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의 결성
다민족 연방국가는 어떤 원칙 위에 세워졌고, 그 원칙을 둘러싸고 누가 싸웠는가?
1922년 12월 30일, 러시아·우크라이나·벨로루시야·자캅카스의 소비에트 공화국들이 대등한 자격으로 연방조약을 맺어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이 탄생했다. 공화국들을 러시아 연방에 편입하려던 자치화안은 레닌의 개입으로 폐기되었고, 탈퇴권을 명시한 대등한 공화국들의 연방이라는 원칙이 채택되었다. 뒤이은 코레니자치야(토착화) 정책은 민족 언어와 민족 간부를 국가가 체계적으로 육성한, 당대 세계에 전례가 없는 민족정책이었다.
제국의 폐허 위에서: 내전과 조약이 만든 여섯 공화국
1922년 12월, 볼셰비키가 옛 러시아 제국의 영토에서 장악한 것은 단일한 국가가 아니라 여섯 개의 형식적 독립국이었다.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RSFSR),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벨로루시야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그리고 아제르바이잔·아르메니아·그루지야의 세 캅카스 공화국: 이 여섯은 저마다 주권을 가진 별개의 소비에트 공화국으로 존재했다. 어떻게 이런 기묘한 지도가 그려졌는가를 이해하려면 1917년 11월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1917년 11월 15일(구력 2일), 볼셰비키 정부는 「러시아 인민의 권리 선언」을 발표했다. 레닌과 스탈린이 서명한 이 문서는 구제국의 모든 민족에게 평등과 주권, 그리고 분리·독립할 권리까지 천명했다. 차르 체제를 '인민의 감옥'으로 규정했던 볼셰비키에게 이는 이념적 약속인 동시에, 내전에서 비러시아 민족의 지지를 확보하기 위한 현실적 수단이었다. 핀란드·폴란드·발트 3국은 이 기회에 영구히 이탈했고, 우크라이나·벨로루시야·캅카스에서는 독립 공화국들이 선포되었다가 적군의 재진격으로 소비에트화되었다. 그루지야만 해도 1921년 2월까지 멘셰비키 정부 아래 독립국으로 존속했다.
내전이 막바지로 치닫던 1920년 가을, 볼셰비키 지도부는 한 가지 냉정한 사실을 직시하게 되었다. 러시아 중부의 산업 지대는 우크라이나의 곡물과 돈바스의 석탄, 캅카스의 석유 없이는 돌아가지 않았다. 레닌 자신이 1920년 10월 이렇게 썼다: "중앙 러시아, 세계혁명의 그 화로는 원료·연료·식량이 풍부한 변경 지역의 도움 없이는 오래 버틸 수 없다." 여기서 등장한 것이 1920-21년의 양자 조약 체계였다. 1920년 9월 30일 RSFSR-아제르바이잔 군사·경제 동맹, 12월 28일 RSFSR-우크라이나 '노동자-농민 동맹 조약', 1921년 1월 16일 RSFSR-벨로루시야 동맹 조약: 이 조약들은 각 공화국의 주권을 형식상 보존하면서도 군사·경제·외교의 핵심 부문을 통합했다. 우크라이나 혁명위원회는 1920년 1월 27일, RSFSR과의 협정에 관련된 기관들의 모든 법령을 RSFSR의 법령으로 대체한다고 선언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이 조약 체계는 근본적 모순을 안고 있었다. 각 공화국은 헌법상 주권국이었지만, 모든 공화국을 통치하는 러시아 공산당(볼셰비키)은 중앙집권적 단일 조직이었다. 공화국들의 '독립'은 종이 위의 독립이었고, 실질적 결정은 모스크바의 당 중앙위원회 정치국에서 내려졌다. 내전이 낳은 이 모순은 전시에는 임시방편으로 용인되었지만, 전후 복구가 시작되자 더는 지속될 수 없었다.
1921년의 상황은 급박했다. 제1차 세계대전과 내전을 거치며 산업 생산은 1913년의 20% 이하로 추락했고, 1921-22년의 대기근은 볼가·우크라이나·캅카스에서 약 500만 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전시공산주의의 강제 곡물 징발은 탐보프 반란과 크론시타트 봉기를 촉발했고, 1921년 3월 레닌은 신경제정책(네프)으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외교적 압력도 거세졌다. 1922년 4월 제노바 회의에서 구협상국 열강은 소비에트 정권의 차르 채무 승계와 외국 자산 국유화 보상을 요구했다. 외무인민위원 게오르기 치체린은 이 회의를 앞두고 RSFSR이 다른 소비에트 공화국들의 법적 이익까지 대표할 수 있는지에 대한 공식 조회를 러시아 정부에 보냈다. 이는 여러 공화국을 하나로 묶어 외교적 단일 전선을 구축해야 할 필요성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순간이었다. 그 해 4월 16일 라팔로에서 소비에트 러시아와 독일이 맺은 별도 조약은 독일로 하여금 RSFSR의 '연방 공화국들에 대한 권위'를 사실상 인정하게 한 것이었다.
요컨대 1922년 중반까지, 옛 제국의 폐허 위에는 여섯 개의 소비에트 공화국이 병존하고 있었지만 그 관계는 법적으로도 실무적으로도 모호했다. 경제 복구는 통일된 계획을 요구했고, 국제무대에서는 단일한 목소리가 필요했으며, 당은 하나였지만 국가는 여럿이라는 모순은 점점 더 버티기 어려워졌다. 국가 형태를 둘러싼 싸움(스탈린의 자치화안 대 레닌의 연방안)은 이렇게 이미 가열된 솥 위에서 시작되었다.
형식은 독립국, 실질은 하나의 국가: 조약 체계와 자캅카스 연방
내전이 끝나갈 무렵, 구 러시아 제국의 영토에는 여섯 개의 소비에트 공화국이 병존하고 있었다: RSFSR, 우크라이나, 벨로루시야, 아제르바이잔, 아르메니아, 그루지야. 이 공화국들은 형식상 완전히 독립된 주권국가였고, 각자 자체 헌법과 정부, 외교인민위원부까지 두고 있었다. 그러나 내전이라는 공동의 전장은 이미 그것들을 하나의 작동하는 국가 장치 안으로 엮어 놓고 있었다. 붉은 군대의 사령부는 모스크바에 있었고, 철도망과 전신은 단일 체계로 운영되었으며, 경제는 전시 공산주의 아래 사실상 통합되어 있었다.
이 모순적인 상태, 즉 형식적 독립과 실질적 통합을 제도화한 것이 1920년 가을부터 1921년 초까지 체결된 일련의 쌍무 조약들이었다. 가장 먼저 1920년 9월 30일 RSFSR과 아제르바이잔 사이에 「군사·경제 동맹 조약」이 맺어졌고, 이어 12월 28일 RSFSR과 우크라이나 사이에 「노동자-농민 동맹 조약」이, 1921년 1월 16일에는 RSFSR과 벨로루시야 사이에 같은 이름의 조약이 체결되었다. 우크라이나 조약이 이 체계의 전형이었다. 조약 전문은 양 공화국의 「독립과 주권」을 상호 인정한다고 명시했지만, 동시에 군사·해군, 최고경제회의, 대외무역, 재무, 노동, 교통, 체신의 일곱 개 인민위원부를 「통합」한다고 선언했다. 이 통합 인민위원부들은 RSFSR 인민위원회의 산하에 들어갔고, 우크라이나는 자기 인민위원회에 이들 부서의 「전권대표」만을 둘 수 있었다. 우크라이나 대표들은 전러시아 소비에트 대회와 전러시아 중앙집행위원회(VTsIK)에 대표를 파견하는 방식으로 참여했지만, 결정권은 모스크바에 있었다. 요컨대 이 조약들은 공화국들이 대등한 주권국가로서 '연합'한다고 선언하면서도 실제로는 RSFSR의 제도를 통해 통치하는 구조를 만들었다.
