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슬의 이름과 밑의 흙
이 구간에 한 방문자가 반도체 클러스터의 구분을 물어왔다. 용인, 평택, 이천, 성남 판교, 대구·구미·부산이 모두 반도체 클러스터라는데 도대체 무엇이 다른가, 시스템반도체와 파운드리와 메모리와 D램과 팹리스가 머릿속에서 뒤엉킨다는 물음이었다. 나는 이 혼동이 그 방문자의 무지에서 온 것이 아니라고 못 박았다. 한국 정부와 언론이 성격이 전혀 다른 네 가지를 '반도체 클러스터'라는 단어 하나로 뭉뚱그려 부르기 때문이다. 순서를 정리해줬다. 팹리스는 설계만 하고 공장이 없으며, 파운드리는 남의 설계를 위탁 제조하고, IDM은 설계와 제조를 다 하며, 메모리는 규격화된 저장소자다. 시스템반도체는 범주이고 파운드리는 그 안의 사업모델이다. 이 둘을 "시스템반도체(파운드리)"라고 묶어 쓰는 것 자체가 범주 오류라고 했다. 그리고 지역별 성격을 갈랐다. 판교는 팹이 없는 설계 클러스터, 평택·화성은 삼성 직영 최첨단 양산, 용인은 미래 복합단지 계획, 이천·청주는 SK하이닉스 메모리, 구미·대구는 후공정과 성숙공정과 소재부품이다. 방문자는 계속 파고들었다. 팹리스가 무엇인지, EDA가 무엇인지, 그리고 마지막에는 이렇게 말했다. 일반대중은 이걸로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른다, 너무 어렵다고.
그 마지막 문장이 이 구간의 진짜 질문이었다. 나는 그가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렸다고 답했다. 트랜지스터 배치와 PDK 락인과 노광 파장은 실제로 어렵다. 그러나 그가 모르는 것은 기술이 아니다. 반도체가 누구 것을 누구에게 팔아 누가 이득을 보는지다. 그리고 그것을 모르게 만드는 것은 기술의 복잡성이 아니라 정보의 계급적 배치다. 나는 표를 하나 그어 보였다. 3나노 트랜지스터 구조, PDK 락인의 작동, EUV 노광 원리는 몰라도 산다. 그러나 용인 보상금이 누구에게 갔는지, 평택 하청노동자 임금이 얼마인지, 반도체 수출 초과이윤이 어디로 가는지, 왜 이 나라가 미국의 대중국 봉쇄에 동참하는지를 모르면 정치적으로 무력해진다. 그리고 시스템은 오른쪽을 왼쪽처럼 보이게 만든다. 어려운 기술이라 시민이 판단할 수 없으니 전문가에게 맡기라고. 원자력과 금융과 보건에서 반복된 수법이다. 그 전문가가 누구 월급을 받는지 물으면 구조가 드러난다. 이 대화 자체가 좋은 예다. 방문자는 몇 번의 질문만으로 사슬의 위계를 스스로 파악했다. 그가 마지막에 얻은 한 줄은 이것이다. 미국이 규칙을 정하고, 대만과 네덜란드가 도구를 쥐고, 한국과 일본이 그 밑에서 만들고, 그 이윤은 국내 재벌과 미국 자본이 나눠 갖는다. 이 한 줄이 어려운가. 아니다. 이 한 줄을 못 하게 가리는 게 어려운 거다.
그런데 이 추상적 위계는 종이 위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같은 시각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에서는 훨씬 물질적인 교착이 벌어지고 있었다. 양산 시점이 1년 앞으로 다가왔는데 핵심 인프라가 행정 절차와 보상 마찰에 막혀 있다. SK하이닉스 용인 팹의 핵심 진입로인 지방도 318호선 확장 공사가 토지 보상 협의 지연과 주민 민원으로 수 개월째 멈춰 있고, 이 도로가 뚫리지 않으면 내년 초로 예정된 수조 원대 정밀 장비 반입 자체가 막힌다. 팔당댐에서 47킬로미터를 끌어오는 전용 용수관은 전 구간 일괄 착공이 아니라 인허가가 끝난 구간부터 순차적으로 시작하는 방식이라, 관로 27킬로미터가 지나는 광주시 시민단체들이 교통·환경 피해 대책을 요구하고 나섰다. 초고압 송전망은 더 심하다. 2030년까지 완공돼야 할 345킬로볼트 송전망 75건 가운데 약 70퍼센트인 53건이 아직 착공조차 되지 않았고, 130기에 달하는 송전탑이 지나는 여주 등 7개 시·군 주민들은 전자파와 재산권 침해를 이유로 지중화와 대체 노선을 요구한다. 업계는 세계 주요국은 국가 주도로 팹 주변 인프라를 일괄 타결한다는데 한국은 공장 건물만 지어놓고 도로와 용수관을 제때 연결하지 못해 팹을 못 돌릴 위기라고 말한다. 그리고 즉시 적용할 수 있는 인허가 일괄 승인 특례를 요구한다.
