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1953

한국전쟁

스탈린은 왜 승인했고, 왜 소련군을 보내지는 않았는가?

한국전쟁은 1950년 6월 25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남진으로 시작해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으로 멎은 전쟁이다. 김일성은 1949년부터 여러 차례 무력 통일 승인을 요청했고, 스탈린은 미국이 개입하지 않으리라는 판단과 중화인민공화국 수립·소련의 핵실험 성공으로 힘의 균형이 바뀌었다는 계산 위에서 1950년 봄 이를 승인하되 소련군의 직접 참전은 배제했다. 미국이 유엔군을 조직해 개입하고 인천상륙으로 전세가 뒤집히자 중국이 인민지원군을 보냈고, 전선은 1951년 여름부터 38도선 부근에서 굳었다. 소련의 참여는 무기·고문단과, 만주 기지에서 미그-15로 싸운 조종사들에 한정됐으며 이들의 존재는 양측 모두 오래 공식적으로 부인했다.

분단은 어떻게 전쟁의 씨앗이 되었나

한국전쟁은 1950년 6월 25일에 시작되었지만, 전쟁을 가능하게 한 구조는 그보다 5년 앞서 만들어졌다. 1945년 8월 10일 밤, 일본의 항복이 임박하자 미군 장교 딘 러스크(Dean Rusk)와 찰스 본스틸(Charles Bonesteel)은 한반도를 분할할 선을 급히 그었다. 소련이 한반도 전역을 점령하는 것을 막기 위해 38도선을 제안했고, 스탈린은 놀랍게도 이를 수용했다. 이렇게 그어진 선은 임시 군사분계선이었으나, 냉전이 굳어지면서 영구적인 국경이 되었다.

1945년 12월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신탁통치안이 합의되었지만, 좌우를 막론한 조선인들의 거센 반대 속에 미소공동위원회는 교착에 빠졌다. 1948년 남쪽에 대한민국(8월 15일), 북쪽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9월 9일)이 각각 수립되면서 분단은 제도화되었다. 소련군은 1948년 12월, 미군은 1949년 6월 철수했다. 그러나 두 정부 모두 한반도 전체의 유일한 합법 정부를 자처했다. 조선의 헌법은 서울을 수도로 명기했고, 남의 이승만은 '북진통일'을 공공연히 주장하며 미국에 무기를 요구했다. 워싱턴은 이승만이 북침할 것을 우려해 탱크와 중화기 지원을 거부했다.

1948년 봄부터 1950년 봄까지 한반도는 이미 낮은 강도의 내전 상태였다. 제주 4·3항쟁(1948년 4월~1949년 5월)과 여수·순천 반란(1948년 10월)으로 남한에서만 약 3만 명이 사망했다. 38도선에서는 1949년 여름 개성과 옹진 일대에서 사단급 충돌이 벌어졌고, 쌍방에 수천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조선의 지원을 받는 남조선로동당 게릴라들은 태백산맥에 근거지를 구축했으나, 1949년 말~1950년 봄 한국군의 대대적인 토벌 작전으로 궤멸 직전까지 몰렸다.

김일성은 1949년 3월 모스크바에서 스탈린에게 처음으로 무력통일을 제안했다. 스탈린은 세 가지 이유로 거부했다. 첫째, 조선인민군은 아직 압도적 우위를 갖추지 못했다. 둘째, 주한미군이 철수했지만 미국이 개입할 가능성이 있었다. 셋째, 38도선은 소련이 직접 합의한 국제적 약속이었다. 이후로도 김일성은 여러 차례 재차 요청했고, 박헌영은 남조선 내 20만 당원이 봉기할 것이라고 장담했다.

1949년 하반기, 전쟁의 계산을 바꾼 세 가지 사건이 일어났다. 1949년 8월 29일 소련이 첫 핵실험에 성공하며 미국의 핵 독점이 깨졌다.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었고, 마오쩌둥은 중국 내전에서 승리했다. 같은 해 6월 미군은 이미 한반도에서 철수한 뒤였다. 1950년 1월 12일, 미국 국무장관 애치슨은 태평양 방위선에서 한국을 제외하는 연설을 했다. 스탈린은 미국이 한국에서 싸우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굳혔다.

1950년 초 조선의 군사적 우위는 압도적이었다. 조선인민군은 소련제 T-34-85 전차 274대, 전투기 210대, 포병 200문을 보유했고, 중국 인민해방군에서 복무하다 돌아온 5만~7만 명의 조선계 베테랑이 주력 부대의 중핵을 이루었다. 반면 한국군은 전차가 한 대도 없었고 대전차 무기도 빈약했으며, 항공기는 훈련기 22대가 전부였다. 소련 군사고문단은 1949년 가을부터 조선에 파견되어 구체적인 작전계획 수립에 착수했다. 1950년 1월 30일, 스탈린은 시티코프 대사에게 '과도한 위험을 감수하지 않고' 준비를 진행하라는 전문을 보냈다. 1950년 4월 김일성은 모스크바에서 스탈린을 다시 만나 최종 승인을 받아냈다. 단, 소련군의 직접 참전은 없고, 마오쩌둥의 동의가 필요하며, 전쟁은 신속히 끝내야 한다는 조건이 붙었다.

왜 스탈린은 마흔여덟 번째에 승인했는가

김일성이 무력 통일을 처음 정식으로 제기한 것은 1949년 3월 5일 모스크바에서 열린 스탈린과의 첫 회담 자리였다. 스탈린은 남한 주둔 미군 규모와 남북 군사력 균형을 꼼꼼히 물은 뒤, 조선인민군이 절대적 우위를 확보하지 못하는 한 공격해서는 안 된다고 답했다. 미군이 아직 철수하지 않았고(소련군은 1948년 12월 이미 철수), 미소 간 38도선 분할 합의가 살아 있으며 무엇보다 미국과의 직접 충돌 위험이 너무 크다는 이유였다. 스탈린은 남한이 먼저 공격해 올 경우 반격하는 형태만 허용한다고 못 박았다.