이 조약 체계는 당장 두 가지 상반된 정치적 의미를 낳았다. 한편으로는 공화국들이 '독립국'으로서 RSFSR과 조약을 맺었다는 사실 자체가 그 주권을 대외적으로 확인해 주었다: 우크라이나는 1922년 초 튀르키예와 독자 조약을 체결하기도 했다. 다른 한편으로는, 통합 인민위원부의 작동은 공화국 경계를 사실상 무력화했고, 모스크바의 몇몇 지도자들, 특히 민족인민위원 스탈린에게 이 체계는 RSFSR로의 완전한 편입을 향한 과도기적 단계에 불과했다.
캅카스에서는 이 긴장이 가장 첨예하게 표출되었다. 아제르바이잔(1920년 4월), 아르메니아(1920년 11월), 그루지야(1921년 2월)가 차례로 적군에 점령되어 소비에트화된 후, 이 세 공화국은 국경 분쟁, 민족 간 충돌, 경제 붕괴의 소용돌이에 빠져 있었다. 바쿠의 석유 산업, 그루지야의 차 재배, 철도 연결망은 분리된 채 운영될 수 없는 것들이었다. RCP(b) 중앙위원회의 캅카스 사무국(카프비우로)을 이끌던 세르고 오르조니키제는 이 혼란을 수습하는 유일한 길이 세 공화국을 하나의 연방으로 묶는 것이라고 확신했다. 스탈린은 전적으로 동의했고, 레닌도 처음에는 반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루지야 공산당의 상당수는 이 구상을 그루지야 주권의 말살로 받아들였다. 사태의 저변에는 이미 1921년 여름의 충돌이 있었다: 스탈린은 그루지야 혁명위원회 의장 필리프 마하라제가 멘셰비키에 대해 지나치게 관대하고 민족적 자율성을 고수한다는 이유로 해임하고 폴리카르프 므디바니를 그 자리에 앉혔다. 그러나 바로 그 므디바니가 연방 문제에서는 모스크바의 가장 완강한 반대자로 돌아섰다. 그와 그의 동료들은 그루지야가 다른 공화국들처럼 장차의 소비에트 연방에 개별적으로 직접 가입해야 하며, 자캅카스 연방이라는 중간 단계를 거쳐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그들의 눈에 자캅카스 연방은 그루지야의 국가성을 아제르바이잔·아르메니아와 함께 희석시키는 장치였다.
1922년 3월 12일, 이 갈등을 덮고 티플리스에서 세 공화국 대표 회의가 열려 자캅카스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동맹(FSSSRZ)의 결성이 선언되었다. 군사, 경제, 재무, 대외무역 분야에서 통합 기구가 설치되었고, 각 공화국은 형식적 자치를 유지했지만 실질적 권한은 연방 평의회로 넘어갔다. 오르조니키제와 스탈린은 이것을 캅카스의 '정상화'로 보았다. 므디바니와 그루지야 반대파는 이것을 정복의 제도화로 보았다. 똑같은 문서를 두고 이토록 정반대의 해석이 가능했다는 사실은, 소비에트 연방이라는 건물이 세워지기도 전에 그 설계도 자체가 이미 전쟁터였음을 보여준다.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의 지도부는 그루지야보다 연방에 덜 적대적이었다. 아르메니아는 튀르키예와의 국경에서 안보 보장이 절실했고, 아제르바이잔은 바쿠 석유의 수출 경로를 확보해야 했다. 연방은 이들에게 분쟁의 중재자이자 경제 재건의 틀이었다. 그러나 이 '실용적 수용'조차도 자발적이라기보다는 오르조니키제가 주도한 카프비우로의 집요한 압박의 산물이었다. 이렇게 해서 연방 결성 과정에서 처음으로 드러난 패턴, 즉 모스크바가 밀고 지역 공산주의자들이 저항하며 그 저항이 '민족적 일탈'로 낙인찍히는 구도는 이후 1922년 가을에 전개될 더 큰 충돌의 예고편이었다.
자치화 대 연방: 레닌과 스탈린이 충돌한 9월
1922년 8월 10일, 정치국은 조직국에 독립 소비에트 공화국들과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RSFSR) 사이의 관계를 검토할 위원회를 설치하라고 지시했다. 민족인민위원 스탈린, 그리고리 소콜니코프, 세르고 오르조니키제, 크리스티안 라콥스키, 그리고 각 공화국 대표들이 위원으로 임명되었다. 위원회는 스탈린이 초안을 쥐고 있었다.
스탈린의 안은 단순했다. 우크라이나·벨로루시야·아제르바이잔·아르메니아·그루지야의 소비에트 공화국들을 「자치공화국 자격으로」 RSFSR에 편입시키는 것이었다. 이 공화국들의 외교·군사·교통·체신 인민위원부는 RSFSR의 해당 인민위원부에 합병되고, 재무·노동·식량·국민경제 인민위원부는 RSFSR의 지시에 복종하며, 독립적인 것은 교육·사법·내무·농업·보건뿐이었다. RSFSR 전러시아 중앙집행위원회와 인민위원회의 결정은 모든 공화국을 구속했다. 공화국들이 이미 누리고 있던 형식적 독립마저 중앙의 통제 아래 두는, 사실상의 흡수 통합이었다.
스탈린이 이 안을 밀어붙인 이유는 분명했다. 1922년 9월 22일 그가 레닌에게 보낸 편지에서 직접 밝혔듯, 4년간의 내전 동안 모스크바가 국제적 고립을 돌파하기 위해 민족 문제에서 「자유주의를 과시할 수밖에 없었던」 결과, 각 공화국의 공산주의자들 사이에 「진짜 사회독립주의자들, 모든 의미에서 진정한 독립을 요구하는」 세력이 자라났다는 것이다. 스탈린에게 독립 공화국들의 연방이란 처음부터 진지한 것이 아니었고, 「게임」이었으며, 그것을 곧이곧대로 믿는 자들이 문제였다.
위원회는 9월 23일과 24일 뱌체슬라프 몰로토프의 사회로 회의를 열어 스탈린 안을 가결했다. 그루지야 대표 폴리카르프 므디바니만이 반대표를 던졌고, 우크라이나 대표 그리고리 페트롭스키는 기권했다. 그루지야 공산당 중앙위원회는 이미 9월 15일 스탈린의 테제를 검토한 뒤 「자치화 형태의 연방은 시기상조」이며 「독립의 모든 속성이 보존되어야 한다」고 결의한 상태였다. 벨로루시야 당 중앙위원회도 독립 공화국들 사이의 조약 관계 유지를 지지했다. 우크라이나 당 중앙위원회는 아예 논의조차 하지 않았다. 크림에서 휴양 중이던 라콥스키는 9월 28일 스탈린에게 장문의 반대 서한을 보내 이 안이 「독립 공화국들의 형식적 폐지」이며 프롤레타리아 러시아의 해방적 역할을 훼손한다고 경고했다.
