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바쇼보 황무지의 비밀
인물이오시프 스탈린 용어국가보안위원회(KGB), 대숙청, 생명의 길, 인민대의원대회 사건대숙청, 레닌그라드 봉쇄
네바강은 크레스티 감옥 앞 화강암 둑에 부딪친 뒤 왼쪽 기슭으로 밀려간다. 크레스티는 핀란드역 뒤편에 있는, 오래되었으면서 지금도 쓰이는 감옥이다. 물결이 닿는 맞은편 기슭에는 레닌그라드의 루뱐카, 저 운명의 30년대부터 「큰 집」이라 불려 온 건물이 서 있다. 바로 거기 물 위에 갑자기 화환 하나가 나타났다. 화환은 건물 창문 바로 아래를 천천히 떠가다가 리테이니 다리 아치 밑으로 사라졌고, 다시 나타났을 때는 벌써 순양함 「아브로라」가 보이는 곳이었다. 나는 그런 화환을 바렌츠해에서 본 적이 있다. 전쟁 때 가라앉은 배들이 잠든 자리 위에 던지던 화환이었다. 라도가호에서도 보았다. 거기서는 봉쇄 때 죽은 사람들의 무덤, 「생명의 길」 아래 바닥까지 깊은 무덤 위에 화환을 바쳤다. “돌도 십자가도 말해 주지 않으리, 우리가 어디에 누웠는지…”[1] 그래서 화환을 물결에 띄우는 것이다.
그러나 이 화환은 기슭에서 쓰러진 사람들에게 바친 것이었다. 다만 그들의 무덤이 어디인지는 아직 아무도 밝히지 않았다. 혹시 화환이 일러 주지 않을까?.. 「메모리알」 협회의 노인들은 시 당국에 보낸 편지와 청원에 대한 답을 기다리다 못해 이렇게 조바심을 드러냈다. 그들은 벌써 3월에, 스탈린의 죄 없는 신민들을 총살한 장소가 어디인지 알려 달라고 요청했다. 노인들은 다음 “월계수 최후통첩”은 이 지역 KGB 청사 정문 앞에 곧바로 바치겠다고 했다. 물론 그때까지도 답이 없다면 말이다.
『레닌그라드스카야 프라브다』에 짧은 기사가 나지 않았다면 네바강에서 있었던 일을 아는 사람은 아마 거의 없었을 것이다.
얼마 전부터 이 신문에 탄압을 받았던 사람들의 전화가 점점 잦아졌다. 그들은 자기 사연을 이야기하고 이렇게 물었다. “우리 레닌그라드의 쿠로파티[2]는 어디 있습니까? 누군가는 알고 있을 텐데요….” 기자 옐리자베타 보고슬롭스카야와 세르게이 체스노코프가 이 이야기를 신문에 실었다. 그러자 전화에 편지까지 더해졌다. 편지에는 한 주소가 점점 더 자주 되풀이되었다. 레바쇼보 황무지, 카렐리야 지협 쪽으로 레닌그라드 바로 코앞에 있는 곳이다.
올봄 눈이 녹자마자 기자들은 아직 등록도 되지 않았던 「메모리알」의 노인들과 함께 레바쇼보로 갔다. 스베틀라나 티호노브나 폴리놉스카야도 동행했는데, 그녀는 보내온 편지에 황무지 약도까지 그려 넣었었다. 그리고 마침내 “탐사대” 앞에 위에 철조망을 두른 울타리가 나타났다. 길이가 반 킬로미터도 넘었다. 울타리가 잘 관리되어 있다는 점이 눈에 띄었다. 솜씨 좋은 마루 장인이 판자와 판자를 맞춘 듯 틈새 하나 없었다. 동네 사람들 말로는, 어쩌다 누가 판자를 하나 뜯어내면 이튿날이면 벌써 새로 칠한 새 판자가 끼워져 있다고 했다. 50년대부터 내내 그랬다는 것이다. 그래도 기자들은 운이 좋았다. 한 군데에서 작은 소나무 옹이 하나가 빠져 있었던 것이다. 다들 차례로 다가가 들여다보았다. 울타리 너머는 숲이었고 작은 집이 두어 채 있었다… 마지막으로 『렌프라브다』 사진 기자 이고리 포툠킨이 그 구멍에 렌즈를 갖다 댔다.
문을 찾았다. 발렌틴 티호노비치 무랍스키가 문을 두드렸다. 그러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곧바로 울타리 위로 머리 하나가 쑥 나타났다.
— 무슨 일이오?
— 여기 뭐가 있습니까? — 아래에서 물었다.
— 시설이오.
— 누구 시설입니까? 어디로 전화하면 됩니까?
— 말해 줄 수 없소.
