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사건
1905년 혁명
피의 일요일 학살로 시작된 1905년 혁명은 대중 파업과 육해군 반란, 농민 봉기가 결합한 차르 전제에 대한 최초의 전국적 도전이었다. 투쟁 속에서 노동자들은 공장에서 선출되고 즉시 소환할 수 있는 대의원 평의회, 곧 소비에트를 발명했으며, 이 기구는 파업위원회에서 인민 권력의 기관으로 성장했다. 혁명은 1907년까지 진압됐으나, 1917년에 승리할 계급과 당을 단련시켰다.
2월 혁명
1917년 2월 혁명은 페트로그라드의 여성 방직 노동자들이 세계 여성의 날에 빵과 전쟁 종식을 요구하며 시작한 파업에서 출발했다. 파업은 며칠 만에 총파업으로 번졌고, 발포 명령을 받은 수비대 병사들이 노동자 편으로 돌아서면서 차르 체제는 무너졌다. 그 결과는 단순한 정권 교체가 아니라 이중권력이었다. 공식 권한은 임시정부가 가졌지만, 노동자와 병사의 실질적 충성은 소비에트에 있었다.
10월 혁명
1917년 가을 코르닐로프 반란이 좌절된 뒤 페트로그라드와 모스크바 소비에트에서 볼셰비키가 다수파가 되었고, 트로츠키가 이끄는 군사혁명위원회가 수도 수비대의 충성을 확보했다. 11월 7일(구력 10월 25일)의 봉기는 페트로그라드에서 거의 유혈 없이 수도를 장악했으며, 같은 날 밤 개회한 제2차 전러시아 소비에트 대회가 권력 이양을 승인했다. 대회는 즉시 평화에 관한 법령과 토지에 관한 법령을 채택하고, 레닌을 수반으로 하는 인민위원회의(소브나르콤)를 구성했다.
내전과 열강의 개입
1918년부터 1922년까지 소비에트 공화국은 백군 장군들과 십여 개 열강의 개입군에 포위된 채 생존을 건 전쟁을 치렀다. 트로츠키가 조직한 붉은 군대는 500만 명 규모로 성장해 콜차크, 데니킨, 유데니치, 브란겔의 군대를 차례로 격파했고, 노동자와 농민 다수는 지주와 구체제의 복귀보다 소비에트 권력을 선택했다. 그러나 승리의 대가는 참혹했다. 전쟁과 기근, 전염병으로 수백만 명이 목숨을 잃었고, 양측 모두가 자행한 테러와 전시의 비상 통치는 이후 소비에트 국가의 성격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
소비에트-폴란드 전쟁
소비에트-폴란드 전쟁은 무너진 세 제국의 국경 지대에서 부활한 폴란드와 소비에트 러시아가 1919년부터 1921년까지 벌인 전쟁이다. 선전포고 없이 1919년 2월 벨로루시에서 시작된 충돌은, 1920년 4월 피우수트스키가 페틀류라와 손잡고 키예프로 진공하면서 전면전이 되었다. 부됸니의 기병과 투하쳅스키의 7월 공세로 전세를 뒤집은 붉은군대는 혁명의 수출을 내걸고 바르샤바까지 진격했으나, 8월 바르샤바 전투에서 결정적으로 패했다. 1921년 3월 리가 조약은 커즌선보다 훨씬 동쪽에 국경을 그어 벨로루시와 우크라이나를 분할했고, 이 국경은 1939년까지 유지되었다. 바르샤바 앞에서의 패배는 총검에 의한 혁명 수출 시도의 사실상 마지막이 되었고, 소비에트 국가를 일국에서의 건설이라는 길로 돌려세웠다.
크론시타트 봉기
크론시타트 봉기는 1921년 3월 1일부터 18일까지 발트 함대의 본거지 크론시타트 요새에서 수병, 병사, 시민들이 볼셰비키 정권에 맞서 일으킨 무장 봉기이다. 러시아 내전이 사실상 종결된 후에도 전시공산주의 아래 곡물 강제징발, 배급 삭감, 정치적 탄압이 계속되자, 크론시타트의 수병들은 소비에트 재선거, 언론·집회의 자유, 정치범 석방, 농민의 토지 자유 처분권 등을 요구하는 〈페트로파블롭스크 결의〉를 채택하고 임시혁명위원회를 구성하였다. 볼셰비키 지도부는 협상을 거부하고 봉기를 반혁명적 음모로 규정했으며, 3월 7일과 16일 두 차례의 공세 끝에 3월 18일 요새를 진압했다. 약 8,000명의 봉기 참가자가 얼어붙은 핀란드만을 건너 핀란드로 탈출했고, 포로가 된 2,100여 명은 즉결 처형되었다.
1921~1922년 대기근
1921~1922년 대기근은 제1차 세계대전·혁명·내전으로 황폐해진 소비에트 러시아에서 1921년 봄 극심한 가뭄이 덮치면서 시작되어 1922년까지 이어진 대규모 기아 참사다. 전시공산주의의 곡물 강제 징발로 농민의 파종 여력이 바닥난 상태에서 가뭄이 볼가·우랄·우크라이나·크림·바시키르·타타르·카자흐 등 35개 구베르니야를 강타했고, 철도 마비는 구호 물자 수송을 가로막았다. 총인구 약 9천만 명 중 최소 2천8백만 명이 굶주렸고 약 500만 명이 아사와 전염병으로 사망했다. 소비에트 정부는 해외 원조를 받아들이고 교회 재산을 몰수했으며, 미국 구호청(ARA)이 2만1천여 개 급식소에서 매일 1천만 명 이상을 먹이며 가장 큰 구호를 제공했다. 이 경험은 전시공산주의 폐기와 신경제정책(NEP) 도입을 결정적으로 밀어붙였다.
소련의 결성
1922년 12월 30일, 러시아·우크라이나·벨로루시야·자캅카스의 소비에트 공화국들이 대등한 자격으로 연방조약을 맺어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이 탄생했다. 공화국들을 러시아 연방에 편입하려던 자치화안은 레닌의 개입으로 폐기되었고, 탈퇴권을 명시한 대등한 공화국들의 연방이라는 원칙이 채택되었다. 뒤이은 코레니자치야(토착화) 정책은 민족 언어와 민족 간부를 국가가 체계적으로 육성한, 당대 세계에 전례가 없는 민족정책이었다.
