коллективная безопасность · 1933–1939

집단안보

Collective Security

1930년대 소련이 나치 독일의 위협에 맞서 추진한 외교 노선. 침략국에 맞서 위협받는 나라들이 상호원조 조약망으로 결속한다는 구상으로, 국제연맹 가입(1934)과 프랑스·체코슬로바키아와의 상호원조조약(1935)으로 구체화되었고 외무인민위원 리트비노프가 그 상징이었다. 뮌헨 협정에서 배제되고 1939년 영국·프랑스와의 동맹 교섭이 결렬되면서 파산했고, 그 자리를 독소불가침조약이 대신했다.

상세

어떤 상황에서 나온 노선인가?

1933년 히틀러의 집권은 소련 외교의 지형을 바꾸었다. 라팔로 이래의 파트너였던 독일이 공공연한 반볼셰비즘과 동방 팽창을 내건 위협으로 돌변한 것이다. 소련의 답이 집단안보였다. 「평화는 불가분하다」라는 리트비노프의 정식이 말하듯, 어느 한 곳의 침략을 방치하면 다음은 모두의 차례라는 논리였다. 소련은 그토록 「제국주의 열강의 도구」라 불러 온 국제연맹에 1934년 가입했고, 이듬해 프랑스·체코슬로바키아와 상호원조조약을 맺었다. 코민테른인민전선 선회는 이 국가 노선의 쌍둥이였다. 파시즘에 맞서는 한, 어제의 적인 사회민주주의자·자유주의자와도 손잡는다는 것이었다.

왜 실패했는가?

불신이 양쪽 모두에 있었다. 서방 보수 정치가들에게 소련은 여전히 혁명의 수출국이었고, 대숙청으로 붉은군대 지휘부가 쓸려 나간 뒤에는 군사적 가치마저 의심스러워 보였다. 소련 쪽에서 보면 유화 정책은 히틀러의 창끝을 동쪽으로 돌리려는 책략으로 읽혔다. 1938년 뮌헨 협정은 결정타였다. 체코슬로바키아의 운명이 소련을 빼놓은 자리에서 결정되자, 집단안보에 걸었던 판돈은 회수 불능이 되었다. 1939년 여름 영국·프랑스와의 삼국동맹 교섭이 지지부진한 사이, 스탈린은 리트비노프를 몰로토프로 갈아 치우고 독일과의 거래로 방향을 틀었다.

어떻게 평가되는가?

역사학의 오랜 논쟁거리다. 한쪽은 집단안보가 진지한 대안이었으나 서방의 유화와 배제가 그것을 죽였다고 본다(하슬람, 칼리). 다른 쪽은 스탈린에게 집단안보와 독일과의 거래가 처음부터 병행 검토된 선택지였으며 리트비노프 노선은 그중 하나였을 뿐이라고 본다. 어느 쪽이든 결론은 같다. 1930년대 유럽에서 반파시즘 동맹은 성사 가능했던 순간들을 흘려보냈고, 그 실패의 대가는 1939년의 조약과 1941년의 전쟁으로 치러졌다. 전후 소련 외교는 이 경험을 「서방은 믿을 수 없다」는 교훈으로 정리했고, 그 기억은 냉전기 진영 결속의 논리로 이어졌다.

관련 인물

관련 역사 사건

출처

  1. Jonathan Haslam, The Soviet Union and the Struggle for Collective Security in Europe, 1933–39 (1984)
  2. Michael Jabara Carley, 1939: The Alliance That Never Was and the Coming of World War II (1999)
  3. Silvio Pons, Stalin and the Inevitable War, 1936–1941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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