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eration Chromite · 1950년 9월

크로마이트 작전

Operation Chromite

한국전쟁 중 1950년 9월 15일부터 19일까지 더글러스 맥아더 유엔군 사령관의 주도로 유엔군이 인천에 실시한 상륙작전의 암호명이다. 인천은 부산 방어선에서 멀리 떨어진 서해안 항구로, 유엔군은 이곳에 기습 상륙해 조선인민군의 보급로를 끊고 전세를 역전시켰다. 작전에는 75,000여 명의 병력이 투입되었고 함정 수는 사료에 따라 261척 또는 230척으로 기록된다. 상륙에 이어 9월 28일 서울이 탈환되었고, 이 작전은 전쟁의 주도권을 유엔군 측으로 넘긴 결정적 전환점으로 평가된다.

상세

역사

맥아더는 1950년 7월 22일 인천 상륙을 위한 블루하츠 작전을 처음 구상했으나 7월 10일까지 이 계획은 폐기되었고, 7월 23일 제2보병사단과 제5해병연대를 투입하는 새로운 계획에 크로마이트 작전이라는 암호명을 붙였다. 이 계획도 수정되어 제7보병사단이 상륙부대로 결정되었고, 맥아더는 미 제10군단을 창설해 에드워드 알몬드 소장을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8월 한 달 동안 그는 제7보병사단을 재무장하고 제1해병사단을 재편성했으며, 새로 도착하는 장비를 제10군단에 배정했다.

초기 계획에는 회의론이 컸다. 인천은 접근로가 좁고 기뢰 부설이 가능했으며 조류가 3~8노트에 달하고 조차가 극심했다. 미 해군 지도부는 부산 방어선에 가까운 군산 상륙을 선호했지만, 맥아더는 군산 상륙이 결정적 승리를 낳지 못하고 조선인민군을 기습하지도 못한다고 보았다. 1950년 8월 23일 도쿄 회의에서 그는 해군작전부장 포리스트 셔먼 제독과 육군참모총장 J. 로턴 콜린스를 설득했고, 8월 28일 합동참모본부가 계획을 승인했으며 트루먼 대통령도 이를 승인했다.

해군은 아서 듀이 스트러블 중장이 지휘하는 제7합동기동부대가 맡았고, 여기에는 항공모함 기동부대, 영국 해군 기동부대, 상륙기동부대 등이 포함되었다. 월미도는 인천 상륙의 전술적 관문으로, 저녁 본상륙에 앞서 별도의 아침 만조 때 점령할 대상이었다. 9월 13일부터 함포 사격과 항공 공격이 시작되었고, 9월 15일 제1해병사단이 세 개 해안에 상륙해 인천을 장악했다. 9월 19일까지 해병대는 김포 비행장을 확보했고, 미 육군 부대는 교두보에서 진격해 부산 방어선에서 북상한 부대와 연결되었으며, 9월 28일 해병대·육군·대한민국군이 서울을 탈환했다.

기습을 지키기 위해 유엔군은 상륙 지점이 105마일 남쪽 군산인 것처럼 보이게 하는 기만 작전을 폈다. 9월 5일부터 극동공군이 도로와 교량을 공격했고, 9월 6일 군산에 대한 함포 사격이 있었으며, 9월 11일부터 B-29 폭격이 이어졌다. 9월 12~13일에는 영국 해군이 특수전 부대와 왕립해병대를 군산에 상륙시켰다. 한편 1950년 9월 초 일본에서 체포된 간첩 조직 책임자가 크로마이트 작전 계획서를 소지하고 있었으나 그것이 전달되었는지는 유엔 측도 알지 못했다.

미 해군 측 평가는 이 작전의 성공이 육·해·공군의 강력하고 긴밀한 협조에 달려 있었다는 점을 강조하며, 상륙작전이 연안 작전에서 결정적 요인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고 정리한다. 한국어 사료에는 작전 개시일을 9월 13일로 적거나 유엔군 총사령관을 맥아더가 아닌 인물로 서술한 오류가 섞여 있는데, 이는 같은 자료의 9월 15일~19일 표기 및 맥아더 지휘 기록과 모순되므로 채택하지 않는다.

구분

작전명 '크로마이트 작전'은 상륙작전 자체를 가리키는 암호명이고, 그보다 넓은 교전은 인천 상륙 작전이라는 이름으로도 기록된다. 같은 지역에서 뒤에 벌어진 제2차 인천 상륙 작전이나 원산 상륙 작전과는 구별된다.

인천과 군산은 후보 상륙지로서 전략적 목적이 달랐다. 미 해군 지도부는 부산 방어선과 조선인민군의 주요 보급축에 가까운 군산을 선호했으나, 맥아더는 군산 상륙이 '포위하려다 포위하지 못하는 작전'이 될 것이고 더 많은 병력을 방어선의 취약한 돌출부에 넣는 결과를 낳는다고 판단해 해군의 선호를 뒤집고 인천을 택했다.

또한 인천 상륙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첫 대규모 상륙작전이 아니었다. 그 지위는 1950년 7월 18일 포항 상륙에 있었지만, 포항은 조선인민군 점령 지역이 아니었고 저항도 없었다. 7월 22일 폐기된 블루하츠 작전은 7월 23일의 크로마이트 작전과 구별되며, 블루하츠의 명칭과 병력 구성은 해당 부대들이 부산 방어선으로 전출되면서 다시 바뀌었다.

예시

기만 작전의 구체적 사례로 9월 5일 극동공군의 군산 고립을 위한 도로·교량 공격, 9월 6일 군산 함포 사격, 9월 11일 미 공군 B-29의 군산 일대 군사시설 폭격이 있다. 이는 실제 목표인 인천을 감추기 위한 일련의 작전이었다.

상륙에 앞서 월미도는 두 차례 공습과 포격을 받았고, 8월 17일부터 9월 14일까지 대한민국 해군 첩보부대가 엑스레이 작전을 수행해 9월 15일 0시 50분 팔미도 등대를 점등했다. 상륙 다음 날인 9월 16일에는 상륙함정 네 척이 인천 레드 비치에서 간조 때 해변에 그대로 걸린 채 병력과 장비를 내려, 이 지역의 극심한 조차 조건을 보여주었다.

관련 인물

관련 역사 사건

출처

  1. 위키백과 (영문) codename 'Operation Chromite,' dates 15–19 Sept 1950, ~75,000 troops, 261 vessels, MacArthur's role, recapture of Seoul, origin of codename on 23 July 1950
  2. 위키백과 (한국어) 작전 암호명 크로마이트 작전, 75,000여 명 병력과 261척 함정, 맥아더 주도, 서울 탈환
  3. history.navy.mil U.S. Naval History and Heritage Command: Operation Chromite as UN assault, MacArthur's plan, JTF 7 under VADM Struble, 13–15 Sept bombardment, 1st Marine Division landings, capture of Kimpo and Seoul
  4. 위키백과 (영문)
  5. 위키백과 (한국어)
  6. history.navy.m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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