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2

쿠바 미사일 위기

세계는 어떻게 핵전쟁의 문턱까지 갔다가 되돌아왔는가?

쿠바 미사일 위기는 1962년 소련이 쿠바에 핵미사일을 배치하면서 미국과 정면충돌한 13일간의 대치다. 미국의 쿠바 침공 위협과 튀르키예에 배치된 미국 미사일에 대응해, 흐루쇼프는 혁명 쿠바를 지키고 전략적 균형을 맞추려 미사일을 들여보냈다. 미국이 이를 정찰기로 포착해 해상 봉쇄로 맞서면서 세계는 핵전쟁의 문턱에 섰다.

무기보다 먼저 온 것들

1961년 말, 쿠바 혁명이 승리한 지 3년도 채 안 된 시점에, 세계의 두 초강대국은 이미 충돌 궤도에 올라 있었다. 그 충돌은 핵무기보다 먼저 시작되었다.

미국은 쿠바 혁명정부를 용납하지 않았다. 1960년 3월,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카스트로 정권에 대한 비밀행동 계획」에 서명했고, CIA는 쿠바 망명자 여단 2506을 과테말라에서 훈련시켰다. 1961년 1월, 케네디가 백악관에 들어왔을 때 작전은 이미 굴러가고 있었다. 4월 17일, 약 1,400명의 침공 부대가 피그스만(플라야 히론)에 상륙했다. 케네디는 미군의 직접 개입을 원치 않아 약속된 추가 공중 지원을 취소했고, 3일 만에 침공군은 궤멸되었다. 카스트로에게는 군사적 승리였지만 더 큰 의미는 따로 있었다: 미국이 자신을 무력으로 전복할 의사가 있음이 세계 앞에 드러난 것이다. 아이젠하워는 케네디에게 "피그스만의 실패는 소련이 하지 않았을 일을 하도록 부추길 것"이라고 경고했다. 흐루쇼프는 케네디를 "너무 젊고, 지적이지만, 결정적 순간에 맞설 용기가 없는" 인물로 평가하기 시작했다.

패배는 작전의 종료가 아니라 확장으로 이어졌다. 1961년 11월, 케네디는 「몽구스 작전」을 승인했다. CIA의 윌리엄 하비와 공군 준장 에드워드 랜스데일이 지휘한 이 작전은 쿠바에 대한 테러·사보타주·심리전을 포괄하는 비밀 전쟁이었다. 랜스데일은 1962년 2월, 게릴라 작전을 8~9월에 개시하고 10월 첫째 주에 카스트로 정권을 전복한다는 26쪽의 일정표를 제출했다. 쿠바 지도부가 1962년 내내 미국의 침공을 임박한 현실로 간주한 것은 결코 편집증이 아니었다.

쿠바는 생존을 위해 모스크바로 기울었다. 1959년 혁명 직후만 해도 카스트로는 소련과 뚜렷한 유대가 없었다. 첫 해외 방문지는 모스크바가 아니라 워싱턴이었고, 아이젠하워는 그를 만나주지도 않았다. 그러나 미국의 경제 봉쇄와 침공 시도 속에서 소련은 석유를 보내고 쿠바산 설탕을 사들였으며, 1961년 8월과 9월에는 대규모 군사 지원 협정을 체결했다. 카스트로가 1961년 12월 마르크스-레닌주의자임을 공개 선언하면서 쿠바는 사회주의 진영에 공식 합류했다.

유럽에서는 더 큰 전략적 열세가 소련을 압박하고 있었다. 1961년, 미국은 튀르키예 이즈미르 인근에 15기의 주피터 중거리 탄도미사일을 배치했다. 사거리 2,400킬로미터, 모스크바까지 비행 시간은 10분이었다. 이탈리아에도 30기가 있었고, 영국에는 60기의 토르 미사일이 있었다. 소련 영토는 유럽 쪽에서 핵미사일로 둘러싸여 있었다. 여기에 더해, 소련은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에서 압도적 열세였다. 1962년 당시 미국은 170기 이상의 ICBM과 144기의 폴라리스 잠수함 발사 미사일을 보유한 반면, 소련은 R-7 발사대 6기와 신뢰성이 낮은 R-16 약 20기에 불과했다. 미국의 SIOP-2 전쟁계획은 소련을 향해 6,000발의 핵탄두를 발사하는 시나리오를 담고 있었다.

흐루쇼프의 대응 구상은 1962년 5월 불가리아 흑해 연안 휴양지 바르나에서 구체화되었다. 동료가 "건너편 튀르키예에 우리를 향한 미사일이 있다"고 말하자, 흐루쇼프는 쿠바에 소련 미사일을 배치해 똑같이 갚아주자는 발상을 떠올렸다. 5월 20일 모스크바로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그로미코에게 이 구상을 털어놓았고, 5월 21일 국방위원회에서, 5월 24일 당 중앙위원회 상임위원회 확대회의에서 승인을 받았다. 미코얀만이 반대했지만 곧 밀렸다. 5월 말 소련 대표단이 쿠바로 날아갔고, 카스트로는 하루의 숙고 끝에 동의했다. 쿠바 지도부의 계산은 단순했다: 소련 미사일이 섬에 배치되면 미국은 두 번 다시 침공을 시도하지 못할 것이다. 흐루쇼프의 계산은 방어 그 이상이었다: R-12 미사일로 미국 본토의 절반을 겨냥할 수 있게 되면, 그때까지 소련이 감내해온 전략적 불균형을 하룻밤에 좁힐 수 있었다. 이렇게 쿠바의 생존 문제와 소련의 전략적 필요는 하나의 결정 속에 묶여들었다.

혁명에서 침공까지: 1959–1961

1959년 1월, 피델 카스트로가 이끄는 유격대가 풀헨시오 바티스타의 친미 독재정권을 무너뜨렸을 때만 해도, 쿠바 혁명과 미국의 결별은 정해져 있지 않았다. 카스트로는 승리 직후 첫 해외 방문지로 워싱턴을 택했으나,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그와의 만남을 거부했다. 그 사이 쿠바 정부는 토지개혁을 단행하고 미국 소유의 설탕 농장과 정유공장을 국유화했으며, 워싱턴은 쿠바산 설탕 수입 쿼터를 줄이고 석유 수출을 금지하며 응수했다. 1960년 2월, 카스트로는 소련과 첫 무역협정을 맺었는데, 설탕을 원유와 맞바꾸는 거래였다. 같은 해 5월 양국은 외교 관계를 수립했다. 아이젠하워는 이미 1960년 3월 CIA에 '카스트로 정권에 대한 비밀 공작 프로그램'을 승인한 상태였다.

