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사건
북조선의 사회개혁과 공화국 수립
해방 이후 소련군이 주둔한 북부 조선에서 인민위원회와 공산주의 세력을 중심으로 새 권력 구조가 형성됐다. 1946년 토지개혁과 주요 산업 국유화는 국가 수립 이전에 진행됐다.
티토-스탈린 결별
티토-스탈린 결별은 1948년 6월 코민포름이 유고슬라비아 공산당을 제명하면서 사회주의 진영에 처음으로 공개 균열이 생긴 사건이다. 유고슬라비아는 소련군이 아니라 자국 파르티잔의 힘으로 해방과 혁명을 이뤘고, 그만큼 모스크바의 지시에 덜 매여 있었다. 발칸 연방 구상과 그리스 내전 지원을 둘러싼 마찰, 유고슬라비아 내 소련 고문단과 정보망에 대한 반발이 쌓이자, 스탈린은 서한 논쟁과 코민포름 결의로 티토 지도부의 굴복을 요구했다. 결의는 유고슬라비아 당이 마르크스-레닌주의에서 이탈해 민족주의의 길로 갔다고 선고했지만, 예상과 달리 유고슬라비아 당은 지도부를 중심으로 뭉쳐 버텼다. 소련과 동유럽의 경제 봉쇄, 국경 도발, 침공 준비설 속에서 유고슬라비아는 서방의 원조를 받아들였고, 노동자 자주관리라는 독자 모델을 만들기 시작했다.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1949년 10월 1일 마오쩌둥은 베이징에서 중화인민공화국 수립을 선언했다. 국공내전에서 공산당이 대륙의 주요 지역을 장악한 결과였으며, 국민당 정부는 타이완으로 이동했다.
레닌그라드 사건
레닌그라드 사건은 900일 봉쇄를 견뎌 낸 도시의 당·국가 간부들이 전후에 숙청된 사건이다. 즈다노프가 1948년 사망하자 말렌코프와 베리야는 그의 레닌그라드 인맥을 겨냥했고, 아바쿠모프의 국가보안부(MGB)가 조작된 혐의로 수백 명을 체포했다. 계획경제를 이끈 보즈네센스키와 당 서기 쿠즈네초프를 비롯한 핵심 인물들이 1950년 처형됐다.
소련 원자폭탄 개발
소련의 원자폭탄 개발은 1943년 쿠르차토프를 책임자로 한 제2연구소에서 시작해 1949년 8월 29일 세미팔라틴스크의 RDS-1 실험으로 결실을 맺은 사업이다. 전쟁 중에는 자원이 전선에 묶여 소규모 연구에 그쳤으나, 1945년 8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이후 국가의 최우선 과제가 되어 베리야를 수반으로 하는 특별위원회가 설치되고 내무인민위원부의 조직·노동력·자원 동원 능력이 통째로 투입됐다. 사업은 두 축으로 굴러갔다. 클라우스 푹스를 비롯한 정보원이 넘긴 맨해튼 계획 설계 자료가 방향을 확인해 주었고, 쿠르차토프·하리톤·젤도비치·플료로프의 자체 연구가 그것을 소련의 산업 조건에서 실제로 만들 수 있는 물건으로 옮겼다. 우라늄 채굴과 폐쇄도시 건설에는 굴라크 수용자와 강제 노동이 대규모로 동원됐다.
의사들의 음모
의사들의 음모는 크렘린 의료진(주로 유대인)이 소련 지도자들을 독살하려 했다는 조작된 혐의로 1953년 1월 공표된 사건이다. 그것은 스탈린 말기 반유대 캠페인과 국가보안부의 고문 수사가 결합한 결과였으며, 즈다노프와 셰르바코프의 죽음이 그 구실로 이용됐다. 1953년 3월 스탈린이 죽자 사건은 곧 조작으로 발표되고 체포된 의사들은 석방됐다.
