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8년 8월 30일, 레닌이 총격을 당해 크렘린으로 이송되자 비노쿠로프가 응급처치를 했다. 의대를 나온 혁명가가 6년 후 소련 사법부의 정점에 오를 줄은 아무도 몰랐다.
의학을 공부한 볼셰비키 법률가로, 1924년부터 1938년까지 소련 최고재판소 초대 의장으로서 소비에트 사법 체계의 기틀을 세웠다. 1903년 볼셰비키에 합류한 혁명 1세대로, 1893년 모스크바 사회민주주의 조직을 공동 창립하고 1917년 10월 페트로그라드 시두마의 첫 볼셰비키 의장을 지냈다. 1918년 레닌 피격 직후 응급처치를 한 의사였으며, 1918–1921년 러시아 사회보장인민위원으로 복지 행정의 초석을 놓았다. 최고재판소 의장 재임기간 내내 비신스키·크릴렌코와 사법 통제권을 놓고 경쟁했고, 법의 규칙성을 중시했으나 대숙청에 제도적으로 연루되었다. 1938년 해임 후 보건인민위원부 위생교육 부서로 밀려났고, 1944년 자연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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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3–1902모스크바·예카테리노슬라프 사회민주주의 조직 공동 창립; 체포·독방·유배
1903–1917볼셰비키 당원; 예카테리노슬라프·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당 활동, 「보험문제」지 편집
「나는 결코 무른 사람이 아니다. 다른 방법이 없다면 내 손으로 모든 반혁명분자를 쏘아 죽이고도 마음이 평온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사형이 비효율적이기 때문에 반대한다」 — 페트로그라드 체카 동료들에게
체르카시 유대인 가정 출신. 키예프 대학 법학부 졸업 후 1898년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에 입당, 처음에는 멘셰비키로 활동했다. 1917년 8월 제6차 당대회에서 볼셰비키에 합류해 중앙위원이 되었고, 10월 무장봉기 당시 군사혁명당중앙에서 봉기를 지휘했다. 1918년 3월 페트로그라드 체카 초대 의장에 임명되었으나 인질 구금과 초법적 처형에 반대하며 모스크바보다 절제된 노선을 취했다. 1918년 8월 30일 암살당했으며, 같은 날 레닌 피격과 함께 적색 테러 공식 선포의 직접적 계기가 되었다.
범죄자는 '현재 위험한 사람이며, 격리하거나 교화하려고 시도해야 하지만, 결코 복수해서는 안 되는 사람이다.' — 1922년 형법 초안 작업 중
키예프 출신의 법률가로, 1904년 볼셰비키에 합류하여 모스크바 무장봉기와 육군 병사위원회에서 활동했다. 1918년부터 1928년까지 법무인민위원 겸 초대 검찰총장으로서 소비에트 형법·민법·가족법의 기초를 놓았고, 프롤레타리아 국가의 정치적 필요에 법을 종속시키는 '혁명적 합법성' 개념을 정식화했다. 1919~1920년에는 군사정보기관을 이끌었고, 말년에는 이탈리아 대사로 일했다.
인민재정위원이 된 첫날, 사무실로 소파를 끌어들여 '재정인민위원부'라고 써 붙이고 그 위에 누웠다. 레닌이 들어왔을 때 그는 잠들어 있었다.
폴란드 귀족 출신의 볼셰비키로, 19개 국어를 구사하고 은세기 문단에서 소설을 발표한 지식인이었다. 제르진스키 사후 1926년부터 1934년까지 OGPU 의장을 지내며 집단화, 초기 쇼 재판, 굴라그 체계 확대를 감독했다. 파리 망명 시절 교통사고 후유증과 심장병으로 대부분 병상에서 기관을 지휘했으며, 실무는 야고다에게 넘어갔다.
1926년 7월 20일, 연합반대파를 격렬히 비판하는 두 시간의 중앙위원회 연설을 마친 직후 심장마비로 쓰러졌다. 육신은 이미 병들어 있었지만 마지막까지 연단을 떠나지 않았다.
차르의 감옥과 유형지에서 11년을 보낸 폴란드 귀족 가문 출신 혁명가. 1917년 12월 체카를 창설해 적색 테러를 집행했고, 요원들에게 「깨끗한 손, 차가운 머리, 뜨거운 심장」을 요구했다. 1926년 중앙위원회에서 격렬한 연설을 마친 직후 심장마비로 죽었다. 그가 만든 기관은 이름을 바꿔 가며 그보다 오래 살았다.
니콜라이에게 말했다. 노동자 대표 소비에트가 당신을 사살하기로 결정했다고. 그가 "뭐라고?" 하며 알렉세이를 돌아보는 순간, 나는 그를 쏘아 즉사시켰다.
톰스크 현의 유대인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나 시계공이 되었고, 1905년 볼셰비키에 입당했다. 1918년 7월 이파티예프 하우스 사령관으로서 니콜라이 2세와 로마노프 일가의 처형을 직접 지휘하고 차르를 자신의 마우저 권총으로 사살했으며, 시신의 은닉과 훼손까지 진두지휘했다. 내전 후 예카테린부르크 현 체카 의장과 모스크바 구역 체카 책임자를 역임했고, 1921년부터 국가귀금속보관소(Gokhran) 금 부서장으로 일하며 부패 척결에서 신망을 얻었다. 말년에는 모스크바 폴리테크닉 박물관장을 지냈으며, 대숙청 와중에 딸 리마가 트로츠키주의자로 체포된 직후인 1938년 위궤양 천공으로 사망했다.
“저는 결백하게 고통받고 있습니다. 믿어주십시오. 시간이 증명할 것입니다.” — 1939년 레포르토보 감옥에서 안드레예프에게 보낸 편지. 1956년 흐루쇼프가 제20차 당대회 비밀연설에서 이 편지를 낭독했다.
볼셰비키 군사조직에서 활동하다 1918년 9월 체카 군사부장, 이후 특별부장이 되어 북부 전선의 적색테러를 총괄했다. 아르한겔스크·볼로그다에서 수천 명을 처형하고, 홀모고리 절멸수용소를 세웠으며, 솔로베츠키 수도원을 폐쇄해 초기 강제노동수용소로 전환했다. 그의 아내 올가의 자매들은 니콜라이 포드보이스키와 결혼했고 아르투르 아르투조프의 어머니였다. 1921년 건강 악화로 체카를 떠난 뒤 경제·보건·스포르틴테른 등 변방 직책을 전전하다 1939년 체포되었고, 1941년 7월 무죄 판결을 받았으나 베리야의 지시로 석방되지 못한 채 사라토프에서 총살되었다.
경찰이 압수한 그의 수학 공책을 가리키며 "이게 암호라면 풀어 보시지"라고 조롱했다. 차르 비밀경찰은 끝내 해독하지 못했다.
구 러시아 제국 말기 지하혁명운동에서 암호 작성술을 익힌 올드 볼셰비키. 페트로그라드 체카 의장과 동부·투르케스탄 전선 특별부장을 거쳐 1921년 체카 산하 스페츠오트델(Спецотдел)을 직접 기획·창설하여 1937년까지 이끌며 소련의 통합 암호·도청·무선정보 체계를 구축했다. 국가기밀 보호, 외교공관 도청 및 암호 해독, 무선 펠렌게이션, 최초의 정부보안통신망을 한 부서 아래 통합한 공로로 소련 신호정보의 창시자로 평가된다. 한편 솔로프키 특수수용소(SLON)의 큐레이터로서 굴라그 체계 초기 형성에도 관여했으며, 밀교와 티베트 탐사에 경도된 이력이 후일 기소의 빌미가 되었다.
1938년 7월 28일, 군사재판에서 운쉴리흐트는 고문으로 받아낸 자백을 전면 번복했다. "나는 '폴란드 군사조직'에 가담한 적이 없다. 모든 진술은 장기간의 심문을 견딜 수 없어서 한 것이다." 재판은 20분 만에 끝났고, 사형이 선고되었다.
폴란드계 유대인 출신으로 바르샤바에서 전기 기술을 공부하고 1900년 SDKPiL에 입당했다. 10월 혁명 당일 군사혁명위원회 위원으로 봉기를 지휘했고 제헌의회 의원이 되었다. 1921년 체카·GPU 부의장으로 보안 기관의 초기 체계를 세웠고 1922년 '철학의 배' 지식인 추방을 주도했다. 혁명군사평의회 부의장, 고스플란 부의장, 민간항공총국장을 지내며 안보·국방·산업의 제도적 기반을 닦았다. 1937년 '폴란드 작전'으로 체포되어 법정에서 자백을 번복했으나 사형을 선고받고 1938년 총살, 1956년 복권.
1918년 7월 좌파 SR 봉기 당시, 벨렌키는 제르진스키와 함께 반란군에게 체포되었다 — 체카 의장과 그의 경호 책임자가 나란히 포로가 된 순간이었다.
벨라루스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나 1902년 볼셰비키에 입당했으며, 1904년 프랑스로 망명해 파리에서 구두장이로 일하다 롱쥐모 당학교에서 레닌을 처음 만났다. 1919년부터 1924년까지 레닌의 개인 경호 책임자로, 체카 특별부서를 이끌며 소비에트 지도부 경호 체계의 기초를 세웠다. 이후 OGPU·NKVD 특별전권위원으로서 간부 인사를 담당했으나, 1938년 체포되어 1941년 숙청의 연쇄 속에서 총살되었다.
베를린에서 중요한 요원과 접선하기 위해 역사학 교수로 위장했을 때, 단벌 신사 트릴리세르에겐 양복이 하나뿐이었다. 새 옷을 급히 맞추고 넥타이를 맨 그날이 그의 진짜 '출장'이었다.
아스트라한의 가난한 구두장이 집안에서 태어나 18세에 사회민주노동당에 입당한 직업혁명가. 1905년 카잔과 페테르부르크에서 볼셰비키 전투조직을 이끌었고, 스베아보르크 봉기를 조직했으며, 5년간 슐리셀부르크 감옥에서 카토르가를 보냈다. 1922년부터 1929년까지 GPU·OGPU 해외부(INO) 부장으로서 소비에트 대외정보망의 토대를 구축했고, 1926년 OGPU 부의장까지 올랐다. 1938년 체포되어 1940년 총살당했고, 1956년 사후 복권되었다.
솔제니친이 기록한 프렌켈의 공식: "수감자에게서 처음 3개월 안에 모든 것을 취하라 — 그 이후로는 필요 없다."
콘스탄티노플 태생의 유대계 상인으로, 오데사에서 '흑해의 목재왕'이라 불리던 밀수업자였다. 1924년 솔로프키 죄수로 수용된 후 노동량에 따라 식량을 차등 배급하는 '식량 기준제'를 제안해 1년 만에 수용소 행정가로 발탁되었다. 이후 백해-발트 운하, BAM, 철도건설총국을 이끌며 굴라그 강제노동 체계의 실질적 설계자가 되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 당시 볼가 록카다 철도를 6개월 만에 완공해 전황에 기여했으며, 레닌훈장 3회를 받고 중장으로 퇴역해 모스크바에서 병사했다.
“크리스털 같은 청렴함과 당에 대한 헌신… 타고난 부드러움이 혁명의 이익이 요구하는 곳에서는 무자비함과 공존했다.” — 동료 체키스트들의 증언, 1926년
스몰렌스크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모스크바 방직공장 노동자로 혁명운동에 투신한 볼셰비키. 1917년 12월 체카 창설 멤버로 합류해 제르진스키의 비서를 맡았고, 1919년부터 1921년까지 체카 제1부의장 겸 특별재판소장으로서 좌파SR 반란 진압, '전술중앙' 재판, 크론슈타트 봉기 진압을 직접 지휘했다. 내전기 내내 제르진스키·페테르스·라치스와 함께 '체카의 불변 지도핵심 4인'으로 불렸다. 1922년부터 1925년까지 당 중앙위원회 업무관리자로 스탈린의 기구 장악을 보좌했으며, 말년에는 사회보장 부인민위원을 지냈다.
1921년 초대 이녜 부장으로 취임한 모길렙스키에게 주어진 것은 겨우 몇 명의 요원과 모스크바의 허름한 사무실이 전부였다. 그로부터 불과 8개월 후 소비에트 해외정보기관의 첫 거점망이 유럽과 중동에 뿌리를 내렸다.
파블로그라드의 유대인 상인 집안에서 태어나 18세에 사회민주노동당에 입당한 직업혁명가. 1904년 체포된 뒤 스위스로 망명해 제네바에서 레닌을 만났고, 그의 추천으로 볼셰비키 분파에 합류했다. 1919년 전연방비상위원회(체카)에 배치되어 모스크바 체카와 특별부에서 활동했으며, 1921년 8월 GPU 해외부(INO)의 초대 부장으로 임명되어 소비에트 대외정보기관의 기초 조직을 구축했다. 1922년 자캅카스 GPU 전권대표 겸 의장으로 전임되어 튀르키예·이란 방면 첩보망을 지휘하고 1924년 그루지야 8월봉기 진압에 참여해 적기훈장을 받았다. 1925년 3월 트빌리시 근방에서 발생한 의문의 항공기 폭발 사고로 먀스니코프, 아타르베코프와 함께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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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2파블로그라드 RSDLP 조직 입당
1904체포, 이후 스위스 망명 — 제네바에서 레닌과 만남
1906–1916러시아 귀국 후 예카테리노슬라프 선전활동, 대학 수학, 군 복무
1917민스크 RSDLP 위원, 4월 당 대회 대의원, 10월 혁명 참가
1917–1919이바노보-보즈네센스크·모스크바·키예프 사법기관, 제12군 혁명재판소
1919–1920모스크바 체카, 좌파 SR 음모 적발; GPU 특별부 전권대표
1921–1922GPU 해외부(INO) 부장 — 소비에트 대외정보기관 초대 책임자
1922–1925자캅카스 GPU 전권대표 겸 의장 — 튀르키예·이란 첩보, 1924년 8월봉기 진압
“그는 사형 영장에 서명할 때마다 육체적 고통을 느낀다고 말했다. 나는 그것이 사실이라고 믿는다. 그의 성격에는 감상적인 면이 강했지만, 볼셰비즘과 자본주의의 충돌에 관해서는 광신자였고 무자비한 의무감으로 목표를 추구했다.” — 영국 외교관 로버트 브루스 록하트, 1918년 회고
라트비아 출신 볼셰비키 혁명가이자 체카의 핵심 설계자. 1904년 라트비아 사회민주노동당에 입당, 1905년 혁명 참여 후 런던 망명. 1917년 페트로그라드 군사혁명위원회 위원으로 10월 봉기를 준비했고, 혁명 후 체카 부의장으로 보안기관의 초석을 놓았다. 1918년 좌파SR 반란 당시 체카 권한대행, 이후 GPU·OGPU 동부국장으로 중앙아시아 바스마치 소탕을 지휘했다. 1937년 체포되어 1938년 총살, 1956년 복권.
부하린의 미망인은 회고했다: '청렴하고 의지가 강한 아쿨로프가 OGPU의 질서를 바로잡기 시작했지만 곧 환영받지 못하는 사람이 되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빈민가 출신으로 1907년 볼셰비키에 입당한 이반 아쿨로프는 지하운동, 내전기 전선위원회, 우랄·시베리아·크림·우크라이나의 당 조직 책임자를 거친 직업혁명가였다. 1933년 소련 검찰청이 신설되자 초대 검찰총장에 임명되어 사회주의 적법성이라는 새 제도의 틀을 구축했으며, 국가보안기구와의 긴장 속에서 검찰의 독자적 영역을 개척했다. 그러나 키로프 암살 이후 긴급법 제정에 연루되었고, 이윽고 자신이 구축에 참여한 탄압 기구에 희생되어 1937년 처형되었다.
「우리는 부르주아 계급 자체를 섬멸한다. 첫 번째 질문은 피의자가 어느 계급 출신이며 어떤 양육과 직업을 가졌느냐다. 그것이 피의자의 운명을 결정한다」 — 『크라스니 테로르』, 1918년 11월 1일
라트비아 소작농의 아들로 1905년 라트비아 사회민주당에 가입해 지하 선전 활동을 벌였다. 1917년 페트로그라드 군사혁명위원으로 10월 봉기에 참여했고, 1918년 5월 체카 간부위원으로 들어가 제르진스키 대리와 반혁명투쟁부장을 맡았다. 1918년 『크라스니 테로르』에 「우리는 부르주아 계급 자체를 섬멸한다」는 논설을 발표해 계급 기반 적색 테러를 이론화했으며, 전우크라이나 체카 의장으로 내전기 보안기구를 지휘했다. 1922년 이후 경제·교육 행정으로 전환했으나 1937년 체포되어 1938년 총살, 1956년 복권되었다.
솔제니친은 골랴코프가 "톨스토이, 코롤렌코, 체호프의 작품을 알고 있었다"고 적었다. 모든 사형 선고를 승인했던 재판소장이 마지막으로 남긴 책은 《문학 속의 재판과 법》이었다.
농민 출신으로 1차대전에 참전한 후 1918년 볼셰비키에 입당해 남북전쟁기 군사재판소장을 거쳐 1938년 소련 최고재판소장에 올랐다. 대숙청과 전쟁기를 관통하는 10년간 소련 사법체계를 총괄했으며, 모든 사형 선고를 승인한 정치국 비밀위원회 위원으로서 숙청의 사법적 형식화를 책임졌다. 한편 전연방 법률과학연구소장으로 70여 편의 학술 저작을 남겼고, 기록에 따르면 '합법성' 국면에서는 최대한 많은 유죄판결자를 복권시키려 노력했다.
1932년 벨로모르 운하 현장을 찾은 미코얀에게 코간이 물었다. "'수감자'는 모욕적이고 '라게르니크'는 무미건조합니다. 그래서 생각해낸 말이 '카날로아르메예츠(운하군인)'입니다." 미코얀이 동의했고, 이 말에서 약칭 '제카(з/к)'가 탄생했다.