그러나 김일성은 멈추지 않았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주재 소련 대사 테렌티 시티코프와 박헌영을 통해 1949년 한 해 동안만 공식적으로 마흔여덟 차례나 승인을 요청했다. 8월에는 전면전이 어렵다면 최소한 옹진반도만이라도 점령하게 해달라고 간청했다. 9월 3일에는 자신의 통역관 문일을 통해 소련 공사 그리고리 툰킨에게 "38선은 미군 철수로 이미 의미를 상실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9월 24일 소련 공산당 정치국은 전면전도, 옹진반도 제한전도 모두 시기상조라고 공식 거부했다. 툰킨은 "미국의 개입으로 분쟁이 장기화될 것"이라고 보고했고, 스탈린은 "남한의 공격을 유도해 반격하는 방식"을 대안으로 제시했다.

1949년 말에서 1950년 초 사이, 스탈린을 움직인 조건들이 빠르게 정렬됐다. 1949년 6월 미군이 남한에서 완전히 철수했고, 8월 소련이 첫 핵실험에 성공해 미국의 핵 독점이 깨졌으며, 10월 마오쩌둥의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됐다. 1950년 1월 12일 애치슨 미국 국무장관이 한국을 미국의 방위선 밖에 두는 연설을 했으나, 공개된 소련 문서들에는 이 연설이 언급된 사례가 단 한 건에 불과해 실제 영향은 미미했다. 결정적 변수는 따로 있었다. 김동길 베이징대 교수가 분석한 대로, 1950년 1~2월 스탈린과 마오쩌둥의 중소 우호 동맹 조약 협상 과정에서 소련은 뤼순항과 창춘 철도 등 중국 내 전략적 특권을 대부분 포기해야 했다. 기존의 대미 전략, 즉 중국을 내세워 아시아에서 미국의 주의를 분산시키고 소련은 유럽 사회주의 강화에 집중한다는 구도가 흔들린 것이다. 한국에서의 군사적 긴장은 이 공백을 메울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었다. 누가 이기든, 미국의 자원을 아시아에 묶어둘 수 있다는 계산이었다.

1950년 1월 17일, 김일성은 박헌영의 관저에서 열린 만찬 자리에서 소련 외교관들에게 "중국 통일이 완료됐으니 이제 남한을 해방할 차례"라며 다시 승인을 요청했다. 1월 30일, 마침내 스탈린은 시티코프에게 전문을 띄웠다. "김일성 동지의 불만은 이해하나, 이 큰일은 치밀한 준비가 필요하며 지나친 모험을 해서는 안 된다. 그를 만나 이 문제를 논의할 용의가 있으며 그를 도울 의사가 있다." 신호등이 바뀐 순간이었다. 2월부터 소련의 군수 물자, 티-34-85 전차, 야크 전투기, 포병 장비가 대량으로 조선에 도착하기 시작했다.

1950년 4월, 김일성과 박헌영은 3월 30일부터 4월 25일까지 거의 한 달간 모스크바에 머물며 스탈린과 침공 계획을 최종 조율했다. 스탈린은 두 가지 조건을 달았다. 첫째, 최종 결정은 마오쩌둥과 공동으로 내려야 한다. 둘째, 소련군은 어떤 형태로도 공개적으로 교전에 참여하지 않으며 전쟁의 주체는 어디까지나 조선인민군이다. 5월 13일, 김일성은 베이징에서 마오쩌둥을 만나 스탈린의 입장을 전달했다. 5월 14일 스탈린은 마오쩌둥에게 직접 전문을 보내 "국제정세의 변화에 따라 통일에 착수하자는 조선 동지들의 제청에 동의한다"고 확인했고, 마오쩌둥은 김일성에게 "만일 미군이 참전한다면 중국은 병력을 파견해 돕겠다"고 약속했다. 이로써 개전의 정치적 조건은 완성됐다.

1950년 6월 25일,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동틀 무렵이었다. 공식적인 선전포고도 없이 조선인민군은 38도선 전역에서 남쪽으로 진격하기 시작했다. 작전명은 '폭풍'. 김일성과 강건 총참모장이 소련 군사고문 바실리예프 중장과 함께 완성한 이 계획은 8월 15일, 광복 5주년까지 한반도 전체를 점령한다는 목표를 세웠다. 하루 평균 10km씩, 50일 안에 부산까지 도달하겠다는 계산이었다.

공격은 다섯 축으로 진행되었다. 서쪽의 옹진반도에서는 포격이 오전 4시 40분 시작되었고, 개성 방면에서는 제1사단과 제6사단이, 중부의 의정부 회랑에서는 제3사단과 제4사단, 그리고 제105기갑여단의 T-34-85 전차들이 남하했다. 동해안에서는 제5사단이 해안도로를 따라 진격했고, 강릉 부근에서는 상륙작전까지 병행되었다. 이 중 가장 결정적이었던 곳은 의정부 회랑이었다. 예로부터 서울로 통하는 침공로였던 이 길에 인민군은 전체 병력의 절반을 집중시켰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대한민국이 먼저 공격해 왔다고 주장했다. 김일성은 전쟁 다음 날인 26일 오전 9시 20분 라디오 방송에서 "리승만 역도군이 38도선을 넘어 전면적 침공을 개시했다"고 발표했다. 구체적으로는 해주 방면에서 대한민국 육군 제17연대가 반격해 들어왔다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유엔 한국위원회(UNCOK) 소속의 호주군 감시단 피치 소령과 랜킨 대위는 25일 오후 5시 보고서에서 조선인민군이 전 전선에 걸쳐 기습공격을 가했으며, 대한민국군은 전적으로 방어 태세에 있었고 대규모 공격을 수행할 능력이 전혀 없었다고 판단했다. 탱크도, 대전차 무기도, 전투기도 없는 군대가 남침을 감행했다는 주장은 군사적으로 성립하기 어려웠다.

병력 규모는 압도적이지 않았으나 구성은 결정적 차이를 보였다. 인민군은 약 8만 9천 명, T-34-85 전차 약 200대, 전투기 및 공격기 120여 대, 그리고 중화기를 갖췄다. 반면 대한민국 육군은 전방에 약 3만 8천 명, 전차는 한 대도 없었고 대전차 무기조차 없었다. 공군은 훈련기 10여 대에 불과했다. 이승만 정권의 북진통일론이 거듭 표명되던 것과 달리, 실전 태세는 참담했다. 전날인 24일까지도 상당수 병사들이 외출 중이었다.

