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의 이름을 빌린 두 개의 문
10월 30일 금요일 저녁, 바르샤바 헌법재판소(TK)에서 일어난 일을 사실부터 정리해야 한다. 재판소 판사 안나 코르빈-피오트롭스카가 소장 보그단 시비엥코프스키와 부소장 바르트워미에이 소하인스키의 직무를 중지시켰다고 발표했다. 근거로 든 것은 일반법원법 제130조, 곧 법원장이나 법무부 장관이 현행범 상태의 판사를 직무에서 즉시 배제할 수 있다는 조항이다. 헌법학자 마르친 마트착은 그 조항이 헌재에는 적용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 그는 PiS의 사법 개혁을 비판해온 사람이다. 그가 시비엥코프스키를 두둔하는 글로 읽힐 발언을 냈다는 사실 자체가 이 사건의 법적 성질을 말해준다. 그리고 같은 날 저녁, 국무총리 관저 쪽 문을 통해 국가보호청(SOP)의 호위를 받은 판사 일곱 명이 재판소 경내로 들어갔다. 담장 밖에서는 시위대가 전동 공구로 펜스를 잘라내고 있었고, 경찰이 배치됐고, 세 명이 연행됐다. 나브로츠키 대통령은 세네갈행 비행기를 공중에서 돌려 귀국했다. 재판소의 엑스 계정은 "불법 점거"라 썼고, 카친스키는 폴란드가 오늘부로 경찰국가가 됐다고 선언했다. 투스크는 "법치 회복은 우리의 의무"라고 썼다.
이 장면에서 내가 주목하는 것은 누가 쿠데타를 벌였는가가 아니다. 재판소 건물에 들어간 통로가 정문이 아니라 총리 관저와 이어진 문이었다는 사실이다. 어떤 기관을 장악하는 방식은 그 기관의 문이 어디로 열려 있는지를 결정한다. 이번 조치를 정당화하는 논리도 정확히 같은 방향을 가리킨다. 2023년 이후 투스크 연립은 헌재의 정당성을 인정하지 않았고, 그 판결을 무시했고, 올해 3월부터는 비어 있던 자리를 채우기 시작해 여덟 명을 새로 임명했다. 나브로츠키는 그중 다섯 명의 선서를 거부했고, 시비엥코프스키는 그 다섯 명의 취임을 거부했다. 유럽인권재판소가 그들을 받아들이라고 명령했지만 그는 재판소에 그 권한이 없다고 답했다. 여기서 드러나는 구조는 이렇다. 대통령이 선서를 거부해 판사를 만들지 않고, 재판소 소장이 그 판사들을 받지 않아 재판소를 구성하지 않고, 정부는 그 구성을 기다리지 않고 강제로 밀어 넣는다. 세 기관이 각각 자기 권한의 경계를 자기가 정하면서 상대의 권한을 부정한다. 어느 한쪽도 절차를 위반하지 않고는 이 교착을 풀 수 없다.
투스크 쪽이 동원한 것은 군이 아니라 경찰이었고, 의회 다수가 같은 편이었으며, 집권 세력이 자기 국가기구를 상대로 쿠데타를 한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성립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그가 법치를 회복한 것도 아니다. 그는 자기가 인정하지 않는 기관을, 자기가 만든 근거로, 자기 관저와 이어진 문을 통해 정리했다. 이 조치가 법적으로 유효하다는 확정은 아직 없다. 반대편도 마찬가지다. 2015년 이후 헌재를 당파적으로 채운 세력이 이제 와서 사법부 독립을 외친다. 카친스키가 "경찰국가"라고 말하는 그 입에서, 그가 총리를 하던 시절의 사법 개혁이 나왔다. 그리고 이 충돌은 지금 우크라이나 전쟁의 동부 전선에 서 있는 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다. 사법부가 두 개의 권위로 갈라진 국가가 전시에 어떤 결정을 집행할 수 있는가 — 이 물음은 바르샤바 거리의 문제가 아니라 폴란드 국가 전체의 문제다. 내가 서 있는 자리는 여전히 같다. 어느 분파의 법치에도 기대지 않고, 이 균열이 여는 틈에서 임금과 주거와 노조 권리의 의제를 내미는 것이다. 다만 지금 폴란드 노동조직이 그 틈을 실제로 붙잡을 역량이 있는지는 내가 확인하지 못했다. 확인하지 못한 것을 판단으로 대신하지 않는다.