시베리아 유대 상인 집안 출신의 아나코-코뮤니스트로, 1908년 무장강도로 사형 선고를 받고 복역했다. 1918년 볼셰비키에 합류, 체카와 국경경비대를 거쳐 1930년 신설된 굴라크의 초대 수장이 되어 소비에트 강제노동 체계의 제도화를 이끌었다. 1931년부터 백해-발트 운하 건설을 지휘, 약 17만 명의 수용자를 동원해 2년 만에 227km 수로를 완공했으나 수만 명이 사망했다. 야고다 계열로 분류돼 1938년 체포, 1939년 총살됐으나 1956년 복권됐다.
사형을 선고받은 에스토니아 변호사에게 울리히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 "자네 직업이 드디어 쓸모 있게 됐군!"
소련 최고재판소 군사합의부 의장(1926–1948)으로서 스탈린 시대 대숙청의 사법적 얼굴이었다. 라트비아 리가 출신으로, 독일계 발트인 혁명가 아버지와 러시아 귀족 출신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리가 공과대학을 졸업했다. 1910년 볼셰비키에 입당했고, 1918년 체카에서 경력을 시작해 1926년 군사합의부 의장에 올랐다. 지노비예프, 카메네프, 부하린, 투하쳅스키 등 구당 지도부에 대한 모스크바 쇼 재판(1936–1938)을 주재했고, 2년간 3만 명 이상의 사형 선고를 내린 기관을 지휘했다. 전후에는 블라소프, 크라스노프 등 나치 협력자 재판과 폴란드 지하국가 지도부 재판을 주재했다. 1948년 해임된 뒤 1951년 뇌졸중으로 사망했다.
1926년 9월 26일, 레닌그라드 OGPU 청사 집무실에서 18세의 하리코프 청년 아나톨리 트루바가 권총을 난사했다. 메싱은 책상 아래로 몸을 피해 살아남았고, 트루바는 곧 총살당했다.
바르샤바의 유대인 음악가 집안에서 태어나 1908년 폴란드 사회민주당에 입당, 펠릭스 제르진스키와 유제프 운쉴리히트의 신임을 얻었다. 모스크바 체카 위원장(1921)과 페트로그라드·레닌그라드 체카-OGPU 수장(1921–1929)을 거쳐 1929년 OGPU 제2부의장 겸 해외부(INO) 부장으로 승진, 미하일 트릴리세르와 아르투르 아르투조프 사이 2년간 소련 대외첩보를 지휘했다. 겐리흐 야고다가 조작한 '봄'(Весна) 사건에 반대했다가 1931년 해임되어 대외무역으로 밀려났고, 1937년 폴란드 간첩 혐의로 총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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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폴란드 사회민주당(SDKPiL) 입당, 바르샤바 요새 투옥 후 벨기에 유형
1913–1917러시아 제국군 징집, 투르케스탄·카프카스 전선 복무, 연대병사위원회 위원
1917–1918소콜니키 집행위원회 서기, 소콜니키 구역 체카 위원장
1918–1920모스크바 체카 비밀작전부장 → 체카 콜레기야 위원 → 모스크바 체카 부위원장
1921.1–1921.11모스크바 체카 위원장
1921–1929페트로그라드·레닌그라드 체카-GPU-OGPU 수장, 페트로그라드 군관구 GPU 부대 사령관 겸임
1926집무실 피격 암살미수, 적기훈장 수훈
1929–1931OGPU 제2부의장 겸 해외부(INO) 부장
1930–1934전연방 공산당 중앙통제위원회 위원
1931'봄'(Весна) 사건 조작에 반대, OGPU 해임 후 대외무역 인민위원부로 전출
스타솁스키는 재무장관 네그린에게 모스크바에 '금 당좌계정'을 열자고 제안했고, 그 계정으로 무기와 원자재를 살 수 있다고 설득했다.
SDKPiL 출신의 소련 정보장교이자 무역 관료. 베를린에서 합동 레지덴투라를 지휘한 초기 군사정보의 핵심 인물로, 이후 토르그신 이사장과 대외무역 간부를 거쳐 1936년 공화파 스페인의 무역대표로 파견되었다. 스페인에서는 무기 판매 협상과 「작전 X」의 재정적 측면을 관리했으며, 후안 네그린에게 스페인 은행의 금을 소련에 예치하자고 설득한 인물로 지목된다. 1937년 6월 소환되어 두 달 뒤 처형되었고, 1956년 복권되었다.
1937년 4월, 야고다는 NKVD 내무인민위원직에서 해임되었다. 스탈린이 그를 부른 자리에는 이미 예조프가 앉아 있었다. '당신은 4년이나 늦었다' — 스탈린의 말이다. 야고다가 재판정에서 남긴 마지막 말은 기록에 따라 엇갈린다. 한 버전에서는 총살 직전 '스탈린 동지 만세!'를 외쳤다고 하고, 다른 버전에서는 조용히 죽음을 맞았다고 한다. 어느 쪽이든, 굴라크의 설계자는 굴라크의 피고가 되었다.
OGPU와 NKVD의 실무 권력자로 백해-발트 운하 같은 강제노동 사업을 지휘했다. 굴라크 시스템의 설계자이자 초대 NKVD 내무인민위원으로 보안기관 통합을 주도했다. 키로프 사건 이후 첫 대숙청 국면을 열었지만, 스탈린은 '충분히 숙청하지 못한다'며 예조프로 교체. 결국 자신이 숙청의 피고가 되어 제3차 모스크바 재판 뒤 총살되었다.
「스베르들로프에게 알리시오: 전 가족이 가장과 같은 운명을 함께했다. 공식 발표는 대피 중 사망이다.」 ― 로마노프 일가 처형 후 레닌 비서에게 보낸 암호 전보, 1918년 7월 17일
우랄 지역에서 두각을 나타낸 볼셰비키로, 1918년 우랄소비에트 의장으로서 니콜라이 2세와 로마노프 일가의 처형 결정에 서명했다. 1923년부터 1927년까지 제르진스키의 후임으로 RSFSR 내무인민위원을 지내며 소비에트 경찰·교정 행정을 관장했다. 1923년 「46인 선언」에 서명하며 좌익반대파에 합류했고, 1927년 당에서 축출되었다가 1930년 복당했으나 대숙청 시기 체포되어 1938년 처형되었다.
스탈린은 1938년 이렇게 회고했다. "예브도키모프가 숄로호프를 체포하라며 두 번 찾아왔다. 전 백위군과 대화한다는 이유였다. 나는 말했다, 자네는 정치도 인생도 모른다고."
내전 세대의 체키스트로, 브란겔군 포로 대량 처형을 지휘하며 현장형 보안요원으로 두각을 드러냈다. 1923년 북캅카스 OGPU 전권대표로 부임해 지역 권력 기반을 쌓았고, 1928년 샤흐티 사건을 설계해 기술 전문가를 겨냥한 첫 대형 정치 재판의 자백 확보를 지휘했다. 1929년부터 OGPU 비밀작전총국장을 맡으며 야고다와 적대했고, 1934년 당직으로 옮겨 야고다 집권기 보안기관 바깥에 머물렀다. 예조프 취임 후 북캅카스 인맥을 중앙에 공급하며 재기했으나, 예조프와 함께 몰락해 1940년 총살, 1956년 복권되었다.
1921년 1월 19일 크림에 도착한 레덴스는 심페로폴·세바스토폴·케르치에 사형 선고권을 가진 독립 시(市)체카를 신설하고 자신의 직속으로 두었다. 이 기관들은 브란겔군 잔여 세력과 '계급적 적'에 대한 대량 숙청을 집행했다.
롬자 지방 출신 폴란드인으로 1918년 체카에 입문해 내전기 크림 체카 의장으로서 브란겔군 패잔병에 대한 대량 보복을 지휘했다. 스탈린의 두 번째 부인 나데즈다의 언니 안나 알릴루예바와 결혼해 스탈린의 처남이 되었다. 1933년부터 모스크바주 NKVD 관리국장을 맡아 수도권 보안을 총괄했고, 대숙청기에는 NKVD 명령 제00447호에 따른 모스크바주 트로이카 의장으로서 대량 사형 판결을 주재했으며 처형은 부토보와 코무나르카에서 집행됐다. 1938년 말 폴란드 간첩 혐의로 체포되어 1940년 2월 총살됐다.
프랑스 경찰 제복을 입은 그들은 거리에서 쿠테포프를 멈춰 세우고 심문을 구실로 차에 태웠다. 쿠테포프는 저항했고, 몸싸움 중 심장마비로 사망했다고 세레브랸스키가 내게 말했다. — 파벨 수도플라토프, 『특수임무』
민스크 유대인 가정 출신으로 1923년 OGPU에 영입되어 팔레스타인에 첫 소련 스파이망을 구축했고, 유럽 전역에서 200명 이상을 포섭했다. 1930년 파리에서 프랑스 경찰로 위장해 백군 지도자 쿠테포프 장군을 납치·살해했으며, 트로츠키 아들의 기록보관소 탈취와 스페인 공화파 군용기 밀반입을 지휘했다. NKVD 특수임무반(SGO) 책임자로 활약했으나 1938년 베리야에게 체포되어 아바쿠모프의 고문으로 거짓 자백하고 사형 선고를 받았다. 1941년 수도플라토프의 요청으로 사면되어 전시 정보전에 복귀했고, 1953년 베리야 사건에 연루되어 재체포된 후 부티르카 감옥에서 심문 중 사망했다. 1971년 복권.
재판 마지막 진술에서: "내가 수사에서 아주 많은 정직한 사람들을 무고히 비방했음을 참작해 주십시오... 저 자신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습니다. 제 운명은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라트비아 출신 볼셰비키이자 시베리아와 벨라루스를 거쳐 레닌그라드 NKVD 수장으로 올라선 대숙청의 집행자. 키로프 암살 수사와 '구시대 계급' 1만 1천여 명의 추방을 지휘했고, '벨라루스 민족중앙' 사건을 조작했으며, 라트비아인을 겨냥한 대규모 민족 작전을 조직했다. 1938년 초 예조프의 부내무인민위원 겸 모스크바 NKVD 수장으로 승진했지만 수개월 만에 자신이 속했던 기관에 체포되어 총살됐고, 사후에도 복권이 거부됐다.
1932년 2월 나가예바 만에 상륙해 툰드라에 마가단을 세운 베르진. 샬라모프는 이렇게 적었다: '콜리마 최초의 책임자 베르진은 가혹한 변경의 식민화와 동시에 수감자들의 '개조'와 격리 문제를 해결하려 했고,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
라트비아 빈농 가정에서 태어나 베를린 왕립미술학교에서 회화를 공부했으나, 제1차 세계대전에 라트비아 소총병으로 참전하며 볼셰비키 혁명에 합류했다. 1918년 체카의 지시로 영국 외교관 로크하트의 반소비에트 음모에 위장 접근해 공모자 체포를 이끌었고, 좌익사회혁명당 반란 진압에도 기여했다. OGPU 소속으로 비세르 화학공장을 수감자 노동으로 건설한 뒤, 1931년 달스트로이 초대 국장으로 콜리마 금광 개발과 마가단 건설을 주도했다. 임금·조기석방·가족동반을 허용하는 독특한 수용소 경영으로 식민화를 추진했으나, 대숙청이 절정이던 1937년 말 체포되어 이듬해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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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베를린 왕립미술학교 졸업, 라트비아로 귀국 후 징집
1915–17제4 비제메 라트비아 소총병 연대 소위, 게오르기 십자훈장 수훈
1917–18라트비아 소총병 사단 제1경포병대대 지휘관; 좌익SR 반란 진압, 로크하트 음모 적발
1918.11RKP(b) 입당
1919–20남부전선에서 데니킨 백군 격퇴, 라트비아 소총병 사단 보급참모
1921.02체카 특별부에서 근무 시작 (후 OGPU)
1926–31비세르 화학공장(비슐라크) 건설 책임자 — OGPU 수감자 노동으로 18개월 만에 완공
명령 제00447호를 준비하던 1937년 여름, 부하들에게 훈시한 속기록이 남아 있다. '제1차 작전의 상한선은 11,000명입니다... 12,000명을 잡아도 좋고, 13,000명도, 15,000명도 좋습니다. 내가 여러분을 그 숫자로 제한하지는 않습니다. 제1범주로 20,000명을 잡아도 됩니다.'
키예프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난 체키스트로, 본디 성은 코롤이며(문헌에는 미로노프코롤로도 쓴다) 북캅카스에서 예브도키모프 아래 경력을 쌓은 이른바 '북캅카스인' 그룹의 일원이자 프리놉스키의 최측근 조력자였다. 서시베리아 변경주 NKVD 국장으로서 1937년 여름 대량작전의 포문을 열었고, 검사 브라코프·당서기 에이헤와 함께 구성된 트로이카의 의장을 맡아 부하들에게 할당 숫자에 얽매이지 말고 잡아들이라고 훈시했다. 1937년 8월 몽골 주재 전권대표로 전임해 라마 승려 8천 명가량이 희생된 몽골 대숙청을 조직했으며, 이후 외무인민위원부 제2동방부장으로 있다가 1939년 1월 체포되어 1940년 1월 16일 스탈린에게 보내진 총살 명단에 올라 처형됐다.
1939년 7월 8일, 모스크바에서 츠할투보로 향하는 NKVD 경호 특별열차 안에서 주중 소련 전권대표 보프쿤-루가네츠를 망치로 살해하고 그의 아내를 교살했다. 시신은 산으로 옮겨져 교통사고로 위장되었다.
그루지야 체레텔리 공작 가문의 후손으로, 제정군 장교와 포로 생활을 거쳐 1921년 그루지야 체카에 들어갔다. 귀족 출신이었지만 베리야의 가장 신뢰받는 은밀 공작 요원이 되어 납치와 암살을 전담했다. 대숙청기 NKVD 특별 트로이카 위원으로 앉았고, 1939년부터 자캅카스 국경경비대를 지휘했다. 그해 7월 주중 소련 대사 부부를 열차 안에서 살해한 뒤 교통사고로 위장한 사건의 직접 실행자로 기록된다. 전쟁 중에는 그루지야 제1부내무인민위원을 지냈다. 베리야 몰락 후 1953년 체포되어 1955년 총살됐다.
1941년 10월 12일, 독일군이 모스크바 외곽에 도달한 날, 스탈린은 자루빈을 직접 불러 워싱턴에서의 유일한 임무를 하달했다: '미국이 독일과 단독 강화를 시도할지 여부를 알아내라.'
소련 국가보안 기관의 대표적 해외정보 장교로, 23년간 근무 중 13년을 불법 체류 요원으로 활동했다. 1933년부터 1937년까지 베를린 비합법 레지던트로 근무하며 게슈타포 내부의 핵심 정보원인 빌리 레만(암호명 '브라이텐바흐')을 운용, RSHA와 게슈타포의 구조·작전·군사 계획에 관한 정보를 입수해 모스크바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 1941년부터 1944년까지는 워싱턴 주재 NKVD 수석 레지던트로서 미국 내 원자력 스파이 활동을 총괄 지휘했으며, 소련의 핵무기 개발에 결정적 정보 기반을 제공했다. 귀국 후 1948년까지 대외정보 부국장을 역임하며 불법 정보망을 감독했고, 퇴역 후에도 KGB 훈련기관에서 후배 정보원들을 교육했다.
금속 노동자와 적군 정치위원을 거친 예조프는 1920년대 지방 당서기에서 중앙위원회 인사부서 책임자로 올라섰고, 1935년 당통제위원회 의장·중앙위원회 서기가 되었다. 1936년 NKVD 수장에 임명된 뒤 스탈린 지도부의 결정 아래 대규모 체포·처형 작전을 조직하고 확대해 대숙청의 핵심 집행자가 되었다. 1938년 해임되고 이듬해 체포되어 1940년 총살됐으며, 러시아 법원은 1998년 그의 복권을 거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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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2–34당 기구에서 간부 인사 담당으로 성장
1934–36키로프 사건 수사 감독
1936.9내무인민위원
1936–38대외 작전 지휘: 스페인 주재 NKVD를 관할하고 국외 「트로츠키주의자」 색출 작전을 확대
1938년 11월, 예조프가 NKVD를 잃은 지 며칠 만에 비서실장 샤피로가 체포되었다 — 대숙청의 모든 수치를 관리하던 사람이 이번에는 자기 상관을 겨눈 조서의 진술자가 되었다.
재무인민위원부와 소비에트통제위원회, 당 중앙위 기구를 거친 경제 관료 출신으로, 1937년 1월 예조프를 따라 NKVD에 들어가 비서실 부실장·실장과 제9특별부장을 지냈고, 1938년부터는 작전 기록·등록·통계를 총괄하는 제1특별부장을 맡았다. 대숙청의 문서와 수치가 그의 손을 거쳐 예조프의 책상에 올랐고, 그 공로로 적성훈장과 명예 체키스트 휘장을 받았다. 예조프 몰락 직후인 1938년 11월 13일 체포되어 옛 상관에게 불리한 진술을 남기고 1940년 2월 군사법정에서 총살형을 선고받아 처형되었으며, 1956년 복권되었다.
자신이 심문받는 자리에서 그는 인정했다. “나는 레포르토보에서 당의 적들을 직접 때려야 했지만, 맞는 자가 겪는 고통은 한 번도 이해하지 못했다.” 그 자리에서 그를 때린 것도 같은 기관이었다.
1895년 키예프현의 유대인 목수 집안에서 태어나 헤데르만 마치고 열세 살부터 일했다. 1920년 키예프 체카에 들어가 우크라이나에서 십사 년을 보냈고, 1937년 1월 모스크바 국가보안총국 특별부 부부장이 되었다. 그해 봄 붉은군대 ‘군사파시스트 음모’ 사건의 주임 심문관으로 투하쳅스키와 야키르, 우보레비치의 자백을 만들어냈다. 5월 25일 투하쳅스키의 첫 심문을 맡았고 그 조서에는 핏자국이 남았다. 1938년에는 아직 붙지 않은 에이헤의 갈비뼈를 이용해 그를 고문했다. 그해 9월 하바롭스크에서 체포되어 1940년 1월 26일 총살됐다. 복권되지 않았다.
베리야 체포 뒤 흐루쇼프에게 쓴 편지에서 그는 적었다. “어떻게 남의 저작에 자기 서명을 올릴 수 있는가. 표절도 아니고 그 이상이다.” 문학적 명예에 선을 그은 그 손은 폴란드인 이만여 명의 사형 명단에는 선을 긋지 않았다.
