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어 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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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흐름’ 이론
teoria dwóch nurtów‘두 흐름’ 이론은 1956년 포즈난 봉기를 노동자의 정당한 항의와 ‘도발자·범죄자’의 폭력으로 나누어 설명한 폴란드 인민공화국의 공식 선전·수사 도식이었다. 이 구분은 당국이 노동자 다수의 요구를 부분적으로 수용하면서도 일부 참가자를 체포하고 재판에 회부하는 책임 관리 방식으로 기능했다.
《종》
Колокол알렉산드르 게르첸과 니콜라이 오가료프가 국외에서 발행한 러시아 최초의 검열 없는 혁명적 신문. 1857년 런던의 자유 러시아 인쇄소에서 창간되어 1865년부터는 제네바에서 나왔고, 러시아어판은 1867년까지 이어졌다. '나는 살아 있는 사람들을 부른다'(Vivos voco)를 제사(題詞)로 내걸고 밀반입망을 통해 러시아 전역에서 읽혔으며, 농노제와 검열, 관료의 전횡을 폭로하는 공개 고발장 구실을 해 한때 궁정에서까지 읽히는 신문이 되었다. 1860년대 초 바쿠닌이 옮긴 『공산당 선언』 최초의 러시아어판이 이 신문의 인쇄소에서 인쇄되었다. 1861년 농노해방 이후 개혁의 평가를 둘러싸고 젊은 급진 세대와 멀어지면서 영향력이 줄었고, 1867년 러시아어판 종간 뒤 1868년 프랑스어판 시도를 끝으로 막을 내렸다.
「러시아 여러 인민의 권리 선언」
Декларация прав народов России10월 혁명 직후인 1917년 11월 2일(신력 15일) 인민위원회가 발표한 민족 정책 선언이다. 레닌과 민족문제인민위원 스탈린이 서명했고, 네 가지 원칙을 담았다. 러시아 여러 인민의 평등과 주권, 분리와 독립국가 수립에 이르는 자유로운 자결권, 모든 민족적·종교적 특권과 제한의 폐지, 소수민족과 소수 인종 집단의 자유로운 발전이다. 짧은 문서지만 소련 민족 정책의 출발점이자, 뒤에 공화국들이 연방을 떠날 때 되짚어 든 근거였다.
「주류 판매 제한 완화에 관한 각료회의 결정」(1988년 10월)
Постановление Совета Министров СССР «Об устранении очередей за винно-водочными изделиями»1988년 10월 12일 CPSU 중앙위원회 결정에 뒤이어 소련 각료회의가 채택한 결정. 1985년 5월부터 시행된 고르바초프 반알코올 캠페인을 사실상 종결시킨 문서로, 과도한 생산 축소와 판매 제한이 예산 적자, 줄서기, 사밀주 제조 폭증, 설탕 부족을 초래했음을 인정하고 주류 생산량을 대폭 늘려 대기열을 해소하도록 지시했다. 니콜라이 리시코프 각료회의 의장이 주도했으며, 캠페인을 '행정적 과잉'으로 규정한 중앙위원회 결정의 실무적 후속 조치였다.
10월 선언
Манифест 17 октября 1905 года (Октябрьский манифест)1905년 10월 17일(구력) 니콜라이 2세가 전국적 총파업에 굴복해 반포한 선언으로, 시민적 자유와 입법 두마를 약속하며 러시아 전제정치가 헌법군주제로 전환하는 분기점이 되었다. 세르게이 비테가 기초한 이 문서는 신체의 불가침, 양심·언론·집회·결사의 자유를 보장하고 두마의 승인 없이는 어떤 법률도 효력을 갖지 못한다는 원칙을 천명했으나, 차르는 두마 해산권과 거부권을 유지했다. 선언 직후 파업은 일시 소강되었지만, 자유주의자들은 이 양보에 만족한 반면 노동자와 사회주의자들은 혁명을 무장해제하려는 '종잇조각'으로 간주했으며, 약속된 개혁이 제한적으로 이행되면서 1907년 6월 쿠데타까지 혁명은 계속되었다.