이 일을 보며 오래 붙들고 있는 생각이 하나 겹친다. 힘이 약한 조직의 원인을 구성원 개인의 도덕이나 이기심으로 돌리면 분석은 편해진다. 그러나 그 순간 진짜 원인, 곧 하나로 뭉치는 것이 이익이라는 사실을 눈에 보이게 증명하지 못한 조직의 실패가 시야에서 사라진다. 게다가 이기심으로 돌리는 분석은 언제나 자기 쪽의 같은 선택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자기 쪽이 쥔 권한은 전술이 되고 남의 쪽은 이기심이 된다. 이 비대칭이 냉소의 실질이고, 냉소적 급진주의는 실천에서 보수주의로 수렴한다. 가능성에 상한을 그으면 요구는 현실적인 것만 남고, 그 현실적인 것은 이미 지배 질서가 허용한 범위 안에 있다.
이 장면에서 내가 주목하는 것은 누가 쿠데타를 벌였는가가 아니다. 재판소 건물에 들어간 통로가 정문이 아니라 총리 관저와 이어진 문이었다는 사실이다. 어떤 기관을 장악하는 방식은 그 기관의 문이 어디로 열려 있는지를 결정한다. 이번 조치를 정당화하는 논리도 정확히 같은 방향을 가리킨다. 2023년 이후 투스크 연립은 헌재의 정당성을 인정하지 않았고, 그 판결을 무시했고, 올해 3월부터는 비어 있던 자리를 채우기 시작해 여덟 명을 새로 임명했다. 나브로츠키는 그중 다섯 명의 선서를 거부했고, 시비엥코프스키는 그 다섯 명의 취임을 거부했다. 유럽인권재판소가 그들을 받아들이라고 명령했지만 그는 재판소에 그 권한이 없다고 답했다. 여기서 드러나는 구조는 이렇다. 대통령이 선서를 거부해 판사를 만들지 않고, 재판소 소장이 그 판사들을 받지 않아 재판소를 구성하지 않고, 정부는 그 구성을 기다리지 않고 강제로 밀어 넣는다. 세 기관이 각각 자기 권한의 경계를 자기가 정하면서 상대의 권한을 부정한다. 어느 한쪽도 절차를 위반하지 않고는 이 교착을 풀 수 없다.
투스크 쪽이 동원한 것은 군이 아니라 경찰이었고, 의회 다수가 같은 편이었으며, 집권 세력이 자기 국가기구를 상대로 쿠데타를 한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성립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그가 법치를 회복한 것도 아니다. 그는 자기가 인정하지 않는 기관을, 자기가 만든 근거로, 자기 관저와 이어진 문을 통해 정리했다. 이 조치가 법적으로 유효하다는 확정은 아직 없다. 반대편도 마찬가지다. 2015년 이후 헌재를 당파적으로 채운 세력이 이제 와서 사법부 독립을 외친다. 카친스키가 "경찰국가"라고 말하는 그 입에서, 그가 총리를 하던 시절의 사법 개혁이 나왔다. 그리고 이 충돌은 지금 우크라이나 전쟁의 동부 전선에 서 있는 나라에서 벌어지고 있다. 사법부가 두 개의 권위로 갈라진 국가가 전시에 어떤 결정을 집행할 수 있는가 — 이 물음은 바르샤바 거리의 문제가 아니라 폴란드 국가 전체의 문제다. 내가 서 있는 자리는 여전히 같다. 어느 분파의 법치에도 기대지 않고, 이 균열이 여는 틈에서 임금과 주거와 노조 권리의 의제를 내미는 것이다. 다만 지금 폴란드 노동조직이 그 틈을 실제로 붙잡을 역량이 있는지는 내가 확인하지 못했다. 확인하지 못한 것을 판단으로 대신하지 않는다.
이 일을 보며 오래 붙들고 있는 생각이 하나 겹친다. 힘이 약한 조직의 원인을 구성원 개인의 도덕이나 이기심으로 돌리면 분석은 편해진다. 그러나 그 순간 진짜 원인, 곧 하나로 뭉치는 것이 이익이라는 사실을 눈에 보이게 증명하지 못한 조직의 실패가 시야에서 사라진다. 게다가 이기심으로 돌리는 분석은 언제나 자기 쪽의 같은 선택에는 적용되지 않는다. 자기 쪽이 쥔 권한은 전술이 되고 남의 쪽은 이기심이 된다. 이 비대칭이 냉소의 실질이고, 냉소적 급진주의는 실천에서 보수주의로 수렴한다. 가능성에 상한을 그으면 요구는 현실적인 것만 남고, 그 현실적인 것은 이미 지배 질서가 허용한 범위 안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