인민군 부대는 첫 3시간 만에 3~5km를 진격했고, 옹진·개성·신의리는 당일 함락되었다. 춘천 방면에서만 대한민국 제6사단의 완강한 저항으로 진격이 지연되었다. 개전 이튿날인 26일, 가장 극적인 해전이 벌어졌다. 대한민국 해군의 백두산함(PC-701)이 부산 앞바다에서 의심스러운 선박을 발견했다. 조선이 부산항을 선제 점령하기 위해 병력 600명을 실어 보낸 수송선이었다. 백두산함은 3인치 함포와 기관총으로 이 선박을 격침시켰고, 인민군 병력은 거의 전원이 수장되었다. 부산항이 함락되었다면 이후 유엔군의 병력 전개 자체가 불가능했을 것이다.

28일 새벽, 대한민국군은 서울 남쪽 한강 인도교를 폭파했다. 인민군의 진격을 늦추기 위한 조치였지만, 철수 명령도 없이 이루어진 성급한 폭파였다. 당시 한강 이북에는 아직 대한민국군 주력 부대와 수많은 피란민이 남아 있었다. 병력과 장비, 수송 수단은 강을 건너지도 못한 채 유기되었다. 6월 25일 9만 5천 명이던 대한민국군은 6월 말에는 2만 2천 명만이 집결 가능했다. 같은 날 서울은 함락되었고, 인민군은 3일 만에 수도를 점령한다는 당초 목표를 달성했다. 하지만 그들이 기대했던 '대규모 민중봉기'는 일어나지 않았다.

빈 의자 하나가 전쟁의 판도를 바꾸다

1950년 1월 13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소련 대표 야코프 말리크는 자리에서 일어나 회의장을 나갔다. 중화인민공화국을 제치고 국민당 정부(타이완)의 장팅푸가 중국 대표로 의장석에 앉은 데 대한 항의였다. 말리크는 "아무도 대표하지 않는 자의 결정은 인정할 수 없다"고 선언했고, 소련은 이후 6개월 넘게 안보리 회의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거부권을 가진 상임이사국의 공백은 유엔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 보이콧이 가장 극적으로 작용한 순간은 1950년 6월 25일부터 7월 7일까지, 불과 열이틀 사이였다. 개전 당일 안보리는 9대 0(유고슬라비아 기권, 소련 불참)으로 결의안 82호를 채택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무력 공격을 규탄하고 즉각 철수를 요구했다. 이틀 뒤인 6월 27일에는 결의안 83호가 통과되어 유엔 회원국에 "대한민국을 지원하는 데 필요한 원조"를 제공하라고 권고했다. 이것이 유엔군 사령부 창설의 법적 근거가 됐다. 7월 7일 결의안 84호로 통일사령부가 정식 수립되고 더글러스 맥아더가 사령관에 임명됐다. 소련 대표가 자리에 있었다면 단 한 번의 거부권으로 이 모든 결의를 무력화할 수 있었다.

말리크는 뉴욕에 있었다. 6월 27일, 결의안 83호가 상정되던 날, 트뤼그베 리 유엔 사무총장과 미국 대표 어니스트 그로스는 스웨덴 식당에서 말리크와 점심을 함께했다. 리 사무총장은 "소련의 국익을 위해서라도 회의에 참석하는 게 좋겠다"고 권했지만, 말리크는 "나는 가지 않겠다"며 단호히 거절했다. 현장 대사가 혼자 내릴 수 있는 결정이 아니었다.

실제로 안드레이 그로미코 외무차관은 결의안 84호 통과 직전 스탈린에게 말리크를 안보리로 복귀시켜 반대표를 행사하게 하자고 건의했다. 스탈린은 이 건의를 거부하고 결석을 유지하라고 답했다. 그로미코의 건의가 받아들여졌더라면 유엔군 사령부는 성립하지 못했을 것이다.

왜 스탈린은 거부권이라는 가장 강력한 외교 무기를 스스로 포기했는가. 이 물음에 대한 결정적 사료는 2005년 러시아 사회정치사문서보관소(RGASPI)에서 발견된 스탈린의 편지다. 체코슬로바키아의 클레멘트 고트발트 대통령이 "왜 민주진영이 안보리 표결에 참여하지 않았는가"라고 묻자, 스탈린은 1950년 8월 27일자 답신에서 네 가지 이유를 들었다. 첫째, 중화인민공화국과의 단결을 과시하기 위해. 둘째, 타이완을 중국 대표로 인정하는 미국 정책의 어리석음을 드러내기 위해. 셋째, 두 강대국(소련과 중화인민공화국)이 빠진 안보리 결의에는 정당성이 없음을 보이기 위해. 그리고 넷째, 스탈린 자신이 명시한 표현 그대로 "미국 정부가 안보리 다수결을 이용해 자유롭게 어리석은 짓을 저지르도록 함으로써 여론이 미국 정부의 진면목을 알게 하기 위하여."

스탈린은 이어서 편지에 자신의 전략적 계산을 숨김없이 적었다. "미국이 한국에 대한 군사 개입에 얽혀 들어가 군사적 명성과 도덕적 권위를 망치고 있다." "미국이 극동에 묶여 유럽에 신경 쓸 여유가 없다." "미국 정부가 극동에 계속 묶여 있고, 조선의 자유와 독립을 위한 투쟁에 중국을 끌어들인다고 가정해 보자. 그렇게 되면 미국은 가까운 장래에 제3차 세계대전을 일으킬 수 없게 될 것이다." 이 편지가 쓰인 8월 말은 아직 조선인민군이 낙동강 전선에서 우세를 유지하던 시기였다. 스탈린은 이미 미국의 개입을 기정사실로, 중국의 참전을 바람직한 전개로 보고 있었다.

안드레이 레도프스키가 발굴한 이 문건은 소련의 안보리 결석이 실수나 외교적 경직성의 산물이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스탈린은 미국이 유엔 깃발 아래 개입할 길을 의도적으로 열어둠으로써, 한반도에서 미국과 중국을 맞붙게 하고 소련은 유럽에 집중하는 이득을 취하려 했다. 1950년 8월 1일 말리크가 안보리 의장 자격으로 복귀했을 때, 스탈린이 원한 구도는 이미 현실이 되어 있었다.

5,000분의 1 도박이 전쟁을 뒤집다

1950년 8월 말, 유엔군과 대한민국군은 부산 주변 140km 방어선에 갇혀 있었다. 조선인민군은 8월 공세와 9월 초 5개 축 동시공격으로 방어선을 뚫으려 했고, 네 차례의 주요 전투에서 유엔군을 거의 밀어냈지만 결정적 돌파에는 실패했다. 인민군도 소진되고 있었다. 보급선이 길어져 탄약과 식량이 바닥나고, 전차와 중화기는 연료 부족으로 버려졌으며, 증원병은 제대로 훈련되지 못했다.