16개조
16 pont1956년 10월 22일 부다페스트 공과대학 학생들이 작성하여 다음날 헝가리 혁명의 시위대가 채택한 16개조 요구 목록. 소련군 철수, 임레 너지 중심의 새 정부 구성, 라코시 체제 청산, 비밀선거와 복수정당제, 언론·라디오 자유, 스탈린 동상 철거, 3·15 국경일 지정, 폴란드 민주화 운동과의 연대 등을 담았다. 이 요구들은 공산당 금지나 사회주의 폐기를 명시하지 않았으나, 자유선거 요구를 통해 사실상 일당독재의 종식을 전제했다.
1920-21년 소비에트 공화국 간 조약 체계
Союзные рабоче-крестьянские договоры 1920–1921 гг.1920년 9월부터 1921년 1월까지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RSFSR)이 아제르바이잔,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소비에트 공화국과 각각 체결한 일련의 양자간 군사·경제 동맹 조약이다. 이 조약들은 군사령부, 경제계획, 재정, 교통, 노동 등 핵심 행정 부문을 통합하여 RSFSR 주도의 단일한 통치 구조를 만들어냈으며, 1922년 12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USSR) 수립의 직접적인 제도적 선례가 되었다. 이 체계는 '조약 연방주의'로 불리며, 형식상으로는 각 공화국의 주권을 인정했으나 실제로는 모스크바 중심의 중앙집권적 통치로 나아가는 과도기적 장치였다.
1922년 교회 귀중품 몰수
изъятие церковных ценностей 1922 года1922년 2월부터 5월까지 소비에트 정권이 볼가 기근 구호를 명분으로 정교회 등 종교 시설의 금은·보석 전례 용품을 강제 몰수한 캠페인이다. 레닌은 3월 19일 비밀 서한에서 이 기회에 '흑백파 성직자들을 무자비하게 분쇄하라'고 지시했고, 슈야 발포 사건과 231건의 재판을 거쳐 약 2천 명의 성직자와 신자가 처형되었다. 몰수한 450만 금루블 상당 귀중품 중 실제 기근 구호에 쓰인 것은 100만 루블에 불과했으며, 나머지는 캠페인 비용과 횡령으로 소진되었다.
1934년 12월 1일 법
Постановление ЦИК СССР от 1 декабря 1934 года1934년 12월 1일 키로프 암살 직후 소련 중앙집행위원회(CEC) 상임간부회가 채택한 비상법령으로, 테러 행위 혐의 사건에 대해 수사 10일 제한, 재판 전날 기소장 교부, 변호인 없는 비공개 재판, 상소 및 사면 청구 불가, 사형 선고 즉시 집행을 규정했다. 야고다가 초안을 쓰고 스탈린이 수정했으며, 1956년 4월 19일 흐루쇼프의 탈스탈린화 과정에서 폐지될 때까지 대숙청의 핵심 법적 기반으로 작동했다.
1934년 2월 6일을 둘러싼 역사학적 논쟁
débat historiographique sur le 6 février 1934이 개념은 1934년 2월 6일 프랑스 파리에서 벌어진 반의회주의 시위를 통일된 파시스트 쿠데타로 볼 것인지, 서로 조정되지 않은 우익 리그들의 폭력적 폭동으로 볼 것인지를 둘러싼 역사학적 논쟁을 가리킨다. 연구자들은 각 리그의 목표와 지휘 체계, 시위의 실제 전개, 의회 장악을 입증하는 문서의 존재를 함께 검토한다.
1940년 대탈출
l'Exode de 19401940년 5~6월 독일군의 프랑스 침공으로 벨기에·네덜란드·룩셈부르크·프랑스 민간인 수백만 명이 전선을 피해 남부와 서부로 이동한 대규모 피란을 가리킨다. 프랑스 정부의 군사적 붕괴가 예상보다 빨랐고 대피 계획이 부족해 도로와 도시 행정이 마비되면서, 이 이동은 프랑스의 군사적 패배를 민간인 위기와 국가 통치의 위기로 확장했다.
1943년 9월 이탈리아 항복과 유고슬라비아 내 무장 해체
Italian surrender in Yugoslavia, September 19431943년 9월 이탈리아가 연합국과의 휴전으로 전쟁에서 이탈하자 유고슬라비아의 이탈리아 주둔군 지휘체계가 무너지고, 파르티잔은 여러 주둔군과 협상해 무기·탄약·보급품과 일부 병력을 넘겨받았다. 이 전환은 달마티아와 서부 마케도니아를 비롯한 지역에서 해방운동의 세력을 크게 넓혔지만, 독일군의 이탈리아군 무장 해제와 재점령으로 성과는 지역별로 제한되었다.