베리야 측근 가운데 가장 교육받은 사람이자 십 년간 그의 실무를 대신한 손이었다. 1921년 그루지야 체카에서 베리야를 만났고, 1938년 12월 NKVD의 이인자가 되었다. 1940년 3월 정치국이 폴란드인 포로 21,857명을 심리도 기소도 없이 처결할 트로이카를 지정했을 때 결정문 첫머리에 적힌 이름이 그였다. 트로이카는 피고를 부르지도, 기소장을 만들지도 않고 명단만 처리했다. 1943년 독일이 카틴 무덤을 발견하자 이를 독일 소행으로 돌릴 부르덴코 위원회의 예비조사를 지휘했다. 집행한 자가 부인까지 조직한 셈이다. 두 차례 국가보안인민위원을 지냈고, 브세볼로드 로크라는 필명으로 희곡을 썼다. 1953년 12월 베리야와 함께 총살됐고 복권되지 않았다.
뉘른베르크 재판을 앞두고 니키첸코가 말했다. "만약 판사가 공정해야 한다면, 그것은 불필요한 지연만 초래할 뿐입니다."
소련 최고재판소 부의장(1938–1949)이자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소 소련 측 판사(1945–1946)로, 스탈린 시대 사법 살육의 핵심 집행자였다. 1916년 볼셰비키에 입당하여 내전기 군사법정에서 경력을 시작했고, 1930년대에는 울리히 휘하의 군사합의부 부의장으로서 지노비예프·카메네프를 사형에 처한 재판을 비롯한 모스크바 쇼 재판을 주재했다. 런던 헌장의 세 명의 주요 기초자 중 한 명으로 국제군사재판의 법적 틀을 설계했으며, 뉘른베르크에서 샤흐트·폰 파펜·프리체의 무죄 판결에 유일한 반대의견을 제출했다. 1940년 당 통제위원회로부터 극동 지역 '컨베이어식' 재판의 절차적 위반으로 엄중 경고를 받았고, 1951년 퇴직 후 1967년 사망했다.
스페인 공화국의 금을 모스크바로 실어 보내고 POUM을 부순 NKVD 총고문, 그리고 스탈린에게서 달아난 망명자
1938년 7월, 안트베르펜에 정박한 소련 선박으로 오라는 전보를 받은 오를로프는 아내와 딸을 데리고 캐나다행 배에 올랐다. 그리고 예조프와 스탈린 앞으로 편지를 남겼다. 자신과 모스크바에 있는 노모를 건드리지 않는 한, 자신이 아는 것은 말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그는 15년 동안 침묵했다.
본명 레이바 라자레비치 펠트빈. 내전기 적군과 국경경비대를 거쳐 1926년부터 대외정보부(INO)에서 파리·베를린·빈·런던의 비합법 거점을 맡았고, 1936년 9월 스페인 공화국 내무부 파견 연락관으로 마드리드에 도착해 이듬해 스페인 NKVD 총책임자가 되었다. 카르타헤나에서 공화국 금 준비 510톤을 소련으로 실어 보낸 작전과, POUM을 반역 조직으로 몰아 서기장 안드레우 닌을 납치·살해한 작전이 그의 이름에 남았다. 1938년 7월 소환 명령이 곧 처형을 뜻한다고 판단해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달아났고, 스탈린이 죽은 뒤인 1953년 『스탈린 범죄의 비사』를 펴내 대숙청에 대한 내부자의 증언을 남겼다. 다만 자신을 장성급으로 소개하고 케임브리지 조직 포섭을 자기 공으로 돌린 진술들은 문서고가 열린 뒤 상당 부분 과장으로 평가되며, 그의 실제 계급은 국가보안소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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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5보브루이스크의 정통파 유대인 가정에서 레이바 라자레비치 펠트빈으로 출생
1916–1921모스크바 대학 법학 중퇴 후 제정 육군 징집, 이어 적군과 내전기 정보·유격 임무
1921–1924법학 복귀, 크릴렌코 아래 최고혁명재판소 근무
1924.05국가정치보안부(OGPU) 입직
1926–1930대외정보부(INO) 파리·베를린 파견, 통상대표부 위장 근무
1933–1935빈·코펜하겐·런던 비합법 거점 지휘 (영국에서는 윌리엄 골딘 명의)
1936.09스페인 공화국 내무부 파견 NKVD 연락관으로 마드리드 부임
1936.10카르타헤나에서 공화국 금 준비의 소련 이송 작전 수행, 레닌 훈장 수훈
1937스페인 NKVD 총책임자: POUM 탄압과 안드레우 닌 납치·살해 지휘, 유격전 훈련학교 운영
1917년 10월 25일,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 위원 블라고느라보프는 겨울궁전 포격을 지휘했다. 요새의 전시용 대포는 사격이 불가능해, 병사들이 무기고에서 3인치 야포를 손으로 끌어내 급히 배치했다.
차르 군대 장교 출신으로 1917년 볼셰비키에 합류했다. 10월 혁명 당시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 위원으로서 요새 포대의 겨울궁전 포격을 지휘하고 임시정부 각료들을 트루베츠코이 능보에 구금했다. 이후 체카·OGPU 수송국장으로 철도 보안과 도로 건설을 감독했으며, 1936년 국가보안 1급 위원이 되었다. 대숙청 속에 1937년 체포되어 이듬해 총살당했다.
베리야가 예조프를 대체하며 예조프 측근들을 차례로 체포할 때, 체르니셰프만은 자리에서 물러나지 않았다. 오히려 굴라그 국장을 겸임하라는 임무를 받고 2년간 수용소 체제 전체를 지휘했다.
1937년부터 1952년 사망까지 15년간 내무인민위원부 부인민위원을 지낸 국가보안 간부로, 예조프 휘하의 부인민위원 가운데 유일하게 숙청을 피한 인물이다. 1939년부터 1941년까지 굴라그 국장을 겸임하며 수용소 체제를 총괄했고, 전시에는 발트 3국 강제이주 작전의 실무를 지휘했다. 전후에는 원자력 프로젝트 건설을 감독하며 굴라그 노동력을 핵시설 공사에 동원하는 데 핵심 역할을 했다.
체포된 블라시크는 "나를 체포했다면, 곧 스탈린도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실제로 한 달 반 뒤 스탈린은 죽었다.
벨라루스 농민 출신으로, 1931년부터 1952년까지 25년간 스탈린의 개인 경호를 책임지며 소련 지도자의 신변 안전과 모든 별장·관저를 총괄했다. 나데즈다 알릴루예바 사후 스탈린의 자녀들을 사실상 양육했고, 경호 업무를 넘어 스탈린 가문의 집사 구실까지 했다. 중장까지 진급하고 레닌 훈장 3개와 쿠투조프 1급 훈장을 받았으나, 1952년 말 의사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실각했다. 1955년 유죄 판결로 계급과 훈장을 박탈당했으며, 사후 2000년이 되어서야 러시아 대법원에 의해 무죄가 확정되었다.
우크라이나 체카 방첩부에서 니콜라예프-주리드, 다긴 등과 함께 복무를 시작해 1923년 예브도키모프를 따라 북캅카스로 옮겨 간 '북캅카스파' 체키스트다. 1936년 여름 카루츠키의 후임으로 서시베리아 변경주 NKVD 국장이 되었고, 몇 달 뒤 모스크바 중앙 기구로 불려 올라가 국가보안총국 비밀정치부장과 방첩부장을 거쳐 내무 부인민위원까지 올랐다. 1937년 7월 2일 수훈자 명단에 이름을 올렸으나 며칠 뒤 권총 자살했으며, 나우모프는 이를 경력이 상승하던 때에 일어난 죽음으로 특기한다.
1938년 10월 체포된 뒤 그는 독일·폴란드·프랑스를 위해 간첩 활동을 했다고 「자백」했다. 2년 동안 그가 남들에게서 받아 내던 바로 그런 종류의 자백이었다.
코노토프의 우크라이나 상인 집안에서 태어나 키예프에서 김나지움을 마치고 법학부를 다니다 제정군 하급 장교로 복무했고, 1918년 적군에 들어갔다. 1919년부터 체카 군 방첩에서 일했으며 예브도키모프 아래에서 우크라이나와 북캅카스 보안기관을 거쳐 올라왔다. 1936년 말 모스크바로 옮겨 NKVD 작전부장이 되었고, 1937년부터 적군 탄압의 주무 부서인 특수부(제5부)와 방첩부를 차례로 이끌며 폴란드·독일·라트비아·조선인 민족 작전을 감독했다. 1938년 10월 체포되어 1940년 2월 예조프와 함께 사형을 선고받고 총살됐다. 2013년 러시아 대법원은 그를 복권 대상이 아니라고 판정했다.
파리 몽마르트르 대로 근처에서 생선가게 주인으로 위장해 소련의 유럽 불법 첩보망을 지휘하던 시절, 그의 가게는 백군 망명자들과 트로츠키주의자들에 대한 침투 작전의 거점이었다.
1936년부터 소련 대외정보국(INO NKVD) 부국장, 1938년 2월부터 6월까지 국장 대행을 지냈다. 4개 국어에 능통한 체카 출신으로, 대숙청 시기 NKVD의 가장 중대한 해외 공작들(파리에서 백군 장군 예브게니 밀레르 납치, 스위스에서 망명자 이그나티 레이스 암살, 로테르담에서 OUN 지도자 예브헨 코노발레츠 제거)을 직접 지휘했다. 생선가게 주인으로 위장해 파리 불법 거점을 운영했으며, NKVD 특수목적학교에서 후대 정보장교들을 양성했다.
예조프에게 라트비아인 500명 체포를 청했다가 "말도 안 돼, 1,500~2,000명은 체포하라, 그들은 모두 민족주의자다"라는 답을 받았다.
모스크바 노동자 출신으로, 적군 복무와 국가계획위원회 당비서를 거쳐 1927년 OGPU에 입문했다. 1937년 스몰렌스크 UNKVD 국장으로서 '라트비아 민족중심' 사건을 조작해 예조프에게 보고했고, 예조프의 "라트비아인 1,500~2,000명을 체포하라"는 지시를 받아내 라트비아 작전 전역을 촉발시켰다. 1938년 벨라루스 내무인민위원으로서 독일·폴란드·라트비아·리투아니아계 주민을 겨냥한 대량 체포와 즉결처형 체계를 도입해 수개월 만에 수천 명을 사살했으며, 1938년 12월 베리야의 NKVD 숙청으로 체포돼 1940년 1월 총살되고 복권되지 않았다.
1940년 7월, 리치코프는 검찰총장 판크라티예프와 함께 명령을 내렸다: 점심시간 후 20분 이상 지각하거나 종료 20분 전에 무단 퇴근한 노동자는 '무단결근'으로 형사 입건하고 최대 징역형에 처할 수 있다.
우랄 공장 노동자 출신으로 정규 고등교육 없이 법무인민위원까지 오른 유일한 인물이다. 대법원 군사합의부 위원으로 모스크바 쇼 재판에 참여했고 동부 지역의 '반혁명' 재판을 주재했다. 1938년 1월 법무인민위원이 되어 대숙청 말기, 전시 사법 행정, 전후 독일 전범 공개 재판까지 10년간 소련 사법을 총괄했다. 1940년 20분 이상 지각을 형사 처벌하는 노동 규율 명령을 공동 서명했다. 1948년 당 인사 부서와의 갈등으로 해임되었으나 군 검찰 부직을 거쳐 1955년 은퇴했다.
1937년 4월 30일, 피린이 연출한 모스크바-볼가 운하 개통 축제 — 깃발과 오케스트라, 죄수들이 그린 지도자 초상화로 빛났다. 한 달 뒤인 5월 28일 체포, 그해 8월 총살.
적군 정보장교 출신의 굴라크 수용소장. 1932년 백해-발트 운하 수용소 부소장을 거쳐 드미트라크(Dmitlag)를 이끌며 모스크바-볼가 운하 건설을 총괄했다. 죄수 노동을 '개조'라는 이름의 선전으로 포장해 캠프를 전시장으로 만들었고, 1934년 막심 고리키, 아베르바흐와 함께 찬양 문집 『벨로모르』를 공동 편집했다. 생산성이 낮은 죄수의 배급을 깎는 한편 '개조'를 설파한 모순적 인물. 야고다 측근으로 1937년 체포되어 총살됐다.
1939년 심문에서 프리놉스키는 이렇게 진술했다. "기회를 잡아 자콥스키가 슬루츠키의 얼굴에 클로로포름 마스크를 씌웠다. 그는 이삼 분 만에 잠들었고, 옆방에서 기다리던 알료힌이 오른팔 근육에 독을 주사했다. 슬루츠키는 즉시 사망했다. 몇 분 뒤 나는 위생과 당직 의사를 불렀고, 의사는 슬루츠키의 급사를 확인했다." 예조프의 지시는 그를 체포하지 말고 "소리 없이 제거하라"는 것이었다. 대외정보국장이 체포되었다는 소식이 해외의 비합법 요원들에게 닿으면 그들이 귀국을 거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숙청이 제 요원들에게 보이지 않도록 설계된 살해였다.
1935~1938년 소비에트 대외정보국장. 야고다 시대 국가보안총국 부서장 중 마지막 생존자로, 케임브리지 첩보망이 형성되던 시기 해외공작을 지휘했다. 1938년 2월 예조프 지시로 독살되었다.
옴스크주에 승인된 1급 한도는 1,000명이었다. 1937년 8월 15일 고르바치는 한도 증액을 청하는 암호전보를 예조프에게 보냈다. '8월 13일 현재 옴스크주에서 1급으로 5,444명이 체포되었고...'
예브도키모프가 1934년 국가정치국 안의 '자기 사람'으로 꼽은 북캅카스파 체키스트로, 오르조니키제 변경주 NKVD 부국장을 지냈다. 1937년 옴스크주 NKVD 국장으로서 상한 증액 암호전보를 예조프에게 보내 한도를 9천 명 늘렸고, 이어 미로노프의 뒤를 이어 서시베리아(노보시비르스크주) NKVD를 맡아 숙청과 대량작전을 함께 밀어붙인 지도자로 꼽힌다. 류시코프 망명 뒤인 1938년 여름 하바롭스크 변경주 NKVD 국장으로 파견되었으나 그해 11월 체포되어 이듬해 총살됐다.
1938년 12월 24일 저녁, 말렌코프는 베르만에게 '스탈린 동지께서 독일 간첩의 형제를 정부에 더 둘 수 없다'고 통보했다. 체카 요원들이 옛 상관을 '까마귀' 호송차에 태웠다.
1918년 스무 살에 체카에 들어가 시베리아·중앙아시아에서 부랴트-몽골 내무인민위원과 우즈베크 GPU 의장을 지냈다. 1932년부터 1937년까지 굴라크를 이끌며 초기 수장 중 최장수로 남았고, 수용소 체계를 교정노동 실험에서 소비에트 경제의 핵심 도구로 확장했다. 백해-발트 운하와 모스크바-볼가 운하를 죄수 노동으로 건설했으며, 강제노동을 '개조'(perekovka)라는 교리로 정당화했다. 1937년 체신인민위원으로 전출된 뒤 1938년 12월 말렌코프 집무실에서 체포돼 1939년 3월 총살됐다. 1957년 복권.
판결문은 그가 노보시비르스크 NKVD에서 ‘근거 없는 체포’와 수사자료 조작을 허용했다고 기록했다.
이반 말체프는 노동자 출신으로 혁명과 내전을 거쳐 국가보안기관의 지역 지휘관이 된 소련 관료였다. 그는 우랄과 시베리아, 북캅카스의 조직을 거치며 VChK·OGPU·NKVD가 지방 행정과 정치적 통제를 결합하는 과정을 대표했다. 1938년 노보시비르스크주 NKVD를 이끈 그는 특별 트로이카에 참여해 대테러의 집행 구조에 책임을 졌으며, 이후 체포되어 유죄 판결을 받고 복권되지 않았다.
1938년 봄 그의 사건을 정리한 결정문은 이렇게 썼다. '모든 범죄 행위는 내무인민위원부 국 기구에 침투하여, 국장 불라흐의 정치적 근시안과 무사안일 덕분에 튼튼한 둥지를 틀은 계급적 적들의 소행임이 밝혀졌다.'
북캅카스에서 잔뼈가 굵은 '북캅카스파' 체키스트로, 다긴이 고리키주로 옮겨 가자 오르조니키제 변경주 NKVD 제3부장에서 국장으로 올라섰다. 1937년 쿨라크 작전에서 예정된 기한보다 앞서 7월 29일에 작전을 개시해 프리놉스키의 격렬한 반응을 불렀고, 평균을 웃도는 숫자를 제안하며 상한을 훨씬 초과해 체포를 밀어붙였다. 지역 체키스트의 자의에 대한 불만이 모스크바에 닿으면서 1938년 3월 해임되고 4월 말 체포되었으며, 1940년 총살됐다.
1941년 6월 22일 새벽 4시, 리벤트로프가 데카노조프를 불러 대소 선전포고를 낭독했다. 데카노조프는 침착히 듣고 '히틀러와 스탈린이 직접 만났더라면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라고 답했다.
바쿠 출신의 그루지야인으로, 베리야의 최측근이자 NKVD 대외정보·방첩을 동시에 지휘하며 대숙청 후반기 숙정을 주도했다. 1940년 리투아니아 전권대표로 파견되어 한 달 만에 소비에트 병합을 연출했고, 베를린 대사로 부임해 1941년 6월 리벤트로프로부터 독일의 선전포고를 직접 받았다. 전후에는 라디오방송위원회 등 한직으로 밀려났다가 1953년 베리야 체포 직후 내무장관으로 잠시 복귀했으나, 곧 '베리야 일당'으로 함께 체포·처형되었다.
“오늘 침묵하는 자는 스탈린의 공범이 된다.” — 1937년 7월 17일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에 보낸 결별서
본명 나탄 마르코비치 포레츠키. 오스트리아-헝가리령 갈리치아의 유대계 가정에서 태어나 1919년 폴란드 공산주의 운동에 합류했고, 이후 ‘루트비히’와 ‘이그나티 레이스’라는 이름으로 서유럽에서 소련 군사정보·국가보안기관의 불법공작망을 운영했다. 1928년 적기훈장을 받았으나 모스크바 재판과 대숙청을 겪으며 스탈린 체제와 결별했다. 1937년 7월 당 중앙위원회에 보낸 공개서한에서 훈장을 반납하고 제4인터내셔널 지지를 선언했다. 같은 해 9월 4일 로잔 근교에서 오랜 지인 게르트루트 실트바흐에게 유인된 뒤, 세르게이 시피겔글라스가 지휘한 NKVD 암살조의 총격으로 살해되었다.