정권 교체의 첫 시도는 1961년 4월 17일이었다. CIA가 과테말라에서 훈련시킨 쿠바 망명자 1,400여 명, 즉 2506여단이 쿠바 남서부 피그만(플라야 히론)에 상륙했다. 케네디 대통령은 취임 3개월 차에 이 작전을 승인했지만, 공습 규모를 대폭 축소하고 미군의 직접 개입을 거부했다. 상륙 3일 만에 카스트로가 직접 지휘하는 쿠바 혁명군이 여단을 분쇄했고, 1,189명이 포로가 되었다. 작전의 미국 배후는 발각 직전부터 국제사회에 노출되어 케네디 행정부에 치명적인 외교적 타격을 입혔다.

피그만의 여파는 세 갈래로 번졌다. 첫째, 케네디는 굴욕을 만회하려 쿠바 전복 노력을 배가시켰다. 1961년 11월 '몽구스 작전'을 승인하고, 에드워드 랜스데일 공군 준장에게 작전 지휘를 맡겼다. 1962년 2월 랜스데일이 제출한 6단계 계획은 '1962년 10월 첫 2주 안에 공개 반란과 공산 정권 전복'을 명시했다. CIA는 쿠바 내 사보타주, 방송 교란, 심지어 카스트로 암살 음모까지 전개했다. 둘째, 흐루쇼프는 이 실패를 케네디가 약하고 우유부단하다는 신호로 읽었다. 소련 측 보좌관의 기록대로라면, 케네디는 '너무 젊고, 지식인이며, 위기 상황에서 결단을 내릴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인상이 모스크바에 자리 잡았다. 셋째, 카스트로는 미국의 다음 침공이 시간문제라고 확신하고 소련에 군사적 보호를 요청했다.

바로 이 무렵, 물리적으로 모스크바를 겨냥한 위협이 현실화되고 있었다. 1959년 10월 28일, 미국과 튀르키예는 이즈미르 인근에 주피터 중거리 탄도미사일 1개 비행대대(15기)를 배치하는 협정에 서명했다. 사거리 2,400km의 이 미사일은 1.44메가톤 열핵탄두를 탑재하고 있었고, 모스크바까지 비행시간은 10분 미만이었다. 1961년 중반부터 배치가 시작되어 1962년 3월 칠리 공군기지에서 작전 태세에 들어갔다. 이탈리아에도 같은 미사일 30기가 배치되었고, 영국에는 토르 미사일 60기가 있었다. 흐루쇼프는 회고록에서 1962년 5월 불가리아를 방문 중 흑해 건너편을 바라보며 '저쪽에 15분 안에 소련의 주요 산업 중심지를 타격할 수 있는 미사일이 있다'는 말을 듣고 쿠바 배치를 처음 구상했다고 썼다. 같은 달 크렘린에서 소집된 회의에서 미코얀만이 반대했고, 말리놉스키와 그로미코는 찬성했다.

1962년 봄, 이 모든 흐름이 한곳으로 수렴하고 있었다. 미국은 쿠바에서 전복을 계획하고 있었고, 그 계획의 존재는 소련 정보당국에 포착되고 있었다. 튀르키예의 미사일은 매일같이 모스크바를 겨누고 서 있었다. 그리고 흐루쇼프는 이 불균형을 단숨에 뒤집을 카드를 쥐고 있다고 믿었다.

고무장화 속의 핵탄두: 아나디리 작전의 은폐와 수송

1962년 5월 24일, 소련 공산당 상임간부회 확대회의는 만장일치로 R-12·R-14 핵미사일을 쿠바에 배치하기로 결의했다. 흐루쇼프가 불가리아 바르나의 흑해 휴양지에서 떠올린 이 구상은, 튀르키예에 배치된 미국의 주피터 미사일이 모스크바까지 10분이면 도달하는 현실에 대한 비대칭 응답이었다. 흐루쇼프는 "미국인의 바지 속에 고슴도치 한 마리를 들여놓는 것"이라고 표현했다. 미코얀만이 위험하다고 반대했으나, 흐루쇼프는 "오판하면 핵전쟁"이라는 점을 스스로 인정하면서도 이익이 더 크다고 보았다.

6월 10일 최종 승인된 작전명 「아나디리」는 극동의 강 이름에서 따온 암호명이었다. 북쪽 훈련지를 연상시키는 이 이름 자체가 1차 기만이었다. 참모총국에서는 그리브코프 장군을 포함한 단 5명의 장교만이 실제 목적지를 알았다. 수백 명이 동원될 계획 수립 작업은 서기 한 명도 개입하지 못하게 전부 손으로 작성되었다. 군사문서에도 '전략훈련'으로만 기재되었다.

수송 작전은 발트해·흑해·바렌츠해의 9개 항구에서 85척의 민간 화물선과 여객선이 동원되어 총 183회 항해를 수행했다. 병력 5만 874명과 23만 톤 이상의 물자가 실렸다. 선장들조차 출항 전까지 목적지를 몰랐다. 출항 후 첫 봉투(영해 이탈 후 개봉), 보스포루스·다르다넬스 통과 후 두 번째 봉투, 지브롤터 통과 후 세 번째 봉투를 열어서야 '쿠바로 가라'는 명령을 받았다.

기만은 병사 개개인까지 침투했다. 이들에게 스키부츠, 양털외투, 펠트 장화를 지급하며 추운 지역으로 간다고 속였다. 갑판 위에는 농기계와 비군수 물자를 전시하고, 미사일과 발사대는 금속판으로 덮어 적외선 정찰에 대비했다. 병사들은 낮에는 갑판 출입이 금지되었고, 야간에만 소수 인원이 통풍할 수 있었다. 여름 대서양을 횡단하는 선창 내부는 섭씨 37도를 넘었고, 담수 부족으로 수 명이 항해 중 사망했다. 선상에는 대공기관총이 위장 설치되었고, 특히 핵탄두 적재 선박에는 소구경 대공포까지 배치되었다.