1949년 3월의 추방
Операция «Прибой», Мартовская депортация1949년 3월 25일부터 28일까지 소련이 에스토니아·라트비아·리투아니아에서 약 9만 5천 명의 민간인을 시베리아와 북부 변경지로 강제추방한 작전이다. 암호명은 '프리보이(파도)'이며, 집단화를 가속화하고 '숲의 형제들' 무장 저항의 사회적 기반을 제거하려는 목적으로 실행되었다. 이주민의 70% 이상이 여성과 16세 미만 아동이었으며, 유럽인권재판소는 이를 인도에 반한 범죄로 규정했다.
1953년 6월 동독 봉기
Volksaufstand vom 17. Juni 19531953년 6월 16일 동베를린 건설 노동자들의 파업으로 시작해 동독 전역으로 번진 노동자·시민 봉기다. 노동할당량 10% 인상에 대한 항의는 자유선거와 정부 퇴진 요구를 포함한 정치적 저항으로 확대됐고, 소련군이 무력으로 진압했다.
1980~1981년 폴란드 경제위기
kryzys gospodarczy w Polsce 1980–19811980~1981년 폴란드 경제위기는 기에레크 시기의 서방 차관과 수입 중심 성장의 한계가 외채 상환 부담, 생산 및 에너지 투입 부족, 물자 공급 붕괴로 이어진 위기다. 임금 인상 요구와 파업은 상점의 식량·생필품 부족 및 배급 확대와 충돌했고, 화폐소득이 상품 공급을 앞지르면서 국가의 계획·분배 능력과 사회적 정당성이 함께 흔들렸다.
1988년 협동조합법
Закон СССР «О кооперации в СССР»1988년 5월 26일 소련 최고소비에트가 채택한 법률로, 네프 종결 이후 처음으로 사적 기업 활동과 고용 노동에 합법적 지위를 부여했다. 생산협동조합과 소비협동조합의 설립을 허용하고 가격·임금의 자율 결정권을 보장했으며, 국영 기업과의 거래 및 은행 대출을 통해 사실상의 사적 자본 축적 통로를 열었다. 이 법은 페레스트로이카 경제 개혁 중 가장 급진적인 입법으로, 수만 개 협동조합과 최초의 '페레스트로이카 백만장자'들을 탄생시켰다.
1994년 부다페스트 문서
Budapest Document: Towards a Genuine Partnership in a New Era1994년 12월 부다페스트에서 열린 유럽안보협력회의(CSCE) 정상회의가 채택한 결정과 문서 모음이다. 이 결정은 CSCE를 1995년 1월 1일부터 유럽안보협력기구(OSCE)로 부르기로 하면서도 기존 CSCE 공약의 성격과 CSCE 및 그 기관의 법적 지위를 바꾸지 않는다고 명시했다.
2만5천인대
двадцатипятитысячники1929년 11월 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 중앙위원회 총회의 결정에 따라 농업집단화를 추진하기 위해 주요 공업도시에서 농촌으로 파견된 약 2만 7천 명의 선진 노동자들을 가리키는 명칭이다. 지원자는 7만 명을 넘었으며, 선발된 인원의 약 70%가 당원이었고 절반 이상이 30세 미만이었다. 이들은 집단농장(콜호스) 의장, 기계트랙터정거장(MTS) 간부, 촌소비에트 당조직 등에 배치되었으나, 쿨라크와 지역 관료의 저항에 직면했고 40%만이 할당된 임기를 마쳤다.
2월 혁명의 자발성 논쟁
спор о стихийности Февральской революции1917년 2월 혁명이 지도자 없는 자발적 폭발이었는지, 아니면 사회주의 활동가들의 조직적 개입의 산물이었는지를 둘러싼 역사학 논쟁이다. 윌리엄 챔벌린은 1935년 저서에서 2월 혁명을 '역사상 가장 지도자 없는, 자발적이고 익명의 혁명'이라고 규정했고, 이 서사는 냉전기 서방 역사학의 통설로 자리잡았다. 제임스 화이트, 마이클 멜란콘, 에두아르트 부르잘로프 등 수정주의 역사가들은 비보르크 구의 볼셰비키 노동자 간부들과 현장의 사회주의자들이 파업 확산, 무장봉기 조직, 구호 형성에서 핵심적 역할을 수행했음을 보이며 '사회주의적 행위주체성' 테제를 제기했다.