신경제정책(네프)
내전에서 승리했으나 경제 붕괴와 크론시타트 반란까지 겪은 1921년 봄, 당은 식량할당징발을 현물세로 바꾸고 시장과 소경영을 허용하는 신경제정책으로 전환했다. 레닌이 전략적 후퇴라 부른 이 전환은 노동자와 농민의 동맹, 곧 스미치카를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 네프 아래에서 경제는 전전 수준을 회복했고, 1920년대의 문화적 개화가 꽃피었다.
레닌 사후 권력투쟁과 좌익 반대파
레닌 사후 권력투쟁은 1923년 가을, 병상의 레닌을 대신해 당을 움직이던 스탈린-지노비예프-카메네프 삼두체제에 맞서 트로츠키와 46인 진술서 서명자들이 당내 민주주의를 요구하며 시작되었다. 1924년 1월 레닌이 사망한 뒤, 삼두체제는 트로츠키의 「10월의 교훈」을 빌미로 그를 군사 인민위원직에서 해임했고, 이어 스탈린이 내놓은 '일국 사회주의' 노선을 두고 지노비예프·카메네프와 결별하면서 삼두체제는 붕괴했다. 1926년 트로츠키와 지노비예프·카메네프는 '통합 반대파'를 결성했으나 스탈린-부하린 동맹에 연이어 패배했고, 1927년 11월 7일 혁명 10주년 시위에서 독자적인 구호를 내걸었다가 강제 해산당한 뒤 당에서 제명되었다. 1927년 12월 제15차 당대회는 좌익 반대파의 입장을 당적과 양립할 수 없다고 선언하며 75명의 활동가를 추방함으로써 스탈린의 단독 승리로 막을 내렸다.
5개년 계획과 소련의 대전환
1928년부터 1937년까지 두 차례의 5개년 계획은 농민의 나라를 산업 강국으로 바꾼 세계사적 전환이었다. 곡물 조달 위기에서 출발한 집단화와 초고속 공업화는 마그니토고르스크와 드네프로스트로이 같은 거대 건설, 대중 문맹 퇴치 운동, 여성의 공장과 대학 진출을 낳았다. 그러나 강제 집단화는 농촌에 격변을 불러왔고, 1932–1933년에는 과도한 조달과 흉작이 겹친 기근으로 수백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 시기의 성취와 희생은 분리할 수 없는 하나의 역사로 남았다.
홀로도모르와 집단화 기근
홀로도모르는 1932년부터 1933년까지 소비에트 우크라이나에서 발생한 인위적 기근으로, 약 390만 명이 아사한 재앙이다. 직접적 원인은 스탈린 지도부가 강제 집단화와 가속화된 공업화를 추진하면서 우크라이나에 설정한 감당할 수 없는 곡물 공출 할당량이었다. 1931년 수확량이 급감했음에도 공출 목표는 오히려 유지되었고, 1932년 가을부터는 몰로토프와 카가노비치 같은 크렘린 특사들이 직접 파견되어 곡물을 샅샅이 수탈했다. 공출에 실패한 마을들은 '블랙리스트'에 올라 경제 봉쇄를 당했고, 1933년 1월 스탈린과 몰로토프는 우크라이나와 쿠반의 국경을 봉쇄해 굶주린 농민들이 식량을 찾아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는 것을 차단했다. 기근은 소련 전체 곡창지대를 덮쳤지만 우크라이나에서 희생이 가장 컸으며, 소비에트 당국은 1987년 말까지 기근의 존재 자체를 부인했다.
1934년 2월 6일 파시스트 폭동
1934년 2월 6일 저녁 파리 콩코르드 광장에서 극우 동맹들이 하원 의사당을 향해 밀어붙이다 경찰 발포로 15명이 죽었다. 스타비스키 금융 사기 사건으로 의회 부패에 대한 분노가 쌓인 끝이었고, 극우 언론은 스타비스키가 유대인 이민자 가정 출신이라는 점을 앞세워 그 분노를 반유대 선동으로 옮겨 놓았다. 이튿날 의회 다수를 쥐고 있던 에두아르 달라디에 총리가 사임하면서, 제3공화국에서 처음으로 거리가 정부를 무너뜨렸다. 사흘 뒤 공산당 시위에서 다시 9명이 죽었고, 2월 12일 총파업에서는 따로 행진하던 사회당과 공산당의 대열이 나시옹 광장에서 만나 「단결!」을 외쳤다. 오늘날 연구는 그날 밤을 조직된 쿠데타로 보지 않지만, 히틀러 집권 1년째였던 당시 좌파에게 그것은 프랑스판 파시즘의 총연습이었다. 이 공포가 사회파시즘 노선을 무너뜨리고 7월 통일행동협정과 이듬해 게오르기 디미트로프의 인민전선 보고로 이어졌다.
프랑스 인민전선과 1936년 총파업
1934년 2월 극우 동맹들의 폭동을 계기로 사회당·공산당·급진당이 결성한 인민전선은 1936년 5월 총선에서 승리해 레옹 블룸의 정부를 세웠다. 승리와 취임 사이의 공백기에 프랑스 역사상 최대의 파업이 터졌다. 6월 한 달에만 파업 12,142건에 참가자 183만 명, 그 4분의 3이 공장을 점거한 채 기계 옆에서 먹고 자는 새로운 방식의 파업이었다. 6월 7일 밤 마티뇽 협정으로 사용자들은 임금 인상과 단체협약, 노조 활동의 자유를 한꺼번에 내주었고, 의회는 곧바로 2주 유급휴가와 주 40시간제를 입법했다. 그러나 스페인 불개입과 프랑 평가절하, 개혁의 「휴지기」를 거치며 연합은 안에서부터 무너졌고, 1938년 11월 총파업의 패배로 인민전선 시대는 막을 내렸다.
스페인 내전
1936년 7월 군부의 반란은 정부가 아니라 노동조합의 무장으로 저지됐고, 그 자리에서 카탈루냐와 아라곤의 공장과 토지가 노동자들의 손에 넘어가는 혁명이 함께 일어났다. 영국과 프랑스가 주도한 불개입 협정이 합법 정부의 무기 구입을 막는 사이 독일과 이탈리아는 반란군을 무장시켰고, 공화국에 무기를 판 나라는 사실상 소련과 멕시코뿐이었다. 소련의 개입은 공화국을 버티게 했지만 「먼저 전쟁에서 이겨야 혁명도 있다」는 노선과 「혁명을 멈추면 싸울 이유도 사라진다」는 노선의 충돌을 함께 키웠고, 1937년 5월 바르셀로나에서 그 대립이 시가전으로 터졌다.