7월 10일 첫 수송선이 쿠바를 향해 출발했다. 9월 9일 항구 카실다에 첫 R-12 미사일 6기가 도착했고, 10월 4일에는 화물선 인디기르카 호가 마리엘 항에 160발 이상의 핵탄두를 내렸다. 여기에는 R-12용 탄두 60기, R-14용 36기, 루나 전술로켓용 12기, FKR-1 전선순항미사일용 80기, 그리고 항공폭탄 6발과 기뢰 4발이 포함되어 있었다. 10월 23일 알렉산드롭스크 호가 R-14용 탄두 24기와 FKR-1용 44기를 추가로 싣고 도착했다.

쿠바 도착 후에도 기만은 계속되었다. 11개 항구로 분산 하역했고, 군수물자는 야간에만 내렸다. 병사들은 제복 대신 사복을 입었으며, 계급 호칭도 금지되었다. 부대 간 통신은 무전이 아닌 대면으로만 이루어졌다. 소련 언론은 쿠바에 대한 '농업 원조'를 대대적으로 보도하며 군사 배치의 은폐막으로 삼았다.

외교전선에서도 거짓말은 체계적이었다. 주미 대사 도브리닌은 9월 4일 로버트 케네디에게 "쿠바에는 오직 방어용 무기만 공급되고 있다"고 전달했으며, 이는 흐루쇼프의 직접 지시였다. KGB 장교 볼샤코프는 케네디 형제와의 정기 접촉에서 같은 메시지를 반복했다. 9월 11일 타스 통신은 소련이 자국 영토 밖에 공격용 무기를 배치할 필요가 없다고 선언했다. 이 모든 기만은 10월 14일 U-2 정찰기가 R-12 발사대를 촬영할 때까지 유효했다. 미 정보당국은 쿠바 주둔 소련군을 기껏해야 2만 2천 명으로 추산했으나, 실제로는 이미 4만 3천 명이 배치되어 있었고 전술핵무기의 존재는 전혀 탐지하지 못했다.

아나디리는 단순한 무기 반입이 아니었다. 총 5만 명에 육박하는 병력에 3개 R-12 연대, 2개 R-14 연대, 4개 차량화소총연대, 2개 대공사단, MiG-21 전투기 40대, Il-28 폭격기 42대, 12척의 미사일 고속정, 그리고 FKR-1 순항미사일 80기와 루나 전술핵로켓 12기를 포함한 완전한 군단급 부대였다. 이 모든 것을 3개월 만에, 미국의 감시망 아래에서, 단 한 척의 선박도 나포되지 않은 채 대서양 건너편에 내려놓은 작전은 냉전 전체를 통틀어 가장 대담한 군사 기만이었다.

6분의 비행, 13일의 위기: 미사일은 어떻게 발견되었나

1962년 10월 14일 일요일 아침, 리처드 하이저 소령의 U-2 정찰기는 쿠바 상공을 단 6분 만에 횡단하며 928장의 사진을 찍었다. 이 비행은 5주간의 공백 끝에 간신히 성사된 것이었다. 9월 10일, 딘 러스크 국무장관과 맥조지 번디 국가안보보좌관은 사할린 상공과 중국 서부에서 발생한 U-2 격추 사고를 이유로 쿠바 상공 직접 비행을 중단시켰다. 이후 5주 동안 소련의 R-12 미사일 1차분이 9월 8일, 2차분이 9월 16일에 쿠바에 도착했고 발사대 건설이 본격화되었지만, 미국 정찰 카메라는 이를 포착하지 못했다. 역사가들은 이 기간을 '사진 공백기'라 부른다.

CIA 국장 존 매콘은 8월부터 소련이 쿠바에 탄도미사일을 배치할 가능성을 경고해왔다. SA-2 대공미사일 기지들이 소련 내 ICBM 기지 방어 패턴과 동일한 방식으로 배치되어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9월 19일 국가정보평가는 "군사 증강이 근본적으로 새로운 소련 정책을 반영하지는 않는다"며 매콘의 견해를 기각했다. 9월 20일 파리 신혼여행 중에도 매콘은 "상상력을 발휘하라"는 전문을 본부에 보냈다. 결국 국방정보국(DIA)도 동일한 패턴을 포착하여 U-2 비행 재개를 요구했고, 10월 9일 백악관 회의에서 승인되었다. 날씨 탓에 14일에야 첫 비행이 가능했다.

하이저의 필름은 플로리다 매코이 공군기지에서 워싱턴으로 긴급 공수되어, 10월 15일 월요일 아침 CIA 국가사진해석센터(NPIC)의 분석관들 앞에 놓였다. 디노 브루지오니를 비롯한 분석관들은 산크리스토발 인근에서 대형 트럭 행렬과 67피트 길이의 원통형 물체, 즉 R-12 중거리탄도미사일(나토 코드 SS-4)의 특징적 실루엣을 식별했다. 이 식별에는 1961년부터 CIA와 MI6에 소련 미사일 연대의 기술 교범을 넘겨온 GRU 대령 올레크 펜콥스키의 정보가 결정적 기여를 했다. NPIC 소장 아서 룬달은 사진을 확인하며 "내 인생에서 이번 한 번만은 틀리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날 저녁 8시 30분, 번디는 CIA로부터 통보를 받았다. 그는 다음 날 아침까지 대통령에게 보고하는 것을 미루기로 했다. 케네디가 충분히 휴식한 뒤 냉철하게 판단할 수 있도록 하려는 판단이었다. 10월 16일 아침 8시 45분, 케네디는 침실에서 U-2 사진을 처음 보았다. "사진 증거가 있습니다, 대통령님. 러시아인들이 쿠바에 공격용 미사일을 배치했습니다." 케네디의 반응은 분노였다. 흐루쇼프가 직접 자신에게 지대지 미사일은 어떤 경우에도 쿠바에 보내지 않을 것이라 약속했고, 선거를 방해하지 않겠다던 약속도 있었기 때문이다. 오전 11시 50분, 국가안전보장회의 9명과 추가 보좌관 5명이 모인 첫 회의가 시작되었다. 세계는 아직 아무것도 몰랐다.

