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헌의회
Constituent Assembly
제헌의회는 헌법을 제정하거나 개정할 목적으로 소집되는 대의 기관이다. 보통 의회와 달리 그 특정한 목적을 위해 구성되고 임무를 마치면 해산된다. 러시아에서는 1917년 11월 25일(구력 11월 12일) 선거로 전러시아 제헌의회가 선출되었으나 1918년 1월 5~6일(구력)·18~19일 단 한 차례 회의를 열고 볼셰비키 주도의 전러시아중앙집행위원회에 의해 해산되었다.
상세
정의
제헌의회(프랑스어 Assemblée constituante)는 헌법을 제정하거나 개정하기 위해 소집되는 대의 기관을 가리킨다. 상설 의회와 달리 특정한 제정 작업을 위해 구성되고 그 임무를 마치면 해산된다. 러시아에서는 전러시아 제헌의회(러시아어 Всероссийское учредительное собрание)가 러시아의 국가 체제를 결정하기 위해 선출된 대의 기관이었다.
배경과 선거
러시아 헌법을 만들 민주적으로 선출된 제헌의회 소집은 1905년 이전부터 모든 러시아 혁명 정당들의 주요 요구였다. 1917년 임시정부는 선출된 제헌의회가 항구적 정부를 세울 때까지 자신이 잠정적 권한만 행사한다고 주장했다. 선거는 임시정부가 예정한 대로 11월 25일(구력 11월 12일)에 실시되어 유권자의 60퍼센트 이상이 투표했으나, 당시 집계는 불완전했다. 스뱌티츠키의 부분 집계(79개 선거구 가운데 54개)에 따르면 사회혁명당이 17,943,000표(40.4퍼센트), 볼셰비키가 10,661,000표(24.0퍼센트)를 얻었다. 사회혁명당은 농촌에서 압도적 지지를 받은 반면, 볼셰비키는 도시에서 가장 큰 득표를 했다. 다른 집계(81개 선거구 가운데 70개)는 사회혁명당 17,256,911표(37.61퍼센트, 324석), 볼셰비키 10,671,387표(23.26퍼센트, 183석)를 제시하며, 완전한 집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회의와 해산
제헌의회는 1918년 1월 18~19일(구력 1월 5~6일) 페트로그라드 타브리다 궁에서 오후 4시부터 다음날 오전 4시 40분까지 13시간 동안 회의를 열었다. 빅토르 체르노프가 마리야 스피리도노바를 누르고 244대 153으로 의장에 선출되었고, 야코프 스베르들로프가 중앙집행위원회의 권한으로 회의를 개회했다. 의회는 「근로·피착취 인민의 권리 선언」을 논의하기를 거부했으며(볼셰비키 법령은 237대 136으로 부결), 러시아를 연방 민주 공화국으로 선포하고 토지법을 채택했으며, 연합국에 민주적 평화를 호소하고 다음 회의를 1월 19일 오후 5시로 예정했다. 회의가 열리는 동안 무장 경비병이 배치되어 있었고 무기가 대의원들을 향했다는 주장도 있다. 오전 4시경 타브리다 궁 경비대장인 무정부주의자 선원 아나톨리 젤레즈냐코프가 체르노프에게 "경비병이 지쳤다. 회의를 닫고 다들 집으로 돌아가게 하자"고 말했고, 이튿날 대의원들은 건물이 잠겨 있는 것을 발견했다. 볼셰비키 주도의 전러시아중앙집행위원회는 1월 6일(구력)·19일 해산령을 채택했으며, 해산령은 1월 9일에 공포되었고 1월 18일(구력)·31일 제3차 전러시아 소비에트 대회가 이를 승인했다.
일부 사료는 해산 날짜를 구력으로는 1월 5~6일, 신력으로는 18~19일로 각각 제시하여 표기가 엇갈린다. 해산을 두고는 레닌이 즉각 해산하지 않고 회의가 끝난 뒤 타브리다 궁을 폐쇄하라고 지시했다는 기록도 전한다.