9월 25일, 위원회의 모든 자료, 즉 스탈린의 초안, 표결 결과, 각 공화국 당 중앙위원회의 결의가 고르키의 병상에 있던 레닌에게 보내졌다. 레닌은 즉시 스탈린을 불러 2시간 40분 동안 면담했고, 전날에는 소콜니코프를, 다음 날에는 므디바니를 만났다. 그리고 9월 26일, 정치국 위원들을 위한 서한을 카메네프에게 보냈다. 이것이 연방 결성의 전체 궤도를 바꾼 문서다.
레닌의 서한은 놀라울 만큼 실무적이고 온건한 어조로 시작된다. 「스탈린은 약간 서두르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한 뒤, 스탈린이 이미 한 가지 양보에 동의했음을 알렸다: 1조에서 「RSFSR에의 편입」 대신 「RSFSR과 함께 유럽과 아시아 소비에트 공화국 연방으로의 형식적 통합」이라는 표현으로 바꾸기로 했다는 것이다. 레닌은 이어서 RSFSR의 전러시아 중앙집행위원회와 별도로 「유럽과 아시아 소비에트 공화국 연방의 연방 전연방 중앙집행위원회」를 두고, 합병되는 인민위원부들에도 각 공화국 대표를 파견하며, 모든 변경은 공화국 중앙집행위원회들의 합의로 하라고 제안했다.
핵심 문장은 이것이다: 「중요한 것은 '독립파'에게 먹이를 주지 않는 것, 그들의 독립을 파괴하지 않는 것, 그리고 새로운 층, 즉 대등한 공화국들의 연방을 하나 더 만드는 것이다.」
레닌은 스탈린을 공개적으로 공격하지 않았다. 그가 므디바니에 대해 「'독립주의' 혐의를 받는」이라고 따옴표를 친 것에서 드러나듯, 스탈린의 '사회독립주의자'라는 낙인을 조용히 무효화하면서도 정면 충돌은 피한 것이다. 그러나 스탈린은 굴욕을 느꼈다. 9월 27일 그가 정치국에 보낸 답신에서, 연방안 자체는 수용하면서도 「이 '서두름'이 레닌 동지의 민족적 자유주의라는 먹이를 '독립파'에게 주고 있다」고 반격했다. 이튿날 정치국 회의에서 그와 카메네프가 주고받은 쪽지에는 더 적나라한 감정이 드러난다. 카메네프가 「일리치가 독립을 지키기 위한 전쟁에 나섰다」고 적자, 스탈린은 이렇게 답했다: 「일리치에 대해서는 단호함이 필요하다. 만약 그루지야 멘셰비키 한 쌍이 그루지야 공산주의자들에게 영향을 주고, 그들이 다시 일리치에게 영향을 준다면, 도대체 '독립'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카메네프의 응답은 현실적이었다: 「블라디미르 일리치가 고집하는데, 저항하면 더 나쁠 거야.」 스탈린: 「모르겠다. 그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두지.」
10월 6일, 레닌이 건강 문제로 불참한 가운데 열린 중앙위원회 전원회의는 레닌이 수정한 연방안을 채택했다. 스탈린은 물러섰고, 자치화안은 폐기되었다. 므디바니가 후일 기록했듯, 「처음에는 (레닌 없이) 우리를 주먹다짐하듯 때리고 조롱했지만, 레닌이 개입하자 사태는 공산주의적 이성 쪽으로 돌아섰다. 대등한 자발적 연방 원칙이 채택되었고, 대국주의자들이 오히려 공격받았다.」 그러나 이 승리는 불안정했다. 스탈린은 양보했을 뿐 설득된 것은 아니었다. 그가 레닌을 「민족적 자유주의자」라 부른 것은 이 논쟁의 마지막 말이 아니었다.
구타 한 방과 대회 하루: 그루지야 사건에서 볼쇼이 극장까지
10월 중앙위원회 총회가 레닌의 대등한 연방안을 채택한 지 사흘 만에, 그루지야 공산당은 균열했다. 므디바니와 마하라제가 이끄는 중앙위원회는 자캅카스 연방을 경유하지 않고 그루지야가 소련에 직접 가입할 것을 요구했다. 그들은 오르조니키제의 자캅카스 당위원회(자크크라이콤)가 공화국 주권을 짓밟고 있다고 보았다. 오르조니키제는 이를 '민족 일탈'로 간주했다. 10월 21일 새벽 2시 55분, 므디바니는 티플리스에서 직통 전신으로 카메네프와 부하린에게 오르조니키제의 '폭정'을 호소했다. 같은 날 레닌은 므디바니를 질책하는 전보를 보내며 오르조니키제 편에 섰지만, 그루지야 중앙위원회는 다음 날인 10월 22일 전원 사임이라는 전례 없는 수단을 택했다.
오르조니키제는 지체 없이 새로운 중앙위원회를 임명했다. 이제 전면적인 내부 전쟁이었다. 므디바니파는 모스크바에 항의 서한을 쏟아부었고, 오르조니키제의 카프비우로는 이들을 '민족주의적 일탈자'로 낙인찍었다. 갈등은 11월에 절정에 달했다. 레닌의 개인 특사로 티플리스에 파견된 알렉세이 리코프가 오르조니키제의 아파트에 머물던 중, 리코프의 시베리아 유형 시절 동지이자 므디바니파 지지자인 노볼셰비키 아카키 코바히제가 방문했다. 대화는 필연적으로 그루지야 정치로 번졌고, 격분한 오르조니키제가 코바히제를 구타했다. 리코프와 그의 아내가 말려야만 사태가 진정되었다.
이 사건은 레닌에게 결정적이었다. 그는 펠릭스 제르진스키를 조사 위원장으로 티플리스에 파견했으나, 제르진스키는 오르조니키제와 스탈린에게 우호적인 보고서를 작성해 사건을 축소했다. 제르진스키가 모스크바로 돌아왔을 때 레닌은 이미 리코프로부터 진상을 파악한 뒤였다. 제르진스키의 보고서가 사실상 오르조니키제를 옹호했다는 점은 레닌을 격분시켰고, 이 분노는 곧 「민족 문제 또는 자치화에 관하여」의 구술로 이어졌다.
그러나 이 모든 격렬한 정치 투쟁과 병행하여, 연방 결성의 기계는 멈추지 않았다. 12월 29일, 4개 공화국─러시아·우크라이나·벨로루시야·자캅카스─의 전권 대표단 회의가 스탈린의 사회로 열려 결성 선언과 연방조약을 채택했다. 12월 30일 오후, 모스크바 볼쇼이 극장에 2,215명의 대의원이 모였다. 대의원의 90퍼센트 이상이 러시아 공산당 당원이었다. 병석의 레닌은 명예 의장으로 선출되었으나 참석하지 못했다. 칼리닌이 대회 의장을 맡았다.