1936년 12월, 슬루츠키가 그에게 임박한 모스크바와 베를린의 협정에 대해 알렸다. '이번에는 상황이 심각합니다. 아마도 히틀러와의 협정 체결까지 남은 시간은 서너 달뿐일 것...' 크리비츠키의 회고는 나우모프가 1936~1937년의 물밑 정치를 재구성하는 주요 사료다.
갈리치아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나 본명이 자무엘 긴즈베르크인 소련 군사정보 요원으로, 1930년대에 헤이그를 거점으로 서유럽 비합법 정보망을 이끌었다. 1936년 12월 해외정보부장 슬루츠키에게서 모스크바와 베를린의 물밑 접촉을 들었고, 1937년 여름 파리에서 시피겔글라스와 투하쳅스키 사건의 본질을 논한 끝에, 동료 이그나츠 라이스가 암살되자 그해 가을 망명했다. 1939년 회고록 '나는 스탈린의 요원이었다'를 펴내고 미 의회에서 증언했으며, 1941년 2월 워싱턴의 호텔에서 총상 사체로 발견되었다. 자살로 판정되었으나 논란은 끝나지 않았다.
그는 1938년 4월 핀란드 측에 독일이 핀란드를 거쳐 레닌그라드를 공격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보리스 아르카디예비치 리브킨은 야르체프라는 이름으로 활동한 소련의 정보관이자 외교관이었다. 1938년 그는 핀란드에 대한 독일의 위협을 막는다는 명분 아래 비밀 협상을 시작했지만, 영토 교환 요구는 합의로 이어지지 않았다. 이 실패한 접촉은 협상과 안보 불신이 얽힌 채 겨울전쟁으로 향하던 소련·핀란드 관계의 첫 단계였다.
1949년 8월 29일 새벽, 카자흐 초원. 베리야는 참호에서 카운트다운을 지켜보았다. 섬광이 초원을 삼키고 버섯구름이 솟아오르자 그는 쿠르차토프에게 달려가 껴안았다. 몇 분 후 "미국인들이 사기꾼이라는 걸 증명해야 한다"며 서방 스파이의 방사능 낙진 샘플 채취 차단 작전을 직접 지휘했다.
스탈린의 마지막 비밀경찰 총수이자 원폭 계획의 감독자 — 그리고 스탈린이 죽자 가장 급진적인 개혁안을 쏟아 낸 사람. 예조프의 대숙청을 마무리 짓고 NKVD를 장악했으며, 1944년 체첸·잉구시 등 민족 강제이주를 집행했다. 전후에는 특별위원회 의장으로 소련 핵무기 개발을 총괄해 1949년 첫 핵실험을 성공시켰다. 스탈린 사후 제1부총리로서 대대적 사면, 동서독 통일 중립화 제안, 민족 간부 우대 등 급진 개혁안을 쏟아냈다. 동료들이 두려워한 것은 그의 개혁이 아니라 그의 서류함이었다. 1953년 6월 정치국 회의 도중 주코프 원수의 장교들에게 체포되어 12월 총살 — 소련 최고 권력투쟁의 마지막 처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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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31캅카스 체카·GPU
1931–38그루지야 당 제1서기
1938–45내무인민위원, 예조프 숙청 마무리와 굴라크 관리, 1944년 민족 강제이주 집행
1941년 10월, 밀시테인은 베리야에게 보낸 보고서에서 전쟁 발발 이후 특별부가 지연·탈주 군인 65만 7천여 명을 억류했고 그중 1만 201명을 총살했으며 "3,321명은 부대 앞에서 총살"되었다고 적었다.
베리야의 측근으로 그루지야에서 당 경력을 쌓은 뒤, 1939년 NKVD 수송총국장에 올라 스탈린 시대 강제이주의 철도 기구를 운영했다. 그의 총국은 폴란드인, 카라차이인, 칼미크인, 체첸인, 잉구시인 등 전체 민족 집단의 추방 열차를 편성하고 움직였다. 이 공로로 전투공로훈장인 수보로프 훈장 2급을 받았으나 소비에트 국가는 1962년 이를 취소했다. 1953년 베리야의 체포 직후 함께 체포되어 별도 재판으로 1955년 총살됐다.
1951년 밍그렐리아 사건으로 체포된 라파바는 자신이 10년간 지휘했던 내부감옥에 갇혀 160일간 잠을 빼앗겼고, 얼음처럼 찬 독방에 수갑을 찬 채 벌거벗겨진 채 버려졌다 — 그가 수하들에게 지시했던 바로 그 고문 수법이었다.
밍그렐리아 출신으로 1920년대 체카에 들어가 1938년부터 10년간 그루지야 NKVD와 국가보안부를 이끌며 대숙청 시기 공화국 보안기구의 핵심 책임자로 활약했다. 베리야의 측근으로서 전간기 그루지야 공안 체제를 구축했으나, 1951년 스탈린의 '밍그렐리아 사건'에 연루됐다가 스탈린 사후 풀려났고, 베리야 몰락 직후인 1953년 7월 재체포되어 1955년 공개 재판 끝에 총살됐다.
에이팅곤은 의식이 있는 메르카데르에게 다가가 물었다. '라몬, 임무를 완수했나?' — '예, 파블로 동지.'
벨라루스 슈클로프 출신 유대인으로, 1917년 사회혁명당에 가담했으나 내전 중 볼셰비키로 전향해 고멜 체카에서 두각을 드러냈다. OGPU 외국부 요원으로 중국·터키·서유럽에서 암약했고, 에스파냐 내전기 오를로프의 부관으로 공화국 금 보유분을 소련으로 반출했다. 1940년 수도플라토프와 함께 트로츠키 암살 작전을 설계했으며, 독소전쟁 중에는 제4국 부책임자로서 적 후방의 전략적 기만 작전을 진두지휘했다. 종전 후 원자력 첩보 부서를 총괄했으나 1951년 '시온주의 음모'로 체포되어 12년간 복역했고, 석방 후 출판사 편집자로 여생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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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1919사회혁명당 입당; 모길료프 노동자·협동조합 활동; 1919년 RKP(b) 입당
1920–1924고멜 체카 — 비밀작전부장 대리, 사빈코프 토벌 중 부상; 군사아카데미 동양부 졸업
1925–1930OGPU 외국부 — 중국·터키 암약; 하얼빈 소련 총영사관 부영사
1930–1936OGPU 특수작전국 — 세레브랸스키 보좌; INO 불법작전부 책임자
1936–1939에스파냐 내전 — NKVD 부주재관 (Kotov 장군); 공화국 금 보유분 소련 반출
1938년 6월 13일 밤, 훈장을 단 정복 차림으로 59국경분견대에 나타난 류시코프는 분견대장에게 '저쪽 비밀요원과 단독 접선한다'며 물러나게 한 뒤 국경을 넘어 일본 헌병대에 투항했다.
스탈린 대숙청의 핵심 집행자에서 NKVD 최고위 망명자로 전락한 인물. 1937년 극동 NKVD 국장으로 부임해 고려인 17만여 명을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시킨 초유의 민족 전체 추방을 지휘했으며, 이는 소련 최초의 대규모 민족 강제이주였다. 1938년 자신도 숙청 대상이 될 것을 직감하고 만주국으로 탈출, 일본 관동군에 합류해 소련 군사 기밀을 넘기고 스탈린 암살을 기획했다가 소련의 만주 진공 직후 일본 헌병에게 살해되었다.
1953년 보르쿠타 수용소 봉기. 마슬렌니코프가 협상장에 나타나자 수감자가 외쳤다 — 「장군! 41년에 우릴 무장도 없이 늪지에 버렸소! 우린 25년형인데 장군만 살아남으셨군요!」 마슬렌니코프는 묵묵히 끝까지 들었다.
철도원 아들로 내전에서 기병여단장까지 올랐고, 1928년 OGPU 국경군으로 이적해 중앙아시아 바스마치 토벌에서 두각을 드러냈다. 1939년 베리야에 의해 NKVD 부인민위원 겸 국경·내무군 총사령관이 되었다. 독소전 발발 후 29군·39군 사령관으로 모스크바 반격 선봉, 캅카스 전투에서 북캅카스 전선군을 지휘해 바쿠 유전을 사수했으며, 1944년 제3발트 전선군 사령관으로 프스코프·타르투·리가를 탈환하고 육군대장에 올랐다. 대일전에서 바실렙스키 부사령관으로 관동군 격멸 작전을 입안해 영웅 칭호를 받았다. 전후 MGB 부장관으로 복귀했으나 베리야 몰락 후 '부대로 정부 전복을 기도했다'는 혐의로 추궁받다 1954년 4월 권총 자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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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1921적위대·붉은군대 복무, 내전 종결 시 기병여단장
1928–1935OGPU·NKVD 국경군, 중앙아시아 바스마치 토벌, 프룬제 사관학교 졸업
1948년 1월 12일 밤, 미호엘스와 골루보프는 민스크 외곽 차나바의 다차로 유인되었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트럭에 깔려 즉사했고, 시신은 인적이 드문 거리에 버려졌다.
베리야의 측근으로 1938년부터 1951년까지 벨로루시 국가보안 책임자로 군림하며, 병합된 서부 벨로루시의 소비에트화와 대규모 추방을 지휘했다. 전쟁 중 파르티잔운동 중앙참모부 부장으로 전선 특별부도 관장했다. 가장 악명 높은 행위는 1948년 1월 자신의 민스크 다차에서 스탈린의 지시로 배우 솔로몬 미호엘스를 살해한 일이다. 1951년 소련 MGB 부장관까지 승진했으나 이듬해 실각했고, 1953년 베리야에 의해 체포되어 재판 없이 부티르카 감옥에서 사망했다.
1940년, 리투아니아 NKVD에 보낸 지령에서 용의자에 대해 이렇게 적었다: "국경을 넘으려 할 때 체포할 것이며, 심문 중 태도에 따라 포섭 여부를 결정한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전차 차장 아들로 태어나 1921년 체카에 입문한 이후 KGB까지 38년간 소련 보안기관에 몸담으며 방첩과 해외정보 양 영역에서 지휘관을 역임한 드문 경력의 소유자다. 1939년부터 1946년까지 NKVD·NKGB 방첩총국장으로서 전시 방첩작전과 카틴 학살에 관여했고, 전후 잠시 MGB 해외정보총국장과 정보위원회(KI) 부의장으로 소련의 대외첩보를 총괄했다. 1954년 KGB 출범과 함께 제2총국(방첩) 국장으로 복귀했으나 흐루쇼프 해빙기인 1956년 스탈린 시대 불법행위로 해임·강등되었고, 1959년 장군 계급을 박탈당하고 제명된 뒤 1963년 모스크바에서 자연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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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1937체카·GPU·OGPU·NKVD에서 북캅카스 지역 방첩·정보·비밀정치부서 요직 역임
1945년 12월, 오골초프는 모스크바로 소환되어 정치국 회의에서 MGB 장관직을 제안받았다. '지식과 경험이 부족하다'며 거절했으나, 6년 뒤 아바쿠모프가 체포되자 그는 바로 그 자리의 대행을 맡았다.
세르게이 오골초프는 체카에서 MVD까지 소련 국가보안 기관의 전 역사를 관통한 인물이다. 1918년 17세로 체카에 들어가 제르진스키의 눈에 띄어 우크라이나로 파견되었고, 마흐노 진압에서 인질 처형과 봉기 전멸 전술을 익혔다. MGB 차관 및 제1차관(1946–1953)으로서 아바쿠모프 휘하에서 작전 서부·봄·파도 등 대규모 강제이주를 조율했고, 1948년 솔로몬 미호엘스 살해를 민스크에서 직접 지휘했다. 1951년 아바쿠모프 해임 후 한 달간 MGB 장관 대행을 맡았으며, 스탈린 사후 베리야에 의해 체포되었다가 석방되었으나 1959년 계급과 훈장을 모두 박탈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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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8–1920사포조크 현 체카 수사관 → 랴잔 현 체카 작전집행위원 → 모스크바 체카 압수수색위원
1920–1925폴타바 현 체카 부서장 → 로흐비차 현 체카·GPU 정치국장
1927–1935OGPU 특별부서장 (제1기병사단, 제95·44·99소총사단 등)
1936–1939NKVD 국경부대 지휘관 (크림·아르한겔스크) → 레닌그라드시 NKVD 국장
1942–1944쿠이비셰프 주 NKVD·NKGB 국장 → 카자흐 SSR 국가보안인민위원
1945–1951NKGB·MGB 제1차관 → MGB 차관(일반 담당)
1951–1952MGB 장관 대행(7–8월) → MGB 제1차관 → 우즈베크 SSR MGB 장관
명령 제00447호가 스베르들롭스크주에 준 한도는 1범주 4천 명, 2범주 6천 명이었다. 그러나 1937년 12월 11일 자 그의 보고서는 작전 종료를 이렇게 명시했다. '반소비에트 분자에 대해 1만 5천 명이 유죄 판결을 받았으며, 그중 1번째 범주로 7500명...'
체카와 OGPU 중앙 기구에서 경력을 쌓고 1936년 여름 스베르들롭스크주 NKVD 국장이 된 체키스트로, 나우모프는 그를 류시코프, 레덴스와 함께 '북캅카스 출신자' 집단으로 분류한다. 쿨라크 작전에서 정치국의 서면 승인 없이 한도 증액을 관철한 지도자 가운데 하나로, 명령 제00447호가 준 한도 1만 명을 훌쩍 넘겨 1만 5천 명 유죄 판결로 작전 종료를 보고했다. 1938년 도로건설총국장으로 소환되었다가 6월 체포되었고, 10월 22일 'NKVD 내부의 공모'에 대한 상세한 진술로 공모 사건의 실을 처음 풀었으며 1939년 총살됐다.
부하린 아파트 수색에 "검은 양복, 흰 셔츠, 고운 반지에 긴 새끼손톱" 차림으로 나타났다. 안나 라리나는 "마치 연회에 온 듯했다"고 남겼다.
1921년 체카에 입문해 경제·방첩 부서를 거쳐 이노(INO)로 옮겨 베를린과 로마에서 비밀 거점을 운영한 소련 정보장교였다. 1935년 이노 제1부책임자로 외국정보를 총괄했고, 1937년 벨라루스 내무인민위원으로서 공화국 전역의 대숙청을 진두지휘해 8개월 만에 6만 명을 체포하고 쿠라파티 집단처형을 감독했다. 1938년 9월 NKVD 3국장으로 전보된 직후 베리야의 숙청에 휘말려 체포됐고, 1939년 2월 총살됐으며 사후 복권되지 않았다.
동독에서 소콜롭스키 원수의 사무실로 소환된 고글리제는, 뒤따라 들어온 두 장교가 권총을 겨누자 체포되었다. '그의 눈이 쉴 새 없이 움직였다'고 목격자가 기록했다. 베리야 측근들의 몰락이 시작된 순간이었다.
그루지야 출신 국경경비대 정치장교로, 캅카스에서 베리야의 눈에 띄어 그루지야 내무인민위원이 되었고 NKVD 트로이카를 주재하며 대숙청을 실무 총괄했다. 베리야의 후원으로 레닌그라드 NKVD에서 예조프 잔당을 정리했고, 1941년 새로 병합된 베사라비아에서 3만 명 이상의 추방을 감독했다. 이후 10년을 소비에트 극동의 보안 총수로 보냈다. 1951년 중앙에 복귀해 MGB 제1부장관과 군 방첩 책임자를 지냈고 '의사들의 음모' 수사를 감독했다. 1953년 7월 동독에서 체포되어 베리야와 함께 재판받고 총살됐다. 복권되지 않았다.
스탈린에게 직통 전보를 보낸 후 모스크바로 소환된 그는 부하에게 "내가 어찌 되든 상관없다, 중요한 것은 나라를 구하는 것"이라고 말하며 처형 가능성에 대비했다.
스탈린 시대 군 방첩과 국가보안 기관에서 핵심적 역할을 수행한 인물로, 스탈린그라드 전투 당시 전선 특별부서장으로서 사령관 고르도프의 무능함을 직통 전보로 스탈린에게 보고해 교체를 이끌어냈다. 1943년부터 스메르시 부국장으로서 독일 후방 침투 공작을 지휘했고, 전후에는 폴란드 공안부의 소련 측 수석고문으로서 공산주의 보안 기구 건설을 주도했다. 1946년 MGB 국가보안차관 겸 제3총국장에 올랐으나, 1951년 'MGB 내 시온주의 음모' 조작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투옥되었다가 스탈린 사후 석방되었다. 1953년 '직위 신뢰 상실'로 해임된 뒤 1997년 96세로 사망할 때까지 연금 생활을 했다.
미하일 시레이데르는 그를 '극악무도한 출세주의자'로 기억했다. '예조프 주변에 먹구름이 드리우는 것을 감지하고 적절한 시기에 스탈린 앞으로 편지를 써서' 예조프가 인민의 적을 감싸 왔다고 알렸다는 것이다.
1937년 9월 쿠이비셰프주 NKVD 국장이 되어 두 차례 상한 증액으로 한도를 4,800명 늘린 체키스트다. 1938년 2월 이바노보주로 옮겨 전임자 라드지빌롭스키가 '실수로' 풀어 준 사람들을 다시 잡아들였고, 그해 11월 예조프가 인민의 적을 감쌌다고 고발하는 편지를 스탈린에게 보냈다. 정치국에서 심의된 이 편지는 예조프 해임의 직접적 계기가 되었고, 그 공으로 모스크바 및 모스크바주 NKVD 국장과 중앙위원 자리를 받았으나 곧 카라간다 수용소장으로 밀려나 1946년에 죽었다.
1938년 초 노보시비르스크에 밀리치야 국장으로 부임하자마자, 형사 요원들을 대규모 작전의 체포와 호송에 동원하라는 요구를 거부했다. 주 NKVD 국장 고르바치와 한 달 내내 충돌한 끝에 그는 전출되었고, 넉 달 뒤에는 그 자신이 체포되었다.