더글러스 맥아더 극동사령관은 이때 이미 다른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개전 직후부터 그는 적 후방에 상륙해 보급선을 차단할 구상을 세웠고, 상륙 지점으로 인천을 점찍었다. 문제는 인천의 조건이었다. 조수 간만 차가 9미터에 달해 상륙 가능 시간이 하루 몇 시간뿐이었고, 접근로는 좁은 수로에 해안은 높은 방파제로 둘러싸여 있었다. 해군은 "모든 자연적·지리적 장애를 갖춘 항구"라 불렀다. 합동참모본부는 군산 상륙을 선호했고, 1950년 8월 23일 도쿄 회의에서 해군과 육군 수뇌부는 90분 동안 인천의 기술적 불가능성을 나열했다.

맥아더는 45분간 맞받았다. "바로 그 불가능성 때문에 적은 아무도 그런 짓을 하지 않으리라 믿을 것이고, 그것이 바로 기습의 핵심"이라는 논리였다. 그는 인천이 아니라면 겨울 내내 힘든 정면 돌파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합참은 마지못해 8월 28일 승인했다.

크로마이트 작전은 9월 15일 새벽 시작됐다. 제1해병사단은 월미도(녹색 해변), 인천 본항(적색 해변), 그리고 남쪽 매립지(청색 해변) 세 곳에 동시 상륙했다. 월미도는 정오에 확보됐고, 인천 시내는 다음 날 아침까지 장악됐다. 17일에는 김포비행장이, 21일에는 영등포가 함락됐다. 서울 탈환은 9월 20일 한강 도하로 시작해 일주일간의 시가전 끝에 9월 28일 완료됐다.

제8군도 9월 16일부터 부산 방어선에서 반격에 나섰다. 두 방향에서 조여오는 압력에 인민군의 지휘체계는 무너졌다. 후방이 차단된 남쪽의 인민군 주력은 조직적 저항을 상실했고, 9월 말까지 인민군은 남한에서만 33만 5천 명의 병력과 239대의 전차, 74문의 자주포를 잃었다. 38도선 이북으로 철수한 병력은 약 3만 명에 불과했다.

이 승리가 전쟁의 성격을 바꿨다. 전쟁 목표는 이제 38도선 회복이 아니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권 자체를 제거하는 '롤백'으로 확장됐다. 9월 27일 워싱턴은 맥아더에게 38도선 이북 작전을 승인했고, 10월 초 유엔 총회는 한반도 통일을 결의했다. 인민군의 붕괴 속도는 스탈린에게도 충격이었다. 그는 김일성의 거듭된 지원 요청을 거부하면서 10월 1일 마오쩌둥에게 "중국 인민지원군" 파견을 처음 제안했다. 한반도 전역을 공산주의 진영이 장악할 수 있으리라 봤던 전쟁은 이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생존 자체가 걸린 위기로 바뀌어 있었다.

중국은 왜 인민지원군이라는 이름으로 싸웠는가

1950년 10월 1일, 한국전쟁이 시작된 지 석 달 만에 국군이 38도선을 넘었다. 같은 날 김일성과 스탈린은 각각 마오쩌둥에게 구조 요청을 보냈다. 김일성의 전문은 "적군이 38도선 이북으로 넘어오고 있다…… 직접적인 군사원조를 요청한다"였다. 스탈린의 전문은 더 냉정했다. "당신들이 5~6개 사단을 조선에 파견할 수 있는지, 그리고 어떤 조건을 요구하는지"를 묻는 내용이었다.

마오는 10월 2일 저녁 이미 원칙적 승인을 담은 회답을 써놓았으나, 정치국 상무위원회는 그날 밤 승인하지 않았다. 널리 알려진 내용과 달리 마오는 10월 2일 회신을 실제로 발송하지 않았다. 1990년대 중국 문헌 공개로 밝혀진 바로는, 10월 2일 저녁 회의에서 정치국은 파병을 보류하기로 결정했고, 마오는 이미 써둔 응답을 보류했다.

10월 4일부터 5일까지 열린 정치국 확대회의가 분수령이었다. 참석자 대다수가 반대했다. 린뱌오는 중국의 산업 기반이 취약하고 미군의 공중 우세에 맞설 방공 능력이 없다는 점을 들었으며, 원자탄 사용 가능성까지 거론했다. 마오는 린뱌오에게 인민지원군 사령관을 맡기려 했으나, 린뱌오는 건강을 이유로 거부하고 10월 8일 저우언라이와 함께 소련으로 치료를 떠났다. 그가 파병 자체에 반대했기 때문인지, 단지 지휘를 맡고 싶지 않았는지는 지금도 학계에서 논쟁 중이다.

회의 분위기를 바꾼 인물은 시안에서 급히 소환된 펑더화이였다. 10월 4일 베이징에 도착해 양쪽 논의를 다 들은 뒤, 10월 5일 마오의 편에 섰다. 펑더화이의 논리는 간결했다. "호랑이는 사람을 잡아먹으려 한다. 먼저 때려잡지 않으면 언젠가 잡아먹힌다." 미국이 조선 전역을 점령하면 압록강을 넘어 중국을 공격할 것이라는 논리였다. 펑더화이의 지지로 회의 분위기가 급변했고, 그날 그가 인민지원군 사령관 겸 정치위원으로 임명되었다.

10월 8일 정치국은 공식 파병을 결정했다. 그러나 스탈린이 공중 엄호를 어디까지 제공할지가 미해결이었다. 10월 11일 저우언라이와 린뱌오는 흑해 연안 스탈린 별장에서 소련 지도부와 협상했다. 스탈린은 중국에 장비와 탄약을 신용으로 공급하겠다고 했지만, 소련 공군은 2~3개월의 준비 기간이 필요하며 그때까지는 중국 영공만 방어하겠다고 통보했다. 사실상 소련 공군의 조선 영공 진입을 거부한 것이다. 스탈린과 저우는 이날 마오에게 공동 전문을 보내 "현 시점에서 중국은 조선에 파병할 능력이 없다"고 결론 내렸다.