대숙청
1937–38년의 대숙청은 NKVD·당 조직·검찰이 결합해 대규모 체포와 처형을 수행한 국가폭력이었다. 그것은 단일 명령이 아니라 할당량, 작전명령, 자백 강요, 지방의 경쟁과 공포가 서로 증폭한 과정이었다.
소련-일본 국경 전쟁과 중립조약
소련-일본 국경 전쟁은 1938년 하산 호 전투와 1939년 할힌골 전투를 중심으로 소련·몽골과 일본·만주국 사이에서 벌어진 무력 충돌이다. 발단은 만주국과 소련·몽골 사이의 경계선 해석 차이였지만, 실질적으로는 관동군 내 북진론 세력이 소련의 군사력을 시험하려는 의도가 컸다. 하산 호에서는 일본군이 분쟁 지역을 일시 점령했으나 소련의 반격에 밀려 철수했고, 할힌골에서는 게오르기 주코프가 5만 7천의 병력과 500여 대의 전차를 동원해 1939년 8월 20일부터 31일까지 일본군 제23사단을 포위 섬멸했다. 이 패배로 일본 육군 내 북진론은 치명상을 입었고, 1941년 4월 13일 소련-일본 중립조약이 체결되었다. 그해 6월 독일이 소련을 침공했을 때 일본은 중립조약을 존중해 참전하지 않았으며, 대신 남쪽으로 진로를 돌려 진주만 공격으로 이어졌다.
독소 불가침조약과 동유럽 분할
독소 불가침조약은 1939년 8월 23일 밤 모스크바 크렘린에서 소련 외무인민위원 뱌체슬라프 몰로토프와 독일 외무장관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가 서명한 조약으로, 공개된 불가침 조항과 함께 동유럽에서의 세력 범위를 나누는 비밀 추가 의정서를 담고 있었다. 영국·프랑스와의 집단안보 협상이 폴란드의 소련군 통과 거부로 교착된 상황에서, 스탈린은 독일과의 협정을 선택했다. 조약 체결 1주일 후 독일이 폴란드를 침공했고, 9월 17일 소련도 폴란드 동부로 진격했다. 9월 28일 양국은 독소 우호 및 국경 조약을 체결하여 폴란드 분할을 확정했고, 비밀 의정서를 개정해 리투아니아를 소련 세력권으로 넘기는 대가로 루블린과 바르샤바 일부를 독일 측에 양보했다. 이 조약은 1941년 6월 22일 독일의 소련 침공으로 파기될 때까지 소련의 발트 3국 합병, 핀란드 겨울전쟁, 베사라비아 점령의 발판이 되었다.
겨울전쟁
겨울전쟁은 1939년 11월 30일 소련의 침공으로 시작해 1940년 3월 모스크바 강화조약으로 끝난 105일간의 소련-핀란드 전쟁이다. 독소불가침조약의 비밀의정서로 핀란드를 자국 세력권에 넣은 소련은 레닌그라드 방위를 이유로 카렐리야 지협의 국경 이동과 항코 반도 조차를 요구했고, 핀란드가 거부하자 마이닐라 포격 사건을 구실로 공격했다. 병력과 장비는 압도적이었으나 대숙청으로 지휘부가 무너진 붉은 군대는 겨울 삼림전에 준비되어 있지 않았고, 수오무살미에서 사단째 포위·궤멸당하며 만네르헤임 선 앞에 멈춰 섰다.
프랑스 침공과 비시 정부
이 사건은 1940년 5월 10일부터 1944년 해방까지 독일의 프랑스 정복과 제3공화국의 붕괴, 비시의 통치를 가리킨다. 프랑스군은 마지노선 방어와 벨기에 진입을 결합했지만, 독일군은 아르덴을 뚫어 뫼즈강을 건넌 뒤 해협으로 진격했다. 독일군은 6월 14일 파리를 점령했고, 됭케르크 철수에도 프랑스의 조직적 저항은 무너졌다. 필리프 페탱은 6월 17일 휴전을 요청했고 6월 22일 협정으로 북부와 대서양 연안은 독일 점령지, 남부는 비시의 통치 아래 놓였다. 7월 10일 국민의회가 페탱에게 전권을 부여했고, 비시는 독일과 협력하며 반유대 법령, 경찰 검거, 경제 수탈과 노동 동원을 시행했다. 1942년 11월 남부까지 점령된 뒤 1944년 해방으로 체제는 붕괴했다.
대조국전쟁
1941년 6월 나치 독일의 기습 침공으로 시작된 대조국전쟁은 인류 역사상 최대 규모의 지상전이었다. 소련은 개전 첫 해의 파국적 손실을 딛고 공업 기반을 통째로 동쪽으로 옮겨 재무장했으며, 모스크바와 스탈린그라드, 쿠르스크에서 전세를 뒤집고 1945년 베를린까지 진격해 나치 독일을 무너뜨렸다. 독일 국방군 지상 전투력의 약 80%가 동부전선에서 소모되었고, 파시즘 격파의 압도적 부담을 짊어진 것은 다민족 소비에트 인민이었다.
태평양 전쟁
태평양 전쟁은 1941년 12월 일본 제국이 미국과 영국 세력권을 공격하면서 본격화된 1941년부터 1945년까지의 전쟁으로, 1937년부터 이어진 중일전쟁과 일본의 자원 및 제국 확장 정책이 배경이었다. 미국의 대일 석유·자재 제재와 중국에서의 충돌 속에서 일본 지도부는 네덜란드령 동인도의 석유와 동남아 자원을 점령하고 미국의 협상 의지를 꺾으려 했지만, 진주만 공격은 미국을 전면전으로 끌어들였다. 일본은 1942년 초 필리핀, 말라야, 싱가포르, 네덜란드령 동인도 등으로 빠르게 팽창했으나 산호해와 미드웨이에서 공세의 한계가 드러났다. 1942년 과달카날부터 연합국은 남서태평양과 중부태평양에서 도약식 공세를 진행했고, 1944년 필리핀 탈환과 마리아나 제도 점령으로 일본 본토를 폭격할 거점을 확보했다. 1945년 봉쇄, 폭격, 이오지마와 오키나와 전투,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원자폭탄 투하, 소련의 대일 참전이 겹치면서 일본은 8월 15일 항복을 공표했고 9월 2일 도쿄만에서 항복 문서에 서명했다.