1919년부터 체카에서 일한 고참 요원으로, 1935년부터 이바노보주 밀리치야(경찰) 국장을 지냈고 1938년 2월 카자흐 SSR 내무인민위원부 부인민위원 겸 밀리치야 총국장이 되었다. 그 직전 노보시비르스크 밀리치야 국장으로 부임했을 때는 밀리치야 인력을 대규모 작전의 체포 업무에 동원하라는 주 NKVD 국장 고르바치의 요구를 거부해 한 달 만에 자리에서 밀려났다. 1938년 6월 알마아타에서 체포되어 여러 나라의 간첩이라는 자백을 강요당했으나 아홉 달 넘게 버텼고, 고문 끝에는 자신이 만주국 황제 푸이의 사생아라는 식의 일부러 터무니없는 진술서를 써서 수사의 조작성을 기록에 남겼다. 1940년 10년형을 선고받고 수용소에 갇혔다가 1942년 풀려나 사병으로 참전했으며, 1950년대 중반 복권되었다. 만년에 쓴 회고록 「NKVD 내부에서: 체키스트의 수기」(1995년 사후 출간)는 지휘부급 생존자가 대숙청기 NKVD 내부를 증언한 보기 드문 기록으로, 역사가들이 널리 인용한다.
베리야가 전화로 "우리는 당신을 기관에서 쫓아내고 체포해 수용소에서 썩게 할 것이며, 가루로 만들어 수용소 먼지로 만들어 버리겠다"고 말했다.
대조국전쟁 시기 30만 빨치산을 지휘한 우크라이나 파르티잔 사령부 책임자로, 이후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내무장관을 지낸 소비에트 보안기관 간부다. 전후 서부 우크라이나에서 우크라이나 반란군(UPA) 진압을 직접 지휘하며 대규모 체포를 주도했고, 스탈린 사후 라브렌티 베리야에 의해 르비우 주 경찰청장으로 좌천되었다. 1953년 6월 베리야가 당 기관을 우회해 MVD의 독자적 권력을 구축하려 한다고 니키타 흐루쇼프에게 경고했으며, 베리야로부터 '수용소 먼지로 만들어 버리겠다'는 협박을 받은 이 사건은 베리야 체포 결의의 결정적 방아쇠가 되었다.
1937년, 나다라야는 전 그루지야 중앙위원회 서기 삼손 마물리야를 심문 탁자에 묶어 일주일 넘게 구타한 끝에 오르조니키제에 대한 허위 자백을 받아냈다. 1955년 재판에서 스스로 실토한 내용이다.
그루지야 서부 세피에티 마을 출신으로, 1937년 대숙청 정점에서 그루지야 NKVD 내부감옥을 운영하며 수감자 구타와 허위 사망진단서 작성에 관여했다. 1939년 베리야의 개인 경호 부책임자가 되어 모스크바로 올라갔고, 1953년 경호 책임자에 올랐다. 베리야 몰락 후 체포되어 1955년 트빌리시 공개 재판에서 10년형을 선고받았으며, 여섯 고위 피고와 달리 처형을 면했다. 1965년 모르도바 수용소에서 석방되었고 1982년 모스크바에서 사망했다.
1954년 1월, 볼린의 최고재판소 총회는 재활된 시민에게 주택을 반환할 수 있다는 해석을 내놓았다. 당 지도부는 곧바로 이를 오류라고 규정했고, 그 해석은 3년 후 그를 실각시킨 결정적 원인이 되었다.
쿠반의 가난한 어부 가정에서 아홉째 아이로 태어나 내전에 참전하고, 라브파크와 레닌그라드대학 법학부를 거쳐 프롤레타리아 법조인으로 성장했다. 1939년 RSFSR 검찰총장에 올라 대숙청 후반기와 전쟁기 검찰을 이끌었고, 1948년 소련 최고재판소장이 되어 1952년까지 사법기관 숙청을 직접 조직·감독했다. 그러나 1954년 1월 최고재판소 총회가 재활된 시민에게 주택 반환 가능성을 시사한 해석을 내놓자 당 지도부는 이를 오류로 규정했고, 결국 1957년 2월 해임되었다. 이후 국가중재위원회 부위원장으로 12년간 재직하다 104세까지 생존해 소련 최고위 법조인 중 가장 오래 산 인물로 남았다.
메르쿨로프는 회고했다 — "베리야는 밤늦은 업무를 마친 뒤 언제나 코불로프만 데리고 집이나 다차로 향했다." 루뱐카의 그 누구보다 코불로프는 베리야의 사적인 영역에 속한 인물이었다.
아르메니아 재단사의 아들로 태어나 베리야의 손에 발탁된 뒤 스탈린 공포정치의 핵심 설계자가 되었다. NKVD 수사국장(1938–1939)으로서 대숙청의 심문과 처형을 지휘했고, 1940년 카틴 학살을 집행한 '3인조'의 일원이었다. 전시에는 NKVD·NKGB 차석으로서 체첸·인구시·크림 타타르 등 민족 전체의 강제이주 작전을 현장에서 지휘했으며, 베리야의 개인적 고문 전문가로도 악명 높았다. 스탈린 사후 베리야와 함께 제1내무차관으로 복귀했으나 1953년 6월 체포되어 12월 베리야 등과 함께 총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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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2–1931그루지야 체카·GPU에서 하급 보안 요원으로 근무
1931–1937베리야에게 발탁되어 그루지야 GPU 비밀정치부에서 활동, NKVD로 승계
1937–1938그루지야 NKVD 차석, 대숙청기 현장 숙청 책임
1938–1939NKVD 수사국장 — 예조프 사건과 주요 정치사건 수사 총괄
1939–1941NKVD 경제총국장, 카틴 학살 집행 3인조 참여
1941–1945NKVD·NKGB 부인민위원(차석) — 체첸·인구시·크림 타타르 등 민족 강제이주 작전 지휘
흐루쇼프와 사브첸코는 1947년 스탈린과 아바쿠모프에게 롬자 주교가 '바티칸의 비밀 사절' 및 우크라이나 민족주의 지하조직과 협력한다고 비난하며 그의 암살 허가를 요청했고, 이후 롬자는 독극물 주사로 살해되었다.
소련 국가보안기관에서 17년간 국경부대를 거쳐 우크라이나 국가보안인민위원(1943–1946)과 국가보안장관(1946–1949)을 지냈다. 1946년 리보프에서 우크라이나 그리스가톨릭 교회를 강제로 러시아 정교회에 통합시키는 '통합 공의회'를 직접 지휘했고, 1947년에는 니키타 흐루쇼프와 함께 스탈린에게 무카체보 교구의 테오도르 롬자 주교 암살 허가를 요청해 관철시켰다. 1949년 모스크바로 소환되어 대외정보를 총괄하는 MGB 제1총국장 겸 국가보안차관에 올랐으나, 1953년 베리야 숙청과 함께 해임되고 1955년 '직무 부적합'을 이유로 강제 전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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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니콜라예프 현 체카 특별부서 작전요원으로 보안기관 입문
1922–1939국경부대에서 작전·참모·학교 교관으로 17년 복무, 1939년 우크라이나 국경군 제5과장 겸 부사령관
1941우크라이나 국가보안부인민위원
1941–1943우크라이나 내무부인민위원. 1941년 말 세르기옌코 인민위원의 이탈로 사실상 NKVD 지휘
1943–1946우크라이나 국가보안인민위원
1946–1949우크라이나 국가보안장관. 1946년 리보프 공의회로 그리스가톨릭 교회 강제 통합 주도
1953년 6월 30일, 사포노프는 베리야 체포 영장 서명을 거부하며 이렇게 말했다: "그는 최고소비에트 대의원입니다. 대의원 면책특권은 헌법에 명시되어 있습니다." 그날로 그는 해임되었다.
야로슬라블현 로스토프의 대장장이 아들로 태어나 1925년 레닌그라드대 법학부를 졸업하고 레닌그라드 공장들의 법률고문으로 일하며 민법 강의를 병행했다. 1935년 검찰로 전환하여 비신스키의 눈에 띄어 1939년 35세에 소련 검찰 부검사장이 되었고, 제1부검사장으로서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에 소련 검찰단의 일원으로 참여했다. 1948년 2월 소련 검찰총장에 임명되어 전후 스탈린기 검찰을 5년간 이끌었으나, 1953년 6월 30일 라브렌티 베리야 체포 영장에 최고소비에트 대의원 면책특권을 이유로 서명을 거부하며 즉시 해임되었다. 이후 모스크바 지방검찰청의 말단 직위로 강등되어 조용히 복무하다 1968년 은퇴했다.
스탈린이 이그나티예프를 불러 "의사들에게서 자백을 받아내지 못하면 네 목을 짧게 해주겠다"고 위협했다. 흐루쇼프는 1956년 비밀연설에서 이 장면을 공개 증언했다.
우크라이나 출신으로 중앙아시아에서 자란 당 조직 전문가. 부랴티야·바시키르·벨라루스 등 민족 공화국에서 당 제1서기를 지내다 스탈린 말기 MGB 장관에 기용되었다. 의사 음모와 밍그렐 사건을 지휘했고, 스탈린의 직접적 위협 아래 복종했으나 체카 출신이 아닌 온순한 당료였기에 처형을 면했다. 실각 후 타타르 공화국 당 서기로 복귀해 타타르어 보존에 힘썼다.
"7월 20일까지 자진 출두하면 사면한다. 이후의 모든 자는 조국의 배신자로서 체포·엄벌·섬멸될 것이다." — 1945년 5월, 우크라이나 내무인민위원으로서 UPA에 내린 최후통첩.
사마르칸트 출신으로, 투르크메니스탄에서 콤소몰·당 경력을 쌓은 뒤 1937년 당 충원으로 NKVD에 들어갔다. 1943년부터 1946년까지 우크라이나 SSR 내무인민위원으로서 UPA와 민족주의 지하조직을 무력 진압하는 작전을 지휘했으며, 종전 후에는 대규모 사면 회유와 가족 추방을 병행하는 이중 전략을 폈다. 이후 소련 내무차관, 국가보안차관 겸 MGB 제2총국(방첩) 국장을 거쳐 1952년 후보 중앙위원이 되었으나, 1956년 '장교 명예를 실추시킨 행위'로 해임된 후 건설 부문에서 일했다.
예비 조사에서 자신의 특별부서 근무를 이렇게 진술했다. "1934년 가을부터 부서는 체계적으로 그리고 지속적으로 소규모 반혁명 분자 집단을 적발하고 제거해 왔다. 부서는 거의 항상 백 명의 체포자를 보유하고 있었다."
1922년 GPU에 입문해 군사방첩 특별부서에서 경력을 쌓았으며, 1937~1938년 '폴란드 작전' 당시 GUGB NKVD 제3(방첩)부서 부책임자로 소련 전역의 폴란드계 시민에 대한 대량 체포·고문·처형을 지휘했다. 1938년 3월부터 10월까지 소련 대외정보국(제5부서) 책임자로 전임되었으나, 예조프 숙청의 파고 속에서 체포되어 1940년 2월 총살되었다. 1957년과 2013년 두 차례 사법 심사에서 사건 조작과 불법 수사 방법을 이유로 재활이 거부된 몇 안 되는 NKVD 고위 간부 중 한 명이다.
나세트킨은 1944년 8월 베리야에게 올린 보고서에서 전쟁 3년간 GULAG 수감자 97만 5천 명을 붉은군대에 넘겼으며 '다섯 명의 전직 수감자가 소련 영웅 칭호를 받았다'고 적었다.
소련 국가보안기관 간부로, 1941년부터 1947년까지 GULAG(교정노동수용소 본부) 책임자를 지냈다. 교사의 아들로 헤르손에서 태어나 15세에 붉은군대에 입대했고 1921년부터 체카-OGPU-NKVD 체계에서 수송·경제 부문 요직을 거쳤다. 독소전쟁 발발 직후 전선 인근 수용소 27곳과 식민지 210곳, 수감자 75만 명을 후방으로 소개시켰으며, GULAG 수감자들을 군수 생산에 총동원했다. 전시 내내 수감자들을 '완전 노동 활용' 원칙 아래 혹사시키면서도 1944년 베리야에게 올린 보고서에서 GULAG의 전쟁 기여를 상세히 기록했다. 1945년 국가보안 중장이 되었으나 전후 쇠락하여 1948년 예비역으로 밀려나고 1950년 사망했다.
수감자들은 그를 '돌 손님(카멘니 고스티)'이라 불렀다. 낮고 냉담한 목소리, 굳은 표정으로 심문실에 들어서는 그 앞에서 누구도 끝까지 버티지 못했다.
베리야의 최측근 수사 책임자로, 스탈린 시대 말기 가장 민감한 정치 사건을 도맡았다. 1939년 NKVD 수사부장, 1943년 NKGB 특별중요사건 수사부장으로 적군 공군 지휘부 사건과 메이예르홀트 심문을 지휘했고, 가혹한 심문으로 악명 높았다. 1946년 실각해 6년간 대외재산총국 서류직으로 전락했으며, 1953년 베리야에 의해 MVD 특별수사부장으로 복귀해 의사들의 음모 사건 반전을 맡았다. 베리야 체포 직후 기소되어 그해 12월 총살됐고, 2000년 사후 복권도 거부됐다.
1939년, 어제까지 온 나라가 이름만으로 떨던 '피의 난쟁이' 예조프가 심문 조서의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조서를 쓰는 손은 에사울로프의 것이었다.
베리야의 수사선에서 몰락한 예조프의 자백을 받아내며 두각을 드러낸 NKVD 수사관. 뱌트카 노동자 가정 출신으로 10세에 고아가 되어 일터로 나갔고, 로도스와 함께 베리야의 '특별 임무'를 수행했으며, MGB 특별협의회 서기국장까지 올랐으나 1954년 자연사하여 흐루쇼프 시기 심판대에 서지 않았다.
1930년대 말 가그라 NKVD 지구부장으로서 심문 중 구타를 일상화하며 공공연히 말했다: "때리지 않는 자야말로 인민의 적이다!"
그루지야 보안기관에서 성장한 루하제는 1937년 압하지야 가그라 NKVD 지구부장으로서 '간이 수사' 방식의 대규모 체포를 지휘했다. 전쟁기에는 자캅카스 전선 특별부장과 스메르시 방첩 책임자를 거쳐, 1948년 그루지야 국가보안장관에 올랐다. 이 자리에서 베리야 파벌을 겨냥한 조작 사건인 '밍그렐리아 사건'을 주도한 핵심 인물이 되었다. 그러나 스탈린 사망 수개월 전인 1952년 11월 스스로 체포되었고, 1955년 역설적으로 베리야 집단 일원으로 재판받아 총살되었다.
트빌리시 처형장에서 사비츠키와 NKVD 간부들은 '사슬에 묶인 개처럼 죄수들에게 달려들어 권총 손잡이로 무자비하게 구타했다' — 1954년 목격자 증언.
타슈켄트 출신의 NKVD 장교로, 차르 군대 대령이자 백위대 조직가의 아들이었다. 1931년 그루지야 NKVD에 들어가 보그단 코불로프의 후원 아래 빠르게 승진했으며, 대숙청기에는 제4부에서 수감자 고문과 사건 조작에 직접 가담했다. 이후 코불로프의 개인 비서로 전속되어 NKGB 서기국, 대외재산관리국을 거치며 베리야 파벌의 핵심 실무자로 활동했다. 대령 계급에 그쳤으나 1953년 베리야 몰락 직후 체포되어 2년 뒤 총살형을 받았다.
1941년 5월, 충칭 주재 소련 정보망이 독일 무관으로부터 입수한 바르바로사 작전 계획을 모스크바로 타전했다. 파뉴시킨은 이를 '전쟁 임박을 알리는 가장 완전한 정보'라고 평가했다.
소련 외교관이자 정보장교로, 대사직과 해외 정보거점 책임자를 겸하며 중국과 미국에서 활동한 인물. 1939년부터 1944년까지 충칭의 장제스 정권 주재 대사로 있으면서 12개 정보거점을 지휘했고, 독일의 소련 침공 계획을 사전 입수해 모스크바에 타전했다. 1947년부터 1952년까지는 워싱턴 주재 대사 겸 주미 소련 정보총책으로 매카시 시대 냉전의 최전선에서 활동했으며, 스탈린 사후 흐루쇼프에 의해 KGB 제1총국(대외정보) 국장으로 발탁되어 1954~1955년 소련 해외정보를 총괄했다. 이후 중앙위원회 대외간부부장을 1973년까지 지냈다.
1943년 8월, 세로프는 스탈린의 전쟁 중 유일한 전선 시찰을 주선하고 3일간 그와 단둘이 동행했다. 수많은 장군 중 스탈린이 자신의 안전을 맡긴 인물은 포병 출신의 이 보안장교였다.
포병장교 출신으로 1939년 NKVD에 투신해 우크라이나 NKVD 인민위원, 전시 NKVD 부인민위원을 지냈다. 베를린 함락에 참여하고 독일 항복 조인식에 입회했으며, 종전 후 소련군정청 민간행정을 담당했다. 1953년 베리야 체포에 가담한 뒤 흐루쇼프의 신임으로 초대 KGB 의장이 되어 대규모 정치범 재활성화를 주도하며 탈스탈린화기 보안기관을 재편했다. 1956년 헝가리 봉기 진압을 현장 지휘했고, 이후 GRU 총국장을 지냈으나 1963년 펜콥스키 사건으로 몰락해 모든 직위와 계급, 영웅칭호를 박탈당했다.
"전쟁 전 정보부는 완전히 해체되었다. 내가 과학기술정보과에 배치되었을 때 거기엔 세 명뿐이었다. 모두 초짜였다. 전쟁이 시작될 무렵 전 세계에 우리 요원은 고작 5~6명이었다."
화학공학자 출신의 소비에트 정보장교로, 과학기술 첩보의 제도적 토대를 구축한 인물이다. 1940년 서방 과학저널에서 핵물리학 논문이 사라진 것을 감지해 소련 외국정보부 최초의 원자력 첩보 지령을 기안했고, 뉴욕에서 클라우스 푹스·줄리어스 로젠버그 등 맨해튼 계획 침투 공작망을 지휘해 쿠르차토프의 원자폭탄 개발을 수년 단축시켰다.