스탈린이 결성 보고를 했다. 그의 연설은 소비에트 권력의 5년사를 정리하는 데 바쳐졌다: 내전의 폐허를 이겨내고 붉은 군대를 세운 첫 시기, 그리고 경제 복구를 위해 공화국들의 힘을 하나로 모아야 하는 지금. 그는 선언과 조약을 낭독하고 채택을 요청했고, 대회는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프룬제의 제안으로 문서는 각 공화국 중앙집행위원회의 최종 심의를 거쳐 확정하기로 했다. 네 공화국을 대표하는 4명의 의장─칼리닌, 페트롭스키, 체르뱌코프, 나리마노프─으로 구성된 371명의 연방 중앙집행위원회가 선출되었다.
대회장 밖에서 레닌은 이미 다음 전투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가 구술한 「민족 문제 또는 자치화에 관하여」의 첫 문장들은 대회 이틀째인 12월 31일에 받아쓰여졌다. 그루지야 중앙위원회 집단 사임부터 볼쇼이 극장의 박수갈채까지, 불과 70일이 걸렸다.
죽어가는 레닌과 살아있는 당: 마지막 구술에서 제12차 대회까지
1922년 12월 30일, 볼쇼이 극장에서 소비에트 연방의 탄생을 선포하던 바로 그날, 레닌은 모스크바 교외 고르키의 침실에서 개인비서 마리야 볼로디체바에게 「민족 문제 또는 자치화에 관하여」를 구술하기 시작했다. 이틀에 걸쳐 받아쓰인 이 글은 연방 결성을 축하하는 문서가 아니었다. 레닌은 "자치화라는 이른바 문제에 충분히 정력적으로 또 날카롭게 개입하지 못한 데 대해 러시아 노동자들 앞에 크게 죄를 지었다"고 적었다. 여름과 가을을 병으로 누워 보내면서 그 문제는 "나를 거의 완전히 비껴갔다"는 것이다.
레닌이 특히 격노한 것은 제르진스키가 보고한 그루지야 조사 결과였다. 오르조니키제가 그루지야 공산주의자 코바히제를 구타한 사건을 제르진스키가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는 이야기를 듣고, 레닌은 이렇게 썼다. "오르조니키제가 육체적 폭력을 휘두르는 데까지 이르렀다면 우리가 어떤 늪에 빠졌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는 스탈린의 "조급성과 행정가적 열중"과 "그 악명 높은 '사회민족주의'에 대한 분노"가 "치명적인 역할을 했다"고 진단했고, 정치적 책임을 "물론 스탈린과 제르진스키에게" 물었다.
그러나 이 글의 진짜 폭탄은 인신 공격이 아니라 원칙의 재정립이었다. 레닌은 추상적인 민족주의 논의를 거부하고 "억압하는 민족의 민족주의와 억압받는 민족의 민족주의, 큰 민족의 민족주의와 작은 민족의 민족주의를 구별해야 한다"고 썼다. 억압해온 큰 민족의 인터내셔널리즘은 형식적 평등을 넘어, "억압하는 민족 쪽에서 실제 삶 속에서 생겨나는 불평등을 보상하는 그런 불평등"에까지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 주장은 볼셰비키 민족정책의 철학적 기초를 근본적으로 다시 쓴 것이었다. 레닌은 한발 더 나아가, "다음 소비에트 대회에서 되돌아가서,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을 군사와 외교에만 남겨두고 다른 모든 면에서는 개별 인민위원부의 완전한 독자성을 회복하는" 방안까지 배제하지 말라고 촉구했다.
이 글은 당대회를 겨냥한 것이었으나, 레닌은 끝내 당대회에 나가지 못했다. 1923년 3월 5일, 세 번째 뇌졸중이 임박한 상태에서 그는 트로츠키에게 편지를 보냈다. "존경하는 트로츠키 동지, 그루지야 사건을 당 중앙위원회에서 방어하는 일을 맡아주시기를 진심으로 부탁합니다. 이 사건은 지금 스탈린과 제르진스키의 '박해' 아래 있습니다." 이튿날 그는 그루지야 반대파 지도자 므디바니와 마하라제에게 "나는 전심으로 그대들의 사건을 따르고 있다. 오르조니키제의 오만과 스탈린과 제르진스키의 방조에 분노한다"고 써 보냈다. 그러나 트로츠키는 레닌의 글을 정치국에 즉시 회부하지 않고 한 달 넘게 쥐고 있었다. 그 사이 그는 스탈린의 당대회 테제 초안에 수정을 가하는 방식으로 절충을 모색했다. 그는 대러시아 국수주의를 "주된 위험"으로 명기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정작 대회장에서 레닌의 글을 낭독하거나 므디바니를 위해 발언하지는 않았다.
제12차 당대회(1923년 4월 17-25일)는 레닌이 불참한 첫 대회였다. 카메네프는 개회사에서 레닌이 "곧 다시 세계혁명의 키를 잡을 것"이라고 했지만, 대회의 실질적 무게중심은 스탈린에게로 옮겨가고 있었다. 레닌의 글은 대회 본회의장이 아니라 '지도자 회의'(세니오렌-콘벤트)에서만 낭독되었고, 카메네프는 므디바니가 그 글을 인용하려는 시도를 저지했다.
스탈린은 민족 문제에 관한 대회 보고에서 두 개의 일탈, 즉 대러시아 국수주의와 지방 민족주의를 모두 공격했다. 대러시아 국수주의를 "주된 위험"으로 인정하면서도, 그는 "민족 문제에는 한계가 있다"며 "노동계급의 권력이라는 더 중요한 문제" 앞에서는 민족자결권도 제한될 수 있음을 분명히 했다. 이는 레닌 구술의 급진적 결론, 즉 연방을 군사·외교로 축소하라는 제안을 우회하는 논리였다.
진짜 싸움은 민족문제 분과회의에서 벌어졌다. 우크라이나 정부수반 라콥스키는 연방의 창설 자체를 "거대한 파괴"라고 부르며, 공화국들의 주권을 형해화하는 중앙집권화를 맹비판했다. 그는 레닌의 12월 구술을 직접 거론하며, 중앙이 공화국의 권한을 잠식할수록 연방은 종이 위의 글자에 불과해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스크리프니크도 우크라이나의 구체적 사례를 들어 "형식적 평등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레닌의 논점을 보강했다.
그러나 최종 결의는 양쪽이 모두 일부 승리한 타협이었다. 대러시아 국수주의가 주된 위험으로 명시되었고, 코레니자치야, 즉 각 공화국에서 민족어로 행정·교육·출판을 운영하고 민족 간부를 체계적으로 양성하는 정책이 공식 당 노선으로 채택되었다. 이는 당대 세계에서 유례를 찾기 어려운, 국가가 소수민족의 발전을 제도적으로 지원하는 선언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연방 중앙의 강력한 권한은 유지되었고, 당의 단일한 중앙집권 체제 안에서 공화국 당 조직들은 모스크바 정치국의 결정에 복종하는 지위를 확정받았다. 레닌이 마지막 구술에서 경고한 긴장, 곧 형식적 연방과 실질적 중앙집권 사이의 모순은 이미 대회장 안에서 완성된 형태로 존재하고 있었다. 이 글은 1956년까지 공개되지 않았다.
헌법이라는 전장: 연방과 공화국 사이의 권력 배분
1922년 12월 30일의 연방 결성 선언과 조약은 새 국가의 윤곽만 그렸을 뿐, 구체적인 권력 배분은 헌법으로 채워야 했다. 1923년 1월 10일, 연방 중앙집행위원회 상임위원회는 예산·최고재판소·국기와 국장·인민위원부 구성·중앙집행위원회 규정·인사를 각각 다룰 6개 위원회를 설치했다. 그해 4월의 제12차 당대회가 민족 문제의 큰 방향을 정했다면, 헌법 초안 작업은 그 방향을 조문으로 번역하는 싸움이었다.