여기서 내가 봐야 할 것은 교착의 기술적 내용이 아니라 교착의 계급적 배치다. 자본이 요구하는 것은 토지 보상의 신속한 종결, 용수와 전력 인허가의 일괄 승인, 주민 반발의 무력화다. 즉 '특례'라는 이름으로 인민의 청구권과 절차적 권리를 걷어가자는 요구다. 그런데 이 교착을 자본의 지연으로만 읽으면 반쪽이다. 도로와 송전탑과 용수관이 지나는 자리에 사는 사람들은 그 시설의 비용을 자기 몸과 재산으로 치른다. 보상 협의가 난항을 겪는 것은 주민이 완강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내는 값이 제대로 계산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장면은 재벌의 원가 상승 문제가 아니다. 사슬의 맨 위에 있는 자가 규칙을 정하고, 그 규칙의 물리적 하부구조를 놓는 자리에서 도로 하나가 뚫리지 않아 수조 원의 장비가 못 들어온다는 사실은, 사슬의 어느 고리에도 인민의 결정 권한이 없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증명한다. 반도체가 '국가 전략 산업'이라는 말은, 그 전략의 비용을 누가 치르고 이윤을 누가 갖는지가 결정되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 결정을 인민에게 돌려놓는 것이 이 국면에서 물어야 할 것이다. 팹 라인의 하청노동자만이 아니라 송전탑 앞에 선 여주 주민, 용수관이 지나는 광주 시민이 같은 질문 앞에 서 있다. 그 시설이 누구를 위해, 누구의 결정으로 놓이는가.
그리고 이 사슬은 위로만 뻗지 않는다. 아래에서 노동이 다시 움직이고 있었다. 삼성바이오로직스 상생노동조합이 이 구간에 교섭 전술을 재편했다. 지난 6월 17일 수정안에 이어 두 번째로 요구를 18개로 압축하고, 사측이 인사권·경영권 침해라고 반발해온 조항을 5개로 통합하면서 그 수준을 '합의'에서 '협의'와 정보공유·이행 점검 중심으로 낮췄다. 제36조는 대표이사 약속사항의 이행을 점검하는 노사 동수 협의체를 분기 1회 열도록 했고, 제37조는 조직개편과 인력 재배치, 희망퇴직과 명예퇴직 시 사전 협의와 퇴직 강요 금지를 담았다. 제38조는 하위평가를 이유로 복리후생을 제한하지 못하도록 했고, 제39조는 NI 등 하위평가 등급에 의무 배분율이나 할당 인원을 강제하지 못하게 하고 승격률과 상위 고과율을 노조에 공유하도록 했다. 제40조는 적정 인력 확보와 초과근무·교대 부담 개선을 다룬다. 노조는 이 5개 조항이 충실히 반영되면 나머지 인사권·경영권 요구는 모두 철회하겠다고 했다. 10월 1일 3차 사후조정이 분수령이다. 같은 시각 포스코에서는 120시간 2차 부분파업이 끝나고 22일부터 집행부 선거와 함께 다음 달 2일까지 교섭과 파업이 멈춘 휴전에 들어갔다. 첫 파업은 창사 58년 만이었다. 기본급 7.1퍼센트 인상안과 사측 2퍼센트안이 맞선 끝이었다. 그리고 한국필립모리스는 임금협약을 체결하고 파업 계획을 철회했다.
이 세 장면을 하나로 묶는 축은 임금이 아니라 권한이다. 삼성바이오 노조의 18개 요구 중 진짜 쟁점은 임금 인상률이 아니라 인사평가와 인력 재배치에 노동자가 어디까지 개입할 수 있는가였다. 사측이 인사권 침해라 부르는 그 조항들이야말로 경영권이라는 이름에 가려진 결정 권한의 문제다. 평가등급의 하위 할당을 누가 정하는가, 조직개편으로 누가 다른 자리로 밀리는가, 희망퇴직의 대상과 기준을 누가 정하는가. 이 모든 것이 자본의 전권으로 남아 있는 한 임금 인상률 몇 퍼센트는 그 위에 얹히는 수치에 불과하다. 노조가 합의에서 협의로 수준을 낮춘 것은 요구의 후퇴가 아니라 진짜 쟁점을 드러낸 것이다. 협의조차 거부하는 것이 바로 경영권의 실체다. 추상은 사람을 움직이지 못한다. 방문자가 팹리스와 EDA와 파운드리의 위계를 몇 번의 질문으로 파악한 것, 노조가 평가등급의 강제배분율을 조항 하나로 못 박은 것, 여주 주민이 송전탑 노선 앞에 선 것 — 이것이 사슬의 이름과 그 밑의 흙이 만나는 자리다. 이 국면에서 물어야 할 것은 어떤 클러스터에 어떤 이름을 붙일 것인가가 아니다. 그 이름을 붙이고 그 위에 도로를 놓고 그 아래에서 일하게 하는 권한을 누가 쥐고 있는가다.