베를린에서 코불로프가 심은 첩자 '리체이스트'는 실제로는 게슈타포가 조종하는 이중간첩이었다. 그의 보고는 NKVD 정보분석관을 건너뛰고 베리야를 거쳐 스탈린의 책상에 직행했고, "독일의 침공 위험은 없다"는 확신을 강화시켰다.
보그단 코불로프의 동생으로, 형과 베리야의 후원에 힘입어 NKVD에서 출세했다. 1938년 서른둘에 우크라이나 내무인민위원 대행, 이듬해 베를린 NKVD 레지덴트로 파견되었으나 독일어도 작전 훈련도 받지 못한 상태였다. 그의 주력 첩자 '리체이스트'는 실제로는 독일이 심은 이중간첩으로, 1940~1941년 나치의 역정보가 코불로프를 통해 모스크바로 흘러들어갔다. 전쟁기에는 우즈베키스탄 보안 총수, 전후에는 포로관리총국과 굴라크 부수장을 지냈으며, 1953년 베리야 몰락 후 체포되어 1955년 총살되었다.
1937년, 하잔은 17세기 그루지야의 민족 영웅 기오르기 사아카제에 대해 '연계를 파악하고 체포하라'는 지령과 함께 수사 파일을 개설했다. 수감자가 그의 이름을 언급했기 때문이었다.
오데사 유대인 가정 출신으로, 1933년 OGPU 고등학교에서 퇴교당한 뒤 그루지야 NKVD 비밀정치부(SPO) 수사관이 되어 베리야-고글리제 체제 아래 사건 조작과 고문을 일삼았다. 대숙청기에는 동료까지 체포·처형으로 몰아넣었고, 1938년 체포됐다가 베리야의 지시로 석방돼 전역 처리에 그쳤다. 전쟁기 NKVD 중앙기구에서 복무했으며, 1948년에는 역설적이게도 『소비에트 인간의 도덕적 모습』을 출간했다. 1955년 베리야 몰락 후 체포되어 트빌리시에서 재판받고 총살됐다.
1959년, 두도로프는 밀리치야의 정보원·도발자 제도를 단계적으로 철폐하라는 명령에 서명했다. 소련 경찰 역사상 거의 유일한 이 시도는 곧바로 저지되었고, 이듬해 그가 해임되면서 묻혔다.
흐루쇼프가 스탈린 시대 NKVD 출신들을 몰아내고 임명한 민간인 내무장관(MVD, 1956–1960). 화학기술자 출신으로 건설·공업 관료로 경력을 쌓았으며, 1954년 당 중앙위 건설부장을 거쳐 내무장관이 되었다. 굴라그 체제를 소규모 교정식민지 중심으로 재편하려 했고, 1959년에는 밀리치야의 정보원·도발자 활용을 단계적으로 폐지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그의 임기는 정치경찰(KGB)과 분리된 내무기관의 위상이 급격히 약화되던 시기였고, 1960년 MVD 자체가 해체되면서 물러났다.
사형선고 후 유서에 "5발의 확산탄으로 쏴 달라. 보통 총알 한 발로는 죽지 않을 테니"라고 썼다. 고문 피해자들에게 고통을 안겼던 자의 마지막 떨림이었다.
소련 MGB 대령, 국가보안 역사상 가장 잔혹한 수사관으로 악명 높다. 1937-38년 대숙청기 NKVD에 들어가 바실리 블류헤르 원수를 고문 살해하고, 이삭 바벨과 프세볼로트 메이예르홀트를 심문했다. 전기 케이블로 그리고리 시테른의 눈을 적출한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1951년 의사들 음모 연루로 체포, 1955년 총살형.
1941년 가을, 서른넷의 수호돌스키는 자보론코프, 치무토프와 함께 툴라 시 방위위원회 3인에 올랐다. 전선의 붉은 군대가 철수한 텅 빈 도시에서, 그가 조직한 노동자 연대와 파르티잔 부대가 구데리안의 기갑군을 45일간 막아냈다.
소련 국가보안 기관에서 복무한 장교로, 1941년 독일군이 모스크바로 진격하던 결정적 시기에 툴라 주 NKVD 국장을 맡았다. 툴라 시 방위위원회 위원으로서 노동자 대대와 파르티잔 부대를 조직하고 시내 방어선을 구축하는 데 핵심 역할을 했으며, 후방에서 압베어(Abwehr) 첩보망을 무력화했다. 전후 보로네시 주 MGB 국장과 불가리아 주재 소련 고문을 지냈다. 1950년 보로네시에서 발생한 청년 반스탈린 조직 'KPM' 사건을 처리한 책임으로 1957년 당에서 제명되고 소장 계급을 박탈당했으며, 사후에도 복권되지 못했다.
«전쟁 전 몇 년 동안 해외에 약 40개의 거점을 꾸리고 200명 이상의 첩보원을 파견했으며, 다수의 직업 체키스트를 비합법 공작에 투입했다. 이는 즉각 성과로 나타났다.» — 파벨 피틴, 회고록에서, 예조프시나로 초토화된 해외정보국을 2년 만에 재건한 성과에 대해
파벨 미하일로비치 피틴은 1939년 31세로 소련 해외정보국장에 임명된 역대 최연소 정보수장이다. 예조프시나로 붕괴된 해외 공작망을 2년 만에 40여 개 거점으로 재건했고, 1941년 영국 핵개발 보고서를 입수해 작전명 '에노르모즈'를 주도하여 소련 원자폭탄 개발을 수년 앞당겼다. 전쟁 중 독일 침공 경고 100여 건을 스탈린에게 올리고 쿠르스크 전투 계획을 입수했으며, 1946년 해임 후에는 카자흐 SSR 국가보안장관을 지냈으나 1953년 베리야 숙청 여파로 연금 없이 해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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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2–1938티미랴제프 농업아카데미 졸업 후 국영출판사 셀호즈기즈 편집자·부편집장
1938.8–11NKVD 특수목적학교 수료, 제5과 실습생 → 9분과장 → 부과장
1939–1946소련 해외정보 총책임자: GUGB NKVD 제5과장 → NKGB·NKVD·MGB 제1총국장
1977년 6월, 연금과 당적을 박탈당한 전직 내무장관이 모스크바 근교 '프라우다'(Правда·진리) 역 선로에서 열차에 치여 숨졌다. 11년간 소련 경찰국가를 총괄했던 그가 어떻게 그 선로 위에 서게 되었는지는 끝내 밝혀지지 않았다.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일본어를 익힌 동양학도였던 크루글로프는, 11년간 소련 내무기관을 이끈 최장수 수장이었다. 굴라그를 사상 최대 규모로 운영하고 체첸인·인구시인 등 민족 강제이주를 지휘하는 한편, 얄타·포츠담 회담 경호로 영국 기사작위와 미국 공로훈장을 받았다. 스탈린 사후 베리야 체포에 가담하고 KGB 창설안을 직접 입안했으나, 흐루쇼프에 의해 해임·제명된 뒤 연금과 주택을 박탈당했다.
1954년 2월, 고르셰닌은 흐루쇼프에게 1921년 이래 반혁명죄로 사형·유형·수용된 자의 정확한 숫자를 담은 증명서를 올렸다. 스탈린 사후 처음 나온 그 숫자는 해빙기 복권의 출발점이었다.
알라티리의 철도 노동자 아들로 태어나 모스크바 소비에트법 연구소를 졸업하고 노동법 학자로 출발했다. 1943년 소련 검찰총장에 임명되어 전시 사법을 총괄했고, 정치국 비밀위원회 위원으로서 소련 전역의 사형 선고를 승인하는 한편 블라소프·크라스노프 재판과 뉘른베르크·도쿄 전범 재판 준비를 주도했다. 1948~1956년 소련 법무장관으로 자리를 옮겨 사법 제도 정비를 이끌었고, 1954년 2월 흐루쇼프에게 1921년 이래 대숙청 희생자 통계를 담은 공식 증명서를 제출했으며, 1956년 주코프·루덴코와 함께 옛 포로들의 명예를 회복시키는 중앙위원회 결의를 공동 발의했다. 법무부 폐지 후에는 전연방 법학연구소 소장으로 학계에 복귀하여 소비에트 노동법전 편찬 작업에 헌신했다.
콘스탄틴 루네프는 섬유 노동자 출신의 당 관료로, 전후 모스크바 당 조직에서 경력을 쌓은 뒤 국가보안기구의 고위직으로 이동했다. 1953년 베리야 체포 뒤 내무부 제1차관이 된 그는 전임 수장을 심리한 특별재판소에 내무부 대표로 참여했다. 이 역할은 내무부가 당의 정치적 결정에 복속되는 과정을 보여 주는 동시에, 당 인사가 강압적 국가기구의 운영을 맡은 체제의 성격을 드러낸다. 이후 KGB 제1부의장과 카자흐 공화국 KGB 의장 대행을 지냈으나, 1960년 병으로 퇴직했다.
1946년 2월 8일 뉘른베르크 법정에서 루덴코는 나치 지도부를 향해 그들이 '식인종의 도덕과 강도의 탐욕'을 독일 민족에게 주입했다고 규탄하며 소련 검찰의 개시 진술을 시작했다.
우크라이나 코사크 가문 출신으로 1926년 입당, 1944년 우크라이나 검사장이 되었다. 1945~1946년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에서 소련 수석검사로 괴링을 신문하며 나치 전쟁범죄의 실체를 법정에 세웠다. 1953년부터 사망 시까지 28년간 소련 검찰총장으로 재임하며 베리야 재판을 주도하고 정치범 재활위원회를 이끌어 흐루쇼프 해빙기의 사법 복권을 추진했다. 브레즈네프 시기에는 안드로포프와 함께 반체제 인사에 대한 '예방적 경고' 제도를 도입하고 1979년 소련 검찰법 제정으로 검찰 제도의 법적 기반을 완성했다.
스탈린 사후에도 그는 처벌을 피하지 못했다. 1958년 소련 최고재판소는 사건 조작과 수감자 고문의 죄로 그에게 15년형을 선고했고, 그는 형기를 하루도 감형받지 못한 채 다 채우고 나왔다.
브레스트-리토프스크의 러시아화된 프랑스계 집안에서 태어나 1931년 OGPU에 들어갔다. 대숙청 시기 NKVD 심문관으로 외무인민위원 대리 크레스틴스키, 코민테른의 퍄트니츠키와 크노린, 에스토니아 공산당의 안벨트 등의 사건을 맡아 구타로 자백을 받아 냈다. 전시에는 작전부서를 지휘하며 투바·몽골·신장에 파견됐고 1945년 중장까지 올랐다. 1955년 해임되고 계급을 박탈당한 뒤 1957년 체포되어, 1958년 사건 조작과 수감자 고문의 죄로 15년형을 선고받았다. 형기를 다 채우고 1972년 출소해 1990년 모스크바에서 죽었다. 복권되지 않았다.
장군은 배신하지 않는다 — 20년 뒤 체포된 CIA 이중간첩 폴랴코프에 대한 첫 경고가 왔을 때 치뇨프가 한 말이다.
브레즈네프가 드네프로페트로우스크 당 시절부터 신임한 야금 기술자 출신 KGB 간부로, 부의장 자리에서 15년간 안드로포프 의장의 움직임을 총비서에게 직접 보고한 'KGB 안의 브레즈네프의 눈'이었다. 육군대장·사회주의노동영웅까지 올랐으나 음모와 전횡으로 동료들의 평판은 나빴다.
베리야는 우리가 추천한 사람들이 유죄인지 무죄인지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가 던진 질문은 단 하나였다: '그들이 정말로 필요한가?' — 『특수임무』
멜리토폴의 제분업자 아들로 태어나 열두 살에 붉은군대에 뛰어든 소년병은 남북전쟁의 무법지를 헤치고 GPU의 암약요원으로 성장했다. 1938년 로테르담에서 스탈린의 친필 명령으로 OUN 지도자 코노발레츠를 암살했고, 1940년에는 나움 에이팅곤과 함께 '오리 작전'을 지휘해 트로츠키를 제거했다. 독소전쟁기에는 제4국장으로서 적 후방의 파르티잔·사보타주 활동과 원자력 첩보(그룹 'S')를 총괄했다. 1953년 베리야의 '공범'으로 체포되어 15년을 감옥에서 보냈고, 석방 후 필명으로 역사소설을 쓰며 살다가 소련 붕괴 뒤인 1992년 완전히 복권되었다. 그의 회고록 『특수임무』는 소련 정보기관의 가장 내밀한 작전들을 처음으로 공개한 증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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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1921붉은군대 소년병; 포로·탈출 후 오데사에서 부랑자 생활
1921–1932우크라이나 GPU·OGPU 정보장교로 두각을 드러냄
1933–1938OGPU·NKVD 외국부(INO) — 베를린 OUN 내부 침투, 해외 암약
1938코노발레츠 암살(로테르담); NKVD 외국정보국장 대행(11월–12월)
1939–1941외국정보부국장; '오리 작전' — 트로츠키 암살 지휘
1941–1946NKVD 제4국장 — 적 후방 파르티잔·사보타주 전쟁; 원자력 첩보 그룹 'S' 지휘
1946–1953전후 대NATO 사보타주 작전; MVD 제1총국 부국장 (1953)
1953–1968베리야 '공범'으로 체포, 15년형 — 블라디미르 교도소에서 복역
1968–1996석방 후 필명으로 소설 집필; 1992년 완전 복권, 회고록 『특수임무』 출간
1950년, 저명한 과학자 리나 시테른을 심문하며 "이 늙은 창녀야!"라고 고함치자, 시테른은 "장관께서 학자에게 말하는 태도가 그렇습니까"라고 답했다.
스탈린 시대 말기 국가보안을 총괄한 실력자로, 14세에 적군 입대 후 OGPU·굴라그를 거쳐 대숙청에서 살아남았고, 전시 방첩 기구 스메르시 총국장으로 발탁되어 스탈린의 절대적 신임을 얻었다. 종전 후 MGB 장관으로서 레닌그라드 사건과 유대인 반파시스트 위원회 탄압을 설계·집행하며 베리야를 견제하는 스탈린의 핵심 카드로 군림했다. 그러나 1951년 부하의 밀고로 '의사들 음모' 은폐 혐의로 체포되어 자신이 구축한 체제에 삼켜졌고, 스탈린 사후 레닌그라드 사건 조작 혐의로 재판받아 1954년 총살되었다.
그가 외무정보를 지휘한 15년은 체카 이래 어느 누구도 넘지 못한 기록이었다. 흐루쇼프, 브레즈네프, 안드로포프 — 세 명의 지도자를 거치며 그는 냉전 소련 첩보의 얼굴이자 그늘 그 자체였다.
레닌그라드 조선소 용접공에서 KGB 외무정보 수장까지 오른 인물로, 소련과 러시아 역사상 가장 오랜 15년간 제1총국을 이끌며 냉전기 소련의 대외 첩보활동을 총괄했다. 헝가리 봉기, 베를린 위기, 쿠바 미사일 위기, 6일 전쟁, 프라하의 봄 등 전후 결정적 국면마다 KGB의 해외 공작을 지휘했으며, 루마니아 세쿠리타테 창설을 지원하고 북유럽·발칸·중동에서 '불법' 요원망을 정비했다. 전시에는 레닌그라드 봉쇄 속에서 40여 개 정찰·파괴 공작조를 독일군 후방에 침투시킨 현장형 정보장교였다. 안드로포프의 선임 고문으로 물러난 뒤에도 KGB의 전략 방향에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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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1931발트 조선소 및 북부 조선소 용접공·선체 표시공
1931–1934적군 복무, 레닌 군사정치대학 야간 코무즈 졸업
1934–1939콤소몰·당 정치활동가, 발트해운회사 당위원회 서기
1939–1941NKVD 레닌그라드국 수상부서 근무, 해외 정찰 임무
1941–1945NKVD/NKGB 레닌그라드국 제1(정찰)과장, 40여 개 공작조를 독일군 후방에 침투
1949년 8월 29일 새벽, 세미팔라틴스크 실험장에서 메시크는 조립된 첫 소련 핵폭탄이 장치된 타워의 경비를 직접 해제하고 중앙 구역에서 마지막으로 철수했다. 몇 시간 후 소련은 핵보유국이 되었다.
베리야의 최연소 측근으로, 1932년 우크라이나 공장에서 NKVD로 발탁되어 경제·방첩 부문을 거치며 가파르게 승진했다. 서른 살에 우크라이나 국가보안인민위원, 전쟁기에는 스메르시 부국장을 지냈다. 1945년부터 소련 원폭 계획의 보안과 방첩을 책임지는 제1총국 부국장으로서 폐쇄도시 체계를 구축했다. 1953년 3월 베리야에 의해 우크라이나 내무장관에 임명되어 서부 지역의 우크라이나화를 추진하며 공화국 당 지도부와 충돌했고, 베리야 체포 직후인 6월 30일 키예프에서 체포되어 그해 12월 함께 처형됐다.
1971년, 솔제니친 추방을 논의하는 폴리트뷰로에 「솔제니친 문제에 관하여」라는 메모를 보내 『암 병동』 출판과 모스크바 아파트 제공을 제안했다. 기각됐지만 KGB도 아니고 내무장관이 반체제 작가를 위해 움직인 장면은 브레즈네프기에 둘도 없다.
브레즈네프의 드네프르파트전 동지로 소비에트 사상 최장 16년간 내무장관을 지냈다. 경찰관 봉급을 대폭 올리고 전용 주택 10% 할당, 신규 경찰학교와 소비에트 최초의 내무아카데미를 세워 밑바닥 직업이던 민병대를 국가 기관으로 끌어올렸다. 로스트로포비치·비슈넵스카야와 교류하고 솔제니친 추방을 막으려 폴리트뷰로에 탄원서를 냈으며, 니콜라이 2세 유해 수색을 처음 지시한 소비에트 고위 관료이기도 했다. 안드로포프의 후계 구도 속에서 부패 혐의로 모든 직위와 훈장을 박탈당하고 권총 자살했다.
1944년 3월, 보라틴 마을에서 UPA 대원들에게 포위되자 쿠즈네초프는 수류탄으로 자신과 적들을 함께 폭사했다.
