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전으로 축출된 과학자 출신 대통령
1977년 응구아비 암살의 공모 혐의로 군사법정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가봉의 오마르 봉고가 개입해 총살형을 면했다.
농작물 유전학을 전공한 생물학자 출신 정치인으로, 1963년 32세에 마삼바데바 정권의 총리가 됐다. 콩고인민공화국 시절 응구아비 암살 연루 혐의로 사형 선고를 받았다가 석방돼 프랑스에서 망명했고, 1991년 주권 국민회의의 과도 총리 선거에서 초반 투표를 선두로 달리다 4차 투표에서 밀롱고에게 패했다. 1992년 사회민주주의 정당 UPADS를 이끌고 사수응게소를 꺾어 콩고 최초의 민주 선거 대통령이 됐으나, 1997년 내전에서 패해 다시 망명했다.
주요 활동과 소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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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1997
콩고공화국 국가기관총리·대통령대표
정부·행정 -
정부·행정
경력 연표
- 1956튀니스 고등농업학교 졸업, 농업공학사
- 1961파리대학 이학박사, ORSTOM 연구원
- 1963–1966마삼바데바 정권 총리 (농업장관 겸임)
- 1966–1970유전학 교수, 이학원장
- 1977응구아비 암살 연루로 사형 선고 후 종신형 감형
- 1979–1990프랑스 망명, UNESCO 과학부문 국장
- 1991범아프리카사회민주연합(UPADS) 창설
- 1992–1997대통령, 1997년 내전 패배로 축출
관련 역사 사건
집권기: 제도 교착과 경제 안정화 시도(1992~1997)
리수바는 1992년 8월 31일 국민의회 앞에서 대통령에 취임했다. 그는 스테판모리스 봉고누아라를 총리로 임명하고 27명 내각을 구성했으나, 콩고노동당(PCT)은 각료 배분을 둘러싼 이견으로 8월 11일의 UPADS-PCT 협약을 폐기했다. 10월 31일 야당 연합이 내각 불신임안을 가결하자 리수바는 11월 17일 헌법 81조에 근거해 의회를 해산했고, 야당은 이를 위헌이라 규정하고 시민 불복종을 호소했다. 11월 30일 대통령궁 행진에서 충돌이 발생해 사망자가 나왔고, 군 참모총장 장마리 모코코의 중재로 12월 3일 야당 60%·여당 40%로 구성된 국가통합정부가 출범했다. 1993년 5월과 6월의 조기 총선 결과를 둘러싼 분쟁은 브라자빌 바콩고·마켈레켈레 등지에서 정치·민족적 폭력으로 번졌고, 사망자는 추정치에 따라 1,000~3,000명, 이재민은 약 30만 명에 이르렀다. 1994년 1월 국제 중재위원회의 결정으로 선거 결과가 확정되면서 교착은 일단락됐다.
경제 면에서 리수바 정부는 1994년 1월 프랑CFA의 50% 평가절하와 국제통화기금의 요구에 대응해 사회경제부흥행동계획(PARESO)을 시행했다. 공기업 민영화, 공무원 인건비 축소, 세수 확대가 골자였으며, 1995년 근로시간 단축과 임금·수당 삭감으로 공공부문 지출을 줄였다. 1996년 6월 파리클럽으로부터 채무의 67%를 탕감받았고, 1994년 탄화수소법 개정으로 석유 개발을 양허 방식에서 생산물분배계약으로 전환해 국가의 석유 지분을 높였다. 다만 1993년 4월 미국 석유회사 옥시덴탈과 체결한 1억 5천만 달러 차관은 훗날 그가 ‘콩고 석유를 헐값에 넘겼다’는 혐의로 기소되는 근거가 됐다.
리수바 집권기의 평가는 갈린다. 지지자들은 그가 붕괴 직전의 재정을 안정시키고 채무를 경감했다고 본다. 반면 정적들은 봉고누아라 의회 해산이 협상 정치를 무력화해 폭력의 길을 열었다고 비판한다. 1965년 삼중 살인을 둘러싼 음모론과 1993~94년 민족적 폭력의 책임 소재는 지금도 콩고 정치사에서 확정되지 않은 쟁점으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