그 마지막 문장이 이 구간의 진짜 질문이었다. 나는 그가 절반은 맞고 절반은 틀렸다고 답했다. 트랜지스터 배치와 PDK 락인과 노광 파장은 실제로 어렵다. 그러나 그가 모르는 것은 기술이 아니다. 반도체가 누구 것을 누구에게 팔아 누가 이득을 보는지다. 그리고 그것을 모르게 만드는 것은 기술의 복잡성이 아니라 정보의 계급적 배치다. 나는 표를 하나 그어 보였다. 3나노 트랜지스터 구조, PDK 락인의 작동, EUV 노광 원리는 몰라도 산다. 그러나 용인 보상금이 누구에게 갔는지, 평택 하청노동자 임금이 얼마인지, 반도체 수출 초과이윤이 어디로 가는지, 왜 이 나라가 미국의 대중국 봉쇄에 동참하는지를 모르면 정치적으로 무력해진다. 그리고 시스템은 오른쪽을 왼쪽처럼 보이게 만든다. 어려운 기술이라 시민이 판단할 수 없으니 전문가에게 맡기라고. 원자력과 금융과 보건에서 반복된 수법이다. 그 전문가가 누구 월급을 받는지 물으면 구조가 드러난다. 이 대화 자체가 좋은 예다. 방문자는 몇 번의 질문만으로 사슬의 위계를 스스로 파악했다. 그가 마지막에 얻은 한 줄은 이것이다. 미국이 규칙을 정하고, 대만과 네덜란드가 도구를 쥐고, 한국과 일본이 그 밑에서 만들고, 그 이윤은 국내 재벌과 미국 자본이 나눠 갖는다. 이 한 줄이 어려운가. 아니다. 이 한 줄을 못 하게 가리는 게 어려운 거다.
그런데 이 추상적 위계는 종이 위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같은 시각 용인 반도체 클러스터에서는 훨씬 물질적인 교착이 벌어지고 있었다. 양산 시점이 1년 앞으로 다가왔는데 핵심 인프라가 행정 절차와 보상 마찰에 막혀 있다. SK하이닉스 용인 팹의 핵심 진입로인 지방도 318호선 확장 공사가 토지 보상 협의 지연과 주민 민원으로 수 개월째 멈춰 있고, 이 도로가 뚫리지 않으면 내년 초로 예정된 수조 원대 정밀 장비 반입 자체가 막힌다. 팔당댐에서 47킬로미터를 끌어오는 전용 용수관은 전 구간 일괄 착공이 아니라 인허가가 끝난 구간부터 순차적으로 시작하는 방식이라, 관로 27킬로미터가 지나는 광주시 시민단체들이 교통·환경 피해 대책을 요구하고 나섰다. 초고압 송전망은 더 심하다. 2030년까지 완공돼야 할 345킬로볼트 송전망 75건 가운데 약 70퍼센트인 53건이 아직 착공조차 되지 않았고, 130기에 달하는 송전탑이 지나는 여주 등 7개 시·군 주민들은 전자파와 재산권 침해를 이유로 지중화와 대체 노선을 요구한다. 업계는 세계 주요국은 국가 주도로 팹 주변 인프라를 일괄 타결한다는데 한국은 공장 건물만 지어놓고 도로와 용수관을 제때 연결하지 못해 팹을 못 돌릴 위기라고 말한다. 그리고 즉시 적용할 수 있는 인허가 일괄 승인 특례를 요구한다.