소련의 전설적 첩보원이자 파르티잔. 독일어 6개 방언을 구사하는 언어 천재로, 독일군 중위 파울 지베르트로 위장하여 나치 점령 우크라이나의 수도 로브노에서 활동하며 6명 이상의 고위 독일 관리들을 직접 제거했다. 쿠르스크 전투를 앞두고 독일군의 대규모 전차 공격 계획을 최초로 입수했으며, 테헤란 회담에서 연합국 수뇌부를 겨냥한 '멀리뛰기 작전'을 사전에 탐지했다. 1944년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과의 교전에서 사망했고, 사후 소련 영웅 칭호를 받았다.
1966년 2월, RSFSR 최고재판소장 스미르노프는 가명으로 서방에 소설을 발표한 두 작가에게 반소비에트 선동·선전 혐의로 7년과 5년의 강제노동형을 직접 선고했다.
레닌그라드대학 법학부 출신으로 1934년 검찰에 투신,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루덴코 소련 수석검사의 보좌관으로 나치 점령지 전쟁범죄 공소를 담당하고 도쿄재판에서 소련 대표단 부검사를 지냈다. 1962년 RSFSR 최고재판소장이 되어 시냡스키-다니엘 재판을 직접 주재했으며, 1972년부터 12년간 소련 최고재판소장으로 재임하며 브레즈네프 시대 사법부를 대표했다. 국제법정에서 파시즘을 기소한 법률가가 국내에서는 정치범을 단죄하는 소련 법조계의 이중적 성격을 체현한 인물이다.
자오제르나야에 오른 비네비틴은 프리놉스키의 개인 명령에 따라 한 발의 정확한 사격으로 국경을 넘어 온 일본 헌병을 그 자리에서 쓰러뜨렸다.
NKVD 포시예트 국경분견대 소위로, 저격 교관을 거쳐 공병대장을 맡았다. 1938년 7월 15일 자오제르나야 고지에서 제1부인민위원 프리놉스키의 개인 명령으로 만주 영토에 들어온 일본 헌병을 저격 사살해 하산 호 분쟁의 도화선이 됐다. 부상 뒤 병원을 이탈해 전선에 복귀했고, 8월 1일 새벽 지뢰 통로 개설 임무를 마치고 돌아오다 초병에게 잘못된 암호를 대어 아군 총에 맞아 숨졌다.
1937년, 시인 티치안 타비제를 두 달 고문해 자백을 받아냈다. 타비제가 공범으로 17세기 민족영웅 사카제를 지목하자, 크리먄은 그 유명한 이름을 몰라본 채 조서에 그대로 기재했다.
1913년 카르스의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나 18세에 자캅카스 GPU 견습으로 보안기관에 투신했다. 트빌리시에서 대숙청기 그루지야 NKVD 수사관으로 급부상해 수사부장까지 올랐으며, 1937년 오라헬라슈빌리 사건 수사를 지휘했다. 1945년 서른한 살의 나이로 아르메니아 국가보안장관에 임명되었으나, 1947년 '당적이지 않은 행동'으로 해임되고 울리야놉스크로 좌천되었다. 1951년 불법 수사와 체포로 보안기관에서 축출된 뒤, 베리야 몰락 후 체포되어 1955년 트빌리시 재판에서 사형 선고를 받고 총살되었다.
1956년 부다페스트, 대사관 창밖으로 헝가리 비밀경찰 장교들이 가로등에 목이 매달리는 광경을 지켜보았다. 그 공포는 그를 평생 따라다녔고, 프라하와 카불과 바르샤바에서도 그가 본 해답은 오직 무력뿐이었다.
1956년 부다페스트 주재 대사로 탱크를 부른 사람, 15년간 KGB 의장으로 프라하의 봄을 진압하고 반체제를 짓밟은 사람 — 그러나 체제의 실상을 가장 정확히 알았기에 고르바초프를 발탁해 키우고 페레스트로이카의 경제 청사진을 그리게 한 사람. 시를 쓰고 영어를 독학하며 미국 정세를 직접 읽은 소비에트 지도자로서, 아프간 개입을 결정한 트로이카의 일원이었고 서기장 15개월 동안 부패 숙청과 규율 캠페인을 밀어붙이다 신부전으로 쓰러졌다. 전신원 청년에서 KGB 수장을 거쳐 최고 권좌에 오른 궤적 자체가 소비에트 체제의 모순을 응축한다.
1951년 체포되어 고문받으면서도 자백을 거부하고, 감방에서 스탈린에게 국가보안 기관 개편안을 작성해 보내 결국 풀려났다.
스탈린 시대 소련 방첩의 핵심 인물로, 29세에 NKVD에 투신하여 빠르게 승진했다. 1946년부터 1950년까지 MGB 제2총국(방첩) 국장을 맡아 전후 소련 방첩 체계를 이끌었고, 1950년 국가보안부 차관이 되었다. 1951년 '아바쿠모프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투옥되었으나 끝내 자백하지 않았고, 스탈린 사후 복권되어 1953년 초 MGB 제1총국(해외정보) 국장으로 소련 대외정보를 지휘했다. 이후 동독과 중국에서 KGB 고문으로 활동했고, 1962년부터 KGB 고등학교장을 지냈으며, 말년에는 소련 상공회의소 의장(1983–1988)으로서 무역 외교와 산업 스파이 활동을 조율했다.
체포 후 진술: '나와 수사관 10명이 레닌그라드로 갔다… 아바쿠모프가 엄중히 경고했다. 재판에서 즈다노프의 이름이 언급되어선 안 된다. 목숨을 건다고.'
1938년부터 NKVD에서 복무한 보안 요원으로, MGB 특별중요사건 수사부 차장(대령)까지 올랐다. 레닌그라드 사건 수사에서 아바쿠모프의 핵심 집행자로 활동하며 피의자들을 직접 구타하고, 부하 수사관 푸틴체프의 조서 조작을 승인·지휘했으며, 재판 전 피고인들에게 위증을 강요하는 리허설까지 주관했다. 1951년 아바쿠모프와 함께 체포되었고, 스탈린 사후 레닌그라드 사건 조작 혐의로 1954년 사형 선고를 받고 레바쇼보에서 총살되었으며, 현재까지 복권되지 않았다.
1982년 1월 19일, 수슬로프와의 격렬한 대면 후 다차 서재에서 권총 한 발. 당일 소집된 의사들은 심장마비로 사망진단서를 썼다.
우크라이나 농민 가정 출신으로 역사 교사에서 NKVD에 입문해 몰다비아에서 브레즈네프의 신임을 얻었고, 1967년 KGB 제1부의장 겸 제5국장으로서 반체제 인사 탄압을 총괄했다. 1982년 1월 의문의 권총 사망은 수슬로프의 급서와 안드로포프의 당직 이동, 브레즈네프의 사망으로 이어지며 크렘린 권력 구도의 분수령이 되었다.
소련 국경군 사상 최초로 대장 계급에 오른 수장이었던 마트로소프는, 아프가니스탄 전쟁 중 직접 국경 부대를 방문해 작전을 조율했다. 훗날 국경군 원로들은 그를 '국경군 역사상 가장 뛰어난 지휘관'으로 꼽았다.
스몰렌스크 지방 시골 교사 가정 출신으로, 1938년 NKVD 국경군에 입대해 이란 접경에서 복무하다 독소전쟁 발발 후 카렐리야 전선에서 핀란드군 후방으로 10차례의 장거리 정찰을 감행했다. 1972년부터 1989년까지 KGB 국경군 총사령관을 지내며 소련 국경수비대 역사상 최장기 지휘관으로 군 복무했고, 국경군 수장 최초로 대장 계급에 올랐다. 안드로포프·페도르추크·체브리코프 3대 KGB 의장 아래에서 아프가니스탄 북부 국경 작전을 직접 지휘했으며, 소련 전 국경의 군사화를 총괄한 국가보안 기관의 핵심 군사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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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1941NKVD 국경군 입대, 아제르바이잔 렌코란 분견대에서 이란 국경 경비
1941–1944모스크바 방어전 참전 후 카렐리야 전선에서 정찰 장교로 10차례 핀란드군 후방 정찰
1948–1963국경군 본부에서 참모 경력, 북부·자캅카스 국경관구 근무
1967–1972국경군 참모장 겸 제1부사령관
1972–1989KGB 국경군 총사령관 (1984년부터 KGB 부의장 겸직), 아프가니스탄 국경 작전 지휘
KGB 도청 부서가 감청 중인 스위스 주재원의 전화에 누군가 망을 봐주었다. 추적 결과, 발신자는 다름 아닌 제1총국장 모르틴 자신이었다. 그는 그해 휴가를 떠난 뒤 다시는 루뱐카로 돌아오지 못했다.
시골 학교 교사와 군 정치장교를 거쳐 KGB 제1총국(PGU) 제1부국장으로 13년간 복무한 후 1971년 수장이 된 소련의 첩보 장군이다. 사하롭스키의 오른팔로서 냉전기 대외첩보의 실무를 지휘했으며, 본인이 총국장이 된 후로는 PGU 본부를 야세네보로 이전하고 과학기술 첩보의 조직적 확대를 추진했다. 브란트 정부와의 비밀 채널이 가동되던 데탕트 초기 소련의 해외 정보활동을 총괄했으나, 불과 2년 반 만에 부하 간부를 감청에서 보호하려 한 전화 한 통으로 크류치코프에게 자리를 넘겨주고 물러났다.
1943년 말 키이우 서쪽에서, 야코블레프는 자신의 대전차포 대대와 두 개의 대전차소총 소대로 50대의 적 전차를 포위사격으로 맞아 17대를 격파하고 공세를 저지했다.
소련 내무부(MVD) 내부군 총사령관을 1968년부터 1986년까지 18년간 역임한 육군대장이다. 스타브로폴의 코사크 가정에서 태어나 1939년 붉은 군대에 입대, 위대한 조국전쟁에서 중위에서 소령까지 진급하며 여섯 개의 전투훈장을 받고 세 차례 부상당했다. 내부군 사령관으로서 영토 기반의 준군사 조직을 항공·해상 부대까지 갖춘 기동타격 부대로 재편하고 특수차량화경찰부대와 지역 사령부 체계를 도입했으며, 체르노빌 원전 사고 당시 1만 5천 명의 병력을 동원해 오염 구역 경계 작전을 직접 지휘했다. 1986년 12월 우파 공항에서 내부군 호송연대 병사들이 여객기를 납치해 여러 명을 살해한 사건의 책임을 지고 해임되었으나, 말년까지 내부군 고문과 참전용사협의회에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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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1940케메로보 박격포·포병학교 졸업, 소련-핀란드 전쟁 참전 (부상)
1941–1945대조국전쟁: 소대장→대대장, 중위→소령, 6개 전투훈장, 3차례 부상
1949–1958스탈린 기갑군사학교·참모대학 졸업, 독일 주둔군 전차연대장, 루마니아 주둔 사단장
그리고렌코가 직접 조직하고 수행한 SMERSH 라디오 게임은 181건에 달했다 — '자가드카(수수께끼)', '투만(안개)' 등 암호명으로 압베어와 체펠린을 교란하며 독일군 사령부에 허위 정보를 주입했다.
그리고리 그리고렌코는 소련 방첩 기관의 중추를 40년 넘게 떠받친 인물이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SMERSH에서 181건의 라디오 게임을 직접 수행하며 압베어와 체펠린을 상대로 기만 작전을 지휘했고, 이후 MGB와 KGB로 이어지는 방첩 부서에서 경력을 쌓았다. 1970년부터 1983년까지 KGB 제2총국장을 맡아 CIA와 서방 정보기관의 심층 침투 요원들을 연쇄 적발하는 체계를 구축했으며, 1978년부터는 KGB 부의장을 겸임하며 유리 안드로포프의 핵심 측근으로 활동했다. 그의 방첩 시스템은 외국 정보기관의 모스크바 거점을 수년간 마비시켰고, 소련 붕괴 후에도 러시아 방첩의 방법론적 토대로 남았다.
1982년 12월 내무장관으로 부임한 페도르추크는 첫 확대 합동회의를 내무부 청사가 아닌 루뱐카의 KGB 건물에서 소집했다. 한 장성은 훗날 '그는 떠날 생각이 없었다'고 회고했다.
우크라이나 빈농 가정 출신의 군 방첩 장교로, 할힌골 전투와 모스크바 방어전에서 실전을 겪은 뒤 SMERSH와 KGB 군 방첩 계통에서 경력을 쌓았다. 1970년부터 12년간 우크라이나 KGB 의장으로 공화국 보안기관을 이끌며 브레즈네프 후기 내내 자리를 지켰고, 안드로포프가 서기장이 되자 소련 KGB 의장을 이어받았다. 그러나 7개월 만에 내무장관으로 이동해 약 9만 명의 경찰 간부를 부패 혐의로 해임하는 숙정을 단행했으며, 1986년 고르바초프에 의해 해임되었다.
서방에 5천여 건의 소련 미사일 기밀을 넘겨 쿠바 위기에서 흐루쇼프의 허세를 벗긴 GRU 대령
런던의 안전가옥에서 펜콥스키는 미국과 영국 육군 대령 군복을 차례로 입어보고 사진을 찍으며 '언젠가 이 제복을 진짜로 입게 될 날'을 말했다.
GRU 대령으로 근무하던 중 흐루쇼프 체제에 환멸을 느껴 1961년 MI6와 CIA에 자진 접촉했다. 18개월간 소련의 대륙간탄도미사일 실태, 쿠바 미사일 기지 배치도, 군사교리 등 5천여 건의 기밀문서를 서방에 넘겼다. 그의 정보는 소련의 미사일 전력이 흐루쇼프의 위세와 달리 서방에 크게 뒤처져 있음을 케네디에게 확신시켜, 쿠바 미사일 위기에서 미국이 강경하게 대응할 근거가 되었다. 1962년 10월 KGB에 체포되어 이듬해 공개재판 끝에 총살형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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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1939제2키예프 포병학교 졸업, 소위 임관
1939–1945폴란드 침공·겨울전쟁·독소전 참전, 두 차례 부상, 제1우크라이나 전선군 포병사령관 부관
1945–1948프룬제 군사아카데미 졸업, 30세에 대령 진급
1949–1953군사외교아카데미 졸업, GRU 제4(중동)국 배속
1955–1956주튀르키예 소련대사관 무관보 겸 GRU 거주자
1960–1962국가과학기술위원회 대외관계국 부국장으로 위장 근무하며 GRU 활동
1961.4–1962.10MI6·CIA 이중첩보원, 런던·파리·모스크바에서 5천여 건 기밀 전달
브레즈네프부터 고르바초프까지 소련 검찰을 이끈 법률가, 사하로프에게 추방령을 전달한 검찰총장
1980년 1월 22일, 레쿤코프는 사하로프 앞에서 최고회의 칙령을 낭독했다: 사회주의 노동영웅 칭호와 모든 국가 훈장을 박탈하며, 폐쇄도시 고리키로 추방한다.
돈 강 유역의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중상을 입은 후 검찰에 투신했다. 로스토프 지역 검사를 거쳐 1976년 소련 검찰 제1부총장, 1981년 루덴코의 후임으로 검찰총장이 되었다. 안드로포프 시기에는 '우즈베크 면화 사건'과 통상부 비리 수사를 진두지휘하며 대규모 반부패 캠페인을 주도했고, 1980년에는 사하로프에게 국가 훈장 박탈과 고리키 추방을 직접 통고했다. 퇴임 후에는 정치적 탄압 피해자 재활 부서에서 일하며 소련 검찰 제도의 복잡한 유산을 몸소 구현했다.
1941년 포위 중 탈출을 이끌며: "동무들, 나는 군 방첩 요원이다! 내가 돌파를 조직할 것이다. 겁먹고 항복하려는 자는 조국이 내게 준 권한으로 사살하겠다."
소련의 군사방첩 지도자. 의료 교육을 받고 1939년 붉은군대에 입대했으며, 독소전 발발 직전 국가보안기관에 배속되어 전선에서 NKVD 특별부서와 스메르시에서 복무했다. 전후에는 주로 소련군 주독 집단군(GSFG)과 극동군관구에서 군 방첩 요원으로 경력을 쌓았고, 1970년 KGB 제3국장에 올라 소련 전군의 특별부서(오소비스트)를 총괄했다. 1973년 게오르기 치네프 KGB 부의장과의 갈등으로 해임된 뒤 다시 GSFG 특별부서장으로 복귀했으며, 1981년 이후 국가계획위원회 안보 고문을 지냈다. 퇴역 후 군 방첩사에 관한 회고록을 저술했고 100세까지 생존했다.
「나는 곧바로 알아챘다 — 더 가까운 사람을 찾고 있다는 걸. 물론 그랬다. 개인적으로 충성하는 사람이 필요했던 것이다…」 1966년 연방 MOOP 수장 자리에서 밀려난 뒤.
바딤 티쿠노프는 셸레핀의 콤소몰 인맥을 타고 KGB 부의장(1959~1961)을 거쳐 러시아공화국 내무장관(1961~1966)을 지낸 소비에트 국가보안·내무 관료다. 흐루쇼프가 연방 MVD를 폐지한 공백기 속에서, 그는 RSFSR 치안 체계를 실질적으로 이끌며 경찰의 날 제정, 무임승차권, 그리고 소련 경찰 사상 처음으로 고무곤봉·수갑·최루가스 도입을 관철했다. 1966년 브레즈네프가 연방 MOOP을 부활시키며 측근 니콜라이 셸로코프를 수장으로 앉히자 밀려났고, 이후 상부볼타·카메룬 대사로 좌천되었으며 재임 중 야운데에서 사망했다.
1979년 12월 카불, 슈토름-333 작전 개시 후 상황을 전혀 몰랐던 주아프간 소련 대사 타베예프가 전화로 해명을 요구하자, 키르피첸코는 "지금 너무 바빠서 통화할 수 없습니다. 아침에 보고드리겠습니다"라고 답하고 끊었다.
