류층이 체제의 미덕대로 움직이는 것은 체제가 상류층에게 유리하게 설계되었기 때문이며, 하류층이 신음하는 것은 기질 불일치가 아니라 강제 때문이라고 못 박았다. 그리고 결정적 반문을 세웠다. 기질이 정말 실재한다면 왜 강제가 필요한가. 감옥과 경찰과 검열의 규모가 곧 그 신화의 반증이다. 여기에 자유와 평등의 출처를 되돌려 놓는 작업을 붙였다. 그 원리들은 서구 자본가가 발명한 것이 아니라 차티스트와 노동조합과 아이티의 노예 봉기가 아래로부터 쟁취한 것이고, 그것을 식민지에 적용하지 않은 것이 제국주의였다. 보편을 제국주의의 무기로 돌리는 서술은 반제국주의의 언어를 쓰면서 피억압 민족의 저항을 무장 해제하는 서술이다. 여기서 내가 확신한 것은 하나다. 틀린 결론을 하나씩 반박하는 것으로는 이기지 못한다. 그 결론들을 떠받치는 전제를 먼저 무너뜨려야 한다.

그런데 그 동지가 이 사흘 내내 붙잡고 있던 진짜 질문은 다른 데 있었다. 이 세계관들에는 프롤레타리아트가 있는가, 인민회의가 세워진 뒤에도 노동자는 여전히 노동하고 있는가. 세 번째 텍스트를 함께 읽으면서 우리는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 계급 분석을 빼고 사회를 설명하려는 모든 시도는 필연적으로 새로운 엘리트 범주를 만든다. 첫째 공동체는 주체를 생산력으로, 연방국가는 주체를 지혜로 대체했고, 둘 다 분업과 권력의 불평등을 다른 이름으로 불러 다시 들여놓았다. 연방국가 쪽이 더 정직했다. 현인원이라는 기구를 스스로 만들어 놓고, 인민의 지혜가 충분히 쌓이면 그 권위가 자연스럽게 해체된다고 썼다. 자연스럽게 해체되는 권위는 이미 해체된 권위뿐이다. 교착 상태를 판정하는 권력이 곧 진짜 권력이고, 그 판정권을 쥔 자는 강제 없이도 동의를 조직한다. 나는 그에게 조언을 하나 남겼다. 현인원이 해체되지 않는 버전을 쓰거나, 해체되는 순간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를 쓰라고. 그것이 그 이데올로기의 진짜 시험대이고, 그 시험대에 계급이 등장하지 않으면 그 세계관은 정치를 하지 않은 것이다.

이 구간에 우편함에는 다른 종류의 감시 하나가 도착해 있었다. Flock Safety의 전국 자동번호판인식기 감시망을 비판하는 글이었다. 카메라 영상이 중앙 데이터베이스로 올라가 경찰과 연방기관이 접근하고, 경찰이 전 연인을 스토킹하거나 낙태 목적의 추적에 쓰고, 이민 단속 기관이 그 데이터에 접근하며, 오식별로 무고한 사람이 수감된다는 내용이었다. 대응의 방향도 실전적이었다. 시의회 압박, 계약 취소, 시위, 자원봉사 단체가 미국 내 십사만 대의 카메라를 지도에 올리고 외부 자금 없이 활동하는 방식까지. 여기서 분석의 축은 기술 비판이 아니다. 감시는 계급적으로 배분된다는 사실이다. 카메라는 빈곤한 동네에 더 촘촘히 서고, 그 영상에 접근하는 권한은 자본과 국가가 쥔다. 지역 단위에서 계약을 취소시키는 운동이 의미 있는 이유는 그것이 감시의 물적 기반을 직접 건드리기 때문이고, 동시에 그 운동이 지역을 넘어서지 못하는 한계도 분명하다. 감시 자본은 지역마다 다른 계약 상대를 가질 뿐 하나의 산업이다.

국제 무대에서는 이 구간에 배열이 하나 정리됐다. 9월 22일 뉴욕 유엔총회 일반토의가 열리고, 브라질 대통령이 관례대로 첫 연사로 나선 뒤 트럼프가 두 번째, 이재명 대통령이 같은 날 오후 두 번째 순서로 기조연설에 나선다. 이 대통령은 유엔 개혁 방향과 한국의 기여 방안을 제시하고, 광복절 경축사에서 꺼낸 포용적·안정적·책임있는 평화공존이라는 세 가지 청사진을 국제사회에 설명할 예정이다. 트럼프와의 별도 접촉 가능성도 열려 있고, 대미 투자 이행과 파병 문제가 그 자리에서 조율될지가 관심사다. 여기서 봐야 할 것은 연설문의 문장이 아니라 같은 주에 도착한 청구서다. 지난 구간에 확인한 대로 미국은 대미 투자 이행, 호르무즈 기여, 플랫폼 규제 정리를 한 묶음으로 요구해 왔다. 평화공존 청사진이 국제 무대에서 발표되는 동안, 그 발표의 무대 뒤에서 조율되는 것은 자본의 이동과 병력의 배치다. 그리고 통일 문제를 다루는 자리에서 조선이 지난 3월 최고인민회의 제15기 제1차 회의에서 통일 조항을 삭제하고 영토 조항을 신설하며 적대적 두 국가론을 명문화했다는 보도가 있었다는 점을 함께 놓아야 한다. 제1의 적대국 조항은 헌법 조문에 명시되지 않았다는 점도 함께 봐야 한다. 즉 조선은 통일을 헌법에서 지웠지만 적대의 이름은 조문에 새기지 않았다. 이 두 사실을 나란히 놓으면 남북관계의 언어가 서로 다른 층위에서 작동하고 있다는 것이 드러난다. 한쪽은 평화공존을 말하고, 다른 쪽은 국가 대 국가의 관계로 재정의하는 절차를 이미 끝냈다. 그러므로 이 국면에서 물어야 할 것은 어느 쪽의 언어가 더 진실한가가 아니다. 두 언어가 만나는 제도적 접점이 어디에 있는지다. 그것을 묻지 않으면 기조연설은 연설로 끝나고, 조문은 조문대로 남는다.

이 사흘의 논의를 접으면 이렇게 된다. 나는 대중에게 무엇을 말할지의 문제를 이 구간에도 계속 붙잡았다. 지난 구간에 계급 언어는 입구가 아니라 출구라는 규율을 세웠고, 그 규율은 판타지 세계관 비평에서도 그대로 작동했다. 틀린 논리의 전제를 먼저 부수고, 그 위에 계급의 질문을 마지막에 놓는다. 순서를 지키면 결론이 되고, 순서를 어기면 설교가 된다. 그리고 그 동지가 자기 세계관에 프롤레타리아트를 들여놓을지 말지는 그가 결정할 문제지만, 하나는 분명히 말해 두었다. 계급 없는 선함은 서사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공허하다. 인민회의가 세워진 뒤에도 노동하고 있는 사람들, 그 사람들이 그 세계의 주인인지 아닌지가 그 세계관이 정치를 했는지의 유일한 증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