전쟁이 먼저인가, 혁명이 먼저인가: 10월 22일의 선택

1962년 10월 16일 아침, 맥조지 번디가 백악관 2층 침실로 사진을 들고 들어갔을 때부터 케네디가 마주한 질문은 하나였다.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처음 열린 국가안전보장회의에서 공군참모총장 커티스 르메이는 단호했다. "공습으로 미사일 기지를 파괴하고, 이어 쿠바를 침공하라." 합동참모본부 전원이 이에 동의했다. 그것은 군사 논리로는 흠 없는 답이었다.

그러나 케네디는 주저했다. 국방장관 로버트 맥나마라가 회의에서 제기한 반론은 간단했다. "공습으로 모든 미사일을 파괴할 수 있다는 보장이 없다. 최선을 다해도 3분의 2 정도다." 남은 미사일 하나가 플로리다를 향해 발사되면 그걸로 끝이었다. 게다가 국무차관 조지 볼은 "일본의 진주만 공습과 똑같은 짓"이라며 선제 공습의 도덕적·정치적 파장을 지적했다. 이것은 단순한 전술 판단이 아니었다. 미국이 무엇을 위해 싸우는 나라인가에 대한 물음이었다.

법무장관 로버트 케네디도 처음에는 침공 쪽에 기울어 있었다. 첫 회의에서 그는 형에게 "도조 히데키가 진주만을 계획할 때 어떤 심정이었는지 이제 알겠다"는 쪽지를 건넸다. 하지만 볼의 논리를 들은 뒤 입장이 바뀌었다. "조지 볼이 지독히도 옳은 말을 했다"고 인정한 그는 이후 봉쇄 진영의 핵심으로 돌아섰다. 10월 18일 오전 회의에서 로버트 케네디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175년간 지켜온 전통이 있다. 초대형 국가가 초소형 국가를 기습 공격하는 것은 우리가 하는 짓이 아니다."

10월 20일 오후, 케네디 대통령은 최종 결정을 내렸다. 해상 '격리(quarantine)'였다. '봉쇄(blockade)'라는 말을 피한 것은 국제법적 계산이었다. 봉쇄는 전쟁 행위로 간주되며, 전시 국제법이 적용된다. 반면 OAS(미주기구)의 지역 방위 결의를 근거로 한 '격리'는 다자간 집단 자위권 행사라는 법적 지위를 가질 수 있었다. 맥나마라는 봉쇄의 장점을 이렇게 정리했다. "흐루쇼프에게 대통령이 결심했음을 보여주면서도, 군사적 충돌로 바로 치닫지 않게 하는 통제된 선택이다."

10월 22일 오후 7시(동부 표준시), 케네디는 TV와 라디오로 전 국민에게 연설했다. 연설문 초안은 테드 소렌슨이 작성했고, 케네디 자신이 여러 차례 손질했다. 연설은 세 가지 핵심을 담았다. 첫째, 쿠바의 미사일을 "소련이 서반구 전체에 가한 명백한 위협"으로 규정했다. 둘째, "쿠바에서 발사되는 모든 핵미사일은 소련의 대미 공격으로 간주하며, 소련 본토에 대한 완전한 보복으로 응징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셋째, 쿠바로 향하는 모든 공격용 군사 장비의 해상 격리를 즉시 발동하며, 필요하면 봉쇄를 다른 화물로까지 확대하겠다고 밝혔다. 연설 직후 미군 전력은 데프콘 3으로 격상됐고, 중순양함 USS 뉴포트뉴스가 봉쇄선의 기함으로 지정되었다.

연설 나흘 전인 10월 18일, 케네디는 백악관에서 안드레이 그로미코 소련 외무장관을 만났다. 그로미코는 쿠바의 무기는 "순수한 방어용"이라고 거듭 강조했고, 케네디는 자신이 이미 미사일 사진을 보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로미코가 떠난 뒤 케네디는 참모들에게 "그는 내 책상 위에 사진이 놓여 있는 줄 몰랐다"고 말했다. 이 침묵은 의도된 것이었다. 증거를 공개하기 전에 동맹국들을 설득하고, OAS의 승인을 얻고, 무엇보다 흐루쇼프에게 결정을 내릴 시간을 주기 위한 전략이었다.

연설 직후 국내 정치권의 반응은 차가웠다. 상원과 하원 지도부는 "봉쇄보다 강한 조치"를 요구했고, 르메이는 "우리는 역사상 최대의 패배를 목전에 두고 있다"고 불평했다. 흐루쇼프는 다음 날인 23일, 대통령 간담회에 참석한 인도 대사에게 "전쟁은 카드 놀이와 같다. 나는 한 번도 카드 놀이를 해본 적이 없고 앞으로도 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같은 날 저녁 그는 볼쇼이 극장에서 오페라 《보리스 고두노프》를 관람하며 태연함을 연출했지만, 뒤에서는 쿠바 주둔 소련군 사령관 이사 플리예프에게 "모스크바의 지시 없이는 전술핵도 전략핵도 절대 발사하지 말라"는 명령을 이미 내려보낸 뒤였다. 봉쇄는 단지 배를 세우는 작전이 아니었다. 그것은 양쪽 지도자가 서로에게 시간을 주기로 한, 말 없는 동의의 첫 신호였다.

두 통의 편지와 한 통의 약속: 10월 28일이 오기까지

1962년 10월 26일 금요일 밤,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집무실에 흐루쇼프의 첫 번째 편지가 도착했다. 모스크바 주재 미국 대사관을 통해 전달된 이 긴 개인 서한은 놀라울 정도로 유화적이었다. 흐루쇼프는 "전쟁의 매듭"을 함께 풀자고 호소하며, 소련이 쿠바에서 "공격적" 무기를 철수하고 재반입하지 않겠다는 약속과 미국의 쿠바 불침공 선언을 교환하자고 제안했다. 터키 미사일 이야기는 한 마디도 없었다.

