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세볼로드 니콜라예비치 메르쿨로프

Всеволод Николаевич Меркулов
소련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95–1953 ✕ 처형

카틴 명령에 첫 번째로 이름을 올린 NKGB 수장, 필명으로 희곡을 쓴 사람

1953년 7월 21일 증인 신문에서 그는 베리야가 남의 저작에 자기 서명을 올린 일을 두고 “표절도 아니고 그 이상이다”라고 말했다. 문학적 명예에 선을 그은 그 손은 폴란드인 이만여 명의 사형 명단에는 선을 긋지 않았다.

베리야 측근 가운데 가장 교육받은 사람이자 십 년간 그의 실무를 대신한 손이었다. 1921년 9월 그루지야 체카에 들어가 1923년 베리야에게 발탁되었고, 1938년 12월 NKVD의 이인자가 되었다. 1940년 3월 정치국이 폴란드인 포로 21,857명을 심리도 기소도 없이 처결할 트로이카를 지정했을 때 결정문 첫머리에 적힌 이름이 그였다. 1943년 독일이 카틴 무덤을 발견하자 이를 독일 소행으로 돌릴 부르덴코 위원회의 예비조사를 지휘했다. 집행한 자가 부인까지 조직한 셈이다. 두 차례 국가보안인민위원을 지냈고, 브세볼로드 로크라는 필명으로 희곡을 썼다. 1953년 12월 23일 소련 최고재판소 군사재판부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같은 날 총살됐으며 복권되지 않았다.

주요 활동과 소속

경력 연표

관련 역사 사건

카틴 학살 — 집행에서 은폐까지

1940년 3월 5일, 베리야는 스탈린에게 폴란드 전쟁포로 14,700명과 서부 우크라이나·벨라루스의 폴란드인 수감자 11,000명을 재판 없이 총살하자고 제안했다. 정치국이 이를 승인하자, 사형 선고를 신속히 처리할 NKVD 트로이카가 구성되었다. 베리야의 제1차관이던 메르쿨로프는 보흐단 코불로프, 레오니트 바슈타코프와 함께 트로이카를 이루어, 피고인 소환도 기소도 없이 명단만으로 22,000명 전원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이 작전으로 카틴 숲 등지에서 폴란드 장교·지식인들이 대량 학살되었으며, 이는 스탈린 시대 최대 규모의 단일 국가범죄 중 하나로 기록된다.

1943년 봄, 나치 독일이 카틴에서 집단 무덤을 발견하여 소련의 범행을 국제사회에 폭로하자, 메르쿨로프는 은폐 작전을 지휘하게 된다. 그는 '카틴 사건 예비조사 특별위원회'(일명 부르덴코 위원회)를 이끌며 증거를 조작하고 목격자들을 위협해 독일군 탓으로 돌리는 허위 보고서를 1944년 1월 공식 발표했다. 소련은 1990년까지 이 위조된 서사를 고수했다. 카틴 학살의 집행과 은폐 모두 메르쿨로프의 손을 거친 셈이다.

몰락과 말년, 1946–1953

1946년 5월 4일 국가보안인민위원부(MGB)가 개편되고 아바쿠모프가 국가보안장관으로 메르쿨로프를 대신하자, 인계 과정은 굴욕적이었고 아바쿠모프는 그의 실적을 깎아내리려 했다. 당 문서는 수사와 요원 사업의 실패를 지적했는데, 국가보안이 간첩보다 '반소련 요소'를 더 많이 다루었다는 것이었다. 1945년 미국 내 소련 첩보망의 실패도 그에게 불리하게 작용했다. 1946년 8월 그는 당 징계로 중앙위원회 정회원에서 후보위원으로 강등되었다.

1946년 6월 스탈린에게 보낸 편지에서 메르쿨로프는 스탈린이 자신을 '소심하다'고 평한 말을 받아들이며, 자신의 잘못이 스탈린 앞에서의 소극적 태도에서 비롯되었다고 적었다. 전화하거나 편지를 쓰는 것이 부끄러워 여러 경우에 보고하지 않았거나, 즉시 보고해야 할 사안을 '부드러운 형태로' 보고했다는 것이다. 이는 문서로 남은 자기 평가다.