초안을 둘러싼 가장 치열한 충돌은 인민위원부의 구조에서 일어났다. 헌법 제50조는 연방 인민위원부를 세 부류로 나누었다. 외무·군사해군·대외무역·교통·체신의 5개 인민위원부는 '전연방 인민위원부'로서 공화국들에 직속 대표만 두었고, 공화국 정부를 거치지 않았다. 최고경제회의·재정·노동·노동자농민감독·식량의 5개는 '통합 인민위원부'로 불렸는데, 모스크바의 연방 인민위원부와 공화국의 동명 인민위원부가 이중으로 지휘 계통을 이루었다. 나머지 교육·보건·사법·내무·농업·사회보장은 순수한 공화국 인민위원부로 남아, 헌법상 연방이 개입할 수 없는 공화국의 고유 사무였다. 이 삼층 구조는 연방과 공화국 사이의 권력 배분을 조문화한 것이면서, 동시에 중앙집권화의 통로이기도 했다. 통합 인민위원부는 공화국이 형식적으로 보유했지만, 운영 지침과 예산·인사는 연방 인민위원부가 결정했다.
라콥스키가 이 구조에서 본 것은 '죽은 손의 중앙집권'(dead-handed centralism)이었다. 그는 1923년 6월의 당 중앙위원회 회의에서 스탈린의 안이 연방을 '더 중앙집권적으로' 비틀고 있다고 항의했다. "우리 우크라이나인들은 스탈린보다 덜 공산주의자가 아니라고 생각한다"는 그의 발언은 회의록에 남았다. 스탈린은 라콥스키와 스크리프니크의 입장을 '연방이 아니라 연합(confederation)을 요구하는 것'이라고 반박했고, 다수는 스탈린 편에 섰다. 라콥스키가 끝까지 싸운 조항은 제59조였다. 공화국 중앙집행위원회가 연방 인민위원부의 명령이 '연방 헌법·연방 법률·공화국 법률과 명백히 저촉될 경우' 그 효력을 정지할 수 있다는 이 조항은, 그에게 공화국 주권의 마지막 보루였다. "개별 공화국의 주권은 조약에 명시된 범위 내에서만, 그리고 연방 관할의 범위 내에서만 제한된다"는 그의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조문 자체는 남았다.
입법부 구조도 첨예한 논쟁의 대상이었다. 헌법은 연방 중앙집행위원회를 양원제로 설계했다. 인구 비례로 선출된 371명의 연방 소비에트와, 각 연방 공화국에서 5명·각 자치공화국에서 1명씩 파견된 민족 소비에트였다. 12차 당대회의 민족 분과 회의에서 라콥스키는 러시아 연방에 속한 15개 자치공화국·자치주가 우크라이나나 벨라루스와 동등한 표를 행사하면, 러시아 연방이 전체 360석 중 최소 280석을 차지하게 된다고 지적했다. 그는 어느 한 공화국도 상원 의석의 5분의 2를 넘을 수 없다는 수정안을 냈다. 스탈린은 이를 '국가 물신숭배(state fetishism)'라고 불렀고, 표결에서 부결시켰다. 러시아 연방의 압도적 비중은 그대로 제도화되었다.
1923년 6월 26~27일의 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헌법 초안이 논의·보완·승인되었고, 7월 6일 연방 중앙집행위원회 제2차 회기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 헌법의 시행에 관하여」라는 결의와 함께 초안을 승인했다. 이 시점부터 헌법은 사실상 효력을 가졌다. 이후 각 공화국의 중앙집행위원회에서 심의를 거쳐, 1924년 1월 31일 제2차 연방 소비에트 대회가 만장일치로 최종 비준했다. 72개 조문으로 확장된 최종본은 원래의 결성 선언과 조약을 그대로 첫머리에 두었고, 제4조에 "각 연방 공화국은 연방으로부터 자유로이 탈퇴할 권리를 보유한다"는 문구를 명시했다. 그러나 같은 헌법 제1조 (w)항은 연방이 "본 헌법에 저촉되는 공화국 소비에트 대회와 중앙집행위원회의 행위를 폐기할 수 있다"고 규정했다. 주권과 중앙집권은 같은 문서 안에 나란히 새겨졌다.
민족을 만드는 국가: 코레니자치야의 현장
1923년 여름, 우크라이나 정부는 두 개의 법령으로 코레니자치야의 실행을 시작했다. 7월 27일 '학교·교육·문화 기관의 우크라이나화' 법령은 2년 안에 모든 학교를 우크라이나어로 전환하라고 명령했다. 8월 1일 '언어 평등 보장과 우크라이나 문화 발전' 법령은 공무원에게 2년 안에 우크라이나어를 습득하도록 요구하고, 모든 공문서가 우크라이나어로 작성되어야 한다고 규정했다. 문제는 이 법령을 집행해야 할 당과 국가 기구 자체가 압도적으로 러시아어를 쓰고 있었다는 점이다. 1922년 우크라이나 공산당(CP(B)U) 당원 중 우크라이나인은 23%에 불과했고, 우크라이나어를 구사할 수 있는 당원은 11%였다.
저항은 즉각적이었다. CP(B)U의 실권자 드미트로 레비드는 우크라이나화를 '페틀류라 분자들과의 타협'이라고 공격했다. 그러나 모스크바는 물러서지 않았다. 1925년 4월 당 중앙위원회는 우크라이나화를 가속하라는 결의를 채택했고, 같은 해 스탈린은 CP(B)U 제1서기로 러시아어를 모어로 하는 라자르 카가노비치를 임명했다. 카가노비치는 오히려 자신이 러시아어 화자이기에 거부할 명분이 없다는 역설적 논리로 우크라이나화를 밀어붙였다. 지연하는 공무원은 해고 통보를 받았고, 기관에 불시에 들이닥치는 '우크라이나화 감독관' 제도까지 도입되었다.
교육 부문의 변화가 가장 극적이었다. 1922-23학년도에 우크라이나어 학교에 재학 중인 학생은 50%에 못 미쳤으나, 1932-33학년도에는 88%에 도달했다. 대학 교육에서도 1926년 우크라이나어 강의 비율이 33%였던 것이 1929년에는 58%로 올랐다. 신문 발행 부수로 보면 1925년 우크라이나어 신문이 전체의 50%였으나 1932년에는 89%가 되었다. 극장 공연의 4분의 3이 우크라이나어로 올려졌고, 오데사와 키이우 영화 스튜디오에서는 우크라이나어 영화가 제작되었다.
이 급진적 전환의 배후에는 두 명의 교육인민위원이 있었다. 올렉산드르 슘스키(1925-27년)는 우크라이나화를 가장 공격적으로 추진하며 당 지도부에도 민족적 대표성을 요구했다. 그는 CP(B)U 제1서기 자리를 우크라이나인에게 넘기라고 스탈린에게 공개적으로 요구했다가 1927년 '민족주의 일탈'로 해임되었다. 후임 미콜라 스크리프니크는 스탈린과 충돌하지 않는 선에서 우크라이나화를 더 멀리까지 밀고 나갔다. 우크라이나어 철자법을 러시아어의 영향에서 벗어나게 개정한 '스크리프니크 철자법'(1928년)과 우크라이나어 학술 용어 사전 편찬이 그의 대표적 유산이다.