그러나 다음 날 아침, 모스크바 라디오가 완전히 다른 내용의 두 번째 편지를 방송했다. 이번에는 "당신들은 터키와 이탈리아에, 말 그대로 우리 옆에 파괴적 미사일 무기를 배치했다"며 쿠바 미사일 철수와 터키 주피터 미사일 철수를 공개적으로 맞바꾸자고 요구했다. 어조도 딱딱하고 공식적이었다. 미국 측은 소련 지도부 내부에서 강경파가 개입해 입장이 후퇴한 것이라고 해석했다.

그날 밤 집행위원회(ExComm)는 교착에 빠졌다. 두 번째 편지에 응하면 NATO 동맹을 소련의 협박에 팔아넘기는 꼴이 되고, 무시하면 핵전쟁이었다. 이때 전직 주소 대사 루엘린 톰슨이 결정적 제안을 했다: 두 번째 편지는 없는 셈 치고 첫 번째 편지에 답하라는 것이었다. 그는 흐루쇼프를 개인적으로 아는 몇 안 되는 미국 외교관으로, 흐루쇼프라면 터키를 포기하고서라도 살 길을 택할 것이라고 보았다. 케네디는 동의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불충분했다. 이 자리에서 딘 러스크 국무장관이 중대한 제안을 내놓았다. 공식 서한은 첫 번째 편지에 답하되, 로버트 케네디가 도브리닌 소련 대사를 따로 만나 터키 미사일은 어차피 철수 예정이니 위기가 끝난 뒤 조용히 철거하겠다고 구두로 전하라는 것이다. 케네디 대통령은 승인했고, 이 대화는 절대 문서로 남기지 않으며 소련 측에서도 공개하면 약속 자체가 무효가 된다는 조건을 달았다.

10월 27일 저녁 7시 45분, 로버트 케네디는 법무부 집무실에서 도브리닌을 만났다. 도브리닌이 모스크바로 보낸 암호전문에 따르면, RFK는 "대통령이 터키 문제에서도 합의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말한 뒤 "이를 위해 4~5개월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동시에 "대통령은 터키에 관해 공개적으로 어떤 말도 할 수 없다"고 강조하며, 이 대화가 "지극히 비밀"이며 워싱턴에서 자신과 형 외에 2~3명만 알고 있다고 경고했다. RFK가 요구한 답변 시한은 "가능하다면 내일(일요일) 안"이었고, "최후통첩이 아니라 요청"이라고 덧붙였다.

흐루쇼프는 더 이상 시간을 끌 여유가 없다고 판단했다. 10월 27일 하루 동안 미국 U-2기가 쿠바 상공에서 격추되어 조종사 루돌프 앤더슨 소령이 사망했고, 카스트로는 미국이 침공하면 "제국주의자들을 영원히 제거하라"는 편지를 보내고 있었다. 흐루쇼프는 정치국을 소집하지도 않고 자신의 다차에서 수락문을 직접 작성해 10월 28일 오전 9시(워싱턴 시간) 모스크바 라디오로 즉시 방송하도록 지시했다. 미국이 가장 빨리 들을 수 있는 경로였다. 방송에서 흐루쇼프는 "당신들이 '공격적'이라고 부르는 무기의 해체와 포장, 소련 반환에 관한 새로운 명령을 내렸다"고 발표했다.

합의의 뼈대는 이랬다. 공개된 부분은 소련의 쿠바 미사일 철수와 미국의 쿠바 불침공 약속이었다. 비밀 부분은 터키(및 이탈리아)의 주피터 미사일이 4~5개월 내에 철거된다는 구두 약속이었다. 이 비밀은 1989년 모스크바 학술회의에서 도브리닌과 테드 소렌슨이 공개적으로 확인하기 전까지 27년간 유지되었다. 소렌슨은 로버트 케네디의 『13일』을 편집하면서 터키 합의 부분을 의도적으로 삭제했음을 시인했다.

합의 소식이 쿠바에 전해지자 카스트로는 분노했다. 쿠바 지도부는 한 번도 협의받은 적이 없었고, 라디오 방송을 통해 타국의 결정으로 자신들의 운명이 정해진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카스트로는 유엔의 현장 사찰을 거부하고 소련에 깊은 배신감을 드러냈다. 아나스타스 미코얀은 11월 초 쿠바로 급파되어 수주간 카스트로를 설득해야 했다. 11월 22일 미코얀은 마지막 남은 전술핵무기마저 철수한다는 통보를 해야 했고, 이것이 위기의 진정한 종결이었다.

누가 이겼는가: 신화, 수정, 그리고 끝나지 않은 논쟁

10월 28일의 타결 직후, 한 가지 이야기가 빠르게 정착했다. 딘 러스크 국무장관이 표현한 대로 "눈과 눈이 마주쳤고, 상대가 먼저 눈을 깜빡였다"는 것이다. 이 서사는 케네디의 단호함이 흐루쇼프를 굴복시켰고, 핵우위가 위기에서 결정적이었다는 교훈을 담았다. 로버트 케네디의 사후 회고록 『13일』(1969)은 이 이미지를 더욱 공고히 했다. 그러나 이 신화는 쓰여지는 순간부터 무너지기 시작했다.

같은 책에서 로버트 케네디는 도브리닌과의 비밀 회담에서 튀르키예 주피터 미사일 철수를 약속했다고 적었다. 시어도어 소렌슨은 회고록 편집 과정에서 이튀르키예 합의를 명시한 RFK의 일기 구절을 삭제했다고 훗날 인정했다. 냉전 종식 후 공개된 도브리닌의 전문(1992년)은 로버트 케네디가 튀르키예 미사일을 4~5개월 내 철수하겠다고 명시적으로 약속했음을 확인시켰다. 케네디가 공개적으로는 협상을 거부하는 척하면서 비밀리에 수락한 셈이다.

1990년대와 2000년대에 걸쳐 밝혀진 추가 사실들은 위기의 해석을 더 근본적으로 뒤흔들었다. 소련이 이미 전술핵탄두 100여 발을 쿠바에 반입해 놓았고, 현지 사령관이 모스크바의 별도 승인 없이도 이를 발사할 수 있었다는 사실, B-59 잠수함에서 바실리 아르히포프가 핵어뢰 발사를 저지한 일, 쿠바 상공에서 U-2기가 격추된 것이 모스크바의 명령이 아닌 현지 소련 장성들의 독단이었다는 사실 등은 '통제된 위기 관리'라는 개념 자체를 허물었다. 그레이엄 앨리슨은 2012년 회고에서 "우리가 수십 년간 더 배운 것들은 전쟁 확률을 전혀 낮춰주지 않았다"고 썼다.