300인의 편지
Письмо трёхсот1955년 10월 11일 소련 과학자 300여 명이 당 중앙위원회 상임간부회에 제출한 청원서로, 트로핌 리센코의 독점적 지배 아래 파괴된 소비에트 생물학을 정상화할 것을 요구했다. 21쪽 분량의 이 문서는 리센코 학설의 반과학성, 유전학 연구의 전면적 탄압, 농업에 대한 실질적 피해를 구체적으로 적시했으며, 물리학자 란다우·탐·사하로프와 수학자 켈디시 등 비생물학 분야의 저명 과학자들도 서명해 항의의 폭을 넓혔다. 흐루쇼프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이 편지는 리센코의 퇴진을 촉발했고, 소련 과학사에서 집단적 학문 자유 투쟁의 상징으로 남았다.
38도선
38선 (三八線), 38-я параллель38도선은 1945년 8월 미군 장교 두 명이 내셔널지오그래픽 지도 위에 급조해 그은 한반도 분할선으로, 사전 계획도 전문가 자문도 없었다. 소련이 이를 수용하면서 소련군과 미군의 점령 구역 경계가 되었고, 1948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대한민국이 수립되면서 사실상의 국경으로 굳어졌다. 1950년 6월 조선인민군이 이 선을 넘어 남진하며 한국전쟁이 발발했고, 1953년 정전협정으로 군사분계선이 새 경계가 되면서 38도선은 실효적 분단선으로서의 역할을 마쳤다.
46인 선언
Декларация сорока шести (Заявление 46-ти)1923년 10월 15일, 46명의 저명 소비에트 공산주의자들이 정치국에 비밀리에 보낸 서한으로, 트로츠키가 일주일 전 제기한 당내 관료화 비판에 동조하며 당내 민주주의 회복과 분파 금지 조치의 재검토를 요구했다. 이 선언은 좌익 반대파 형성의 기초가 되었으며, 서명자 대다수는 대숙청기에 처형되었다.
4월 테제
Апрельские тезисы레닌이 1917년 4월 스위스 망명에서 페트로그라드로 귀환한 직후 볼셰비키 당에 제시한 10개 조항의 행동 강령이다. 임시정부에 대한 일체의 지지 거부,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 이양, 제국주의 전쟁의 즉시 종식, 토지 국유화와 은행 통합, 당의 명칭을 공산당으로 바꿀 것 등을 주문했으며, 부르주아 민주혁명이 끝났고 사회주의 혁명 단계로 이행해야 한다고 선언했다. 제7차 전러시아 당협의회(4월)에서 다수의 지지를 얻어 볼셰비키의 공식 노선이 되었고, 7월 사태와 10월 혁명으로 이어지는 전략적 전환의 출발점이 되었다.
500일 계획
Программа «500 дней»1990년 스타니슬라프 샤탈린과 그리고리 야블린스키를 중심으로 작성된 소련의 급진적 시장경제 전환 계획. 고르바초프와 옐친의 공동 합의로 작업반이 구성되었으며, 500일 내에 대규모 사유화·가격 자유화·대외경제 개방을 단계적으로 실행하여 국가 재산을 국민에게 이전한다는 구상을 담았다. 고르바초프의 지지를 받았으나 니콜라이 리시코프 총리의 '기본 방침' 대안과 충돌했고, 연방 차원에서는 채택되지 못한 채 러시아 공화국에서 부분 시행되었으며 이후 가이다르의 충격요법으로 이어졌다.
58조
58-я статья1927년 2월 25일 발효된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형법 제58조는 '반혁명 활동'을 기소하기 위한 포괄적 법적 도구였다. 반역, 간첩, 사보타주(해당 행위는 '레킹'이라 불렸다), 반소비에트 선동, 불고지(不告知) 등 14개 항목으로 구성되어, 6개월 징역부터 재산 몰수를 동반한 총살형까지 규정했다. 1961년 폐지될 때까지 국가보안 기관이 정치적 적을 탄압하는 법적 근거로 기능했으며, 대숙청기(1937~38년) 대량 체포·처형의 핵심적 법적 장치였다.