마오는 10월 12일 펑더화이에게 작전을 보류하라고 지시했으나, 10월 13일 정치국을 다시 소집해 결정을 뒤집었다. 소련의 공중 엄호가 없더라도 참전한다는 결론이었다. "적이 우월한 장비를 가졌으나 우리는 우월한 사기를 가졌다"는 판단이었다. 10월 18일 저우가 베이징으로 돌아와 스탈린이 소련 공군을 조선 영공에 직접 투입하지는 않되 장비와 탄약을 계속 공급하겠다고 약속했다고 보고하자, 마오는 최종 명령을 내렸다.

'인민지원군'이라는 명칭은 법적 허구였다. 실체는 중국 인민해방군 제13병단 산하 25만 명의 동북변경방위군이었다. 그러나 '의용군'이라는 이름은 중국이 공식적으로 미국과 전쟁 상태에 돌입하지 않았다는 외교적 명분을 제공했다. 미국도 이 허구를 알면서도 전쟁 확대를 우려해 문제 삼지 않았다. 이 명칭은 7월 초 저우언라이가 처음 제안했으며, 황옌페이 부총리가 '지원군'(Support Army)이라는 초기 명칭이 너무 노골적이라고 지적한 것도 영향을 미쳤다.

10월 19일 저녁, 첫 인민지원군 부대가 극비리에 압록강을 건넜다. 주간에는 위장하고 야간에만 행군하는 엄격한 은폐 규율 덕분에 유엔군 정찰은 25만 병력의 이동을 전혀 포착하지 못했다. 10월 25일 첫 교전이 벌어졌고, 11월 1일에는 소련 조종사들이 모는 미그-15기가 압록강 상공에 처음 모습을 드러냈다. 중국의 참전은 전쟁의 판도를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하늘의 비밀 전쟁: 소련 조종사들은 어떻게 싸웠는가

1950년 11월 1일, 만주 안둥 기지에서 소련 전투기들이 처음 출격했다. 이날 제1중위 표도르 치시가 미스탱을 격추했고, 같은 날 세묜 호미니치 중위가 F-80 슈팅스타를 떨어뜨리며 역사상 첫 제트기 대 제트기 공중전을 기록했다. 11월 27일에는 이들 부대가 제64전투항공군단(64이아크)으로 편성됐다. 이후 1953년 7월 정전까지 이 군단을 거쳐 간 소련 공군 병력은 12개 전투항공사단, 야간전투기 연대 2개, 대공사단 4개, 인원 약 2만 6천 명에 달했다.

참전은 철저히 감춰졌다. 조종사들은 중국 인민지원군 군복을 입었고, 미그-15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또는 중국 군기가 그려졌다. 무선 교신은 한국어로 하라는 명령이 내려졌고, 조종사들은 '공격합니다', '후퇴하라' 같은 필수 구절을 키릴문자로 음차한 카드를 받았다. 그러나 첫 교전 직후 이 규칙은 사실상 무너졌다. 격렬한 교전 중에 러시아어 욕설이 무선에 흘렀고, 미 F-86 조종사들은 탈출하는 금발의 조종사를 목격했다고 보고했다. 미 정보당국은 1950년 말 이미 소련 조종사들이 싸우고 있음을 파악했으나, 양측 모두 전면전 확대를 피하기 위해 공식 확인을 피했다.

미그 회랑은 압록강 하구의 안둥에서 남쪽 신안주까지, 그리고 수풍댐까지 이어지는 북서쪽 삼각지대였다. 소련군의 주임무는 압록강 철교와 수풍 수력발전소를 폭격으로부터 방어하는 것이었다. 조종사들은 해안선과 전선에 접근하지 말라는 명령을 받았고, 이는 피격 시 포로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였다.

1951년 4월 12일, 소련 조종사 30명이 F-80과 F-84 약 100대의 호위를 받던 B-29 폭격기 48대를 요격했다. 그들은 호위기를 따돌리고 폭격기 편대에 돌입해 3대를 격추하고 7대를 손상시켰으며, 아군 손실은 없었다. 미국은 이날을 '검은 목요일'이라 불렀고, 이후 3개월간 주간 폭격을 전면 중단했다. 같은 해 10월 23일 '검은 화요일'에는 약 100대의 미그가 남시 상공에서 B-29 8대 중 3대를 격추하고 나머지도 사실상 전손시켰다. 이날을 끝으로 미 공군의 주간 고고도 정밀폭격 작전은 한국전쟁에서 종료됐다. 이후 B-29는 소수의 야간 공습으로 전환했고, 소련군은 La-11과 이후 미그-15 야간형을 투입해 맞섰다. 최고의 야간 에이스로 꼽히는 아나톨리 카렐린 소령은 야간에만 B-29 5대와 정찰기 1대를 격추했다.

한낮의 제공권을 두고는 미그-15와 F-86 세이버가 미그 회랑에서 맞붙었다. 1951년 여름까지 미그 조종사의 90% 가까이가 소련인이었으며, 이들은 대부분 제2차 세계대전 참전 경험이 있는 베테랑이었다. 니콜라이 수탸긴 대위는 22대를 격추해 제트기 시대 최다 격추 기록을 세웠고, 예브게니 페펠랴예프 대령이 19~23대(기록에 따라 차이)로 뒤를 이었다. 소련 측은 총 51명의 에이스를 배출했다고 주장한다. 격추비에 관해서는 논쟁이 있다. 미 공군은 10:1로 세이버가 우세했다고 주장했으나, 냉전 종식 후 공개된 자료와 최근 연구는 소련 조종사와의 교전에서는 1.3:1 수준에 가까웠으며, 중국·조선 조종사 상대로는 5:1 이상이었다고 본다.

1952년 중반부터 소련군은 전투의 주도권을 점차 중국·조선 공군에 넘겼다. 64이아크는 훈련교관 역할로 전환하며, 먼저 소규모 교전에 투입한 후 단계적으로 독자 작전을 맡겼다. 1952년 말에는 중국 공군이 서해안, 조선 공군이 동해안을 각각 담당하는 체계가 자리 잡았다. 64이아크가 기록한 최종 통계는 출격 약 6만 4천 회, 공중전 1,872회, 격추 주장 1,250기(전투기 1,100기·대공포 150기), 자체 손실 335기와 조종사 전사 120명 이상이다. 사령관 게오르기 로보프 중장은 전후 "우리는 공중에서 미국을 이길 수 없었다. 우리에겐 전투기와 대공포밖에 없었다"고 술회했다. 전사한 조종사들의 시신은 여순 뤼순의 소련 군묘지에 조용히 묻혔고, 소련 국내에는 '특수임무 중 사망'으로 통보됐다. 소련이 자국 조종사의 한국전쟁 참전을 공식 인정한 것은 1970년대 후반의 일이다.