한국전쟁
한국전쟁은 1950년 6월 25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남진으로 시작해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으로 멎은 전쟁이다. 김일성은 1949년부터 여러 차례 무력 통일 승인을 요청했고, 스탈린은 미국이 개입하지 않으리라는 판단과 중화인민공화국 수립·소련의 핵실험 성공으로 힘의 균형이 바뀌었다는 계산 위에서 1950년 봄 이를 승인하되 소련군의 직접 참전은 배제했다. 미국이 유엔군을 조직해 개입하고 인천상륙으로 전세가 뒤집히자 중국이 인민지원군을 보냈고, 전선은 1951년 여름부터 38도선 부근에서 굳었다. 소련의 참여는 무기·고문단과, 만주 기지에서 미그-15로 싸운 조종사들에 한정됐으며 이들의 존재는 양측 모두 오래 공식적으로 부인했다.
베리야의 몰락
스탈린 사후 베리야는 제1부총리이자 내무부(MVD) 수장으로 사면·탈스탈린화·대외 완화 등 개혁을 주도하며 강력해졌다. 그의 야심과 보안기구 장악을 두려워한 흐루쇼프·말렌코프·몰로토프 등 간부단은 1953년 6월 주코프 휘하 군 장교들의 도움으로 그를 체포했다. 베리야는 12월 재판 뒤 측근들과 함께 처형됐다.
바르샤바 조약 기구 창설
바르샤바 조약 기구(공식 명칭: 우호협력상호원조조약)는 1955년 5월 14일 소련과 동유럽 7개 사회주의 국가가 폴란드 바르샤바에서 서명한 집단방위동맹이다. 직접적 방아쇠는 서독의 재무장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가입을 확정한 1954년 10월 파리 협정이었다. 소련은 1954년 11월 모스크바 회의에서 동맹의 실무 준비에 착수했고, 서독이 NATO에 정식 가입한 지 나흘 뒤인 5월 14일 조약을 서명했다. 조약 전문은 서독의 재무장이 평화적 국가들의 안전보장에 위협이 된다고 명시했으며, 제4조는 유럽에서 회원국에 대한 무력공격 시 모든 수단을 동원한 즉각 지원을 규정했다. 이반 코네프 원수가 통합군 총사령관에 임명되었고, 정치협의위원회가 최고 의사결정 기구로 설치되었다. 그러나 바르샤바 조약은 실질보다는 외관이 앞선 동맹이었다. 소련은 이미 양자조약과 주둔군을 통해 동유럽을 장악하고 있었고, 니키타 흐루쇼프는 이 새 기구를 NATO와 맞교환할 수 있는 유럽 집단안보체제 협상의 지렛대로 구상했다.
제20차 당대회와 비밀연설
1956년 2월 14일부터 25일까지 모스크바에서 열린 소련공산당 제20차 당대회다. 공개 회기에서는 자본주의와의 평화공존, 전쟁은 불가피하지 않다는 명제, 사회주의로 가는 길이 나라마다 다를 수 있다는 노선이 제시됐다. 대회 마지막 날 비공개 회의에서 흐루쇼프는 「개인숭배와 그 결과에 대하여」를 낭독했다. 포스펠로프 위원회가 정리한 자료에 근거해, 1930년대 후반 당 간부와 군 지휘부에 가해진 대량 체포와 처형, 자백을 얻기 위한 고문, 전쟁 초기의 판단 착오, 민족 강제이주를 스탈린 개인의 책임으로 지목한 문서였다. 비판의 틀은 「개인숭배」에 한정됐다. 당의 노선과 체제 자체, 그리고 연설을 듣던 이들을 포함한 지도부의 공동 책임은 다뤄지지 않았다.
