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사건

1789–1799

프랑스 혁명

왕정의 재정 위기에서 시작해 신분 특권과 군주제를 무너뜨린 혁명. 의회·민중·농민·여성과 식민지의 투쟁, 공화국의 전쟁과 공포정치, 총재정부와 브뤼메르까지 살펴본다.

1792–1802

프랑스 혁명 전쟁

제1·2차 대프랑스 동맹전쟁의 배경과 전개. 발미·플뢰뤼스·이탈리아에서 이집트·아일랜드와 아미앵까지, 군사 작전과 동원·점령·해방의 모순을 함께 다룬다.

1870–1871

파리 코뮌

프로이센과의 전쟁에서 제2제정이 무너지고 파리가 넉 달 동안 포위된 뒤, 왕당파 다수의 국민의회와 무장한 파리 국민방위군이 충돌했다. 1871년 3월 18일 몽마르트르의 대포를 둘러싼 대치에서 정부가 베르사유로 물러나자 파리는 선거로 코뮌을 세웠다. 코뮌은 정교분리, 집세 면제, 노동자 협동조합 같은 법령을 내놓았지만, 5월 21~28일 「피의 주간」에 정부군에게 진압되었다.

1905–1907

1905년 혁명

피의 일요일 학살로 시작된 1905년 혁명은 대중 파업과 육해군 반란, 농민 봉기가 결합한 차르 전제에 대한 최초의 전국적 도전이었다. 투쟁 속에서 노동자들은 공장에서 선출되고 즉시 소환할 수 있는 대의원 평의회, 곧 소비에트를 발명했으며, 이 기구는 파업위원회에서 인민 권력의 기관으로 성장했다. 혁명은 1907년까지 진압됐으나, 1917년에 승리할 계급과 당을 단련시켰다.

1911–1916

신해혁명과 중화민국의 탄생

1911년 10월 우창의 신군 봉기가 각 성의 독립 선언으로 번져 청 왕조가 무너지고 아시아 최초의 공화국이 섰다. 그러나 권력은 혁명파가 아니라 북양군의 위안스카이에게 넘어갔고, 그의 제정 복고 시도와 죽음은 군벌 할거를 남겼다.

1914–1918

1차 세계대전

1914–1918년 협상국과 동맹국이 벌인 세계전쟁. 프랑스·러시아·영국 제국을 중심으로 일본·이탈리아·미국 등이 가담한 협상국이 독일·오스트리아-헝가리·오스만 제국·불가리아와 싸웠다. 전쟁은 자치령·식민지의 병력과 노동까지 동원했으며 러시아 혁명과 제국들의 붕괴로 이어졌다.

1907–1919

제2인터내셔널의 붕괴

제2인터내셔널은 1907년 슈투트가르트와 1912년 바젤에서 전쟁에 맞서겠다고 결의했다. 그러나 1914년 7월 조레스가 암살되고, 8월 4일 독일과 프랑스의 사회주의 의원들이 전쟁공채에 찬성하면서 국제 연대는 무너졌다. 소수 반전파는 리프크네히트의 반대표와 1915년 치머발트 회의로 모였고, 레닌의 치머발트 좌파는 새 인터내셔널을 요구했다.

1917.02–07

2월 혁명

1917년 2월 혁명은 페트로그라드의 여성 방직 노동자들이 세계 여성의 날에 빵과 전쟁 종식을 요구하며 시작한 파업에서 출발했다. 파업은 며칠 만에 총파업으로 번졌고, 발포 명령을 받은 수비대 병사들이 노동자 편으로 돌아서면서 차르 체제는 무너졌다. 그 결과는 단순한 정권 교체가 아니라 이중권력이었다. 공식 권한은 임시정부가 가졌지만, 노동자와 병사의 실질적 충성은 소비에트에 있었다.