제2전선과 노르망디 상륙
제2전선과 노르망디 상륙은 1941년 독일의 소련 침공 뒤 제기된 서유럽 재개전 요구가 1944년 6월 6일 연합군의 오버로드 작전으로 실현된 과정이다. 이 요구는 동부전선의 압력을 덜어 달라는 소련의 군사적 필요와, 충분한 병력·상륙정·공중우세 없이는 실패할 수 있다는 영미 지휘부의 판단이 충돌하면서 지연되었다. 영국과 미국은 북아프리카와 이탈리아에서 먼저 공격했고, 1943년 회담에서 해협 횡단 상륙을 확정한 뒤 영국 남부에 병력과 물자를 모았다. 1944년 6월 6일 드와이트 아이젠하워가 지휘한 연합군은 공수부대와 해군 포격에 이어 유타, 오마하, 골드, 주노, 소드 다섯 해변에 상륙했다. 기만작전은 독일군이 주공을 파드칼레로 오인하게 만들었지만 해안의 요새와 전투는 큰 희생을 요구했다. 연합군은 6월 말까지 교두보를 보급 가능한 전선으로 바꾸고, 8월 파리 해방과 독일 국경을 향한 서진의 기반을 마련했다.
프랑스 레지스탕스와 해방
프랑스 레지스탕스와 해방은 1940년 독일의 프랑스 패배와 비시 정부 수립에서 시작되어 1944년 연합군의 노르망디·프로방스 상륙과 프랑스 영토의 해방으로 이어진 저항과 국가 재건의 과정이다. 독일 점령, 비시 당국의 협력과 탄압, 강제노동, 반유대주의 정책이 저항의 조건을 만들었고, 샤를 드골의 자유 프랑스와 국내의 다양한 정치 세력, 특히 공산주의자·사회주의자·공화주의자·가톨릭 세력이 서로 다른 목표를 지닌 채 지하 언론, 정보 수집, 탈출 지원, 파업, 사보타주와 무장 투쟁을 전개했다. 장 물랭은 1943년 국민저항위원회(CNR)를 조직해 주요 운동을 조정했으며, 1944년 레지스탕스는 프랑스 내무군(FFI)으로 통합되어 연합군의 진격을 지원하고 파리 봉기에 참여했다. 1944년 8월 파리 해방 뒤 드골의 임시정부가 공화국의 연속성을 선언하면서 비시 체제의 국가적 정당성은 부정되었다.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 전쟁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 전쟁은 1941년 4월 추축국이 유고슬라비아 왕국을 침공하고 분할한 뒤 1945년까지 벌어진 공산당 주도 무장투쟁이다. 독일의 소련 침공 뒤 유고슬라비아 공산당은 점령군과 협력 정권에 맞선 전국 봉기를 조직했고, 요시프 브로즈 티토가 이끈 파르티잔은 왕당파 체트니크와 경쟁하면서 게릴라 부대에서 정규군으로 성장했다. 추축국의 대공세, 특히 네레트바와 수테스카에서 살아남은 파르티잔은 1943년 연합국의 지원과 승인을 얻었고, 1944년 소련군과 함께 베오그라드를 해방했다. 1945년 3월 군대는 유고슬라비아군으로 개편되었고, 파르티잔의 승리는 왕정을 대신하는 사회주의 연방국가의 수립으로 이어졌다.
얄타 회담과 포츠담 회담
1945년 2월 크림반도의 휴양지 얄타에서 스탈린·루스벨트·처칠이, 7월과 8월 베를린 교외 포츠담에서 스탈린·트루먼·애틀리가 마주 앉아 전후 세계의 틀을 짰다. 얄타에서는 독일의 분할 점령과 배상, 폴란드의 국경과 정부 구성, 해방된 유럽에 관한 선언, 안보리 거부권을 포함한 유엔 창설 방안이 합의되었고, 소련은 남사할린·쿠릴의 확보를 조건으로 대일 참전을 약속했다. 포츠담에서는 독일의 비무장화·탈나치화 원칙과 폴란드의 서부 국경 실무가 다루어졌다. 회담장 밖에서는 이미 다른 시대가 시작되고 있었다. 트루먼이 「신형 무기」를 넌지시 알렸을 때 스탈린은 무표정했다. 정보망을 통해 원폭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소련의 대일 참전과 만주 작전
만주 전략공세작전은 1945년 8월 9일부터 9월 2일까지 이어진 제2차 세계대전 최후의 대규모 지상 작전이었다. 1945년 2월 얄타회담에서 스탈린은 독일 항복 2-3개월 후 대일 참전을 약속하고 남사할린·쿠릴열도·여순항 조차권을 확보하는 비밀의정서에 서명했다. 소련은 4월 중립조약을 파기하고 5월부터 8월까지 유럽에서 극동으로 40만 이상의 병력과 2천여 대의 전차를 이동시켰다. 8월 8일 몰로토프가 선전포고를 통보했고, 바실렙스키가 지휘하는 150만 병력이 서·동·북 삼면에서 동시에 진입했다. 관동군은 70만 이상이었으나 정예 병력은 태평양으로 빠져나갔고, 소련군의 기갑 우세와 작전술 앞에 열흘 만에 조직적 저항을 상실했다. 약 60만 명의 일본군이 포로가 되어 시베리아로 보내졌다.
마셜 플랜과 냉전의 시작
1947년 미국이 유럽 재건을 위한 마셜 플랜을 내놓자, 소련은 그것을 미국 자본에 유럽을 종속시키려는 시도로 규정했다. 몰로토프는 파리 회담에서 협상을 결렬시켰고, 스탈린은 동유럽 국가들이 원조를 받는 것을 막았다. 즈다노프의 「두 진영」 선언과 코민포름 창설로 세계는 냉전의 두 블록으로 굳어졌다.
베를린 봉쇄와 공수
베를린 봉쇄(1948년 6월 24일–1949년 5월 12일)는 소련이 서방 연합국이 장악한 서베를린으로 향하는 모든 철도·도로·수로를 차단한 냉전 최초의 대규모 대치였다. 직접적 발단은 1948년 6월 서방이 독일 서부 점령지구에 도이치마르크를 도입하면서 소련 점령지구와의 경제적 분리가 확정된 데 있었다. 이오시프 스탈린은 베를린을 봉쇄하면 서방이 통화 개혁을 철회하거나 서베를린에서 철수할 것이라고 계산했으나, 해리 S. 트루먼 행정부는 철수하지 않고 베를린 공수 작전으로 맞섰다. 미군과 영국 공군은 15개월 동안 27만 8,000회 이상의 비행으로 233만 톤의 식량·석탄·연료를 서베를린에 수송했고, 절정기에는 30초마다 한 대의 수송기가 베를린에 착륙했다. 동시에 서방의 대응봉쇄로 동독 지역은 석탄과 강재 부족에 시달렸다.