포즈난 봉기
포즈난 봉기는 1956년 6월 28일부터 30일까지 폴란드 인민공화국의 공업도시 포즈난에서 노동자들이 스탈린주의 체제에 맞서 일으킨 무장 봉기이다. 발단은 포즈난 최대 공장인 ZISPO(옛 체겔스키 공장) 노동자들의 파업이었다. 바르샤바 중앙정부가 임금 인상과 과도한 세금 환급 약속을 하루 만에 번복하자, 6월 28일 아침 수만 명이 거리로 나섰고 곧 10만 명 규모의 시위로 확대되었다. 처음에는 경제적 요구를 내걸었으나 당국이 대화를 거부하면서 시위대는 당 위원회, 보안국 청사, 감옥을 점거하고 무기를 탈취했다. 콘스탄틴 로코솝스키 국방장관이 파견한 스타니스와프 포프와프스키 장군이 전차 400여 대와 병력 1만 명을 동원해 30일까지 봉기를 진압했으며, 최소 57명이 사망하고 수백 명이 부상당했다.
헝가리 혁명
1956년 헝가리 혁명은 흐루쇼프의 비밀연설이 연 탈스탈린화의 기대 속에서 스탈린주의 체제에 맞서 터진 봉기였다. 10월 부다페스트의 학생·노동자 시위가 전국적 항쟁으로 번지자 개혁파 너지 임레가 총리로 복귀해 다당제와 바르샤바조약 탈퇴, 중립을 선언했다. 소련 지도부는 이를 진영의 붕괴로 보고 11월 대규모 군사 개입으로 봉기를 진압했다.
반당 그룹 사건
1957년 6월, 몰로토프·말렌코프·카가노비치를 비롯한 주석단 다수파는 비밀연설과 개혁으로 자신들의 입지를 위협한 흐루쇼프를 제1서기직에서 몰아내려 했다. 흐루쇼프는 문제를 중앙위원회 전원회의로 넘겼고, 주코프의 도움으로 소집된 중앙위원들이 그를 지지했다. 다수파는 「반당 그룹」으로 규정되어 패배했다.
소련 우주 계획
1957년 스푸트니크 1호에서 1965년 레오노프의 우주 유영까지, 소련은 최초의 인공위성, 최초의 유인 비행, 최초의 여성 우주인, 최초의 우주 유영이라는 우주 시대의 첫 관문들을 모두 먼저 통과했다. 치올콥스키가 남긴 이론, 코롤료프의 OKB-1 설계국, 그리고 무상 대중 기술교육과 계획경제가 집중시킨 자원이 이 도약을 떠받쳤다. 그것은 한 세대 전까지 농업국이었던 나라가 이룬 세계사적 성취였다.
중소분열
중소분열은 소련과 중화인민공화국이 1950년대 후반부터 이념 논쟁을 거쳐 1960년대에 국가 관계 파탄으로, 1969년에는 국경 무력 충돌로까지 간 과정이다. 발단은 제20차 당대회였다. 중국공산당은 스탈린 격하와 평화공존 노선을 수정주의로 규정하고, 제국주의와의 타협이자 혁명 포기라고 비판했다. 여기에 국가 이익의 충돌이 겹쳤다. 소련은 중국의 핵무기 개발 지원을 1959년 중단했고, 1958년 대만해협 위기와 중국-인도 국경분쟁에서 중국이 기대한 지지를 보내지 않았다. 1960년 소련이 기술고문 1,300여 명을 일시에 철수시키면서 경제 협력의 축이 끊겼다. 논쟁은 국제 공산주의 운동 전체로 번져 각국 공산당이 노선을 골라야 하는 상황을 만들었다.
쿠바 혁명과 사회주의 전환
1959년 바티스타 정권의 붕괴 뒤 쿠바의 혁명정부는 토지개혁과 국유화를 추진했다. 혁명 승리와 사회주의 노선의 공식화는 단계적으로 진행됐다.