MGB 자리에서 물러난 뒤 그는 1946년 8월 대외무역부 산하 대외 소비에트재산총국(GUSIMZ) 부국장으로 임명되었고, 1947년 4월 GUSIMZ가 각료회의 직속 독립 총국이 되면서 그 국장이 되었다. 그는 1950년 10월까지 그곳에서 일했다. 전리품의 반출을 처리하는 기구였으며, 패전한 독일에서 자동차를 실은 철도 차량과 회화, 골동품, 가구가 주로 최고 지도부를 위해 소련으로 반입되었다. 메르쿨로프는 훗날 스탈린이 해외 파견을 제안했다고 말했고, 국가보안장관처럼 높은 직위에서 물러난 뒤의 해외 발령을 신뢰의 표시로 읽었다고 했다.

1950년 10월 스탈린은 그를 소련 국가통제장관으로 임명했다. 그는 '1946년 MGB에서 해임된 뒤 거의 복권된 기분이었다'고 회고했고, 1952년 10월 제19차 당대회에서도 중앙위원회 후보위원 자리를 유지했다. 국가통제장관 재임 시기는 출처에 따라 1950년 10월 27일–1953년 5월 22일로도, 1953년 12월 16일까지로도 기록되어 있어 확정하지 않고 병기한다. 1946년부터 스탈린이 죽을 때까지 그는 베리야를 만나지 못했다. 각료회의에 두 번 찾아갔으나 면담이 이루어지지 않았고, 베리야가 더 이상 자신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해했기에 원망하지 않았다.

건강 문제도 있었다. 1952년 첫 심장마비를 겪고 넉 달 뒤 두 번째 심장마비를 겪어 오래 입원했으며, 1953년 5월 22일 소련 각료회의가 건강을 이유로 네 달의 휴가를 허가했다. 스탈린 장례 전날 베리야는 그를 불러 추도 연설문을 함께 다듬게 했는데, 베리야는 명랑하게 농담하고 웃으며 들떠 있었고 메르쿨로프 자신은 스탈린의 죽음에 무너져 있었다. 그는 그것을 정치가의 자제력으로 해석했다. 1953년 3월 11일 그는 베리야에게 국가통제장관직을 내려놓고 MVD의 어떤 자리든 맡겠다는 편지를 썼다.

그러나 1953년 9월 18일 그는 체포되었고, 베리야와 함께 설 사람들 가운데 마지막이었다. 부티르카의 독방에 수감되었으며 심문 조서는 9월 19·21일과 10월 8·23일자로 남아 있다. 11월 18일 당 지명투표로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직에서 해임되었고, 12월 16일 '소련 검찰이 MGB·MVD 근무 시절 메르쿨로프의 범죄적 반국가 행위를 밝혀냈기 때문에' 장관직에서 공식 해임되었다. 이는 기존 카틴 절과 구별되는, 문서로 확인되는 체포·구금 단계다.

베리야의 1953년 7월 23일 심문 조서에는 수사관이 메르쿨로프의 7월 21일 증인 진술을 낭독하고 베리야가 표절을 부인하는 대목이 있다. 메르쿨로프는 그 진술에서 베리야가 남의 저작에 서명한 일을 두고 '표절도 아니고 그 이상'이라고 말했다. 이 진술은 말년 국면의 문서적 전사(前史)에 속한다.

최후 진술에서 메르쿨로프는 '반혁명적 조항'을 빼고 형법의 다른 조항으로 재판해 줄 것을 요청했으며, 자신을 망친 베리야와의 친밀함을 후회했다. '나는 그를 위해 많은 일을 했고 도왔지만, 베리야를 정직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가족도 처벌받아 1954년 아내 리디야 드미트리예브나와 어머니 케테반 니콜라예브나가 카자흐 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 특별정착지로 유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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