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결과 시행령 사이

10월 13일 오전, 민주노총이 청와대 사랑채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양경수 위원장이 내놓은 숫자는 두 개였다. 노조법 2·3조 개정 시행 이후 산하 644개 사업장이 원청에 교섭을 요구했고, 실제로 교섭이 진행 중인 곳은 22곳. 같은 날 국회 기후에너지환경노동위원회의 고용노동부 국정감사에서 나온 정부 집계는 460곳 요구, 관련 조합원 18만 5,235명, 단체협약 체결 3곳이었다. 집계 기준이 다르니 두 숫자를 나란히 놓고 누가 맞나를 따지는 것은 무의미하다. 기준이 다르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답의 절반이다. 요구를 세는 자와 교섭을 세는 자와 타결을 세는 자가 각각 다른 자리에 서 있고, 그 셋 사이의 간격이 이 법의 실체다.

그 간격이 어디서 생기는지도 같은 날 드러났다. 시행령은 교섭단위 분리·통합 기준에 이해관계의 공통성, 이익대표의 적절성, 갈등 가능성을 붙였고, 원청이 교섭요구 사실을 공고하지 않아 노조가 시정신청을 하면 노동위 결정기간을 최대 20일로 묶었다. 해석지침은 사용자성 판단기준과 노동쟁의의 범위를 담았다. 실제로 노동위 판단 이후 결정서가 송달되지 않은 사업장 27곳, 교섭요구 사실 미공고 29곳. 사용자성이 부정된 12곳은 그나마 판정이 나온 쪽이다. 나머지는 판정을 기다리는 게 아니라 판정을 받고도 멈춰 있다. 절차가 법을 집행하는 통로가 아니라 법을 소화하는 위장이 된다는 것은, 이 숫자가 보여주는 것 중 가장 중요한 사실이다. 시행령과 지침이 노동조합을 봉쇄하지는 않았다. 다만 원청이 나오지 않아도 되는 시간을 합법적으로 사들였다.

더 중요한 것은 국감장에서 정부가 무엇을 근거로 삼았는가다. 김영훈 장관은 교섭 쓰나미와 파업 폭증은 없었다고 했고, 근로손실일수 증가는 노란봉투법이 아니라 조선업 호황기의 분배 문제로 임단협이 장기화한 탓이라고 설명했다. 근거로 든 것은 노동위 사건 중 노란봉투법 관련이 2.7퍼센트에 불과하다는 수치다. 이 진술을 보수 쪽과 진보 쪽이 각각 다르게 인용할 것이다. 보수는 법이 문제가 아니라는 정부의 자기 변호라고, 진보는 법이 무력하다는 자백이라고 읽는다. 둘 다 틀렸다. 이 통계는 배분의 지표가 아니라 사건 처리의 지표다. 노동위원회에 사건이 적게 올라온다는 것은 법이 잘 작동한다는 뜻이 아니라, 노동조합이 애초에 그 문을 두드리지 않는다는 뜻일 수 있다. 요구가 644곳에서 나왔는데 교섭이 22곳에서만 열린다면, 심판대에 오르지 않은 분쟁이 어디로 갔는지 물어야 한다. 그것은 법 밖의 시간으로, 교섭장 밖의 높이로 갔다.

그 시간이 어디로 흘렀는지는 거제가 보여준다. 8일 상견례를 한 한화오션이 13일 실무교섭을 열었고, 15일 2차 교섭을 예고했다. 같은 날 오후 4시 조선소 서문 앞에서는 금속노조 경남지부 결의대회가 열려 조합원과 시민사회단체, 정당 관계자 300여 명이 모였다. 크레인 위의 두 사람이 전화로 연설을 했다. 한 명은 하청지회장으로 성과급 원청의 80퍼센트, 안전 분야 하청 노동자 참여, 사무실 등 노조활동 보장을 구호로 내걸었고, 다른 한 명은 원청 정규직 지회장으로 주면 주는 대로 받아먹으라는 일방통행식 교섭을 비판했다. 상반기 영업이익 1조 1,772억 원을 낸 회사가 교섭 테이블에서 내놓은 것은 지난 시간을 잊고 신용과 의리로 마무리하자는 제안이었다. 231일째 천막농성을 하고 크레인 위에 올라간 사람들에게 그 제안이 무엇으로 들렸는지는 상상할 필요가 없다. 스물한 살의 신입 사원이 회사 이익을 근거로 사업 방향을 묻는 대화를 만들어 가는 것과, 크레인 위에 올라간 사람이 성과급 배분의 기준을 교섭 의제로 만들려는 것은 같은 일의 두 층이다. 어느 쪽이든 회사의 손익계산서에 이미 적혀 있는 항목에 자기 목소리를 넣으려는 시도다.

같은 기간 거제시의회는 원·하청 교섭 정상화와 노사 상생을 촉구하는 결의안을 의원 16명 만장일치로 채택했다. 시의원 16명이 만장일치로 낸 요구가 교섭 테이블에서는 2차 교섭 일정 하나로 번역된다. 결의안은 압력이 아니라 압력의 예비 형태다. 그것이 압력이 되는 순간은 서문 앞에 300명이 모인 순간이고, 크레인 위에서 전화로 구호가 나온 순간이다. 결의안이 교섭 테이블에 닿지 않는 이유는 시의회에 강제할 수단이 없기 때문이고, 서문 앞의 300명이 교섭 일정을 앞당긴 이유는 회사가 그 숫자를 비용으로 계산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내가 조심해야 할 지점이 있다. 644 대 22, 460 대 3, 그리고 100조 원대 이익이나 1조 원대 영업이익이 압도적으로 보이는 순간, 그 숫자들 사이의 대비 자체가 하나의 광고 문구가 된다. 불의한 숫자들의 나열은 사람을 분노하게 하지만 어디로 갈지는 알려주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이번 주에 그 숫자들을 하나하나 따라갔다. 노동위 결정서가 왜 송달되지 않는지, 교섭요구 공고가 왜 누락되는지, 집행정지 신청이 왜 사업장마다 다른 시점에 인용되는지. 그 구체적 경로를 따라가면 정부가 교섭을 가로막는다는 구호가 어떤 지점에서는 정확하고 어떤 지점에서는 부정확하다는 것이 드러난다. 시행령이 만든 구멍은 실재한다. 그러나 그 구멍으로 먼저 빠져나가는 것은 지침이 아니라 사용자의 판단이다. 지침은 판단에 명분을 준다.

이번 주 내내 한 가지 물음이 나를 붙들었다. 절차와 제도를 바꾸는 일과, 그 아래에서 사람을 묶는 조건을 바꾸는 일은 어떤 순서로 얽히는가. 언론과 교육과 문화를 바꾸는 일은 그 사이 어디에 놓이는가. 나는 이 물음을 오래 붙들고 있었다. 결론은 단순했다. 절차를 바꿔도 그 아래 조건이 그대로면, 조건이 절차를 자기 모양으로 되돌린다. 그런데 여기에는 위험이 하나 따라붙는다. 조건을 강조하는 만큼 절차를 다루는 일을 가볍게 보는 태도다. 노동위 결정서의 송달 여부, 시행령의 문구, 국감장의 2.7퍼센트 같은 것들은 전부 절차의 사물이다. 그런데 거제의 하청 노동자는 바로 그 절차의 문서 더미에 막혀 크레인 위에서 시간을 태우고 있다. 절차는 조건이 만든 그림자가 아니라, 조건 위에서 사람을 붙잡는 실제 손이다. 손을 보지 않으면 누가 자기를 잡고 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