1917.10–1918.01

10월 혁명

1917년 가을 코르닐로프 반란이 좌절된 뒤 페트로그라드와 모스크바 소비에트에서 볼셰비키가 다수파가 되었고, 트로츠키가 이끄는 군사혁명위원회가 수도 수비대의 충성을 확보했다. 11월 7일(구력 10월 25일)의 봉기는 페트로그라드에서 거의 유혈 없이 수도를 장악했으며, 같은 날 밤 개회한 제2차 전러시아 소비에트 대회가 권력 이양을 승인했다. 대회는 즉시 평화에 관한 법령과 토지에 관한 법령을 채택하고, 레닌을 수반으로 하는 인민위원회의(소브나르콤)를 구성했다.

1917.12–1918.11

브레스트 강화와 독일의 동방 점령

브레스트-리토프스크 강화는 군대가 사라진 소비에트 러시아가 독일과 맺은 강요된 평화였다. 1917년 12월 시작된 협상에서 혁명전쟁, 「전쟁도 강화도 아니다」, 즉시 강화의 세 노선이 당을 갈랐고, 1918년 2월 독일의 공세 뒤 레닌은 사임을 내걸고 3월 3일의 조약 수용을 관철했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발트·핀란드에 대한 권한과 인구의 3분의 1을 내주었고, 독일은 우크라이나에 헤트만 정권을 세우고 핀란드 내전에 파병하며 발트에 자국 우산 아래의 공국들을 구상했다. 11월 독일의 패전으로 조약은 폐기되었지만, 정전협정 12조로 발트에 남은 독일군과 붉은 군대, 각국 민족정부, 백군이 마주한 공백은 이듬해 국경 지대 전쟁의 무대가 되었다.

1918.10–1919.08

독일 11월 혁명

1918년 11월 킬 수병 봉기가 전국의 노동자·병사 평의회로 번져 제정이 무너지고 공화국이 선포되었다. SPD의 에베르트는 최고사령부와 손잡고 평의회를 국민의회 선거로 이끌었고, 1919년 1월 봉기와 3월 투쟁, 바이에른 평의회 공화국은 자유군단에게 진압되었다. 그 과정에서 로자 룩셈부르크와 카를 리프크네히트가 살해되었고, 8월 바이마르 헌법이 발효되었다.

1918.10–1919.08

헝가리 평의회 공화국

1918년 10월 과꽃 혁명으로 들어선 카로이의 인민공화국은 영토 상실과 경제난 속에 1919년 3월 빅스 각서로 무너졌고, 사회민주당과 공산당이 합당해 3월 21일 평의회 공화국을 선포했다. 거르버이 샨도르가 의장, 쿤 벨러가 실권자인 혁명통치평의회는 기업과 대토지를 사회화했지만 토지를 농민에게 나누지 않았고, 레닌 소년단의 적색 테러는 지지를 더 깎았다. 붉은군대는 북부 원정에서 이겼으나 클레망소 각서에 따라 물러났고, 7월 티서 공세가 실패하자 8월 1일 정부가 사퇴하고 루마니아군이 부다페스트에 들어왔다.

1917–1921

우크라이나 혁명과 전쟁

1917년 3월 키예프에 세워진 중앙라다는 연방 러시아 안의 자치에서 출발해 1918년 1월 독립을 선언했지만, 그 뒤 4년 동안 키예프의 주인은 열 번 넘게 바뀌었다. 소비에트군, 독일 점령군과 헤트만 스코로파츠키, 빈니첸코와 페틀류라의 디렉토리아, 데니킨의 백군, 폴란드군이 차례로 도시를 차지했고, 그 사이에서 흐리호리우와 마흐노의 농민군은 어느 국가에도 속하지 않는 자기 전쟁을 벌였다. 1,500건 안팎의 포그롬으로 유대인 수만 명이 살해되었다. 1920년 바르샤바 협정과 1921년 리가 조약으로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의 독립전쟁은 끝났고, 소비에트 우크라이나의 형식적 국가 지위와 볼셰비키 중앙의 실질적 통제라는 모순이 남았다.