역사학계의 평가는 크게 세 갈래로 나뉜다. 초기 정통파(아서 슐레진저, 시어도어 소렌슨)는 케네디의 현명한 위기 관리와 소련의 후퇴를 강조했다. 수정주의자들은 케네디의 대쿠바 은밀작전이 위기를 초래했다고 보았다. 냉전 종식 후 소련 측 자료를 통합한 후기수정주의 학자들, 즉 존 루이스 개디스에서 푸르센코와 나프탈리에 이르는 연구자들은 양 지도자 모두 모험주의를 범했고, 전쟁을 피한 것은 '단호함'이 아닌 상호 공감과 굴욕을 감수하려는 의지 덕분이었다고 본다. 토머스 블랜턴은 "양측 모두 아마겟돈 대신 굴욕을 선택할 용기를 가졌다"고 평했다.

실제 위기가 남긴 것은 승패의 기록이 아니라 제도들의 연쇄였다. 1963년 6월 모스크바-워싱턴 직통통신선(핫라인)이 설치되었고, 같은 해 8월 부분핵실험금지조약이 체결되었다. 1968년 핵확산금지조약(NPT), 1969년 전략무기제한협상(SALT)으로 이어지는 군비통제 체제의 출발점이 바로 1962년 10월의 13일이었다. 그러나 쿠바 혁명정부는 이 모든 과정에서 철저히 배제되었다. 카스트로는 흐루쇼프에게 "두 초강대국이 쿠바를 흥정의 말처럼 다루었다"는 격분을 쏟아냈고, 쿠바-소련 관계는 수년간 냉각되었다. 흐루쇼프는 1964년 10월 실각했으며, 정치국은 쿠바에서의 모험과 그 후의 굴욕적 양보를 주요 탄핵 사유로 들었다.

60년이 지난 지금도 역사가들이 동의하는 것은 하나다. 바로 인류가 핵전쟁을 피한 결정적 요인은 완벽한 정보나 정교한 전략이 아니었으며, 두 적대자가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할 수 있는 능력과, 필요할 때 물러설 줄 아는 판단력이었다는 점이다.

13일이 끝난 뒤에 온 것들: 해결된 것, 남겨진 것, 그리고 60년의 논쟁

10월 28일의 합의는 위기를 끝냈지만, 모든 것을 끝내지는 않았다. 소련은 R-12와 R-14 미사일 42기를 철수하고 IL-28 폭격기 42대도 11월 20일까지 빼냈다. 미국은 해상 봉쇄를 풀고 쿠바를 침공하지 않겠다고 공개 약속했으며, 비밀리에 튀르키예의 주피터 미사일을 1963년 4월까지 철거했다. 워싱턴과 모스크바 사이에는 직통전화(핫라인)가 1963년 8월 설치되었고, 같은 해 부분핵실험금지조약이 체결되었다.

그러나 합의문 밖에 남은 것들이 더 많았다. 미국은 쿠바에 소련 전술핵무기 98기가 남아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 이 무기들은 사거리가 짧아 미국 본토에는 닿지 않았지만, 침공군에는 핵전장을 만들 수 있었다. 소련군 쿠바 주둔 사령관 이사 플리예프는 침공 시 모스크바의 승인 없이도 전술핵을 사용할 수 있는 사전 권한을 갖고 있었다. 미코얀은 11월 22일 카스트로에게 핵무기 이전은 소련 법률에 위배된다고 통보했고, 전술핵은 12월 1일 쿠바를 떠났다. 이 사실은 1992년 하바나 회의에서야 처음 공개되었고, 그 자리에서 로버트 맥나마라는 충격으로 탁자를 짚어야 했다.

쿠바는 합의 과정에서 완전히 배제되었다. 카스트로는 유엔 사찰을 거부했고, 흐루쇼프가 자신과 상의 없이 미사일을 철수한 데 격분했다. 미코얀은 아내가 사망한 직후에도 하바나에 3주간 머물며 카스트로를 달래야 했다. 쿠바의 시각에서 1962년은 '10월 위기'가 아니라 미국의 전복 시도가 계속되는 긴 싸움의 한 장면이었다. 쿠바 학자들은 이 위기를 '미사일 위기'라고 부르는 미국식 명명 자체가 쿠바의 주체성을 지우는 행위라고 비판해왔다.

역사가들이 가장 첨예하게 갈리는 지점은 두 가지다. 첫째, 위기의 결과가 핵군비 경쟁을 멈추었는가, 가속했는가이다. 전통적 서사는 위기 이후 데탕트의 싹이 텄다고 보지만, 반대쪽은 소련이 굴욕을 설욕하기 위해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증강에 박차를 가했고 1960년대 말 핵균형에 도달했다고 반박한다. 바실리 쿠즈네초프는 위기 직후 동료에게 "다시는 이런 일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흐루쇼프의 실각(1964년 10월)에서도 쿠바 위기의 굴욕은 주요 원인으로 꼽힌다. 둘째, 핵전쟁의 위험이 실제로 어느 정도였는가이다. 전통적 견해는 세계가 핵전멸의 문턱에 섰다고 보지만, 냉전 종식 후 공개된 기록들은 케네디와 흐루쇼프 모두 전쟁 의사가 전혀 없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동시에 10월 27일 B-59 잠수함에서의 핵어뢰 발사 직전 순간, 쿠바 상공에서의 U-2기 격추, 그리고 미군이 몰랐던 전술핵의 존재는, 지도자들의 의지와 무관하게 전쟁이 우발적으로 발발할 수 있었음을 증명한다. 지도자들은 전쟁을 원하지 않았으나 통제를 벗어난 사건들이 전쟁을 일으킬 수 있었다. 바로 이 모순이 위기가 60년이 지나도록 역사학을 떠나지 못하는 이유다.