스탈린의 죽음이 정전을 어떻게 열었는가

1953년 3월 5일 이오시프 스탈린이 뇌출혈로 사망했다. 정전 교섭은 1951년 7월 개성에서 시작된 이후 1년 8개월 동안 사실상 멈춰 있었다. 가장 큰 걸림돌은 포로 송환 원칙이었다. 유엔군 측은 1952년 1월 '자유송환', 즉 포로가 북으로 돌아가기를 원하지 않으면 강제로 보낼 수 없다는 입장을 제시했고, 공산 측은 제네바협약에 따른 '전원 송환'을 주장했다. 이 교착은 협상 테이블의 기술적 차이가 아니었다. 스탈린이 지속을 원했기 때문이다. 1952년 8월 저우언라이와의 회담에서 스탈린은 "이 전쟁은 미국의 신경을 건드리고 있다. 인내와 끈기가 필요하다"며 강경 노선을 재확인했다. 그해 7월 김일성이 폭격에 시달리다 마오쩌둥에게 포로 문제 양보를 제안했을 때, 마오는 이를 거부하며 스탈린에게 물었고 스탈린이 반대하자 김일성은 곧바로 제안을 철회했다.

스탈린의 죽음은 이 판을 한순간에 바꿨다. 후계 구도는 게오르기 말렌코프(각료회의 의장), 라브렌티 베리야(내무상), 뱌체슬라프 몰로토프(외무상)의 집단지도체로 짜였고, 이들 모두 전쟁 지속에 이익이 없었다. 스탈린의 장례식에 참석한 저우언라이는 새 지도부로부터 종전 의사를 직접 전달받았다. 3월 19일 소련 각료회의는 마오쩌둥과 김일성 앞으로 보내는 서한 초안을 결의했다. 내용은 분명했다: 전쟁을 끝내기 위해 적극적으로 움직이라는 지시였다. 소련의 군사·경제 지원 없이 중국은 전쟁을 계속할 수 없었고, 중국 없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도 마찬가지였다.

3월 28일 김일성과 펑더화이는 마크 클라크 유엔군 사령관에게 부상 포로 교환을 위한 제네바협약 이행 의사를 통보했다. 이틀 뒤인 3월 30일 저우언라이는 '송환을 원하는 포로는 즉시 송환하고, 나머지는 중립국에 이관한다'는 제안을 발표했다. 1년 넘게 깨지지 않던 공산 측의 전원 송환 원칙을 스스로 접은 것이다. 4월 26일 판문점에서 교섭이 재개됐고, 이후 중립국송환위원회 설치를 골자로 한 인도안이 타결됐다.

여기서 또 하나의 장애물이 튀어나왔다. 이승만은 통일 없는 정전을 절대 받아들일 수 없다며 1953년 6월 18일 남한에 수용된 반공 포로 약 2만 7,000명을 일방적으로 석방했다. 협상을 깨뜨리려는 노골적인 행동이었다.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미 대통령은 분노했고, 미 제8군 사령관 맥스웰 테일러는 이승만 체포를 포함한 비상계획 '에버레디' 작전을 입안하기까지 했다. 워싱턴은 월터 로버트슨 극동담당 차관보를 서울로 급파했고, 결국 이승만은 "정전협정에 서명하지는 않겠지만 방해하지도 않겠다"는 약속을 했다.

1953년 7월 27일 오전 10시, 판문점에서 조선인민군 대표 남일과 유엔군 대표 윌리엄 해리슨 주니어가 말 한마디 없이 정전협정에 서명했다. 12시간 뒤 포성이 멎었다. 협정은 이후 김일성과 펑더화이, 그리고 클라크 장군이 따로 서명했다. 이승만은 끝내 서명하지 않았다. 38도선 부근의 교착선을 따라 폭 4km의 비무장지대가 그어졌고, 3년 1개월 2일 만에 총성이 멎었다. 평화협정은 아니었다. 오늘날까지도 아니다.

끝나지 않은 전쟁: 무엇이 결정됐고, 무엇이 남았는가

1953년 7월 27일 오전 10시, 판문점에서 조인된 문서는 평화협정이 아니라 군사정전협정이었다. "완전한 적대행위 중지"를 명시했지만, 서명자는 군 지휘관들이었고 정부는 아니었다. 대한민국은 아예 서명하지 않았다. 이승만은 통일을 포기할 수 없다며 서명을 거부했고, 유엔군 사령관 마크 클라크가 남측을 대표해 서명했다. 협정은 3개월 안에 정치회담을 열어 평화협정을 맺도록 규정했으나, 1954년 제네바 회담에서 존 포스터 덜레스가 평화협정 논의 자체를 거부하면서 그 조항은 사문화됐다.

70년이 지난 지금도 한반도에는 휴전만 있을 뿐 평화는 없다. 비무장지대(DMZ)는 정전협정이 그은 군사분계선을 따라 길이 248km, 폭 4km로 설정되었고,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무장이 밀집된 국경이다. 이 경계선은 전쟁 전 38도선과 거의 같다. 3년 동안 수백만 명이 죽고 국토는 폐허가 되었지만, 영토는 바뀌지 않았다. 통일이라는 전쟁의 애초 목표는 완전히 좌절되었다.

그러나 한국전쟁이 바꾼 것은 한반도에만 머물지 않는다. 첫째, 냉전의 군사화를 결정적으로 밀어붙였다. 미국 국방예산은 1950년 135억 달러에서 1951년 480억 달러로 네 배 가까이 뛰었고, 유럽 주둔 미군은 두 개 사단에서 네 개 사단으로 증가했다. NSC-68은 전쟁 전에는 의회에서 통과될 가망이 없던 문서였으나, 6월 25일 이후 예산안이 통과되었다. 둘째, 나토는 종이동맹에서 실제 군사기구로 바뀌었다. 아이젠하워가 초대 유럽 연합군 최고사령관으로 임명되었고, 서독 재무장 논의가 본격화됐다. 셋째, 일본은 유엔군의 병참기지가 되어 '특별조달'로 35억 달러를 벌어들였고, 이 전쟁특수는 일본 경제부흥의 분수령이 됐다. 미쓰이, 미쓰비시, 스미토모가 이 시기에 재건됐고, 1950년 8월에는 경찰예비대가 창설돼 훗날 자위대로 이어졌다.