1918–1922

내전과 열강의 개입

1918년부터 1922년까지 소비에트 공화국은 백군 장군들과 십여 개 열강의 개입군에 포위된 채 생존을 건 전쟁을 치렀다. 트로츠키가 조직한 붉은 군대는 500만 명 규모로 성장해 콜차크, 데니킨, 유데니치, 브란겔의 군대를 차례로 격파했고, 노동자와 농민 다수는 지주와 구체제의 복귀보다 소비에트 권력을 선택했다. 그러나 승리의 대가는 참혹했다. 전쟁과 기근, 전염병으로 수백만 명이 목숨을 잃었고, 양측 모두가 자행한 테러와 전시의 비상 통치는 이후 소비에트 국가의 성격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

1918.11–1920.10

발트 독립전쟁과 국경의 강화

1918년 11월 독일이 무너진 뒤 에스토니아·라트비아·리투아니아의 신생 정부는 붉은 군대, 러시아 백군, 독일 자유군단이라는 세 세력 사이에서 국가를 만들어야 했다. 영국 함대의 지원과 핀란드 의용군, 토지개혁으로 농민을 얻은 에스토니아는 1919년 초 붉은 군대를 밀어냈고, 자국 땅에서 출발한 유데니치의 북서군이 페트로그라드 앞에서 무너지자 이를 무장해제한 뒤 1920년 2월 타르투에서 소비에트 러시아의 첫 독립 승인 조약을 맺었다. 라트비아는 스투치카의 소비에트 정부, 폰 데어 골츠의 독일군과 니에드라의 친독 정부, 베르몬트-아발로프의 리가 공격을 차례로 이겨 냈고, 리투아니아는 리트벨을 물리쳤지만 폴란드에 빌뉴스를 잃었다. 1920년 한 해에 맺어진 타르투·모스크바·리가·타르투(핀란드) 조약은 소비에트 러시아의 북서 국경을 그렸으나 폴란드-리투아니아 분쟁은 남았다.

1919–1921

소비에트-폴란드 전쟁

소비에트-폴란드 전쟁은 무너진 세 제국의 국경 지대에서 부활한 폴란드와 소비에트 러시아가 1919년부터 1921년까지 벌인 전쟁이다. 선전포고 없이 1919년 2월 벨로루시에서 시작된 충돌은, 1920년 4월 피우수트스키가 페틀류라와 손잡고 키예프로 진공하면서 전면전이 되었다. 부됸니의 기병과 투하쳅스키의 7월 공세로 전세를 뒤집은 붉은군대는 혁명의 수출을 내걸고 바르샤바까지 진격했으나, 8월 바르샤바 전투에서 결정적으로 패했다. 1921년 3월 리가 조약은 커즌선보다 훨씬 동쪽에 국경을 그어 벨로루시와 우크라이나를 분할했고, 이 국경은 1939년까지 유지되었다. 바르샤바 앞에서의 패배는 총검에 의한 혁명 수출 시도의 사실상 마지막이 되었고, 소비에트 국가를 일국에서의 건설이라는 길로 돌려세웠다.

1919–1921

코민테른의 창설

1919년 3월 볼셰비키는 세계 혁명이 임박했다고 보고 모스크바에서 공산주의 인터내셔널(코민테른)을 창설했다. 1920년 제2차 대회는 21개 가입 조건과 민족·식민지 테제를 채택했고, 독일·프랑스·이탈리아의 사회주의 정당은 가입 여부를 두고 갈라져 공산당이 생겨났다. 1921년 3월 행동이 실패하자 코민테른은 「대중 속으로」와 통일전선으로 방향을 틀었다.

1915–1921

5·4 운동과 중국공산당의 창당

1915년 『신청년』이 연 신문화운동은 유교와 낡은 문체를 공격했고, 1919년 5월 4일 베르사유의 산둥 결정에 항의한 학생 시위가 전국의 파업으로 번졌다. 러시아 혁명의 충격 속에 리다자오·천두슈가 마르크스주의로 옮겨 갔고, 코민테른의 지원으로 1921년 7월 상하이에서 중국공산당이 창당되었다.