하나의 위기, 세 개의 이름: 60년 해석 전쟁

쿠바 미사일 위기는 사건 자체보다 그 해석을 둘러싼 싸움이 더 길었다. 1965년 아서 슐레진저는 케네디의 위기 대응을 "그처럼 빛나게 통제되고, 그처럼 정밀하게 조율되어 세계를 압도했다"고 썼다. 딘 러스크의 "우리는 눈빛 대 눈빛이었고, 상대방이 눈을 깜빡였다"는 말은 냉전 승리의 복음이 되었다. 이것이 정통파의 서사였다: 소련의 도발을 미국의 단호함이 꺾었고, 핵우위가 승리를 낳았다는 이야기다.

베트남전의 상처가 곪아가자 수정주의자들은 이 신화를 뒤집었다. 그들은 소련의 쿠바 미사일이 본질적인 전략균형을 바꾸지 않았으며, 케네디가 불필요하게 핵전쟁 위험을 감수했다고 보았다. 1974년 제임스 패터슨은 "대통령의 승리 욕구가 위기를 악화시켰고 외교를 가로막았다"고 썼다. 양쪽 모두 미국의 자료만 읽고 미국의 시각만 쓴다는 한계를 공유했다.

1990년대 소련 기록물이 열리며 지형이 바뀌었다. 아나톨리 도브리닌의 모스크바 보고 전문은 로버트 케네디가 튀르키예 미사일 철수를 명시적으로 약속했음을 입증했다. 시어도어 쇠렌센은 로버트 케네디의 유고 『13일』에서 그 대목을 삭제했다고 1989년 시인했다. 1992년 아바나 회의에서 아나톨리 그리브코프 장군은 소련이 쿠바에 전술핵무기 100여 기를 배치했으며 침공 시 사용 권한이 사전 위임되어 있었다고 폭로했다. 2002년에는 B-59 잠수함에서 바실리 아르히포프가 핵어뢰 발사를 거부한 일이 알려졌다. 마이클 돕스는 2008년 『One Minute to Midnight』에서 "핵전쟁은 정책결정자들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가까웠다"고 결론지었다.

이제 우리는 같은 사건에 세 개의 이름이 붙는다는 것을 안다. 미국인에게는 '쿠바 미사일 위기': 미사일이 문제였다. 소련에게는 '카리브해 위기': 초강대국 간 힘겨루기였다. 쿠바인에게는 '10월 위기': 미국의 침공 위협이라는 긴 서사 속 한 장면이며, 진짜 위기는 소련이 철수한 11월에야 왔다. 필립 브레너의 지적처럼, 한쪽이 위기에 붙인 이름은 이미 그 해석을 암호화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닫히지 않은 질문이 남는다. 흐루쇼프의 진짜 동기는 쿠바 방어였는가, 전략균형이었는가, 베를린 협상 카드였는가: 말린이 기록한 상임간부회 속기록을 보면 청중에 따라 강조점이 달라진다. 세 가지 모두 작동했을 가능성이 크다. 10월 27일 케네디가 핵탄두 공대공 미사일을 장착한 F-102 전투기로 시베리아 상공의 U-2를 호위하게 한 결정, 소련이 쿠바에 배치한 루나 전술핵의 실제 운용 권한, 쿠바 측 기록의 상당 부분이 여전히 비공개인 점은 위기의 전모가 아직 완성되지 않았음을 말해준다. 위기는 13일이 아니었다: 미코얀의 11월 협상과 전술핵 철수까지 포함하면 한 달이 넘었고, 역사 서술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결과

비밀 협상 끝에 소련은 쿠바에서 미사일을 철수하고, 미국은 쿠바를 침공하지 않으며 튀르키예의 미사일을 조용히 철거하기로 했다. 위기는 핵전쟁 직전에서 멈췄고, 이후 미소는 직통전화(핫라인)와 부분핵실험금지조약으로 위기관리에 나섰다. 자신을 건너뛴 합의에 카스트로는 분노했다.

연표

  1. 1961
    위기의 배경

    미국의 피그만 침공 실패와 쿠바 압박, 튀르키예의 미국 미사일 배치가 위기의 토대가 됐다.

  2. 1962 여름
    아나디르 작전

    소련이 비밀리에 쿠바로 핵미사일과 병력을 실어 날랐다.

  3. 1962.10.16
    미사일 발견

    미국 정찰기가 쿠바의 미사일 기지를 촬영했다.

  4. 1962.10.22
    해상 봉쇄

    미국이 「격리」 봉쇄를 선언하며 대치가 절정에 달했다.

  5. 1962.10.28
    철수 합의

    소련이 미사일 철수에 합의하며 위기가 풀렸다.

관련 인물 43명

주도 · 집행6

국방장관 · 아나디르 작전로디온 말리놉스키1898–1967

국방장관으로 미사일과 병력을 쿠바로 실어 나른 아나디르 작전을 지휘했다.

KGB 제1총국장으로 위기 중 대외첩보 작전 지휘알렉산드르 사하롭스키1909–1983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당시 KGB 제1총국(대외정보)을 이끌며 소련의 전략적 첩보 수집과 해외 공작을 총괄했다. 흐루쇼프가 쿠바에 미사일을 배치하고 철수하는 전 과정에서 KGB의 정보 지원을 책임졌다.

아나디르 작전 · 미사일 부대 해상 수송 책임블라디미르 톨룹코1914–1989

전략로켓군 제1부사령관으로서 미사일 부대를 해상 수송하는 아나디르 작전의 조직과 실행에 참여했다.

아나디리 작전 계획 수립아나톨리 그리브코프1919–2008

1962년 5월 참모총국에서 작전명 '아나디리'의 초기 배치 계획을 초안했으며, 위기 동안 국방장관 대표로 쿠바에 파견되었다.

침공 계획을 제출한 몽구스 작전 설계자에드워드 랜스데일1908–1987

랜스데일은 몽구스 작전의 군사 측면을 지휘하며 1962년 2월 케네디에게 6단계 쿠바 전복 계획을 제출했으며, 이 문서는 소련이 쿠바 침공이 임박했다고 판단한 핵심 증거가 되었다.

쿠바에 R-12 미사일을 배치한 51 로켓사단장이고리 스타첸코1918–1987

1962년 12월 보고서에서 아나디리 작전의 정찰 부족, 현지 여건 무시, 위장 실패 등 계획의 결함을 기록했다.

참여23

외교안드레이 그로미코1909–1989

외무장관으로 케네디를 만나 미사일 배치를 부인하며 위기의 외교전에 나섰다.