당과 국가 기구의 인적 구성도 바뀌었다. CP(B)U 당원 중 우크라이나인 비율은 1922년 23%에서 1933년 60%로 올랐다. 같은 기간 러시아인 비율은 54%에서 23%로 떨어졌다. 도시의 민족 구성도 움직였다. 1923년에서 1933년 사이에 하르키우의 우크라이나인 거주 비율은 38%에서 50%로, 키이우는 27%에서 42%로, 드니프로페트로우스크는 16%에서 48%로 상승했다.
우크라이나의 변화는 가장 크고 가장 잘 기록된 사례이지만, 코레니자치야는 연방 전역에서 동시에 진행된 실험이었다. 벨라루스에서는 1924년 벨라루스화가 선포되었고, 1920년대 중반까지 학교의 28%만이 벨라루스어로 가르쳤으나 1928년에는 80%에 육박했다. 중앙아시아에서는 문자가 없던 민족들에게 라틴 알파벳 기반의 표기 체계가 만들어졌다. 1926년 바쿠에서 열린 제1차 전연방 투르크학 회의는 튀르크계 언어들의 라틴 문자 전환을 결정했고, 아제르바이잔이 이를 선도했다. '북방 위원회'는 시베리아와 극북의 소수 민족 30여 개에 문자를 보급하고 학교를 세웠다. 1926년 인구 조사에 따르면 카자흐스탄의 문자 해독률은 25.2%, 우즈베키스탄은 10.6%, 타지키스탄은 3.7%에 불과했으나, 10년 뒤에는 대부분의 공화국에서 70%를 넘어섰다.
그러나 코레니자치야에는 애초부터 긴장이 내장되어 있었다. 이 정책의 목표는 민족의 자유로운 발전이 아니라, 민족이라는 형식을 통해 소비에트 권력을 강화하는 것이었다. 민족어 학교와 신문, 민족 간부가 늘어날수록, 중앙과 다른 이해관계를 가진 민족 엘리트도 자라났다. 우크라이나의 슘스키와 스크리프니크, 벨라루스의 프리셰프 등은 처음에는 모스크바가 보낸 집행자였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자기 공화국의 이익을 대변하는 목소리가 되었다. 테리 마틴이 '소수민족 우대 제국'이라 부른 이 체제는, 민족을 키우기 위해 설계되었으면서도 민족이 키워지면 그것을 위험으로 간주해야 하는 모순을 안고 있었다. 1932년 12월, 우크라이나화의 종말을 알리는 첫 조치가 RSFSR 내 우크라이나어 교육의 전면 폐지로 나타났을 때, 그 모순의 대가는 이미 집단화와 기근 속에서 계산되고 있었다.
연방인가 제국인가: 한 세기의 논쟁
소련 결성으로 무엇이 해결되었고 무엇이 해결되지 않았는지에 대해서는 역사가들 사이에 100년 가까이 날카로운 대립이 이어져 왔다. 1922년 12월의 타협은 적어도 세 가지 긴장을 봉합하지 않은 채 출발했다. 첫째, 모든 연방 공화국에 탈퇴권을 명시한 헌법과 단일한 중앙집권적 당 사이의 모순이었다. 둘째, 민족 공화국들 사이의 대등한 연방이라는 원칙과 러시아 공화국의 압도적 비중이라는 현실이었다. 셋째, 코레니자치야로 대표되는 민족 육성 정책과 당이 지향하는 단일한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 사이의 충돌이었다. 이 세 긴장은 1991년 연방의 종말까지 소련을 따라다녔다.
냉전기 서방 역사학을 지배한 것은 리처드 파이프스의 해석이었다. 1954년 출간된 『소련의 형성』에서 파이프스는 소비에트 연방제를 겉치레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공화국들의 형식적 주권은 모스크바가 주변부를 장악하기 위한 수단이었으며, 연방 구조는 중앙집권을 은폐하는 위장막이었다. 파이프스에게 소련은 "제국의 탈을 쓴 제국"이었고, 1991년의 붕괴는 이 본질이 드러난 필연적 결말이었다.
1991년 소련 붕괴와 기록물 개방은 이 구도를 근본적으로 바꾸었다. 테리 마틴은 2001년 『소수민족 우대 제국』에서 소련을 "제국"으로 보면서도 정반대의 결론에 도달했다. 마틴은 방대한 당 기록물을 분석해, 1920년대 소비에트 국가가 비러시아 민족의 언어·교육·간부를 전례 없이 체계적으로 육성했음을 실증했다. 그가 "소수민족 우대"라 명명한 코레니자치야는 단순한 위장이 아니라 실제 자원이 투입된 국가 정책이었다. 마틴의 해석에서 소련은 제국주의 열강들과는 반대 방향으로 움직인 독특한 다민족 국가였다.
프랜신 허쉬는 2005년 『민족들의 제국』에서 또 다른 각도에서 개입했다. 허쉬는 소련의 민족 정책이 제정 러시아의 민족지학자들과 그 지식을 계승하여 전개되었음을 보여주며, 마틴이 강조한 단절보다 연속성에 주목했다. 두 연구는 방법론과 강조점에서 갈렸지만, 공통적으로 1991년 이전의 서방 연구가 소련 민족정책의 실제 작동을 과소평가했음을 입증했다.
오늘날 논쟁의 한 축은 "연방 대 제국"이라는 이분법 자체를 문제 삼는다. 정치학자 타니아 라파스는 2012년 저서에서 미국, 스위스 등 서구 연방국들의 형성 과정도 폭력과 강제로 점철되었음을 지적하며, 소련의 "가짜 연방"론이 규범적 잣대에 기댄 이중기준이라고 비판했다. 한편 콜로니츠키는 소련 결성을 당내 다양한 민족공산주의 세력들 사이의 "타협"으로 보면서, 어떤 단일한 설계자의 청사진이 아니라 내전이라는 극한 조건에서 살아남기 위한 냉혹한 선택들의 산물이었다고 평가한다.
소련 결성이라는 사건이 남긴 가장 깊은 물음은 오늘날까지 닫히지 않았다. 제국의 폐허 위에 대등한 민족들의 연방을 세우려 했던 그 실험은 형식이 현실을 바꿀 수 있는지, 다민족 국가가 중앙집권 없이 존속할 수 있는지, 그리고 제국의 유산은 제도로 청산될 수 있는지를 물었다. 1991년 이후의 세계는 이 물음들에 대한 답을 다른 방식으로 내고 있지만, 물음 자체는 1922년 12월 볼쇼이 극장의 것이 그대로 남아 있다.
정착된 것, 미해결된 것, 그리고 한 세기의 평가
1922-24년의 결성 과정이 정착시킨 것은 세 가지다. 첫째, 국가 형태로서의 연방이다. 러시아가 다른 공화국들을 삼키는 자치화가 아니라, 명목상으로나마 대등한 공화국들이 모인 하나의 연방이 수립되었다. 이 결과는 레닌의 9월 서한과 12월 구술이라는 두 차례 개입 없이는 불가능했다. 둘째, 민족을 인정하고 육성하는 국가다. 제12차 대회의 코레니자치야 결의는 공화국들에 민족어 학교, 민족 간부, 민족문화 기관을 세울 책임과 자원을 동시에 부여했다. 셋째, 탈퇴권을 포함한 헌법적 건축이다. 1924년 헌법 제4조는 각 연방 공화국이 '자유로이 연방을 탈퇴할 권리'를 명시했고, 이 조항이 1991년 12월 벨라베자 협정의 법적 근거가 될 것이라는 사실을 그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다.