1921.03

크론시타트 봉기

크론시타트 봉기는 1921년 3월 1일부터 18일까지 발트 함대의 본거지 크론시타트 요새에서 수병, 병사, 시민들이 볼셰비키 정권에 맞서 일으킨 무장 봉기이다. 러시아 내전이 사실상 종결된 후에도 전시공산주의 아래 곡물 강제징발, 배급 삭감, 정치적 탄압이 계속되자, 크론시타트의 수병들은 소비에트 재선거, 언론·집회의 자유, 정치범 석방, 농민의 토지 자유 처분권 등을 요구하는 〈페트로파블롭스크 결의〉를 채택하고 임시혁명위원회를 구성하였다. 볼셰비키 지도부는 협상을 거부하고 봉기를 반혁명적 음모로 규정했으며, 3월 7일과 16일 두 차례의 공세 끝에 3월 18일 요새를 진압했다. 약 8,000명의 봉기 참가자가 얼어붙은 핀란드만을 건너 핀란드로 탈출했고, 포로가 된 2,100여 명은 즉결 처형되었다.

1921–1922

1921~1922년 대기근

1921~1922년 대기근은 제1차 세계대전·혁명·내전으로 황폐해진 소비에트 러시아에서 1921년 봄 극심한 가뭄이 덮치면서 시작되어 1922년까지 이어진 대규모 기아 참사다. 전시공산주의의 곡물 강제 징발로 농민의 파종 여력이 바닥난 상태에서 가뭄이 볼가·우랄·우크라이나·크림·바시키르·타타르·카자흐 등 35개 구베르니야를 강타했고, 철도 마비는 구호 물자 수송을 가로막았다. 총인구 약 9천만 명 중 최소 2천8백만 명이 굶주렸고 약 500만 명이 아사와 전염병으로 사망했다. 소비에트 정부는 해외 원조를 받아들이고 교회 재산을 몰수했으며, 미국 구호청(ARA)이 2만1천여 개 급식소에서 매일 1천만 명 이상을 먹이며 가장 큰 구호를 제공했다. 이 경험은 전시공산주의 폐기와 신경제정책(NEP) 도입을 결정적으로 밀어붙였다.

1921–1924

몽골 혁명과 인민공화국 수립

1921년 혁명 이후 몽골은 제한된 군주제에서 인민공화국으로 이동했다. 소련과의 관계 강화는 독립국가의 제도 형성과 국내 권력투쟁에 함께 작용했다.

1922.12

소련의 결성

1922년 12월 30일, 러시아·우크라이나·벨로루시야·자캅카스의 소비에트 공화국들이 대등한 자격으로 연방조약을 맺어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이 탄생했다. 공화국들을 러시아 연방에 편입하려던 자치화안은 레닌의 개입으로 폐기되었고, 탈퇴권을 명시한 대등한 공화국들의 연방이라는 원칙이 채택되었다. 뒤이은 코레니자치야(토착화) 정책은 민족 언어와 민족 간부를 국가가 체계적으로 육성한, 당대 세계에 전례가 없는 민족정책이었다.

1921–1928

신경제정책(네프)

내전에서 승리했으나 경제 붕괴와 크론시타트 반란까지 겪은 1921년 봄, 당은 식량할당징발을 현물세로 바꾸고 시장과 소경영을 허용하는 신경제정책으로 전환했다. 레닌이 전략적 후퇴라 부른 이 전환은 노동자와 농민의 동맹, 곧 스미치카를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 네프 아래에서 경제는 전전 수준을 회복했고, 1920년대의 문화적 개화가 꽃피었다.

1924–1927

제1차 국공합작과 북벌, 1927년의 파국

소련의 원조와 코민테른의 지시로 공산당원이 국민당에 가입한 국공합작은 황푸군관학교와 북벌로 군벌 중국을 흔들었다. 그러나 노동자·농민 운동이 커지자 장제스는 1927년 4월 상하이에서 공산당을 학살했고, 스탈린이 기대한 우한의 국민당 좌파도 7월 공산당과 결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