볼셰비키의 해산 근거와 그 평가
볼셰비키는 소비에트 권력이 '부르주아 의회주의'보다 높은 민주주의 형태이며, 제헌의회 선거가 좌파 사회혁명당 분열 이전에 작성된 명부로 치러져 인민을 제대로 대표하지 못한다는 논리로 해산을 정당화했다. 레닌은 1918년 1월 6일 전러시아중앙집행위원회 연설에서 소비에트 권력이 어떤 의회보다 우월하고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가 인민의 의지이며, 인민의 권력을 인정하지 않은 제헌의회는 해산된다고 주장했다. 해산은 더 광범위한 민주주의를 요구하던 좌파 사회혁명당과 무정부주의자들의 초기 지지를 받았고, 좌파 사회혁명당 대의원들은 새벽 4시에 볼셰비키를 따라 퇴장했다.
해산을 둘러싼 평가는 갈린다. 마르셀 리프만 등은 1918년 소비에트 헌법의 불평등한 대표제(도시 25,000명당 1명 대 농촌 125,000명당 1명)와 즉각 소환 가능성을 들어 소비에트가 더 민주적이었다고 본다. 리처드 파이프스와 올랜도 파이지스는 소비에트 선거가 불공정했고 볼셰비키가 제3차 소비에트 대회를 대항 의회로 만들었다고 본다. 볼셰비키 주도의 전러시아중앙집행위원회 해산령은 선거가 10월 혁명 이전에 작성된 명부로 치러져 낡은 정치 역량 관계를 반영했고, 다수당이 「근로·피착취 인민의 권리 선언」과 소비에트 권력을 인정하지 않았으므로 제헌의회를 해산한다고 밝혔다.
해산 이후
타브리다 궁에서 배제된 대의원들은 구레비치 고등학교에서 모였다. 사회혁명당 중앙위원회는 무장 저항을 하지 않기로 결정했고, 사회주의자들은 소비에트 재선거에서 승리해 제헌의회를 다시 소집하기를 바라며 소비에트 기구로 돌아갔다.
1918년 6월 8일 제헌의회 의원 5명이 사마라에서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의 지원을 받아 제헌의회 의원 위원회(콤우치)를 구성하고 자신들이 국가의 최고 권력이라고 선포했다. 콤우치는 처음에는 사회혁명당원 5명(볼스키, 브루슈비트, 클리무시킨, 포르투나토프, 네스테로프)으로 이루어졌으나 9월 말에는 96명으로 늘었고, 8시간 노동제를 도입했으며 그 영향력은 심비르스크, 카잔, 우파, 사라토프로 퍼졌다가 적군의 반격으로 후퇴했다. 1918년 9월 8~23일 우파 국가회의는 콤우치를 임시전러시아정부(디렉토리) 아래의 제헌의회 의원 회의로 전환했고, 이 정부는 1919년 1월 1일 재개되는 제헌의회에 보고하도록 되어 있었다. 1918년 11월 18일 콜차크의 쿠데타가 디렉토리를 전복하고 예카테린부르크에서 회의 중이던 의원 회의를 해산했다. 1921년에는 의원 38명이 파리에서 모여 비효율적인 집행위원회를 구성했다.
다른 나라의 사례
프랑스 국민제헌의회(1789년 7월~1791년 9월)는 1789년 6월 20일 테니스코트 서약으로 헌법이 제정될 때까지 해산하지 않겠다고 맹세하며 성립했다. 덴마크의 1848년 제헌의회(1849년 헌법), 1919년 2월 16일 선출된 독일 국민의회, 1946년 6월 2일 선출된 이탈리아 제헌의회(1947년 12월 22일 헌법), 1919년 그루지야 제헌의회(1921년 헌법), 에스토니아·라트비아·리투아니아의 제헌의회도 같은 유형의 사례로 꼽힌다.
관련 인물
관련 역사 사건
출처
- 위키백과 (영문) Wikipedia: detailed account of the election, the 13-hour session, the Bolshevik dissolution, and the Samara Komuch aftermath
- 위키백과 (러시아어) Russian Wikipedia: confirmation of the federal democratic republic proclamation, land law, and dissolution by VTsIK on 6 (19) January 1918
- 마르크스주의 인터넷 아카이브 Lenin's Speech On The Dissolution Of The Constituent Assembly (6 January 1918): primary source for the Bolshevik justification of dissolution
- britannica.com Britannica: confirms election results (SR 40%, Bolsheviks under 25%), the rejection of Soviet authority, and dissolution on 18–19 January 1918
- 위키백과 (러시아어)
- 위키백과 (영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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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키백과 (영문)
- 위키백과 (러시아어)
- hist.msu.ru
- 마르크스주의 인터넷 아카이브
- 위키백과 (영문)