키르피첸코는 KGB 제1총국(대외정보)의 첫 번째 부국장으로서 1979년부터 소련 붕괴까지 12년간 소련의 해외 첩보 활동을 실질적으로 지휘한 인물이다. 모스크바 동양학대학 아랍어과를 수석 졸업한 후 1954년 이집트 부주재관으로 정보 경력을 시작했으며, 수에즈 위기와 욤키푸르 전쟁을 카이로 현장에서 목격했다. 1979년 12월에는 카불에 직접 파견되어 하피줄라 아민 축출 작전의 정보 부문을 지휘했고, 이후 고르바초프 시기 글라스노스트가 외국 정보기관의 활동을 용이하게 만들고 있다고 경고했다. 은퇴 후 6권 분량의 《러시아 대외정보사》 편찬을 주도하며 소련 정보기관의 공식 기억을 정리하는 작업에 헌신했다.
체브리코프는 죽기 1년 전 러시아 TV 인터뷰에서 KGB 시절을 이렇게 변호했다. "나는 과거를 얼려버리는 시각에 반대합니다."
2차대전에서 세 차례 부상당하며 대대장까지 오른 전투 장교 출신으로, 드니프로페트로우시크 당 간부를 거쳐 1967년 안드로포프의 부름으로 KGB에 합류했다. 1982년부터 6년간 KGB 의장을 맡아 알드리치 에임스의 정보를 활용한 대미 첩보전과 우즈베키스탄 부패 수사를 동시에 진두지휘했다. 1985년 정치국 정위원이 되었으나 페레스트로이카의 속도에 반대하며 리가초프 계열에 섰고, 1988년 해임되었다.
1984년 8월 RYaN 회의에서 그는 서방의 핵공격 징후보다 ‘실제 상황’을 파악해야 한다는 문제를 제기했다.
마르쿠스 볼프는 나치 박해를 피해 소련으로 망명한 뒤 독일민주공화국의 대외정보기관을 이끈 공산주의 관료이자 정보 책임자였다. 그는 1952년부터 1986년까지 슈타지 해외정보국 HVA를 지휘하며 서독 정치·군사·경제를 겨냥한 첩보와 공작을 조직했다. 1980년대 초 소련이 핵 선제공격 공포 속에서 RYaN 작전을 확대하자, 볼프는 협력을 유지하면서도 현장 정보가 실제 상황을 파악해야 한다는 긴장을 드러냈다. 독일 통일 뒤 그는 해외 망명과 재판을 거쳤고, 자신의 국가보안 활동에 대한 책임과 사회주의의 개혁 가능성을 회고록과 공개 발언으로 다뤘다.
페레스트로이카 시기 소련의 마지막 개혁 검찰총장, 스탈린 탄압 피해자 재활을 감독한 법률가
1988년 검찰총장 취임 후 수하레프는 이렇게 말했다: "검사는 민중의 삶에 더 가까이 다가가야 합니다." 그가 지휘한 검찰은 페레스트로이카 시기 수십만 명의 정치적 탄압 피해자에 대한 재활 심사를 추진했다.
보로네시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10대에 항공 공장 선반공으로 일하다 18세에 전선으로 나갔다. 통신장교로 모스크바에서 비스와 강까지 진격하며 4개의 전투 훈장을 받고, 1944년 폴란드 나레프 강 도하 작전에서 중상을 입었다. 전역 후 콤소몰과 당 중앙위원회 기구에서 사법·검찰 분야를 담당하며 법률가로 성장해, 1970년 재창설된 소련 법무부의 제1차관으로 발탁되었다. 1988년 고르바초프에 의해 검찰총장으로 임명되어 스탈린 시대 정치 탄압 피해자들의 대대적인 법적 재활을 추진했고, 1990년 퇴임 후에도 러시아 검찰 산하 연구소를 이끌며 법치 강화와 형사사법 개혁에 평생을 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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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1944제69소총병사단 통신소대장·중대장·연대통신주임, 대위
1947–1950콤소몰 보로네시 철도지구위 서기, 보로네시 주위원회 부장
1950–1959콤소몰 중앙위원회 국제부 지도원·부장·국제부장
1959–1966CPSU 중앙위원회 행정기관부 지도원·RSFSR 담당 부부장
1966–1970CPSU 중앙위원회 행정기관부 검찰·법원·사법 부문장
1970–1984소련 법무부 제1차관
1984–1988러시아 SFSR 법무장관
1988.2–1988.5소련 검찰 제1부총장
1988–1990소련 검찰총장
1991–2006러시아 연방 검찰청 산하 합법성 및 법질서 강화 연구소 부소장·소장·주임연구원
1958년 콤소몰 40주년 대회에서 파스테르나크를 두고 “돼지는 자신이 먹는 곳에 더럽히지 않는다. 파스테르나크는 돼지도 하지 않을 짓을 했다”라고 연설했다. 이 발언으로 파스테르나크는 노벨문학상을 거부했다.
콤소몰에서 두각을 드러낸 셸레핀의 측근으로, 37세에 소련 사상 최연소 KGB 의장이 되었다. 1958년 파스테르나크를 '돼지'에 비유한 연설로 악명을 얻었고, 1964년 흐루쇼프 축출에서 보안·통신·경호를 장악해 쿠데타의 물리적 기반을 제공했다. 이후 브레즈네프가 셸레핀 계열을 약화시키며 우크라이나 직책으로 밀려났고, 결국 변방의 대중교육 단체에서 경력을 마감했다.
1991년 6월 17일, 최고소비에트 비공개 회의에서 크류치코프는 개혁파 내부에 서방의 '영향력 공작'이 침투했다고 경고하며 내각에 비상대권을 부여하라는 파블로프 총리의 요구에 동참했다. 두 달 뒤 그가 조직한 쿠데타는 사흘 만에 무너졌고, KGB 의장은 모스크바 경찰학교 생도들에게 체포되었다.
1956년 부다페스트의 안드로포프 밑에서 경력을 시작해 KGB 의장까지 오른 심복. 1991년 8월 국가비상사태위원회를 조직해 고르바초프를 크림에 연금했으나, 군이 움직이지 않자 쿠데타는 사흘 만에 무너졌다. 감옥에서 회고록을 썼고, 1994년 사면되어 조용히 죽었다. 그가 지키려던 나라보다 16년을 더 살았다.
옐친 회고록: KGB 국장이 '당과 우호 협력한다'고 하자 피로시코프가 '코르닐로프 장군, 일어서! 당 기관의 지도 아래 일할 의무가 있다는 것을 명심하시오.'
1942년 18세에 자원입대하여 민스크·바르샤바 해방과 베를린 공방전을 거쳐 베를린 전승 퍼레이드에 참가한 전쟁 세대. 전후 알타이 지역에서 콤소몰과 당 간부로 올라 1968년 제2서기까지 지낸 뒤, 정치국의 결정으로 KGB에 배치되어 인사국장과 당위원회 서기를 거쳐 1971년부터 1991년까지 부의장직을 수행했다. 안드로포프·페도르추크·체브리코프·크류치코프 4대 의장 아래에서 거의 20년간 자리를 지킨 유례없는 장기 재임자로, KGB 인사정책과 구조 정비, 대테러 작전(알파 그룹 지휘·감독)을 총괄했으며 퇴역 후에는 FSB 재향군인회를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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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1945자원입대, 316근위박격포연대에서 민스크·바르샤바·베를린 전투, 베를린 전승 퍼레이드 참가
작전 직전 유리 안드로포프가 전화로 말했다. "우리도 원하지 않네. 하지만 해야만 하네." — 1979년 12월 27일, 아민 궁전 습격을 앞두고
소련의 대표적 정보장교로, 1956년 KGB에 입문한 후 동독·중국·미국에서 활동하며 냉전기 소련의 해외정보망을 구축했다. 1979년부터 1991년까지 KGB 제1총국 산하 불법정보국(S국)을 지휘하며 위장 신분으로 침투한 '불법 요원' 네트워크를 총괄했다. 1979년 12월 아프가니스탄 아민 대통령궁을 43분 만에 제압한 특수작전 '폭풍-333'을 지휘해 소련-아프간 전쟁의 서막을 열었고, 이 경험을 바탕으로 1981년 KGB 정예 특수부대 '빔펠'을 창설했다. 1962년 글리니케 다리에서 루돌프 아벨과 프랜시스 게리 파워스의 포로 교환을 성사시키기 위해 아벨의 '독일인 사촌'으로 위장한 일화로도 유명하다.
「우리 KGB가 페레스트로이카에 상당히 기여했다. 그것 없이는 소련이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소련 국가보안기관에서 45년간 12명의 기관장 아래 근무한 봅코프는 KGB 제5총국장으로서 반체제 인사·종교·민족주의 운동을 감시·탄압하는 이념방첩 체계를 설계했다. 만년에는 사하로프 추방에 대한 책임을 인정했으며, 소련 붕괴 후 올리가르흐 구신스키의 모스트 그룹 분석부를 이끌었다.
「러시아가 힘의 논리로 대화할 수 있는 나라가 아니라는 것을 세계에 처음으로 보여준 순간」 — 프리마코프의 대서양 회항에 대한 러시아 정치학자들의 평가
소련 최고의 아랍 전문가이자 정보·외교·정치를 가로지른 실용주의자. 《프라우다》 중동 특파원을 거쳐 IMEMO와 동양학연구소 소장을 지냈고, 1989년 정치국 후보위원이 되었다. 1991년 KGB 제1총국장으로 소련 해체 직후 러시아 대외정보국(SVR)을 창설했으며, 외무장관 시절 '프리마코프 독트린'으로 불리는 다극 외교를 주창했다. 1999년 총리 재임 중 NATO의 유고슬라비아 폭격을 이유로 대서양 상공에서 전용기를 돌려 귀국한 사건으로 널리 기억된다.
1991년 8월 18일 오후, 야조프 국방장관이 공수군 사령관 그라초프에게 크렘린의 쿠데타 계획을 실행하라 명령하면서 덧붙였다. "KGB 부의장 그루슈코·아게예프와 협조하라."
소련 KGB에서 해외정보(PGU)와 방첩(VGU) 양대 본부를 모두 지휘한 정보 장교. 타간로크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나 MGIMO를 졸업하고 노르웨이 주재 외교관으로 출발, 1960년 KGB로 전직한 후 오슬로 주재관을 거쳐 PGU 제3(영국·스칸디나비아)부장, PGU 제1부국장으로 승진했다. 1989년 블라디미르 크류치코프 체제에서 제2총국(방첩)을 맡으며 KGB 부의장이 되었고, 1991년 1월 KGB 제1부의장으로서 작전 부문 최고위직에 올랐다. 같은 해 8월 국가비상사태위원회(GKChP) 쿠데타에 가담했다가 체포되었고, 구금 중 두 차례 심장마비를 겪은 뒤 건강 악화로 석방되어 1994년 사면되었다.
고르바초프의 회고: 「옐친은 누군가 옆에서 도청하는 듯 불편해했다. 그의 직감은 틀리지 않았다. 9국장 플레하노프가 그 방을 준비한 것이다.」
안드로포프의 개인 비서로 출발해 KGB 12부서(도청·검열)를 13년간 지휘한 도청 전문가. 크류치코프의 지시에 따라 1991년 7월 29일 노보오가료보 회담실을 사전 도청 장비로 세팅했고, 고르바초프·옐친·나자르바예프의 강경파 교체 밀약이 녹음되어 쿠데타 세력에 전달되면서 8월 쿠데타의 뇌관이 되었다. 쿠데타 당일에는 포로스 별장으로 날아가 공모자들을 고르바초프 앞에 들여보냈고, 실패 후 체포되어 1994년 사면되었다.
내무부에서 블라소프를 부르던 별명은 「티샤이시」였다 — 가장 조용한 자. 조직범죄를 방치한다는 비판 속에서도 그는 아무 말 없이 자리를 지켰다.
부랴티야의 광산 기술자 출신으로 콤소몰과 당 기구를 거쳐 체첸-인구시 공화국과 로스토프 주의 당 제1서기를 지낸 전형적인 소비에트 당 관료였다. 1986년 1월 내무장관에 임명되어 특수경찰부대 OMON을 창설했으나, 조직범죄 대응에 소극적이란 비판을 받으며 2년 8개월 만에 바카틴으로 교체되었다. 1988년 10월 RSFSR 각료회의 의장(총리)으로 옮겼고, 1990년 5월 최고소비에트 의장 선거에서 보리스 옐친에게 535 대 467로 패배했다. 개혁의 소용돌이 속에서 구당 조직의 적응 논리를 체현했으나 결국 양쪽에 밀려난 인물이다.
1991년 8월 19일, GKChP 쿠데타가 시작되던 날, 셰바르신은 하루 종일 테니스를 치며 '시위적으로' 거리를 두었다.
소련 KGB 제1총국의 마지막 국장으로, 파키스탄·인도·이란에서 수십 년간 현장 경험을 쌓은 직업 정보장교였다. 1991년 8월 쿠데타에 거리를 두었고 실패 후 하루 동안 KGB 의장 대행을 맡았으나 보리스 옐친의 반대로 바딤 바카틴으로 교체되었으며, 퇴역 후 회고록을 통해 소련 대외정보의 마지막 순간을 증언했다.
체포되기 몇 시간 전, 유서에 이렇게 썼다: 「나는 정직하게 살았다 — 평생을.」 아내와 함께 권총으로 생을 마감했다.
라트비아인 공산주의자 집안 출신으로 라트비아 KGB 의장과 라트비아 공산당 제1서기를 거쳐 1990년 소련 내무장관까지 오른 보수 강경파로, 범죄·민족분규 격화 속에서 강경 법질서 노선을 고수했다. 1991년 8월 쿠데타(GKChP)에 가담했고, 실패 후 체포 직전 권총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체키즘의 전통은 근절되어야 하며, 이데올로기로서 존재를 멈춰야 한다」 — 1992년 회고록 『KGB로부터의 해방』에서, 루뱐카를 해체한 마지막 의장이 남긴 선언.
건설기사 출신으로 고르바초프의 신임을 받아 소련 내무장관(1988–1990)과 마지막 KGB 의장(1991년 8월–11월)을 지냈다. 8월 쿠데타 실패 후 크류치코프의 후임으로 KGB를 맡아 외부정보·통신·국경수비대를 분리하고 기관을 해체하는 임무를 수행했으며, 남은 조직을 대통령 직속의 소규모 정보기관으로 재편했다. 1991년 12월 미국 측에 모스크바 대사관 도청 장치의 설계도를 넘겨 보수 진영으로부터 '매국'이라는 맹비난을 받았다.
소련·우크라이나·러시아 3개국 보안기관을 두루 거친 KGB 우크라이나 공화국 KGB의 마지막 의장
그는 회고록 제목처럼 소련·우크라이나·러시아 3개국 보안기관에서 근무했다. 1994년 10월 사태 관련자 사면을 막으라는 옐친의 요구를 거부하고 “러시아 장교로서 국민에게 한 맹세를 지켰다”며 사임했다.
소련 국가보안기관에서 경력을 쌓아 우크라이나 공화국 KGB의 마지막 의장(1987–1991)을 지낸 인물이다. KGB 제5총국(이념적 방첩 및 반체제 탄압)에서 오래 근무하며 민족주의 감시와 반소 활동 단속을 전담하다가, 페레스트로이카기 우크라이나 공화국 보안기관 수장으로 발탁되었다. 소련 해체 후에는 잠시 독립 우크라이나의 국가안보국(SBU)을 이끌었고, 이후 러시아로 옮겨 보안장관과 연방방첩국(FSK) 국장을 역임하며 3개국 보안기관에서 근무한 특이한 이력을 남겼다. 러시아 보안장관 시절 1993년 10월 사태 수감자 사면 문제로 옐친 대통령과 갈등하다 사임하였으며, 회고록 『3개국의 특별기관에서』를 남겼다.
PR 계열 동료들은 랴얀(РЯН) 작전에 회의적이었지만, 아무도 제1총국의 평가에 이의를 달아 중앙에서 체면을 잃고 싶어 하지 않았다.
서방으로 망명한 KGB 장교 중 최고위 인물로, 제1총국 대령이자 1974년부터 11년간 MI6의 정보원 '오베이션(Ovation)'으로 이중 활동했다. 런던 주재관으로서 랴얀(РЯН) 작전과 1983년 에이블 아처 훈련에 대한 소련 지도부의 경계를 영국·미국 정보기관에 전달한 핵심 정보원이었고, 이 증언은 1983년 핵전쟁 위기를 낮추는 데 기여한 것으로 평가된다. CIA 내통자 올드리치 에임스에게 배신당해 모스크바로 소환되어 약물 심문을 받다가 1985년 외교 차량 트렁크에 실려 탈출했고, 궐석 재판에서 반역죄 사형을 선고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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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모스크바 국제관계대학(MGIMO) 졸업, KGB 제1총국 S국(비합법 첩보) 입직
1966–1970코펜하겐 KGB 레지덴투라 장교 (영사부 위장)
1972–1978코펜하겐 부레지던트(정치정보), 1976년 레지던트 대행
1978–1982제1총국 영국·스칸디나비아부 근무
1982–1985런던 레지덴투라 (대사관 참사관 위장), 1984년 부레지던트, 1985년 레지던트 대행
벨로루시 출신의 소련 군사법률가로, 1987년 소련 부검찰총장에 임명되어 우즈베키스탄 등 주요 부패사건 수사를 지휘했다. 그러나 그의 이름이 역사에 남은 것은 1988년 2월 27일 중앙텔레비전 방송에서 아스케란 인근 충돌로 사망한 두 아제르바이잔인 청년의 이름과 국적을 거론한 순간이다: 이 발표는 몇 시간 뒤 숨가이트 포그롬의 직접적 방아쇠가 되었다. 1989년부터 주임군사검사로 재임하며 판필로프 28영웅 신화의 허구성을 폭로했으나, 8월 쿠데타 이후 강제 퇴진당했다.
예브도키모프가 1934년 국가정치국 안의 '자기 사람'으로 거명한 '북캅카스파' 체키스트로, 1936년 여름부터 체첸(체첸-인구시)의 NKVD를 맡았다. 쿨라크 작전에서 평균을 웃도는 숫자를 제안한 지역 책임자 가운데 하나로 나우모프의 명단에 오르내린다. 극동 개편 뒤인 1938년 8월 국가보안소령으로 연해주 NKVD 국장이 되었으나, 예조프 몰락과 함께 그 자리에서 물러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