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 샤플리에 법
Le Chapelier Law
1791년 프랑스 제헌의회가 통과시킨 법으로, 같은 직업이나 신분에 속한 시민들의 모든 단체를 헌법의 근본 기초에 반하는 것으로 규정하고 어떤 명목과 형태로도 그 재건을 금지했다. 동업자·고용주·노동자·직인(職人)이 회합하여 임원을 선출하거나 명부를 작성하고 공동 이익에 관한 결의나 규정을 채택하는 것을 막았으며, 행정·시청 기관이 직업 단체 명의의 청원을 접수하거나 답변하는 것도 금지했다.
상세
제정 배경
1791년 3월 2일과 17일의 알라르드 칙령이 영업의 자유를 선포하고 길드와 동업단체를 폐지했다. 르 샤플리에 법은 이 자유화를 마무리하면서 노동자 결사의 금지를 덧붙였다. 법안을 제출한 이삭 르네 기 르 샤플리에(Isaac René Guy le Chapelier)는 왕국 전역으로 퍼지는 노동자 회합이 최저 일당을 강요하고 상호부조회를 세우려 한다고 묘사하며, 개인 간 자유계약이 하루 임금을 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루소의 《사회계약론》에서 구절을 그대로 옮겨, 모든 시민은 회합할 수 있지만 특정 직업의 시민은 '공동 이익'을 위해 회합할 수 없으며 국가에는 개인적 이익과 일반적 이익만 존재할 수 있다고 정당화했다. 의회 토론은 매우 짧았고, 질서 자체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은 가운데 의원 장프랑수아 고티에 드 비오자(Jean-François Gaultier de Biauzat)가 표결 연기를 시도하고 집회·결사의 권리 침해를 우려했으나 실패했다.
처벌과 시행
임금 고정 결의나 합의의 주동자·선동자는 500리브르의 벌금과 1년간 능동적 시민권 정지에 처해졌고, 공공사업에서 배제되었다. 외부 노동자나 낮은 임금을 받아들이는 노동자를 위협한 경우에는 1,000리브르의 벌금과 3개월 징역이 선고되었다. 제8조는 산업과 노동의 자유를 방해할 목적의 노동자 회합을 '선동적 집회(attroupements séditieux)'로 규정해 공권력으로 해산하고 법의 최대 엄격함으로 처벌하도록 했다. 금지는 노동자와 고용주 양쪽의 단체에 적용되었으나 집행은 비대칭적이어서, 노동자의 모든 결사는 징역으로 처벌될 수 있었던 반면 고용주 측 단체는 임금 인하를 목적으로 할 때만 처벌 대상이 되었다.
폐지와 유산
법은 길드와 노동조합을 1791년부터 1864년까지 실제로 봉쇄했고, 벨기에에서는 1867년 폐지될 때까지 효력을 지녔다. 폐지는 두 단계로 이루어졌다. 1864년 5월 25일 올리비에 법이 결사죄(délit de coalition)를 폐지했고, 1884년 3월 21일 발데크루소 법이 노동조합을 합법화했다. 한편 법은 노동자 대중의 저항을 낳았다. 1800년부터 목수들 사이에 사적 방어 동맹이 생겨났고, 노동자 결사 금지는 1803년 4월 12일 법과 1810년 형법 제414·415조로, 다시 1849년 3월 15일 법으로 되풀이해 확인되었다. 실제로는 고용주 신디카가 결성되는 것도, 콩파뇨나주 단체가 조직되는 것도 막지 못했으며, 1834년 이후의 노동자 협동조합은 1867년 7월 24일 법까지 이 법에 따라 결사로 취급되었다.
평가
'파업권을 폐지한 법'이라는 통설적 표현에는 주의가 필요하다. 이 법은 길드·노동조합·콩파뇨나주를 금지하고 집단행동의 가능성을 제거했지만, 1791년 이전 프랑스법에 파업권이 존재하지 않았으므로 문자 그대로 권리를 '폐지'한 것은 아니다. 마르크스는 노동자 결사를 금지한 이 법을 '부르주아지의 쿠데타'라고 불렀고, 뒤르켐은 현대 사회의 사회적 유대가 파괴된 기원으로 보았다. 역사가 스티븐 카플란은 마르크스주의적 독법이 유혹적이지만, 일반의지의 우위에 도전하는 중간적·부분적 결사를 루소주의적으로 혐오한 결과로 읽는 편이 낫다고 주장했다.
연표상 위치
이 법은 1791년 5월 22일과 6월 14일의 르 샤플리에 법들로도 불리며, 1810년 형법으로 갱신되어 1864년 5월 25일 법이 공포될 때까지 파업은 금지되어 있었다. 같은 법과 1792년 8월 18일 칙령은 자유로운 의료 행위의 명분으로 대학과 의학부의 해체에 기여했고, 1794년 12월 4일 파리·몽펠리에·스트라스부르 보건학교가 창설되기까지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