그러나 결성 과정이 해결하지 못한 핵심 긴장은 단일한 당의 중앙집권과 연방적 분권 사이의 모순이었다. 정치국이 공화국 간부의 임면을 결정하고, 국가보안기관이 모스크바의 명령계통 아래 있었으며, 연방 중앙집행위원회는 당의 결정을 추인하는 기구였다. 이 모순은 1930년대 스탈린의 '위대한 후퇴' 속에서 폭발했다. 스크리프니크 사건, 우크라이나화의 축소, 러시아어와 러시아 민족의 위상 재확립이 이어졌고, 1920년대의 소수민족 우대 연방은 점차 러시아인이 '동등한 자들 중 첫째'인 위계적 제국으로 전환되었다.
냉전기 서방 역사학의 지배적 해석은 리처드 파이프스의 『소련의 형성』(1954)으로 대표된다. 파이프스에게 소련은 '간판만 바꿔 단' 제국이었고, 연방의 외피는 민족을 분할 통치하기 위한 위장술에 불과했다. 이 시각은 1990년대 '제국 전환'의 학자들인 테리 마틴, 로널드 수니, 프랜신 허쉬에 의해 근본적으로 수정되었다. 마틴이 '소수민족 우대 제국'이라는 역설적 개념을 제안한 것은, 소련이 제국적 중앙집권과 민족 육성이라는 양립 불가능해 보이는 두 과제를 동시에 수행했기 때문이다. 허쉬는 소련의 민족 공화국들이 단순히 모스크바가 그은 선이 아니라, 옛 제국의 민족지학자들이 축적한 지식과 현지 엘리트들의 정치적 협상의 산물임을 밝혔다. 수니는 민족 정체성이 '허위의식'이 아니라 실재하는 정치적 힘이었으며, 연방 구조가 오히려 민족적 동원의 틀을 제공했다고 분석했다.
오늘날의 평가는 두 극단을 거부한다. 소련은 차르 제국의 단순한 계승도, 순수한 반제국적 해방 기획도 아니었다. 그것은 민족을 억압하는 동시에 생산하는, 중앙집권화하는 동시에 토착화하는, 파괴하는 동시에 건설하는 모순된 국가였으며, 그 모순이야말로 연방을 70년 가까이 유지시킨 동력이자 1991년 파국의 설계도였다.
결과
1924년 헌법은 연방과 공화국의 권한 배분을 성문화하고 각 연방 공화국의 자유로운 탈퇴권을 명시했다. 코레니자치야는 수십 개 민족의 학교·출판·행정을 민족어로 세웠고, 역사가 테리 마틴은 그 결과를 「소수민족 우대 제국」이라 불렀다. 형식적 평등과 단일한 당의 중앙집권 사이의 긴장은 남았지만, 연방은 민족 문제에 대한 세계사적 실험으로서 이후 탈식민 세계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연표
- 1920–1921조약 체계: 독립 공화국들의 동맹
내전기 러시아 소비에트 공화국은 우크라이나·벨로루시야·자캅카스의 소비에트 공화국들과 군사·경제 동맹 조약을 맺었다. 형식상 독립국들 사이의 조약 관계였으나, 국방과 경제의 통합이 깊어지면서 항구적인 국가 형태의 문제가 제기되었다.
- 1922.03.12자캅카스 연방의 결성
그루지야·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이 연방적 동맹으로 결합했다. 오르조니키제가 이끄는 자캅카스 당 지도부가 통합을 강하게 밀어붙이면서 그루지야 공산당 지도부와의 갈등이 자라났다.
- 1922.08–09스탈린의 자치화안
조직국 위원회에서 민족인민위원 스탈린은 우크라이나 등 공화국들을 자치공화국 자격으로 러시아 연방에 편입하는 안을 기초했다. 우크라이나와 그루지야의 당 지도부가 반발했고, 안건은 병상의 레닌에게 회부되었다.
- 1922.09.26레닌의 개입: 대등한 공화국들의 연방
레닌은 카메네프에게 보낸 서한에서 자치화안을 비판하고, 러시아가 다른 공화국들과 대등한 자격으로 함께 가입하는 새로운 연방, 곧 유럽과 아시아의 소비에트 공화국 연방을 제안했다. 스탈린은 이 수정을 받아들여 안을 다시 썼다.
- 1922.10–12그루지야 사건
자캅카스 연방을 경유하지 않는 직접 가입을 요구하던 그루지야 중앙위원회가 집단 사임했고, 오르조니키제가 그루지야 활동가를 구타하는 사건까지 벌어졌다. 제르진스키가 이끈 조사위원회는 사실상 오르조니키제를 옹호했고, 그 결론은 레닌을 격분시켰다.
- 1922.12.30제1차 연방 소비에트 대회: 연방의 탄생
러시아·우크라이나·벨로루시야·자캅카스의 대표들이 연방 결성 선언과 연방조약을 채택했다. 스탈린이 결성 보고를 했고, 프룬제의 제안에 따라 문서는 각 공화국의 심의를 거쳐 확정하기로 했다. 칼리닌이 포함된 의장단이 새 연방 중앙집행위원회를 이끌게 되었다.
- 1922.12.30–31레닌의 마지막 투쟁: 대러시아 국수주의 비판
레닌은 「민족 문제 또는 자치화에 관하여」를 구술해 대러시아 국수주의를 억압 민족의 배외주의로 규정하고, 과거에 억압했던 민족은 형식적 평등을 넘어 실질적 불평등을 보상해야 한다고 썼다. 그는 그루지야 사건의 정치적 책임을 스탈린과 제르진스키에게 물었다.
- 1923.04제12차 당대회와 코레니자치야
당대회는 민족 문제 결의를 채택해, 각 공화국에서 민족어와 민족 간부를 육성하는 코레니자치야(토착화)를 공식 정책으로 삼았다. 라콥스키 등은 연방 중앙 권한의 비대화를 경고하며 공화국 권한의 확대를 요구했다.
- 1923.07.06연방 헌법의 발효
연방 중앙집행위원회가 헌법 초안을 승인해 발효시켰다. 헌법은 외교·국방·대외무역을 연방에, 교육·보건·토지 등의 사무를 공화국에 배분했다.
- 1924.01.311924년 헌법의 비준
제2차 연방 소비에트 대회가 헌법을 최종 비준했다. 헌법은 각 연방 공화국의 자유로운 탈퇴권을 명문화했고, 이후 중앙아시아의 민족 구획을 거쳐 새 공화국들이 연방에 더해졌다.
- 1923–1932코레니자치야의 실천
우크라이나화를 비롯한 각지의 토착화로 민족어 학교·신문·행정이 급증했고, 문자가 없던 민족들에게 새 문자가 만들어졌다. 역사가 테리 마틴은 이 시기의 소련을 소수민족의 발전을 국가가 체계적으로 지원한 최초의 사례로 평가했다.