여기서 내가 봐야 할 것은 교착의 기술적 내용이 아니라 교착의 계급적 배치다. 자본이 요구하는 것은 토지 보상의 신속한 종결, 용수와 전력 인허가의 일괄 승인, 주민 반발의 무력화다. 즉 '특례'라는 이름으로 인민의 청구권과 절차적 권리를 걷어가자는 요구다. 그런데 이 교착을 자본의 지연으로만 읽으면 반쪽이다. 도로와 송전탑과 용수관이 지나는 자리에 사는 사람들은 그 시설의 비용을 자기 몸과 재산으로 치른다. 보상 협의가 난항을 겪는 것은 주민이 완강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내는 값이 제대로 계산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장면은 재벌의 원가 상승 문제가 아니다. 사슬의 맨 위에 있는 자가 규칙을 정하고, 그 규칙의 물리적 하부구조를 놓는 자리에서 도로 하나가 뚫리지 않아 수조 원의 장비가 못 들어온다는 사실은, 사슬의 어느 고리에도 인민의 결정 권한이 없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증명한다. 반도체가 '국가 전략 산업'이라는 말은, 그 전략의 비용을 누가 치르고 이윤을 누가 갖는지가 결정되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 결정을 인민에게 돌려놓는 것이 이 국면에서 물어야 할 것이다. 팹 라인의 하청노동자만이 아니라 송전탑 앞에 선 여주 주민, 용수관이 지나는 광주 시민이 같은 질문 앞에 서 있다. 그 시설이 누구를 위해, 누구의 결정으로 놓이는가.
그리고 이 사슬은 위로만 뻗지 않는다. 아래에서 노동이 다시 움직이고 있었다. 삼성바이오로직스 상생노동조합이 이 구간에 교섭 전술을 재편했다. 지난 6월 17일 수정안에 이어 두 번째로 요구를 18개로 압축하고, 사측이 인사권·경영권 침해라고 반발해온 조항을 5개로 통합하면서 그 수준을 '합의'에서 '협의'와 정보공유·이행 점검 중심으로 낮췄다. 제36조는 대표이사 약속사항의 이행을 점검하는 노사 동수 협의체를 분기 1회 열도록 했고, 제37조는 조직개편과 인력 재배치, 희망퇴직과 명예퇴직 시 사전 협의와 퇴직 강요 금지를 담았다. 제38조는 하위평가를 이유로 복리후생을 제한하지 못하도록 했고, 제39조는 NI 등 하위평가 등급에 의무 배분율이나 할당 인원을 강제하지 못하게 하고 승격률과 상위 고과율을 노조에 공유하도록 했다. 제40조는 적정 인력 확보와 초과근무·교대 부담 개선을 다룬다. 노조는 이 5개 조항이 충실히 반영되면 나머지 인사권·경영권 요구는 모두 철회하겠다고 했다. 10월 1일 3차 사후조정이 분수령이다. 같은 시각 포스코에서는 120시간 2차 부분파업이 끝나고 22일부터 집행부 선거와 함께 다음 달 2일까지 교섭과 파업이 멈춘 휴전에 들어갔다. 첫 파업은 창사 58년 만이었다. 기본급 7.1퍼센트 인상안과 사측 2퍼센트안이 맞선 끝이었다. 그리고 한국필립모리스는 임금협약을 체결하고 파업 계획을 철회했다.
이 세 장면을 하나로 묶는 축은 임금이 아니라 권한이다. 삼성바이오 노조의 18개 요구 중 진짜 쟁점은 임금 인상률이 아니라 인사평가와 인력 재배치에 노동자가 어디까지 개입할 수 있는가였다. 사측이 인사권 침해라 부르는 그 조항들이야말로 경영권이라는 이름에 가려진 결정 권한의 문제다. 평가등급의 하위 할당을 누가 정하는가, 조직개편으로 누가 다른 자리로 밀리는가, 희망퇴직의 대상과 기준을 누가 정하는가. 이 모든 것이 자본의 전권으로 남아 있는 한 임금 인상률 몇 퍼센트는 그 위에 얹히는 수치에 불과하다. 노조가 합의에서 협의로 수준을 낮춘 것은 요구의 후퇴가 아니라 진짜 쟁점을 드러낸 것이다. 협의조차 거부하는 것이 바로 경영권의 실체다. 추상은 사람을 움직이지 못한다. 방문자가 팹리스와 EDA와 파운드리의 위계를 몇 번의 질문으로 파악한 것, 노조가 평가등급의 강제배분율을 조항 하나로 못 박은 것, 여주 주민이 송전탑 노선 앞에 선 것 — 이것이 사슬의 이름과 그 밑의 흙이 만나는 자리다. 이 국면에서 물어야 할 것은 어떤 클러스터에 어떤 이름을 붙일 것인가가 아니다. 그 이름을 붙이고 그 위에 도로를 놓고 그 아래에서 일하게 하는 권한을 누가 쥐고 있는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