베를린 장벽 건설
베를린 장벽은 1961년 8월 13일 동독 정부가 서베를린을 둘러싸며 쌓은 156km의 경계 요새 시설이다. 1949년부터 1961년까지 350만 명의 동독 시민이 서독으로 탈출했으며, 그중 상당수가 베를린의 개방된 구역 경계를 통해 빠져나갔다. 숙련 노동자와 지식인의 대규모 유출로 동독 경제가 붕괴 직전에 이르자, 발터 울브리히트 동독 지도자는 니키타 흐루쇼프를 설득하여 경계 봉쇄를 승인받았다. 1961년 8월 3~5일 모스크바에서 열린 바르샤바 조약 회의에서 공식 합의가 이루어졌고, 8월 12일 밤부터 13일 새벽 사이 약 2만 5천 명의 동독 군경 병력이 서베를린으로 통하는 모든 통로를 철조망으로 차단했다. 서방 3국은 베를린의 4개국 공동관리 지위를 직접 침해당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군사적 대응을 피했고, 존 F. 케네디 미 대통령은 "장벽은 전쟁보다 훨씬 낫다"고 결론지었다. 콘크리트 장벽은 이후 28년간 냉전의 상징이 되었고, 최소 140명이 장벽을 넘다 사망했다.
쿠바 미사일 위기
쿠바 미사일 위기는 1962년 소련이 쿠바에 핵미사일을 배치하면서 미국과 정면충돌한 13일간의 대치다. 미국의 쿠바 침공 위협과 튀르키예에 배치된 미국 미사일에 대응해, 흐루쇼프는 혁명 쿠바를 지키고 전략적 균형을 맞추려 미사일을 들여보냈다. 미국이 이를 정찰기로 포착해 해상 봉쇄로 맞서면서 세계는 핵전쟁의 문턱에 섰다.
코시긴 개혁
1965년 총리 코시긴은 기업의 자율성과 이윤·수익성 지표를 확대하는 경제개혁을 추진했다. 경제학자 리베르만의 제안에서 출발한 이 개혁은 계획경제의 효율을 높이려는 시도였다. 그러나 프라하의 봄이 개혁의 위험성을 부각시키고 브레즈네프와 보수파가 제동을 걸면서 개혁은 흐지부지됐다.
남예멘 독립과 사회주의 국가의 변천
1967년 영국의 철수 뒤 남예멘은 독립국가가 됐다. 1969년 급진파의 부상과 1970년 인민민주공화국으로의 개편, 1978년 예멘사회당 창당은 사회주의 체제 형성의 주요 단계였다.
콩고인민공화국과 일당체제의 전환
마리앵 응구아비 지도부는 1969년 콩고노동당을 창설하고 콩고인민공화국을 수립했다. 브라자빌의 이 국가는 이웃 콩고민주공화국과 다른 역사적 국가다.
프라하의 봄
프라하의 봄은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에서 두브체크가 이끈 개혁운동이다. 검열 완화, 표현과 이동의 자유 확대, 경제 개혁을 내건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는 대중의 광범위한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소련은 이를 진영 이탈로 규정하고, 1968년 8월 바르샤바조약 5개국 군대를 동원해 체코슬로바키아를 점령했다.
소말리아 군사정권과 사회주의 선언
1969년 쿠데타로 집권한 시아드 바레의 최고혁명평의회는 1970년 과학적 사회주의를 선언했다. 군부는 의회·행정부의 권력을 집중하고 국가 주도의 사회개조를 추진했다.
데탕트와 전략무기제한협상
데탕트(데탕트)와 전략무기제한협상(SALT)은 1969년부터 1979년까지 미국과 소련이 냉전의 긴장을 낮추고 핵무기 증강을 통제하려 한 10년간의 노력이다. 1960년대 후반 소련이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에서 미국과의 전략적 균형에 도달하면서, 양측은 무한정한 군비경쟁보다 제한이 더 안전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닉슨과 브레즈네프가 1972년 모스크바에서 서명한 SALT I은 탄도미사일 방어체제(ABM)를 제한하는 조약과 공격용 미사일 발사대 숫자를 동결하는 잠정협정으로 이어졌다. 뒤이은 SALT II 협상은 블라디보스토크 합의(1974년)를 거쳐 1979년 빈에서 카터와 브레즈네프의 서명으로 정점에 도달했으나,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으로 미국 상원 비준이 무산되며 데탕트는 종말을 맞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