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권 국민회의
Sovereign National Conference
정권·야당·시민사회·군·종교 대표가 모여 스스로 주권을 선포하고 집행력 있는 결정을 내린 회의체다. 1990~1991년 프랑스어권 아프리카에서 현 정권을 심판하고 과도질서를 세운 제도로, 1990년 2월 베냉의 국가활력세력 국민회의가 개막일 기준 프랑스어권 최초 사례로 꼽힌다.
상세
스스로 주권을 선포한 회의
주권 국민회의는 대표자 회의가 정권·야당·시민사회·군·종교를 한자리에 모아 스스로 주권을 선포하고 집행력 있는 결정을 내린 제도다. 베냉에서는 자문기구에 그칠 것이라는 반대 논리를 깨고 주권을 선포했고, 콩고에서는 국가기구보다 우월한 권위를 주장했다. 결정 내용은 현 정권의 심판, 과도질서의 수립, 헌법 폐기와 기본법 채택이었다.
베냉 1990년 2월 19~28일, 코토누
국가활력세력 국민회의는 1990년 2월 19~28일 코토누 PLM 알레지오 호텔에서 열려 마르크스-레닌주의 정권 폐지와 다당제에 기초한 법치국가 수립을 목적으로 삼았다. 준비위 구성은 1989년 12월 22일 로베르 도수의 주도로 이루어졌고, 2월 19일 개막해 2월 28일 폐막했다.
콩고 1991년 2월 25일~6월 10일, 브라자빌
콩고 주권 국민회의(CNS)는 1991년 2월 25일부터 6월 10일까지 브라자빌에서 열렸다. 1988년 11월 베르나르 콜레라스가 사수응게소에게 보낸 공개서한 등 내외부 압력으로 1990년 7월 4일 콩고노동당 중앙위가 다당제와 마르크스-레닌주의 포기를 공식 인정했고, 9월 30일 즉각 다당제 도입과 국민회의 개최가 결정되었다. 참가자 명단 검증 논란으로 지연되어 1991년 3월 1일 1,202명의 최종 대의원 명단이 확정되었고, 3월 15일 에르네스트 콤보를 의장으로 하는 사무국이 설치되어 3월 19일부터 정당 토론이 시작되었다.
구성은 정확히 1,202명으로, 67개 정당이 각 8명, 134개 단체가 각 2명, 개인 자격 초청 인사로 이루어졌으며 콩고노동총연맹과 군대가 각 20명을 보냈다. 회의는 즉시 스스로 주권을 선언하고 사수응게소의 대통령 권한을 정지시켰으나 그를 축출하지는 않았고, 공화국 상징(국가·삼색기)을 복원하고 국민의회를 대체할 최고공화국평의회를 세웠다.
심판과 배상
콩고 회의는 콩고노동당과 지도부의 정치범죄(1965년 암살 사건, 1977년 응구아비 암살 등)의 책임을 심판해 사수응게소를 개인적 책임자로 지목하고 10억 프랑 CFA 배상을 요구했다. 1991년 4월 26일 사수응게소의 'J'assume(내가 책임진다)' 공개 발언과 4월 27일 상징적 손 씻기 의식으로 과거와의 단절이 표시되었다.
과도질서와 결과
콩고 회의는 1991년 6월 4일 과도기를 규율하는 기본법(Acte fondamental)을 채택해 광범위한 집행권을 가진 과도총리와 이를 감시하는 과도 최고공화국평의회를 설치했고 1979년 헌법을 폐기했다. 6월 8일 1차 투표에서 리수바가 285표로 선두였고, 6월 9일 4차 투표에서 밀롱고가 454대 419로 과도총리에 선출되었으며 회의는 6월 10일 폐막했다. 폐막은 콤보가 시작한 손 씻기 의식과 나무 심기로 마무리되어 매년 6월 10일이 '국가화합의 날'이 되었고, 일주일 뒤 구성된 밀롱고 정부는 회의를 지지한 연립 세력의 반영이었으며 콩고노동당은 각료를 하나도 얻지 못했다. 회의가 세운 최고공화국평의회는 1992년 3월 15일 국민투표로 채택된 신헌법을 작성했고, 회의는 다당제 복귀와 이듬해 선거로 이어졌다.
군대는 참모총장 장마리 미셸 모코코를 통해 민주화 과정 지지와 군의 정치적 중립(정당·개인이 아닌 공화국 기구에 복무)을 선언했다.
배경과 지역적 확산
1980년대 말~1990년대 초 동유럽 공산정권의 붕괴와 국제적 민주화 압력, 프랑수아 미테랑이 1990년 6월 20일 라 볼(La Baule) 정상회담에서 민주화에 착수하지 않은 나라의 국제원조를 축소하겠다고 천명한 것이 전환의 계기로 작용했다. 베냉(1990)과 콩고(1991)를 비롯해 가봉, 자이르(현 콩고민주공화국), 코트디부아르 등 여러 아프리카 국가가 정권·야당·시민사회를 모은 국민회의를 소집해 정치 규칙을 재정의하고 다당제 민주화 이행을 시작했다.
콩고에서 국민회의는 이웃 콩고민주공화국과 구별되는 브라자빌 중심의 콩고인민공화국(1969~1991) 일당체제를 종결시키고, 1992년 8월 파스칼 리수바의 대통령 당선으로 이어지는 정권 이양의 제도적 통로가 되었다.
출처 간 이견
아프리카 최초의 국민회의를 상투메프린시페의 1989년 12월 5~7일 회의로 보아 베냉보다 두 달 앞선다고 서술하는 자료가 있어 '최초' 규정에는 출처 간 긴장이 있다. 개막일 기준으로는 베냉이 프랑스어권 최초라는 한정이 더 안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