중국에게 전쟁은 더 복합적인 유산을 남겼다. 미국과 맞서 싸워 정전으로 끝냈다는 사실은 신생국 중국에 막대한 위신을 안겼고, 사회주의 진영 안에서 마오쩌둥의 발언권은 전쟁 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커졌다. 그러나 중국은 소련 차관으로 소련 무기를 사야 했고, 전후 복구용으로 의도된 차관을 무기 구입에 썼으며, 이 불평등한 동맹은 1950년대 말 중소분열의 씨앗 가운데 하나가 됐다. 대만 문제는 더욱 결정적이었다. 미국은 전쟁 발발 직후 제7함대를 타이완 해협에 급파했고, 이후 타이완은 미국의 군사적 보호 아래 중국의 통제 밖에 영구히 남게 되었다. 1970년대까지 미국이 중화인민공화국을 외교적으로 승인하지 않은 배경에도 한국전쟁이 있었다.

전쟁의 성격을 둘러싼 역사학계의 논쟁은 70년이 지나도 끝나지 않았다. 정통파, 즉 딘 애치슨의 회고록과 냉전 초기 합의는 이 전쟁을 소련이 기획·지시하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실행한 국제적 침략으로 본다. 이에 맞서 I. F. 스톤의 《숨겨진 한국전쟁사》(1952)와 컬럼비아 대학의 브루스 커밍스 《한국전쟁의 기원》(1981, 1990)은 전쟁의 뿌리를 해방 직후의 민중투쟁과 1948년 제주 4·3, 여수·순천 봉기로 거슬러 올라가며, 이를 본질적으로 내전으로 재규정했다. 커밍스의 2권짜리 연구는 미군정 문서와 현지 조사를 바탕으로 정통파 서사를 근본에서 뒤흔들었다.

1990년대 소련과 중국의 문서고가 열리면서 논쟁은 새 국면을 맞았다. 스탈린-김일성 간 전문과 마오쩌둥-저우언라이-스탈린의 교섭 기록은 전쟁이 단순한 내전도, 단순한 대리전도 아니었음을 보여주었다. 윌리엄 스툭의 《한국전쟁: 국제사》(1995)는 이 새 자료를 바탕으로 전쟁을 '제3차 세계대전의 대체물'로 해석했다. 초강대국들이 한반도라는 제한된 무대에서 직접 충돌하지 않고 힘을 겨룬 최초의 사례였으며, 바로 그 제한성 덕분에 핵전쟁으로 비화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1990년대 이후 냉전사 연구자들은 대체로 전쟁의 이중적 성격에 합의했다. 국내적 차원에서는 내전이었고, 국제적 차원에서는 미·소 대리전이었다. 그러나 아직도 확정되지 않은 문제들이 있다. 전쟁의 기원을 1950년 6월 25일로 보아야 하는가, 아니면 1945년 분단과 1948년의 제주·여순 무력충돌까지 포함하는 연속선으로 보아야 하는가? 이 문제는 전쟁 책임론과 직결된다. 또한 이 전쟁이 없었다면 냉전은 덜 군사화된 방향으로 흘렀을 가능성은 없는가? 전쟁 발발 두 달 전에 작성된 NSC-68이 전쟁이 없이도 예산통과가 가능했을 것인가? 그리고 결정적으로, 누가 이 전쟁에서 이겼는가 하는 질문은 답을 내리기 불가능하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영토를 지켰지만 경제는 재건되는 데 수십 년이 걸렸고, 중국은 국제적 위신을 얻었지만 대만을 영구히 놓쳤고, 소련은 미국의 자원을 묶었지만 나토와 서독 재무장을 불러왔으며, 미국은 남한을 구했지만 이길 수 없는 전쟁에서 3만 6천 명 이상의 전사자를 냈다. 한국전쟁은 어느 쪽도 결정적으로 이기지 못한 채 끝난 최초의 냉전 분쟁이었고, 그 결말은 오늘날까지도 휴전 상태로 남아 있다.

결과

전쟁은 통일을 이루지 못한 채 분단을 고착시켰고, 한반도 양쪽과 중국에 막대한 인명 손실을 남겼다. 소련에게는 직접 충돌 없이 미국의 자원을 묶어 두는 결과를 냈지만, 서방의 재무장을 앞당기고 나토를 군사기구로 굳혔다는 점에서 대가도 컸다. 중국은 미국과 맞서 싸운 경험으로 사회주의 진영 안의 위상을 크게 높였고, 이는 뒤에 중소분열의 배경 가운데 하나가 됐다. 스탈린이 죽은 1953년 3월 이후 정전 교섭이 빠르게 진전됐다는 사실은, 전쟁의 지속에 모스크바의 판단이 얼마나 결정적이었는지를 보여 준다.

연표

  1. 1949–1950.04
    거듭된 요청과 승인

    김일성은 1949년부터 무력 통일 승인을 요청했고 스탈린은 거듭 미뤘다. 1950년 4월 모스크바 회담에서 최종 승인이 내려졌으나 소련군 파병은 배제됐다.

  2. 1950.06.25
    개전

    조선인민군이 38도선을 넘어 남진했다. 사흘 만에 서울이 함락됐다.

  3. 1950.06–07
    안전보장이사회 결석

    중화인민공화국의 대표권 문제로 소련 대표 말리크가 안보리를 결석하던 중 유엔군 결의가 통과됐다. 거부권을 쓰지 않은 이 공백은 지금도 논쟁거리다.

  4. 1950.09–10
    인천과 반격

    인천상륙으로 전세가 뒤집혀 유엔군이 38도선을 넘어 북상했다.

  5. 1950.10
    중국 인민지원군

    중국이 인민지원군을 보내 전선을 다시 남쪽으로 밀어냈다. 소련은 공중 엄호와 장비를 대는 데 그쳤다.

  6. 1950.11–1953
    미그 회랑

    소련 조종사들이 만주 기지에서 미그-15로 출격했다. 소속을 감춘 이 참전은 냉전기 내내 공식적으로 부인됐다.