5개년 계획
пятилетний план, пятилетка소련에서 국가경제 발전을 5년 단위로 계획한 중앙집권적 지령형 경제계획 체계. 국가계획위원회(고스플란)가 공산당의 지침에 따라 전국 단위로 수립했으며, 1928년 제1차 계획부터 1991년까지 총 13차에 걸쳐 시행되었다. 중공업 우선의 초고속 공업화를 제도화한 수단으로서 소련식 경제발전 모델의 핵심이었고, 훗날 중국·쿠바 등 다른 사회주의 국가들도 이 방식을 채택했다.
6·3 쿠데타 (트레티예이윤스키 페레보로트)
Третьеиюньский переворот1907년 6월 3일(구력) 러시아 제국에서 제2국가두마가 강제 해산되고 선거법이 일방적으로 개정된 사건이다. 니콜라이 2세와 스톨리핀 내각은 두마의 동의 없이 선거제도를 바꾸었으며, 이는 기본법 제87조를 위반한 헌정 쿠데타였다. 이 사건은 1905년 혁명의 종결로 간주되며, 새 선거법은 지주와 부유층에 유리하게 재편되어 제3두마에서 보수적 다수를 낳았다.
6개년 계획 (1950–1955)
Plan sześcioletni폴란드 인민공화국의 두 번째 중앙집중식 경제계획으로 3개년 계획(1947–1949)에 이어 1950년 7월 21일 의회에서 채택되었다. 노바 후타의 레닌 제철소, 그단스크·슈체친 조선소 등 중공업 부문에 국영 자금을 집중했으며, 소비재·식품·서비스 부문 투자는 억눌렀다. 급격한 공업화와 농업 집단화 속에서 생활수준이 떨어지고 물자 부족과 배급제가 되살아나 노동자들의 불만을 쌓았으며, 계획은 수차례 수정되었으나 결국 목표를 채우지 못했다.
6월 3일 체제
Третьеиюньская система1907년 6월 3일 스톨리핀이 제2국가두마를 해산하고 선거법을 개정한 친위쿠데타로 수립된 러시아 제국의 정치 체제. 토지 소유 귀족과 부유한 도시 계층에 압도적으로 유리하게 선거권을 재편해 제3·제4두마에서 정부에 협조적인 보수 다수를 확보했으며, 자의적 통치와 제한된 의회주의를 결합한 '두마 군주제'의 성격을 띠었다. 1915년 진보블록이 결성되며 사실상 붕괴했다.
7월 사태
Июльские дни1917년 7월 3~5일(구력) 페트로그라드에서 제1기관총연대 병사, 크론시타트 수병, 공장 노동자 수십만 명이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를 구호로 무장 시위를 벌인 사건이다. 케렌스키 공세의 참패와 카데트 장관들의 사퇴로 촉발된 이 봉기는 임시정부 충성 부대의 발포로 유혈 진압되었고, 이후 볼셰비키에 대한 탄압이 전개되어 레닌은 핀란드로 피신하고 트로츠키 등 지도부가 체포되었다. 이 사건은 이중권력의 종식과 평화적 소비에트 권력 이양 가능성의 소멸, 그리고 무장 봉기 노선으로의 전환을 예비한 분수령이었다.
87년 체제
87년 체제 (八七年體制)1987년 6월 민주항쟁과 노동자대투쟁을 계기로 형성된 한국의 정치·경제·노동체제. 정치적으로는 대통령 직선제와 형식적 민주주의의 제도화를, 경제적으로는 신자유주의적 시장 개방과 재벌 중심 성장 구조의 지속을, 노동 영역에서는 기업별 노조 체제와 전투적 조합주의의 확립을 특징으로 한다. 1997년 IMF 외환위기 이후 노동시장 유연화와 비정규직 확대, 노동자 내부 격차 심화를 겪으며 장기 위기 담론의 대상이 되었다.