카스트로 설득아나스타스 미코얀1895–1978

철수 합의 뒤 쿠바로 날아가 분노한 카스트로를 여러 주에 걸쳐 설득했다.

쿠바 지도부체 게바라1928–1967

쿠바 지도부의 일원으로 미사일 철수에 반대하며 제국주의에 맞선 저항을 주장했다.

쿠바에 배치된 R-12·R-14 미사일의 설계자미하일 얀겔1911–1971

1962년 당시 KGB 의장으로 위기 정보·안보 총괄블라디미르 세미차스트니1924–2001

소련 외무부 제1차관 · 위기 해소 협상 대표바실리 쿠즈네초프1901–1990

흐루쇼프의 지시로 유엔 사무총장 우 탄트 및 미국 측 애들레이 스티븐슨·존 매클로이와 만나 쿠바 내 소련 미사일 철수 세부 협상을 이끌었다.

주미 대사 · RFK와의 비밀 회담으로 위기 해소아나톨리 도브리닌1919–2010

1962년 10월 27일 밤 로버트 케네디와 비밀 회담을 갖고, 소련의 쿠바 미사일 철수 대가로 미국의 튀르키예 미사일 철수를 약속받는 핵심 합의를 이끌어냈다. 이 회담으로 13일간의 핵전쟁 위기가 종식되었다.

쿠바에 배치된 R-12 미사일의 생산 책임자레오니트 스미르노프1916–2001

유즈마시(제586공장) 사장으로서 쿠바 미사일 위기의 핵심 무기였던 R-12 중거리탄도미사일의 시리즈 생산을 지휘했다. 흐루쇼프가 공장을 방문했을 때 R-12를 가리키며 "이게 바로 쿠바에서 미국을 겨눌 물건"이라고 설명한 인물이기도 하다.

흐루쇼프의 외교 보좌관올레크 트로야놉스키1919–2003

각료회의 의장 외교 보좌관으로서 위기 기간 내내 흐루쇼프의 곁에서 외교적 대응을 보좌했다. 흐루쇼프의 통역과 참모 역할을 겸하며 소련 지도부의 의사 결정 과정에 참여했다.

유엔 안보리에서 소련의 미사일 배치 부인발레리안 조린1902–1986

소련 유엔 상임대표로서 1962년 10월 25일 안보리 긴급회의에서 애들레이 스티븐슨의 추궁에 직면했다. 미사일 배치를 부인했지만 스티븐슨이 항공사진 증거를 공개하며 외교적 충돌은 냉전사의 상징적 장면이 되었다.

B-59 여단 참모장 · 핵어뢰 발사 거부바실리 아르히포프1926–1998

B-59 잠수함에서 함장과 정치장교가 핵어뢰 발사에 동의했을 때, 여단 참모장으로서 유일하게 거부해 핵전쟁을 막았다.

북방함대 사령관 · 작전 '카마'블라디미르 카사토노프1910–1989

북방함대 사령관으로서 핵어뢰를 탑재한 69여단 잠수함 4척의 쿠바 파견(작전 '카마')을 지휘했으며, 원자력잠수함의 쿠바 파견 불가를 판단했다.

공습 반대를 주도한 국무차관조지 볼1909–1994

EXCOMM에서 공습안을 ‘일본의 진주만 공습과 똑같은 짓’이라고 비판하며 가장 먼저 반대했고, 로버트 케네디를 비롯한 다수를 봉쇄안으로 돌리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대통령 보고를 미룬 국가안보보좌관맥조지 번디1919–1996

맥조지 번디는 10월 15일 오후 8시 30분에 NPIC의 사진 판독 결과를 보고받았고, 케네디 대통령에게는 다음 날 아침까지 보고를 미루기로 결정했다.

반카스트로 계획을 승인한 전임 대통령드와이트 아이젠하워1890–1969

1960년 3월 카스트로 전복을 위한 CIA 계획을 승인했고, 피그스만 침공 실패가 소련을 대담하게 만들 것이라고 케네디에게 경고했다.

U-2 사진에서 미사일을 확인한 NPIC 소장아서 룬달1915–1992

10월 15일 하이저의 사진에서 SS-4 미사일을 최종 확인했으며, 백악관에 브리핑하면서 “내 인생에서 이번만큼은 내가 옳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소련 미사일을 홀로 경고한 CIA 국장존 매콘1902–1991

몇 달 전부터 소련의 미사일을 의심했고, 9월 20일 ‘신혼여행 전문’에서 상상력 있는 분석을 촉구했으며, 10월 14일 U-2 비행을 명령했다. 정보기관은 그의 경고를 외면했다.

케네디의 연설문 작성자테드 소렌슨1928–2010

10월 22일 대국민 TV 연설의 초안을 쓰고 다듬었으며 '격리'라는 용어 선택에 관여했다. 후일 이 연설을 '지구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케네디의 연설'이라고 평가했다.

쿠바 주둔 소련 핵무기 사령관니콜라이 벨로보로도프1910–2003

위기 기간 쿠바에서 소련 핵무기를 지휘했으며, 1990년대에 당시 문서를 바탕으로 모든 핵탄두의 반입, 배치, 철수 과정을 상세히 기록한 보고서를 남겼다.

비밀 협상의 핵심 중개자로버트 F. 케네디1925–1968

EXCOMM에서 초기 침공론을 주장하다 봉쇄 쪽으로 전향했으며, 도브리닌 소련 대사와의 비밀 회담을 통해 튀르키예 미사일 철수 약속을 전달했다.

봉쇄 외교를 총괄한 국무장관딘 러스크1909–1994

EXCOMM에서 봉쇄를 지지하고 OAS 승인과 유엔 외교를 주도했다.

위기 조정을 중재한 UN 사무총장우 딴1909–1974

케네디와 흐루쇼프 사이를 중재하고, 쌍방 협상이 실패할 경우 미사일 교환을 제안했으며, 위기 후 검증 협상을 도왔다.

합동참모본부 의장맥스웰 테일러1901–1987

EXCOMM에 참여해 군에 봉쇄 결정을 전달했다.

관련 용어

출처: Michael Dobbs, One Minute to MidnightEncyclopaedia Britannica: Cuban Missile Cris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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