  7. 1953.03–07
    스탈린의 죽음과 정전

    스탈린이 죽은 뒤 소련 지도부가 종전으로 방향을 틀면서 교섭이 풀렸고, 7월 27일 정전협정이 조인됐다.

관련 인물 37명

지도부13

개전을 승인한 지도자이오시프 스탈린1878–1953

미국이 개입하지 않으리라 보고 승인했으나, 소련군의 직접 참전은 끝까지 배제했다.

무력 통일을 추진한 당사자김일성1912–1994

1949년부터 거듭 승인을 요청했고 개전 후 조선인민군을 지휘했다.

인민지원군 총사령관 겸 정치위원펑더화이1898–1974

1950년 10월 5일 정치국 회의에서 마오의 파병 결정을 지지해 분위기를 반전시켰고, 10월 19일부터 인민지원군을 지휘해 유엔군을 압록강에서 축출했다.

스탈린 사후 종전을 결정한 소련 각료회의 의장게오르기 말렌코프1902–1988

스탈린이 죽은 지 2주 만인 1953년 3월 19일 각료회의에서 마오쩌둥과 김일성에 보내는 서한 초안을 승인해 적극적 협상으로의 전환을 지시했다.

스탈린 사후 집단지도체의 일원으로 종전 방침에 동의한 내무상라브렌티 베리야1899–1953

말렌코프·몰로토프와 함께 스탈린 사후 '트로이카'를 구성했으며, 3월 19일 각료회의 결의로 종전 추진 방침에 동참했다.

스탈린 사후 집단지도체의 일원으로 종전 방침에 동의한 외무상뱌체슬라프 몰로토프1890–1986

말렌코프·베리야와 함께 3월 19일 각료회의 결의에 참여했으며, 이후 정전 교섭의 외교적 방향을 조율했다.

참전을 결정하고 맥아더를 해임한 미국 대통령해리 S. 트루먼1884–1972

그는 한국전쟁 개입을 결정했고, 원자폭탄 사용을 검토했으며, 맥아더 장군을 해임했다.

인천상륙작전을 구상하고 관철한 유엔군 사령관더글러스 맥아더1880–1964

유엔군 사령관으로서 인천상륙작전을 구상했으며, 합동참모본부의 만장일치 반대를 꺾고 작전을 강행하여 전황을 역전시켰다.

정전회담 조선 측 수석 대표남일1913–1976

남일은 판문점에서 2년 동안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측 대표로서 정전회담을 이끌었으며, 1953년 7월 27일 조선인민군을 대표하여 정전협정에 서명했다.

인민지원군 부사령관덩화1910–1980

1950년 7월 동북변방방위군을 편성하고, 이후 인민지원군 부사령관으로 압록강을 건넜다.

64전투비행군단 사령관게오르기 로보프1915–1994

1951년 9월부터 1952년 8월까지 지휘했으며, 공중전에서 미국을 이기지 못했다고 인정했다.

전쟁 발발 당시 육군참모총장채병덕1916–1950

한강교 폭파 등 준비 실패의 책임을 지고 경질되었다.

1해병사단장올리버 P. 스미스1893–1977

인천 상륙과 서울 진격을 지휘했다.

참여16

인민지원군 파병 결정마오쩌둥1893–1976

유엔군이 북상하자 파병을 결정해 전선을 다시 남쪽으로 밀어냈다.

파병 교섭저우언라이1898–1976

모스크바를 오가며 공중 엄호와 장비 지원 조건을 놓고 협상했다.

안보리 결석과 정전 제안야코프 말리크1906–1980

중국 대표권 문제로 안보리를 결석했고, 1951년 정전 교섭을 공개 제안했다.

전투항공사단장으로 참전이반 코제두프1920–1991

전파방해 장교로 조선 파견표트르 플레샤코프1922–1987

중국인민지원군 고문단장미하일 샬린1897–1970

PLA 총사령관주더1886–1976

PLA 총사령관으로서 1950년 참전 결정 회의에 참여하고 전군의 한국전쟁 지원을 총괄했다.

당 제1서기허가이1908–1953

전쟁 중 당 검증을 주도해 60만 당원 중 45만 명을 제명했고, 김일성과 당 노선 충돌로 실각했다.

인민군 포병사령관 겸 제2군단장김무정1904–1952

포병사령관 겸 제2군단장으로 낙동강 전선에서 진격을 지휘했으나, 패전과 오발 살인사건으로 1950년 12월 숙청되었다.

안보리 복귀 건의안드레이 그로미코1909–1989

결의안 84호 통과 직전 스탈린에게 안보리 복귀를 건의했으나, 스탈린은 이를 거부하고 결석을 유지하라고 지시했다.

파병 지휘를 거부한 마오의 첫 선택린뱌오1907–1971

마오는 인민지원군 사령관으로 린뱌오를 먼저 지목했으나, 린뱌오는 건강을 이유로 거부하고 소련으로 치료를 떠났다. 그가 파병 자체에 반대했는지는 학계에서 의견이 갈린다.

중국군의 후방 기지 책임자가오강1905–1954

그는 선양에서 개입 전 간부 회의를 소집하고 병참을 조직했으며, 마오쩌둥의 실무 준비 핵심 연락책이었다.

소련 보이콧을 촉발한 안보리 의장장팅푸1895–1965

1950년 1월 13일 안보리 의장을 맡은 중화민국 대표로, 그의 사회 아래 소련 대표 말리크가 퇴장하며 보이콧이 시작되었다.

유엔군 대표로 정전협정에 서명한 중장윌리엄 K. 해리슨 주니어1895–1987

그는 158차례 정전회담 끝에 판문점에서 유엔군사령부 대표로 정전협정에 서명했다.

결의안 82를 제안한 미국 대표어니스트 그로스1906–1999

1950년 6월 25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결의안 82를 제안하고 9대 0 표결을 이끌었다.

제196전투연대장예브게니 페펠랴예프1918–2013

19~23기를 격추한 소련 에이스로, 한국전에서 영웅 칭호를 받았다.

관련 용어

출처: Kathryn Weathersby, Soviet Aims in Korea and the Origins of the Korean War (CWIHP Working Paper No. 8)Wilson Center Digital Archive: Korean War OriginsEncyclopaedia Britannica: Korean War

← 역사 사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