관련 인물 33명
지도부4
자치화안을 물리치고 대등한 공화국들의 연방을 관철했으며, 마지막 구술에서 대러시아 국수주의와 싸웠다.
민족인민위원이오시프 스탈린1878–1953자치화안을 기초했고, 레닌의 비판 뒤 연방안을 수용해 제1차 대회에서 결성 보고를 맡았다.
연방 중앙집행위원회 공동의장나리만 나리마노프1870–1925제1차 연방 소비에트 대회에서 소련 중앙집행위원회 의장단 4인 중 한 명으로 선출되어 새 연방의 공식 국가원수 역할을 맡았다. 자캅카스 SFSR를 대표하는 의장으로서 대등한 공화국 연방 원칙을 지지했다.
자캅카스 연방평의회 의장·당 제1서기알렉산드르 먀스니코프 (먀스니캰)1886–19251922년 자캅카스 SFSR의 연방평의회 의장이자 자캅카스 당 제1서기로서 공화국들을 소련으로 결속시키는 제도적 연결고리였다. 스탈린·오르조니키제·몰로토프와 함께 소련 창설 준비 위원회에 참여했고, 연방 결성 후 소련 중앙집행위원회 상임위원이 되었다.
참여20
레닌이 그루지야 문제를 당대회에서 방어해 달라고 요청했던 정치국의 동맹자였다.
자캅카스 당 책임자세르고 오르조니키제1886–1937자캅카스 연방화를 강행하다 그루지야 활동가를 구타해 그루지야 사건의 중심에 섰다.
공화국 권한의 옹호자크리스티안 라콥스키1873–1941우크라이나 정부수반으로서 12차 당대회에서 연방 중앙집권화에 맞서 공화국 권한을 가장 일관되게 옹호했다.
위원회 지도부레프 카메네프1883–1936결성 준비 위원회의 지도부로서 자치화안을 비판한 레닌의 9월 서한을 받아 수정 과정에 반영했다.
연방 중앙집행위 의장미하일 칼리닌1875–1946제1차 연방 소비에트 대회에서 연방 중앙집행위원회 의장단의 일원으로 선출되어 새 연방 기구를 대표했다.
조약 확정 절차 제안자미하일 프룬제1885–1925제1차 대회에서 결성 선언과 조약을 각 공화국의 심의를 거쳐 확정하자는 결의를 제안했다.
중앙집권 노선 지지자드미트리 마누일스키1883–1959우크라이나 당 지도자로서 결성 논쟁에서 자치화에 가까운 중앙집권적 노선을 지지했다.
외교인민위원게오르기 치체린1872–1936제노바 회의 등 대외 관계의 경험에서 조약을 맺을 통일된 연방 주체의 필요를 제기했다.
연방 중앙집행위원회 서기 · 연방 기구의 행정 설계자아벨 예누키제1877–1937소련 수립 당일인 1922년 12월 31일부터 1935년까지 TsIK 서기로 재직하며 연방 형성과 제도화의 실무를 관장했다. 1932년 '소련 결성에 대한 탁월한 공로'로 개인 최초의 레닌 훈장(제3호)을 받았다.
그루지야 반대파의 지도자폴리카르프 므디바니1877–1937그루지야 인민위원회 의장이자 자캅카스 연방 동의회 의장으로서 스탈린의 '자치화' 계획에 맞서 그루지야의 연방 내 주권을 주장했다. 이 갈등은 레닌이 마지막 정치적 개입에서 므디바니 측을 지지하게 된 '그루지야 사건'의 중심이었다.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국가원수그리고리 페트롭스키1878–1958우크라이나 소비에트 공화국을 대표해 연방 결성에 참여했다.
우크라이나화 설계자미콜라 스크리프니크1872–1933민족문화 권리를 주장하며 연방 구성 논쟁에 참여한 우크라이나 공산주의자였다.
라트비아 소비에트 법이론가페테리스 스투치카1865–1932라트비아 혁명정부를 이끈 경험으로 소비에트 연방 법질서에 기여했다.
벨라루스 소비에트 국가원수로서 연방조약 체결과 연방 설계에 직접 참여알렉산드르 체르뱌코프1892–19371920-22년 벨라루스 공산당 서기로서 연방 가입 결정에 주도적 역할빌헬름 크노린1890–19381922년 그루지야 공산당 제1서기로 임명되어 중앙집권화에 반대한 그루지야 공산주의자들을 대체하며 연방 형성에 관여비사리온 로미나제 (베소)1897–1935아제르바이잔 당 제1서기로 자캅카스 연방·소련 결성에 참여세르게이 키로프1886–1934우크라이나화의 최대 강경파올렉산드르 슘스키1890–19461925-27년 우크라이나 교육인민위원으로서 우크라이나화를 가장 빠르고 과감하게 밀어붙였고, 민족 공산당 간부의 당내 승진을 요구하다 스탈린과 충돌해 '국수주의 일탈'로 해임되었다.
우크라이나 정부수반, 우크라이나화 시행의 제도적 책임자블라스 추바리1891–19391923년 7월 라콥스키의 후임으로 우크라이나 인민위원회 의장에 임명되어 우크라이나화 법령의 제도화를 주도했다.
우크라이나 당 서기, 우크라이나화의 모스크바 집행자라자르 카가노비치1893–19911925-27년 우크라이나 공산당 제1서기로서 러시아어를 쓰면서도 우크라이나화를 강제해 당내 저항을 꺾었다.
반대 · 저항2
대상 · 피해2
목격 · 증언5
1922-23년 레닌이 「당대회에 보내는 편지」와 민족문제에 관한 마지막 구술들을 받아쓰게 했고, 병상의 레닌을 대신해 그루지야 문제에 관한 트로츠키와의 연락을 중개했다.
레닌의 그루지야 특사알렉세이 리코프1881–1938레닌의 지시로 그루지야에 파견되어 오르조니키제의 아파트에서 코바히제 구타 사건을 직접 목격했고, 이 사건은 레닌이 스탈린과 제르진스키에게 정치적 책임을 묻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레닌의 병상 구술을 기록한 업무서기마리야 볼로디체바1891–19731922년 12월 30일과 31일 이틀에 걸쳐 레닌이 구술한 '민족 문제 또는 자치화에 대하여'를 받아 적었고, 1923년 3월 5일에는 레닌의 쪽지를 트로츠키에게 전달했다.
긍정적 차별 제국 테제의 창시자테리 마틴1963–현재그의 2001년 저서 《긍정적 차별의 제국》은 초기 소비에트 민족 정책에 관한 가장 영향력 있는 영문 저작이며, 이 문서의 역사학 논의는 그의 테제와 파이프스의 대비를 중심축으로 전개된다.
연속성 테제를 제시한 역사학자프랜신 허쉬1967–허쉬는 저서 『Empire of Nations』(2005)에서 소련이 제정 러시아의 제국적 민족지 관행을 이어받았다고 주장하며, 마틴의 단절 테제와 대비되는 연속성 테제를 제시했다.
관련 용어
출처: 자료 1자료 2Terry Martin, The Affirmative Action Empire: Nations and Nationalism in the Soviet Union, 1923–1939 (2001)Moshe Lewin, Lenin's Last Struggle (1968)Jeremy Smith, The Bolsheviks and the National Question, 1917–23 (1999)Stephen Kotkin, Stalin, vol. 1: Paradoxes of Power, 1878–1928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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