티토-스탈린 결별
티토-스탈린 결별은 1948년 6월 코민포름이 유고슬라비아 공산당을 제명하면서 사회주의 진영에 처음으로 공개 균열이 생긴 사건이다. 유고슬라비아는 소련군이 아니라 자국 파르티잔의 힘으로 해방과 혁명을 이뤘고, 그만큼 모스크바의 지시에 덜 매여 있었다. 발칸 연방 구상과 그리스 내전 지원을 둘러싼 마찰, 유고슬라비아 내 소련 고문단과 정보망에 대한 반발이 쌓이자, 스탈린은 서한 논쟁과 코민포름 결의로 티토 지도부의 굴복을 요구했다. 결의는 유고슬라비아 당이 마르크스-레닌주의에서 이탈해 민족주의의 길로 갔다고 선고했지만, 예상과 달리 유고슬라비아 당은 지도부를 중심으로 뭉쳐 버텼다. 소련과 동유럽의 경제 봉쇄, 국경 도발, 침공 준비설 속에서 유고슬라비아는 서방의 원조를 받아들였고, 노동자 자주관리라는 독자 모델을 만들기 시작했다.
레닌그라드 사건
레닌그라드 사건은 900일 봉쇄를 견뎌 낸 도시의 당·국가 간부들이 전후에 숙청된 사건이다. 즈다노프가 1948년 사망하자 말렌코프와 베리야는 그의 레닌그라드 인맥을 겨냥했고, 아바쿠모프의 국가보안부(MGB)가 조작된 혐의로 수백 명을 체포했다. 계획경제를 이끈 보즈네센스키와 당 서기 쿠즈네초프를 비롯한 핵심 인물들이 1950년 처형됐다.
소련 원자폭탄 개발
소련의 원자폭탄 개발은 1943년 쿠르차토프를 책임자로 한 제2연구소에서 시작해 1949년 8월 29일 세미팔라틴스크의 RDS-1 실험으로 결실을 맺은 사업이다. 전쟁 중에는 자원이 전선에 묶여 소규모 연구에 그쳤으나, 1945년 8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이후 국가의 최우선 과제가 되어 베리야를 수반으로 하는 특별위원회가 설치되고 내무인민위원부의 조직·노동력·자원 동원 능력이 통째로 투입됐다. 사업은 두 축으로 굴러갔다. 클라우스 푹스를 비롯한 정보원이 넘긴 맨해튼 계획 설계 자료가 방향을 확인해 주었고, 쿠르차토프·하리톤·젤도비치·플료로프의 자체 연구가 그것을 소련의 산업 조건에서 실제로 만들 수 있는 물건으로 옮겼다. 우라늄 채굴과 폐쇄도시 건설에는 굴라크 수용자와 강제 노동이 대규모로 동원됐다.
의사들의 음모
의사들의 음모는 크렘린 의료진(주로 유대인)이 소련 지도자들을 독살하려 했다는 조작된 혐의로 1953년 1월 공표된 사건이다. 그것은 스탈린 말기 반유대 캠페인과 국가보안부의 고문 수사가 결합한 결과였으며, 즈다노프와 셰르바코프의 죽음이 그 구실로 이용됐다. 1953년 3월 스탈린이 죽자 사건은 곧 조작으로 발표되고 체포된 의사들은 석방됐다.
한국전쟁
한국전쟁은 1950년 6월 25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남진으로 시작해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으로 멎은 전쟁이다. 김일성은 1949년부터 여러 차례 무력 통일 승인을 요청했고, 스탈린은 미국이 개입하지 않으리라는 판단과 중화인민공화국 수립·소련의 핵실험 성공으로 힘의 균형이 바뀌었다는 계산 위에서 1950년 봄 이를 승인하되 소련군의 직접 참전은 배제했다. 미국이 유엔군을 조직해 개입하고 인천상륙으로 전세가 뒤집히자 중국이 인민지원군을 보냈고, 전선은 1951년 여름부터 38도선 부근에서 굳었다. 소련의 참여는 무기·고문단과, 만주 기지에서 미그-15로 싸운 조종사들에 한정됐으며 이들의 존재는 양측 모두 오래 공식적으로 부인했다.
베리야의 몰락
스탈린 사후 베리야는 제1부총리이자 내무부(MVD) 수장으로 사면·탈스탈린화·대외 완화 등 개혁을 주도하며 강력해졌다. 그의 야심과 보안기구 장악을 두려워한 흐루쇼프·말렌코프·몰로토프 등 간부단은 1953년 6월 주코프 휘하 군 장교들의 도움으로 그를 체포했다. 베리야는 12월 재판 뒤 측근들과 함께 처형됐다.
바르샤바 조약 기구 창설
바르샤바 조약 기구(공식 명칭: 우호협력상호원조조약)는 1955년 5월 14일 소련과 동유럽 7개 사회주의 국가가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서명한 집단방위동맹이다. 직접적 방아쇠는 서독의 재무장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가입을 확정한 1954년 10월 파리 협정이었다. 소련은 1954년 11월 모스크바 회의에서 동맹의 실무 준비에 착수했고, 서독이 나토에 정식 가입한 지 나흘 뒤인 5월 14일 조약을 서명했다. 조약 전문은 서독의 재무장이 평화적 국가들의 안전보장에 위협이 된다고 명시했으며, 제4조는 유럽에서 회원국에 대한 무력공격 시 모든 수단을 동원한 즉각 지원을 규정했다. 이반 코네프 원수가 통합군 총사령관에 임명되었고, 정치협의위원회가 최고 의사결정 기구로 설치되었다. 그러나 바르샤바 조약은 실질보다는 외관이 앞선 동맹이었다. 소련은 이미 양자조약과 주둔군을 통해 동유럽을 장악하고 있었고, 니키타 흐루쇼프는 이 새 기구를 나토와 맞교환할 수 있는 유럽 집단안보체제 협상의 지렛대로 구상했다.