8시간 노동제 법령
Декрет о восьмичасовом рабочем дне1917년 10월 혁명 나흘 뒤인 11월 11일(구력 10월 29일) 인민위원회의가 채택한 법령으로, 1일 8시간·주 48시간 노동제를 세계 최초로 국가 법령으로 확립했다. 6시간 노동 후 최소 1시간 휴식, 14세 미만 아동 고용 금지, 18세 미만 6시간 제한, 야간노동 규제, 주 42시간 연속 휴식 등을 규정했으며, 본문은 임시정부 노동부가 준비한 초안을 거의 그대로 수용한 것이었다. 이후 1918년 노동법전에 편입되었고, 1928년 7시간제로 단축되었다가 전시에 재연장되는 등 소비에트 노동법제의 기초가 되었다.
8월 블록
Августовский блок1912년 8월 빈에서 트로츠키의 주도로 열린 협의회(' 8월 협의회')로 결성된 반(反)볼셰비키 블록. 같은 해 1월 프라하 협의회에서 청산파를 축출하고 당을 재편한 볼셰비키에 맞서, 청산파와 분트, 캅카스의 멘셰비키, 라트비아 사회민주주의의 일부가 '통합'의 기치 아래 모였다. 민족문제에서 이 협의회는 캅카스 대표단의 요구를 받아 문화적 민족 자치가 당 강령의 '정확한 뜻과 어긋나지 않는다'고 선언했는데, 이는 강령의 민족자결권 조항을 사실상 비껴가며 문화적 민족 자치에 문을 열어 준 결정이었다. 스탈린의 「마르크스주의와 민족문제」 제6절과 레닌의 「민족자결권에 대하여」가 이 결정을 정면으로 겨냥해, 민족주의적 동요에 대한 '외교적 승인'이라고 공격했다. 블록은 내부의 이질성 때문에 1913~1914년에 사실상 허물어졌고, 레닌은 그 해체를 청산주의 노선 전체의 파산의 증거로 삼았다.
8차 5개년 계획 (황금의 5개년)
Восьмая пятилетка, Золотая пятилетка소련의 제8차 5개년 계획(1966–1970)으로, 코시긴 개혁과 병행되어 소련 역사상 가장 높은 경제성장률을 기록하여 '황금의 5개년'이라 불렸다. 국민소득이 42% 증가하고 연평균 7.7~7.8%의 성장률을 달성했으며, 공업 총생산은 51%·농업은 21% 증가했다. 그러나 이 성장이 개혁에 의한 것인지, 아니면 기존에 투입되지 않았던 비축 자원의 일회적 방출에 의한 것인지는 소련 경제사의 핵심적인 논쟁으로 남아 있다.
9+1 성명
Совместное заявление о безотлагательных мерах по стабилизации обстановки в стране и преодолению кризиса («9+1»)9+1 성명은 1991년 4월 23일 미하일 고르바초프와 RSFSR, 우크라이나, 벨로루시,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아제르바이잔, 키르기스스탄, 타지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등 9개 공화국 정상들이 모스크바 근교 노보-오가료보에서 서명한 「무질서 극복과 정세 안정을 위한 긴급 조치에 관한 공동 성명」으로, 노보오가료보 과정의 출발점이 된 문서다. 이 성명은 헌정 질서 회복, 신연방조약 초안의 조속한 완성, 반위기 경제 조치의 공동 시행을 골자로 했으며, 연방 중앙을 공화국들과 대등한 '9+1' 협상의 한 축으로 규정함으로써 소련의 평화적 재편을 위한 제도적 기반을 마련했다. 고르바초프와 옐친의 일시적 타협이자 협력의 순간이었으나, 양측 해석 차이는 이후 모든 협상의 긴장으로 작동했다.
9평
九评苏共中央的公开信중국공산당이 1963년 9월부터 1964년 7월까지 《인민일보》와 《홍기》에 게재한, 소련공산당 공개서한에 대한 9편의 논평이다. 중소 이념 논쟁의 정점을 이룬 이 문건들은 흐루쇼프의 평화공존·평화경쟁·평화이행 노선을 수정주의로 규정하고, 스탈린 문제·전쟁과 평화·유고슬라비아의 성격 등 9개 주제에서 소련의 노선을 전면 비판했다. 제9평 「흐루쇼프의 가짜 공산주의와 세계사적 교훈」은 자본주의 복벽 방지 15개 조항을 제시했으며, 이는 훗날 문화대혁명의 이론적 토대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