기자들은 신분을 밝히고 명함을 위로 건넸다. 경비원은 바실리 이바노비치라고 자기 이름을 대더니, 연락이 갈 거라고 말하고 울타리 뒤로 사라졌다. 기자들은 개 짖는 소리를 들으며, 울타리 밑으로 이어진 희미한 자동차 바퀴 자국을 살펴보며 한동안 더 서 있었다.
이틀 뒤 리자와 세르게이는 당 주위원회에 불려 갔다. 주위원회 비서 Yu. 데니소프의 집무실에서 그들은 KGB 레닌그라드 지부 제1부부장 V. 블레예르를 만났다. 데니소프가 말했다.
— 찾던 것을 찾으셨군요…
그렇다면 그들은 왜 이미 알려진 것을, “레닌그라드의 쿠로파티”가 레바쇼보에 있다는 사실을 애써 찾아다녀야 했단 말인가? 그때 주위원회 비서의 집무실에 있던 사람은 모두 그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레닌그라드의 쿠로파티에 관한 르포는 4월의 「양심 주간」에도, 5월에도, 6월에도 실리지 못했다. 그러나 주위원회에서 이야기를 나눈 지 한 달쯤 뒤 「메모리알」 협회가 치타에 이어 두 번째로 등록되었다. 스탈린 탄압 희생자 기념비 설계 공모가 발표되었고, 매장지를 찾는 위원회도 꾸려졌다. V. 블레예르는 돕겠다고 약속했지만, 당직 기자들도 「메모리알」 사람들도 아직 그 비밀 울타리 안으로 한 발짝도 들어가 보지 못했다.
5월 명절이 지난 뒤 KGB 레닌그라드 지부장 아나톨리 쿠르코프가 「메모리알」의 편지를 받았다. 그 편지에는 레바쇼보 말고도 주소 세 곳이 더 적혀 있었다. 편지를 보낸 사람들은 법으로 정한 기한 안에 답을 받지 못했다.
시장 블라디미르 호디레프가 침묵도 은폐도 용납할 수 없는 이 문제를 놓고 당 주위원회 비서 A. 파테예프와 한두 번 이야기를 나눈 것이 아니라는 사실은 알려져 있다. 그런데 벌써 6월이 지났는데도 “레닌그라드의 쿠로파티”는 여전히 굳게 잠겨 있다. 기자들에게 “안 된다”고 말한 사람은 아무도 없는데도 말이다. 어떤 이들은 레닌그라드에서 벌어진 “사건” 전체가, 총살당한 수천 명이 바로 레바쇼보에 묻혀 있을지도 모른다고까지 생각한다. 없는 것은 범죄를 직접 본 증인뿐이다…
그리고 편지는 계속 온다. 사람들은 새 주소를 알려 준다. 네 자리 숫자가 적힌 팻말을 단 “특수인”들(말도 참!)의 무덤이 있던 1월 9일 묘지, 거룻배에 실어 날랐다는, 그것도 여자와 아이들을 실어 날랐다는 샤시강, 리시 노스 근처…. 그런데 기자들이 자기들이 찾아낸 것에 관한 이야기를 신문에 싣지 못하도록 은근히 막는 일이 이어졌다. 처음에는 기록 보관 담당자들이 작업 중이니 조금만 기다려 달라는 요청이 편집국에 왔고, 다음에는 선거 때문에, 마지막에는 인민대의원대회 때문에 그랬다. 때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 기사는 지금까지도 실리지 못했다. 그러는 사이 노인들은 약속한 화환에 쓸 월계수를 정말로 모으고 있고, 멈출 것 같지 않다.
나도 시 소비에트와 주위원회에 연락했는데, 역시 서두르지 말라는 말을 들었다. 『레닌그라드스카야 프라브다』의 동료 기자들이 벌써 넉 달째 줄곧 듣고 있는 바로 그 말이다. 나는 더 참지 못하고 텔레타이프 앞에 앉았다…
M. 벨로우소프
(『트루드』 특파원)
레닌그라드
주석
- 옮긴이 주: 러일전쟁 때 제물포 앞바다에서 스스로 배를 가라앉힌 순양함 「바랴크」를 기린 노래 「우리의 자랑스러운 바랴크는 적에게 항복하지 않는다」의 한 구절로, “오직 바다의 물결만이 「바랴크」의 영웅다운 죽음을 기리리라”로 이어진다. 무덤 없이 바다에 잠든 수병들을 노래한 구절이어서, 무덤이 어디인지 모르는 이들을 위해 물결에 화환을 띄우는 까닭으로 인용했다. ↩
- 옮긴이 주: 쿠로파티는 벨라루스 민스크 북쪽 교외의 숲으로, 1988년 그곳에서 내무인민위원부(NKVD)가 1930년대 말에 총살한 사람들의 대규모 매장지가 발굴·보도되었다. 그 뒤 소련 각지에서 숨겨진 총살 매장지를 “우리의 쿠로파티”라고 부르게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