제20차 당대회와 비밀연설
1956년 2월 14일부터 25일까지 모스크바에서 열린 소련공산당 제20차 당대회다. 공개 회기에서는 자본주의와의 평화공존, 전쟁은 불가피하지 않다는 명제, 사회주의로 가는 길이 나라마다 다를 수 있다는 노선이 제시됐다. 대회 마지막 날 비공개 회의에서 흐루쇼프는 「개인숭배와 그 결과에 대하여」를 낭독했다. 포스펠로프 위원회가 정리한 자료에 근거해, 1930년대 후반 당 간부와 군 지휘부에 가해진 대량 체포와 처형, 자백을 얻기 위한 고문, 전쟁 초기의 판단 착오, 민족 강제이주를 스탈린 개인의 책임으로 지목한 문서였다. 비판의 틀은 「개인숭배」에 한정됐다. 당의 노선과 체제 자체, 그리고 연설을 듣던 이들을 포함한 지도부의 공동 책임은 다뤄지지 않았다.
포즈난 봉기
포즈난 봉기는 1956년 6월 28일부터 30일까지 폴란드 인민공화국의 공업도시 포즈난에서 노동자들이 스탈린주의 체제에 맞서 일으킨 무장 봉기이다. 발단은 포즈난 최대 공장인 ZISPO(옛 체겔스키 공장) 노동자들의 파업이었다. 바르샤바 중앙정부가 임금 인상과 과도한 세금 환급 약속을 하루 만에 번복하자, 6월 28일 아침 수만 명이 거리로 나섰고 곧 10만 명 규모의 시위로 확대되었다. 처음에는 경제적 요구를 내걸었으나 당국이 대화를 거부하면서 시위대는 당 위원회, 보안국 청사, 감옥을 점거하고 무기를 탈취했다. 콘스탄틴 로코솝스키 국방장관이 파견한 스타니스와프 포프와프스키 장군이 전차 400여 대와 병력 1만 명을 동원해 30일까지 봉기를 진압했으며, 최소 57명이 사망하고 수백 명이 부상당했다.
헝가리 혁명
1956년 헝가리 혁명은 흐루쇼프의 비밀연설이 연 탈스탈린화의 기대 속에서 스탈린주의 체제에 맞서 터진 봉기였다. 10월 부다페스트의 학생·노동자 시위가 전국적 항쟁으로 번지자 개혁파 너지 임레가 총리로 복귀해 다당제와 바르샤바조약 탈퇴, 중립을 선언했다. 소련 지도부는 이를 진영의 붕괴로 보고 11월 대규모 군사 개입으로 봉기를 진압했다.
반당 그룹 사건
1957년 6월, 몰로토프·말렌코프·카가노비치를 비롯한 주석단 다수파는 비밀연설과 개혁으로 자신들의 입지를 위협한 흐루쇼프를 제1서기직에서 몰아내려 했다. 흐루쇼프는 문제를 중앙위원회 전원회의로 넘겼고, 주코프의 도움으로 소집된 중앙위원들이 그를 지지했다. 다수파는 「반당 그룹」으로 규정되어 패배했다.
소련 우주 계획
1957년 스푸트니크 1호에서 1965년 레오노프의 우주 유영까지, 소련은 최초의 인공위성, 최초의 유인 비행, 최초의 여성 우주인, 최초의 우주 유영이라는 우주 시대의 첫 관문들을 모두 먼저 통과했다. 치올콥스키가 남긴 이론, 코롤료프의 OKB-1 설계국, 그리고 무상 대중 기술교육과 계획경제가 집중시킨 자원이 이 도약을 떠받쳤다. 그것은 한 세대 전까지 농업국이었던 나라가 이룬 세계사적 성취였다.
중소분열
중소분열은 소련과 중화인민공화국이 1950년대 후반부터 이념 논쟁을 거쳐 1960년대에 국가 관계 파탄으로, 1969년에는 국경 무력 충돌로까지 간 과정이다. 발단은 제20차 당대회였다. 중국공산당은 스탈린 격하와 평화공존 노선을 수정주의로 규정하고, 제국주의와의 타협이자 혁명 포기라고 비판했다. 여기에 국가 이익의 충돌이 겹쳤다. 소련은 중국의 핵무기 개발 지원을 1959년 중단했고, 1958년 대만해협 위기와 중국-인도 국경분쟁에서 중국이 기대한 지지를 보내지 않았다. 1960년 소련이 기술고문 1,300여 명을 일시에 철수시키면서 경제 협력의 축이 끊겼다. 논쟁은 국제 공산주의 운동 전체로 번져 각국 공산당이 노선을 골라야 하는 상황을 만들었다.
베를린 장벽 건설
베를린 장벽은 1961년 8월 13일 동독 정부가 서베를린을 둘러싸며 쌓은 156km의 경계 요새 시설이다. 1949년부터 1961년까지 350만 명의 동독 시민이 서독으로 탈출했으며, 그중 상당수가 베를린의 개방된 구역 경계를 통해 빠져나갔다. 숙련 노동자와 지식인의 대규모 유출로 동독 경제가 붕괴 직전에 이르자, 발터 울브리히트 동독 지도자는 니키타 흐루쇼프를 설득하여 경계 봉쇄를 승인받았다. 1961년 8월 3~5일 모스크바에서 열린 바르샤바 조약 회의에서 공식 합의가 이루어졌고, 8월 12일 밤부터 13일 새벽 사이 약 2만 5천 명의 동독 군경 병력이 서베를린으로 통하는 모든 통로를 철조망으로 차단했다. 서방 3국은 베를린의 4개국 공동관리 지위를 직접 침해당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군사적 대응을 피했고, 존 F. 케네디 미 대통령은 "장벽은 전쟁보다 훨씬 낫다"고 결론지었다. 콘크리트 장벽은 이후 28년간 냉전의 상징이 되었고, 최소 140명이 장벽을 넘다 사망했다.
쿠바 미사일 위기
쿠바 미사일 위기는 1962년 소련이 쿠바에 핵미사일을 배치하면서 미국과 정면충돌한 13일간의 대치다. 미국의 쿠바 침공 위협과 튀르키예에 배치된 미국 미사일에 대응해, 흐루쇼프는 혁명 쿠바를 지키고 전략적 균형을 맞추려 미사일을 들여보냈다. 미국이 이를 정찰기로 포착해 해상 봉쇄로 맞서면서 세계는 핵전쟁의 문턱에 섰다.
코시긴 개혁
1965년 총리 코시긴은 기업의 자율성과 이윤·수익성 지표를 확대하는 경제개혁을 추진했다. 경제학자 리베르만의 제안에서 출발한 이 개혁은 계획경제의 효율을 높이려는 시도였다. 그러나 프라하의 봄이 개혁의 위험성을 부각시키고 브레즈네프와 보수파가 제동을 걸면서 개혁은 흐지부지됐다.
프라하의 봄
프라하의 봄은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에서 두브체크가 이끈 개혁운동이다. 검열 완화, 표현과 이동의 자유 확대, 경제 개혁을 내건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는 대중의 광범위한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소련은 이를 진영 이탈로 규정하고, 1968년 8월 바르샤바조약 5개국 군대를 동원해 체코슬로바키아를 점령했다.
데탕트와 전략무기제한협상
데탕트(데탕트)와 전략무기제한협상(SALT)은 1969년부터 1979년까지 미국과 소련이 냉전의 긴장을 낮추고 핵무기 증강을 통제하려 한 10년간의 노력이다. 1960년대 후반 소련이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에서 미국과의 전략적 균형에 도달하면서, 양측은 무한정한 군비경쟁보다 제한이 더 안전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닉슨과 브레즈네프가 1972년 모스크바에서 서명한 SALT I은 탄도미사일 방어체제(ABM)를 제한하는 조약과 공격용 미사일 발사대 숫자를 동결하는 잠정협정으로 이어졌다. 뒤이은 SALT II 협상은 블라디보스토크 합의(1974년)를 거쳐 1979년 빈에서 카터와 브레즈네프의 서명으로 정점에 도달했으나,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으로 미국 상원 비준이 무산되며 데탕트는 종말을 맞았다.
헬싱키 협정
헬싱키 협정(1975년 8월 1일)은 유럽 33개국과 미국, 캐나다 등 35개국이 핀란드 헬싱키에서 서명한 '유럽안보협력회의(CSCE) 최종의정서'이다. 소련은 1954년부터 유럽 전후 국경의 공식 승인을 목표로 유럽안보회의를 추진해 왔고, 1970년대 데탕트 분위기 속에서 서방이 마침내 응했다. 1972년 사전 협의, 1973~1975년 제네바 실무 협상을 거쳐 35개국 정상이 헬싱키에 모였다. 최종의정서는 정치·군사(제1바스켓), 경제·과학(제2바스켓), 인권·인도적 협력(제3바스켓) 등 세 갈래로 구성되었다. 브레즈네프는 국경 불가침 원칙을 관철시켰다고 판단했으나, 제3바스켓의 인권 조항은 소련과 동구권 내 반체제 인사들에게 정부가 스스로 서명한 약속을 근거로 활동할 발판을 제공했다.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1979년 12월, 소련은 흔들리는 아프가니스탄 공산정권을 지키기 위해 군사 개입을 결정했다. 브레즈네프·안드로포프·우스티노프·그로미코가 주도한 이 결정은 짧은 안정화 작전으로 기획됐으나, 무자헤딘의 저항과 미국·파키스탄의 지원 속에서 10년에 걸친 소모전이 됐다.
폴란드 연대노조와 계엄
1980년 여름, 식료품 가격 인상에 맞선 그단스크 레닌 조선소 파업은 21개 요구를 내건 노동자 자주관리운동으로 발전했고, 8월 31일 정부와의 협약을 통해 동구권 최초의 공인 독립노조인 '연대'(Solidarność)가 탄생했다. 1,000만 명이 가입한 연대노조는 16개월 동안 단순한 노동조합을 넘어 자치공화국을 요구하는 사회운동이 되었으나, 소련의 압박과 경제 파탄 속에서 당 제1서기 보이치에흐 야루젤스키는 1981년 12월 13일 계엄을 선포하고 군사평의회를 세워 연대를 불법화했다. 수만 명의 군경이 통신망을 차단하고 지도부를 구금했으며, 부이크 탄광에서는 특수진압대가 파업 광부 9명을 사살했다.
1983년의 위기
1983년의 위기는 1981년 소련이 미국의 핵 선제공격 탐지를 위해 개시한 사상 최대 평시 정보작전 RYaN에서 시작되어, 1983년 11월 NATO의 핵전쟁 지휘통제 훈련 Able Archer 83에서 정점에 달한 냉전 최고의 긴장 국면이다. 페르싱 II 미사일의 서유럽 배치, KAL 007기 격추, 페트로프 중령의 조기경보 오경보 대처, 레이건 행정부의 심리전과 함대 훈련이 겹치며 소련 지도부는 NATO 훈련이 실제 선제공격을 위장한 것이라고 확신했다. 소련은 동독과 폴란드에서 항공기에 핵탄두를 탑재하고 전투태세를 상향했으며, 1990년 미 대통령 외국정보자문위원회는 '소련군 일부가 Able Archer를 엄호로 한 NATO 공격을 선제하거나 역습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고 결론 내렸다.
페레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스트
1985년 서기장이 된 고르바초프는 침체한 경제와 경직된 정치를 되살리기 위해 페레스트로이카(개혁)와 글라스노스트(개방)를 내걸었다. 야코블레프가 설계한 글라스노스트는 검열을 풀고 과거의 범죄를 드러냈으며, 셰바르드나제의 외교는 냉전을 끝으로 이끌었다. 그러나 개혁은 보수파와 급진파 사이에서 통제를 잃어 갔다.
반알코올 캠페인
고르바초프 지도부가 집권 두 달 만에 시작한 첫 대규모 사회 개혁이었다. 1985년 5월 「음주와 알코올 중독 퇴치 조치」가 공포되면서 보드카 생산이 감축되고 판매 시간이 제한되었으며 주류 가격이 크게 올랐다. 정치국에서는 리가초프와 솔로멘체프가 캠페인을 가장 강경하게 밀어붙였고, 실적 경쟁 속에 몰도바·크림·그루지야의 포도밭까지 갈려 나갔다.
체르노빌 참사
1986년 4월 26일, 우크라이나 체르노빌 원자력발전소의 4호기가 폭발해 대량의 방사성 물질이 유럽으로 퍼졌다. 초기에 사고를 축소·은폐한 관성은 글라스노스트를 표방한 새 지도부의 시험대가 됐다. 리시코프가 이끄는 정부위원회가 수습에 나섰고, 수십만 명의 「청산인」이 피폭을 무릅쓰고 동원됐다.
신사고 외교와 냉전의 종식
고르바초프는 핵전쟁에는 승자가 없으며 안보는 상대를 위협해서가 아니라 상대와 함께 얻는 것이라는 「신사고」를 내걸고 소련 외교를 다시 짰다. 28년간 외무장관이던 그로미코가 물러나고 셰바르드나제가 그 자리에 앉았다. 제네바(1985)와 레이캬비크(1986) 정상회담을 거쳐 1987년 중거리핵전력조약(INF)으로 사상 처음 핵무기 한 급이 통째로 폐기되었고, 1988년 12월 유엔 연설에서 고르바초프는 일방 감군 50만과 「선택의 자유」를 선언했다. 1989년 2월에는 아프가니스탄 철군이 끝났다.
제19차 당협의회와 최초의 경쟁 선거
1988년 6월 제19차 전연방 당협의회에서 고르바초프는 권력을 당 기구에서 선출된 소비에트로 옮기는 정치 개혁을 통과시켰다. 회의는 수십 년 만에 처음으로 공개 논쟁의 무대가 되었고, 리가초프가 옐친에게 던진 「보리스, 자네가 틀렸네」라는 말은 온 나라의 유행어가 되었다. 1989년 3월 인민대의원 선거는 소련 역사상 첫 경쟁 선거였다. 지역 당 간부 수십 명이 무명의 도전자에게 패했고, 2년 전 실각했던 옐친은 모스크바 전역구에서 89%를 얻어 부활했다.
민족위기와 중앙권력의 붕괴
1988년 숨가이트 포그롬에서 1991년 빌뉴스 유혈사태에 이르는 일련의 사건은 페레스트로이카 아래에서 소련의 민족질서와 중앙권력이 함께 무너져 가는 과정이다. 네 사건의 성격은 같지 않다. 숨가이트는 나고르노카라바흐 문제를 계기로 터진 반아르메니아 포그롬이자 국가의 치안 실패였고, 1989년 트빌리시는 비무장 민족·독립운동에 대한 군사적 진압이었으며, 1990년 바쿠는 민족폭력과 중앙권력 붕괴가 겹친 자리에서 이루어진 대규모 군사개입이었고, 1991년 빌뉴스는 독립을 선언한 연방공화국의 주권기관에 대한 강제력 행사였다. 그러나 하나의 공통된 위기를 보여 준다. 중앙정부는 민족 간 폭력으로부터 주민을 지키지 못하면서도, 공화국의 정치적 이탈에는 반복해서 군사력을 썼다.
발트 독립운동과 「발트의 길」
에스토니아·라트비아·리투아니아는 1940년 독소불가침조약의 비밀의정서에 따라 소련에 병합된 역사를 기억하고 있었고, 글라스노스트가 열리자 그 기억이 곧 정치가 되었다. 1987년 8월 탈린의 히르베파르크 집회가 비밀의정서를 처음 공개적으로 규탄했고, 1988년에는 세 공화국 모두에서 인민전선(에스토니아의 라흐바린네, 라트비아 인민전선, 리투아니아의 사유디스)이 결성되었다. 합창 축제의 전통 위에서 자란 이 대중운동은 「노래 혁명」이라 불렸다. 1988년 11월 에스토니아가 첫 주권 선언을 냈고, 1989년 8월 23일 조약 체결 50주년에는 200만 명이 세 나라의 수도를 잇는 600킬로미터의 인간 사슬 「발트의 길」을 만들었다. 그해 12월 인민대의원대회는 비밀의정서의 존재를 인정하고 무효를 선언했다. 병합의 법적 근거가 소련 스스로의 손으로 부정된 것이다.
1989년 동유럽 혁명
1989년, 동유럽 전역에서 공산당 일당 체제가 잇따라 무너졌다. 헝가리는 국경을 열었고, 폴란드는 원탁회의로 자유선거에 이르렀으며,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루마니아에서는 차우셰스쿠가 처형됐다. 결정적 차이는 고르바초프가 1956년·1968년과 달리 무력 개입을 포기한 데 있었다.
경제 개혁 논쟁과 500일 계획
1987년 국영기업법과 1988년 협동조합법으로 시작된 경제 개혁은 계획도 시장도 아닌 어중간한 상태를 낳았다. 기업은 임금을 올릴 자유를 얻었지만 가격은 묶여 있었고, 돈은 늘고 물건은 줄면서 재정 적자와 상점의 빈 진열대가 함께 커졌다. 1989년 여름에는 쿠즈바스와 돈바스의 광부 수십만 명이 파업에 나서 비누 한 장까지 요구 목록에 올렸다. 1990년 여름 샤탈린과 야블린스키가 500일 만에 시장경제로 이행한다는 「500일 계획」을 내놓았고 옐친의 러시아공화국이 이를 지지했지만, 고르바초프는 리시코프 정부의 온건안과의 절충을 택했다.
노보오가료보 협상과 신연방조약
1991년 3월 국민투표에서 연방 유지가 76%의 찬성을 얻자, 고르바초프는 이를 마지막 정치적 자본으로 삼았다. 4월 23일 그는 모스크바 교외 노보오가료보 별장에서 러시아의 옐친을 포함한 9개 공화국 정상과 「9+1 성명」을 발표하고, 소련을 주권 공화국들의 자발적 연방으로 재편하는 신연방조약 협상을 시작했다. 발트 3국과 그루지야 등 6개 공화국은 처음부터 불참했다. 여름 내내 세금 징수권과 연방·공화국 권한을 놓고 밀고 당긴 끝에 조약안이 만들어졌고, 서명일은 8월 20일로 잡혔다. 7월 말 고르바초프·옐친·나자르바예프의 심야 회동은 서명 뒤 크류치코프·파블로프 등 강경파를 교체하기로 합의했는데, 이 대화는 KGB의 도청으로 당사자들에게 그대로 새어 들어갔다.
8월 쿠데타와 소련의 해체
1991년 8월, 신연방조약 체결을 막으려는 보수 강경파가 고르바초프를 감금하고 국가비상사태위원회를 세워 쿠데타를 일으켰다. 크류치코프·야조프·파블로프 등이 주도한 이 쿠데타는 옐친이 전차 위에 올라 저항하고 시민이 결집하면서 사흘 만에 무너졌다. 쿠데타의 실패는 오히려 연방의 해체를 가속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